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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과 전법도생 게을리 마라”
은해사 조실 혜인대종사 유훈
1943년 제주에서 출생한 스님은 수차례 부모님을 설득한 끝이 13세에 출가, 동화사 선원에서 일타스님을 만나 상좌의 연을 맺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강원에서 경전을 공부하고 자운율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981년 고향인 제주로 돌아간 스님은 제주불교중흥회 회장을 맡으면서 불교 발전에 헌신했다. 제주도에 내세울 만한 가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스님은 서귀포시에 부지를 매입, 약천사 대작불사를 시작하면서 16년 만에 현재의 대가람을 완공했다. 이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환희정사를 창건하고, 단양 광덕사에 주석하면서 백만불전 건립 불사를 했다.
사찰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스님은 다시 수행자로 돌아갔다. 2006년 수덕사 정혜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수행에만 전념했던 혜인스님은 2012년 조계종 계단위원과 은해사 조실로 추대됐다. 이후 2014년 은해사 기기암 선원에서 정진하면서 안거철에는 선원에서, 해제철에는 제방 사찰에서 법문을 했다. 특히 2014년에는 “암 수술 4일만에 관악산 호압사에서 대중법문”을 할 정도로 철저하게 정진을 했다.
당시 스님은 법문을 만류하는 대중에게 “선을 하는 사람은 좌복 위에서 죽기를 서원해야 하고, 법사는 법상에서 숨을 거두겠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며 후학들에게 늘 정진과 전법도생의 길을 갈 것을 당부했다. 전국 어디서든 법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발걸음을 해 부처님 가르침을 전했던 혜인스님은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부모은중경>을 중심으로 불심과 효사상에 대한 법문을 널리 폈다.
임종을 앞두고 염불을 하시던 혜인스님은 “일생동안 살면서 단 한사람에게 마음 아픈 일을 하지 말고, 미워하는 마음도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며 “열심히 정진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찾아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으라”고 간곡히 이르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다 원적에 들었다.
혜인스님은 저서로 <신심> <원력> <행복을 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겼으며, 육성법문으로 <범망경 보살계 법문> <칠월백중법문> <부모은중경법문> 등 수십종의 법문을 남겼다.
혜인대종사 임종게
무적지처부진명(無蹟之處孵眞命)
무시무종어차법(無始無從於此法)
혹건혹파천당옥(或建惑破天堂獄)
시이름등삼계주(是以凛騰三界主)
약몰심멱감천칙(若沒尋覓甘泉則)
여마니주격천장(與摩尼主隔千丈)
시십마(是什麽)
해인스님
초심자때 인연을 잊지 않겠습니다
극락정토에 화생하시어 광명에 섭수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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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스님 돌아가셨는데 화환이 왜 저리 많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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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염송하다 원적에 들었는데 임종게는 시십마입니다
임종게가 극락왕생이던지, 시심마로 원적에 들어야 하는데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유심정토인가? 무심정토인가? , 참선수좌인가? 미타행자인가?
양손의 떡! 떡맛을 알 수 있는가? 비빔밥 권장인가? 바쁘고 빠쁘다 유심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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