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커억~' 침 뱉는 이는 아저씨들뿐
은퇴 후 적어도 30년 이상 더 살아야 하는데
사무직이었던 사람은 손으로 하는 일 배워야
친구들이 여수 내 화실을 찾아왔다. 참 오랜만에 만난다. 잘나갈 때는 다들 기사가 모는 '법인 차량'을 타고 와 폼 잡았다. 이번에는 친구 다섯 명이 차 한 대에 몰려 타고 우르르 내려왔다. 올해 다들 '짤렸다'. 남자가 망가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제일 이상해진 건 범재다. 자꾸 '소리'를 낸다. '어허~', '아~', '카아~'와 같은,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탄사를 자꾸 뱉는다. 다들 쳐다본다. 진짜 창피하다! 음식점 늙수그레 아줌마들에게는 '여수에 오니 미녀가 많다'는 등, 뜨악한 농담을 꼭 한마디씩 한다. 정말 미치겠다! 화장실에서는 지퍼를 내리며 '커억~' 하고 목 깊은 곳에서 가래를 뽑아내 침을 뱉고는 소변을 본다. 아주 드~럽다!
화장실이나 목욕탕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침을 뱉거나, 깊은 신음소리를 내는 이들은 언제나 아저씨들이다. 에드워드 홀의 '공간학(proxemics)'에 따르면, 45㎝ 이내의 거리는 엄마와 아기, 혹은 부부 사이와 같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만 허용된다. 낯선 이가 이 거리 안으로 침입하면 몹시 불편해진다. 그래서 고급스러운 장소일수록 소변기 사이의 거리가 멀고, 칸막이가 쳐져 있는 거다. 소변기 앞에서 없는 가래를 뽑아내며 소리를 내는 이유는 심리적으로 몹시 불편하다는 뜻이다. 한때 폼 나는 '싸나이'였던 범재가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권력 공간'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이다.
범재처럼 드~럽지는 않지만, 재림이는 너무 짜증난다. 계속 중얼거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 듣는 이야기를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중얼거리기'는 '기러기 아빠'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기러기 15년 차인 재림이는 올해 초 진짜 죽을 뻔했다. 큰 회사 부사장에서 해고된 지 며칠 안 되어 뇌출혈로 쓰러진 거다. 이제 겨우 회복했다. 후각을 잃은 것 이외에는 큰 부작용도 없다. 참 다행이다.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30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은 것이 '짤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 경제권에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했던 선배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가 부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설명 모델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정신이 자연에 변화를 가져와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헤겔의 낭만적 '외화(Entäußerung)'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맞춰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개념들은 대부분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심리학적으로 그의 '소외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고 의미 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기자·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30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 할 일이 있는가? 그래서 아직 체력 좋은 범재에게는 '용접일'이 만장일치로 추천되었다.(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다. 우리 모두 대학 4년 그렇게 대충 다 니고 30년 가까이 잘 먹고 잘살았으면 감사해야 한다. 앞으로 30여 년을 더 살려면 뭔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하나 더. 연구의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인문사회 분야의 교수는 딱 두 종류다. '이상한 교수'와 '아주 이상한 교수'. 끝까지 우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수가 은퇴 후를 걱정하며 정치권이나 기웃거리면 진짜 이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