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레토릭'(수사·修辭)이 달라졌다. 그동안 금기시해오던 푸틴 대통령과의 협상 가능성을 언급하고, 미국을 향해서는 무기 지원이 중단될 경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설정한 '레드 라인'을 넘을 수도 있다고 수위를 높였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러시아에게는 '화해', 미국에는 '경고'를 보내는 손짓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어법(語法)을 바꿨을까?
젤렌스키 대통령의 미 CBS 방송 인터뷰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29일 미 CBS 방송과의 회견에서 "우리는 군사적 수단으로만 우리의 모든 영토를 탈환할 필요는 없다"며 "우크라이나군이 2022년 2월 국경(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 국경)에 도달하면, 푸틴 대통령과 협상할 준비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매체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처음으로 19991년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러시아와 협상할 수 있다고 그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가을 러시아가 4개 점령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자포로제주, 헤르손주)을 연방으로 편입하자, 푸틴 대통령과의 협상 불가를 선언하고 그 원칙을 법제화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이 원칙을 깨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발언의 앞뒤 맥락을 보면, 놀랄 만한 발언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푸틴 대통령이 2022년 2월 이후 점령한 우크라이나 땅을 잃으면, 우크라이나 지원을 머뭇거리는 국가들조차 (푸틴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접을 것으로 확신한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에서 권력을 잃을 것이고,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대화에 나설 준비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 뿐만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무역 봉쇄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긴다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경제적으로 승리하고 전장에서 강해지고,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며 "군사적 수단으로만 모든 영토를 점령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사진출처:주한러시아 대사관 페북
그의 발언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30일 "특수 군사작전이 시작된 후 지정학적 현실이 바뀌었고, 우크라이나와의 국경도 달라졌다"며 "우리는 4개의 새로운 연방 구성체를 갖게 됐는데,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현실"이라고 반박했다.
◇ 미국 지원 중단시 "후퇴할 수 밖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미국이 군사 지원을 계속하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그는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우리는 대공 방어도, 패트리어트 미사일도, 전자전 전파 교란 장치도, 155㎜ 포탄도 없다는 뜻"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구체적으로 "최소한 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8,000발의 포탄이 필요한데, 2,000발 밖에 없다면 사격을 줄여야 한다"며 "그 방법은 후퇴하면서 전선을 줄이는 것으로, 러시아군은 우리의 방어선을 돌파해 대도시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서방이 군사지원을 계속해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우크라이나는 후방에서 새로운 여단을 훈련시켜 올해 하반기에는 새로운 반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퇴각하지 않을 길을 찾고 있다는 WP 인터뷰/웹페이지 캡처
그는 또 러시아 에너지 시설 폭격에 대한 미국의 불만에는 "수긍할 수 없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무기의 사용을 제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도 (에너지 단지가 파괴되는) 비슷한 대가를 치러야만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폭격을 중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이 국제유가 상승과 서방 에너지 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 공격을 피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게 정유소 등 러시아 에너지 단지에 대한 공격 중단을 촉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 젤렌스키, 잇단 측근 인사 교체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을 경질에 이은 군 내부 인사를 끝낸 젤렌스키 대통령은 본격적적으로 권력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교체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지난 26일 알렉세이 다닐로프 국가안보회의 서기(장관)를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해외정보국장으로 교체한 뒤, 30일에는 '대통령 지갑'으로 불린 세르게이 셰피르 대통령 보좌관을 해임했다. 신임 리트비옌코 안보회의 서기는 모스크바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의 해외정보국장 자리는 올레그 이바쉔코 보안국 부국장(중장)에게 넘어갔다.
신임 안보회의 서기 리트비옌코를 소개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축하를 받고 있는 이바쉔코 신임 해외정보국장/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스트라나.ua는 30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측근인 세피르 보좌관을 해임했다"며 "그는 그동안 대통령과 올리가르히및 기업가들간의 소통 역할을 맡은 최측근"이라고 전했다. 셰피르는 '대통령의 지갑'으로 불렸다고도 했다.
그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첫날 키예프(키이우)를 황급히 탈출했다는 사실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크게 실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또 대통령실의 알렉세이 드네프로프, 안드레이 스미르노프 부국장을 해임하고, 이리나 무드라야, 엘레나 코발스카야 등 2명의 여성을 발탁했다. 대통령실에서 법무 조정 업무를 맡았던 스미르노프 부국장의 경우, 부동산 불법 취득 등 부패 혐의로 반부패조사국의 수사선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졌다. 친형과 함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지역에서 부동산 불법 거래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일련의 권력 주변 인사로 안드레이 예르마크 대통령 행정실장의 위상이 더욱 강화됐다고 스트라나.ua는 분석했다. 우메로프 국방장관,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과 함께 우크라이나 안보 '트로이카'로 불렸던 다닐로프 전 안보회의 서기는 몰도바 주재 대사로 내정됐다. 잘루즈니 전 총참모장(영국 대사 내정)과 마찬가지로 해외로 유배(?)됐다는 분석도 일각에서는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