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October 28th Friday :
청량사 종합상가 부터 -- 청량사 폭포까지
"가을 단풍 모습 "
토요화가회 추계 3박4일 스케치 여행 3일차
봉화 청량사를 처음 왔다! 아마도 오지고 나에게 잘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그랬다.
주차장 도착해서 청량산 봉우리 연속된 것을 보면서 그 멋지고 가을 단풍색을 보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아주 다른 세계에 처음으러 발을 디디고 들어선 느낌이다!
"청량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기암괴석이 장관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불려진 명산"
2007년에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제23호로 지정.
2008년에는 청량산 800m 지점에 위치한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90m 하늘다리 현수교가 있다
가장 높은 장인봉( 870 m) 근처이다.
"장인봉( 丈人峯) 옛날 명칭은 대봉. 주세봉 1544년 풍기군수가 명명한, 중국 태산의 장악( 丈岳)을 모방 하여 명명."
丈人峯은 중국 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청량사 절까지는 비탈길로 좀 먼거리로 보여서.. 한 2km 정도에 있는 청량폭포까지 가면서 가을 색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단풍구경을 만끽하려고 했다..
운좋게 단풍 시점과 맞추어 왔다는 생각이 걸으면서
들었다.. 참으로 좋은곳에 왔다는 생각..
청량산의 12봉은 아래와 같다, 봉우리 이름들이
예사롭지 않다!
12개 봉은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을 비롯해
외장인(外丈人)·축융(祝融)·경일(擎日)·선학(仙鶴)·금탑(金塔)·자소(紫宵)·자란(紫鸞)과 연화(蓮花)·연적(硯滴)·향로(香爐)·탁필(卓筆) 등의 봉우리를 이르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절경이다.
내가 젊었으면 12개 봉우리를 볼수가 있었는데..
이제 산행은 무리한 노인이 되어 아쉬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3년( 663) 창건된 사찰로 30여좌의 암자가 있었다 하니 그 규모가 대단한 불교의 요람이었을 것같다..
중심 전각은 유리보전 으로 약사여래를 모신곳(세부내용은 아래에 별도 소개)
주차장에서 입구에서 갈때 낙동강을 끼고 바위암벽에 학소대가 있다 학소대와 주변 풍경이 가히 절경이고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어서 그림으로 그리기 좋은 구도이다..나중에 길게 크게 그리고 싶은 경관
( 사진으로 소개합니다)
청량산을 이야기 할때 등장하는 인물 두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과 김생 ,, 그리고 창건한 원효대사. 홍건적을 피해서 왔다는 공민왕 ( 사당이 있다)
청량산의 봉우리등음 원래 불교명칭인 반야, 의상, 보살,문수,원효봉 이었는데 1544년 조선시대때 풍기군수 주세봉이 유교적 이름으로 개칭. 12개 봉우리를 육육봉 이라고도 한다. 이후 퇴계 이황이 주자의 중국 무이산과 연결시켜 조선의 무이산이라 하여
청량산이 불가의 산이 유가의 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
무척 재미있는 스토리가 많은 산이다..
유교 유적으로 청량정사가 있다. 청량사 근처에 위치.
퇴계를 기리는 학자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
안동 도산서원이 청량사에서 13km 가까운 거리에 있다.
10시 10분 부터 ~ 12시 30분까지 추경을 찍은 사진들입니다. DSLR 카메라로 찍으면 좀더 깊은 맛을 볼수있었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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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인터넷 검색한 것을 임의로 편집한 것임.
청량산
맑을 청(淸)과 서늘할 량(凉) 산
‘태백산맥이 들에 내렸다가 예안(禮安) 강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멧부리 두어 송이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모두 만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청량을 두고 한 말이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청량산 옆을 비껴 흐른다.
청량산의 드러난 암석과 봉우리는 그 조화가 수려해 예로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한 가지만 더 숙지하고 산으로 들어가자. 조선시대 이전의 청량산은 불심이 가득한 산이었다. 봉우리 이름도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원효봉 등으로 지어졌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식으로 고쳐졌다.
이후 퇴계 이황이 청량산 봉우리를 중국의 무이산과 연관시키면서 '육육봉'으로 부르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청량정사 :
이곳에서 김생은 10년 동안 글씨를 연마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굴에서 글씨를 연마한 지 9년이 됐을 즈음 김생은 세상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떠났던 속세가 그리울 법도 했을 것이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어두운 굴속에서 김생은 글씨를, 자신은 길쌈을 해서 서로의 솜씨를 겨뤄보자고 제안했다. 김생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어두운 굴에서 서로의 솜씨를 발휘. 결과는 김생의 패배.
김생은 떠날 시기를 1년 더 뒤로 미루고 연마에 정진했다는 이야기.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 (663)에 창건된 고찰로,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봉우리 이름이 유교적 의미를 담은 명칭으로 바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이 청량사에도 이어져 산사 규모가 축소됐다고 한다.
청량정사이다. 이황은 이곳에서 숙부이자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이후 과거급제하며 벼슬생활을 하는 틈틈이 이곳을 찾아와 학문에 정진했다. 벼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온 후에도 제자와 함께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
이황은 청량산을 '우리 집안의 산'이라는 뜻의 '오가산(吾家山)'이라 불렀을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또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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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 유리보전
淸凉寺 琉璃寶殿
유리보전(琉璃寶殿)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 藥師琉璃光如來)을 모신 곳이라는 뜻으로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우환을 없애주는 부처이다.
청량사 유리보전의 불상은 종이로 만들어 그 위에 금박을 입힌 지불(紙佛)이다.
약사불의 좌측에 지장보살과 우측에 문수보살이 협시불로 자리한다. 663년(문무왕 3)에 원효가 청량사를 창건할 때 지었다 한다.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현판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 1구와 길이 15m의 거대한 괘불이 남아 있다.
공민왕이 죄수들을 사형시키던 밀성대, 원효가 머물렀던 암자인 응진전, 이황의 서당인 청량정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첫댓글 이제사 답 드리네요 요렇게 예쁜 단 풍은 쌤의 사진촬영 솜씨때문에 더 빛을뽐내줍니다 언 제나 감 사해요~
늘 따뜻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