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세상에 오는 것은 돌아감을 뜻함이니
죽은 정율과 교분이 있었던 백사 이항복은 정율을 추모하는 글 한 편을 지어 무덤 속에 넣었다. 그 후 정율의 아들 세규가 장성한 후에 묘를 이장하면서 그 만장을 꺼냈는데, 거기에 쓰인 내용은 이러하였다.
대저 사람은 본래 잠깐 우거하는 것과 같으니, 오래고 빠른 것을 누가 논하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곧 또 돌아감을 뜻함이니 이 이치를 내 이미 밝게 아나 자네를 위하여 슬퍼하노니.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가며 가만히 울고 있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어 주리.
전주객사 © 유철상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전주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며, 고려ㆍ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묶게 한 일종의 관사를 말한다.
정언신은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정언신에 대한 서인 측의 집요한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듬해에 나주의 양형, 양천경 등은 정언신이 정여립을 옹호하였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정언신은 다시 붙잡혀 사사(賜死)의 명을 받는데,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입을 다물고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때 정철이 “아조(我朝)에서는 200년 이래 일찍이 반역 죄인을 제하고는 대신을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인후한 풍이 조송(趙宋)과 다름없으니 지금 마땅히 준수할 것이고 감히 다른 의논은 없습니다”라고 거듭 아뢰어 정언신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정언신이 갑산으로 유배를 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또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자 선조는 “어찌하여 이렇듯 강경히 고집하는가. 언신은 위인이 불학무식하여 스스로 큰 죄에 빠지는 줄도 몰랐다. 역당의 공초에 따르면 ‘먼저 정언신과 신립을 죽인 후에 군사를 일으킨다’ 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언신의 죄는 마땅히 용서할 만한 것이다. 지금 만약 국문하다가 혹 매를 못 이겨 죽게 되면 반드시 대궐 뜰에서 때려 죽였다는 말이 날 것이고, 혹 병으로 죽게 되면 대신이 옥에서 병사하였다는 말이 날 것이니 이런 것은 모두 좋지 못한 일이다. 경들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자고 하는가?” 하고 호통을 쳤다. 갑산으로 간 정언신은 몇 달도 안 되어 통한의 한을 품고 죽었다.
그 뒤에 세워진 정언신의 비에는, 정집이 처형될 때 크게 울부짖으며 “공경과 사대부를 많이 끌어들이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더니 왜 나를 죽이느냐”라고 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정집의 진술이 날조였던 이상 정언신이 역모에 가담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정언신은 역모 초기에 고변했던 사람을 참해야 한다는 말을 한 이후 궁지에 몰렸다. 그는 정여립의 역모를 믿지 않았고 기축옥사와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고(東皐) 이준경은 “나를 대신할 사람은 오직 정언신밖에 없다”라고 칭찬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황정욱은 남대문에 올라가 “정언신이 살았다면 왜 적에게 그토록 허망하게 국토를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정언신을 비롯한 조선의 인재들을 희생시킨 벌로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이 일어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한다. 정언신은 1599년에 복직되었으며,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배향되었다. 그 뒤 4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전주의 큰 도로에 ‘정언신로’, ‘정여립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택리지』 「주기(州記)」에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이 섞여 있으며, 사람들의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전주를 최충헌에 의해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이곳에 왔던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전주는 완산이라고 부르는데, 옛 백제국이다. 인물이 번호(繁浩)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古國)의 풍이 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은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고 모두가 의관을 갖춘 선비와 같으며, 행동거지가 본뜰 만하다. 그러나 완산이란 이름은 근교의 작은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해서 고을의 이름이 되었는지 이상하다.
경기전 © 유철상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이다. 1410년(태종 11)에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살았다고 해서 객사의 이름조차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붙인 전주에는 호남제일문인 풍남문과 경기전, 오목대, 이목대 등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다. 1894년 5월에는 동학농민군이 무혈입성을 한 뒤 전주화약을 맺었던 곳이며, 오늘날 지방자치제의 효시라 할 집강소를 설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전주는 현재 문화관광도시로 거듭나기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으며, 음식으로는 전주비빔밥과 한정식 그리고 콩나물국밥이 유명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것들도 많다. 전주부성의 4개 문 중 호남제일문인 풍남문만 남았고, 그 안에 자리했던 매월정(梅月亭)이나 진남루(鎭南樓), 제남루(濟南樓) 등의 정자와 누각은 사라지고 없으며 오직 옛사람의 글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성계 어진 © 유철상보물 제931호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으로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다. 1872년(고종 9) 조중묵(趙重默)이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그림이다.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하고 전주를 찾았을 때 동행한 포은 정몽주는 남고산성 중 한 봉우리인 만경대에 올라 시 한 편을 남겼다.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이요, 황엽(黃葉)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豪氣)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누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뜬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여지도서』에는 만경대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고덕산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기이하게 솟아 마치 안개구름처럼 보이는데, 그 위로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서쪽으로 군상도(群上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을 향해 막힘없이 트여 있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다. 온갖 모습으로 변화하는 경치를 뽐내고 있다.
그 뒤 전주에 왔던 성현은 『제남정기』에서 이곳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만경대는 유리알 같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기린봉(麒麟峯)은 동쪽 구석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논밭은 수놓은 것 같고 촌락은 즐비하다. 아침저녁으로 연기는 수목 사이에 엄애(掩譪)하고 망망한 넓은 들은 안계(眼界)가 공활(空豁)하다. 오르는 자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 흥취가 무궁하다. 대개 유락(遊樂)의 적취(適趣)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깊은 것과 넓은 것이 그것이다. 만약 여러 귀빈을 초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촛불 들고 밤까지 노는데 예로써 응수함에는 진남루의 깊은 것이 좋고, 난간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고 천지를 부앙(俯仰)하며 성정을 즐겁게 하고 울적함을 풀기에는 제남루의 넓은 것이 좋으리라.
깊고 넓은 것이 서로 어울려 있던 전주의 풍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제 역사의 자취는 간 곳이 없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권근이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놓으니, 완산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라고 하였고, 이승소가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한 옛날의 명도(名都)로다”라고 노래한 전주에서 전군가도를 따라가면 군산에 이른다.
금산사 미륵전 © 유철상금산사 미륵전. 국보 제62호로 1ㆍ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겉모양이 3층으로 된 한국의 유일한 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이다.
하마비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와 궐문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을 세워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는 표식을 일컫는다. 이 표목은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ㆍ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있는데, 경기전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모악산 전주시 남서쪽 1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며, 아래로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남평야의 젖줄 구실을 하는 구이저수지ㆍ금평저수지 등의 물이 모두 이 곳 모악산으로부터 흘러든다. 정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내장산, 서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바라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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