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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9) 호세아서
정화된 이스라엘, 하느님과 새로운 혼인관계를 맺을지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 「타낙」은 호세아서를 예언서로 분류해 에제키엘서 다음으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호세아는 우리말로 ‘야훼께서는 구원이시다’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과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히브리어 ‘호세아’를 음차해 ‘Ωσηε’, ‘Osee’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호세아서’라 표기합니다.
구약 성경은 아브라함, 모세, 드보라를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또 열왕기에는 엘리야, 엘리사, 나탄, 가드 등이 예언자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의 행적과 그들이 선포한 말들이 기록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세기부터입니다. 이들은 히브리어 타낙 성경의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예언자들로 ‘저술 예언자’라 불립니다.
첫 저술 예언자는 아모스입니다. 저술 예언자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기원전 8세기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아모스와 호세아가, 남 왕국 유다에서 이사야(이사 1-39장)와 미카가 활동합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바빌론 유배 직전까지 스바니야, 나훔, 하바쿡, 예레미야, 오바드야가 등장합니다. 기원전 587~538년 바빌론 유배 시기에는 에제키엘과 제2이사야(이사 40-55장)가 활약하죠. 귀향 후 기원전 2세기까지 하까이, 즈카르야, 제3이사야(56─66장), 말라키, 요나, 요엘, 제2이사야(9-14장), 다니엘이 나타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호세아는 기원전 750~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 사마리아와 베텔, 길갈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같은 시기 남 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했습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사회 불의를 비판했다면,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종교 타락과 우상 숭배를 고발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암투와 암살이 만연했습니다. 즈카르야 임금은 6개월 만에 살룸에게, 살룸은 한 달이 못 돼 므나햄에게, 므나햄의 아들 프카흐야는 2년이 채 못 돼 페카에게, 페카는 호세아에게 왕위를 빼앗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불과 10년 동안 5명의 왕이 정변으로 교체되고 결국 아시리아군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정치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도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대중화됐고, 물질주의에 빠져 쾌락을 즐겼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망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이스라엘의 종교ㆍ윤리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성경학자들은 호세아서를 호세아가 직접 작성했거나, 제자들이 그의 전승 자료를 남 왕국 유다로 가져와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계약 관계를 ‘혼인’에 비유한 첫 번째 책입니다. 이후 예레미야, 에제키엘, 제2이사야가 계승 발전시킵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신약 성경에도 도입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발전합니다.(마르 2,19-20; 에페 5,22-25)
호세아서는 전반부(1-3장)와 후반부(4-14장)로 구성돼 있습니다. 전반부는 호세아의 혼인과 자녀들에 대한 진술이고,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아울러 이스라엘이 정화된 후 새로운 삶의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호세아는 브에리의 아들로 주님의 명에 따라 창녀인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습니다. 큰아들 ‘이즈르엘’은 이스라엘의 땅과 역사를 상징하고, 둘째 아들 ‘로 루하마’와 딸 ‘로 암미’는 하느님의 징벌을 받게 될 이스라엘의 미래를 암시합니다. 아내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호세아를 버리고 떠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녀를 찾아 다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3장) 이처럼 호세아의 가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 관계를 대변해 줍니다.
호세아서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경건한 제례가 화려한 형식에 치우쳐 더는 정화와 생명의 장이 되지 못함을 고발합니다. 또 저주와 속임수, 살인, 도둑질, 간음, 서로를 죽이는 참극의 결과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과 민족의 추방을 선고합니다. 이스라엘의 신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징벌하기로 했습니다.(5,2.9) 모든 신당이 파괴되고(10,2-8), 예루살렘 도성과 모든 성읍이 적에게 약탈당할 것입니다. 주민들은 그들의 칼에 쓰러지고, 살아남은 자들은 유배지로 끌려갈 것입니다.(9,11-14.16)
추방은 ‘광야로의 복귀’입니다.(2,16) 그래서 그곳에서 다시 단련된 이스라엘은 본래의 모습으로 재창조될 것이라고 호세아서는 예언합니다. 아울러 호세아서는 하느님께서 다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통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11,2)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헤셋’이라고 표현합니다.(2,21) 바로 ‘신의’입니다. 하느님의 헤셋은 백성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사랑과 자비, 변함없이 충실한 마음, 질투심, 연민, 용서 등을 함축합니다. 바람난 고메르를 찾아가 용서해 주고 처음의 혼인 관계를 회복하는 호세아의 사랑(3장)은 하느님의 헤셋을 암시합니다.
하느님과 새로운 혼인관계를 맺기 위해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알아야’(호세 2,22)하고, 하느님께 받은 헤셋을 그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호세 4,1; 10,12; 12,7) 곧 그분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7) 이사악의 깊고 깊은 마음의 상처
예전의 본당에서 형제님들 구역모임이 있었다. 형제님들 모임은 보통 저녁에 간단한 식사와 함께 주(酒)님(?) 한잔 마시면서 자유롭게 생활나눔을 했다. 모임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이가 가장 많은 형제님이 자신의 깊은 속내를 이야기했다.
“저는 배우지도 못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막일부터 안 한 일 없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성실하게 일했어요. 결혼도 혼기를 놓쳐 늦은 나이에 했어요. 그리고 늦둥이 아들을 보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하며 키웠어요.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무척 순종적이라 사실 기대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겨울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방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봤어요. 너무 실망과 배신감이 커서 화를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손찌검을 했어요. 그리고 옷을 벗겨 문밖으로 쫓아냈어요. 한 시간쯤 뒤에 아들도 집안으로 들어와서 무릎을 꿇긴 채 한바탕 훈계를 했지요. 다음 날부터 말도 많던 아이가 집에서는 입을 닫았어요. 이후로 아들은 내가 대화를 시도해도 건성으로 듣기만 했어요. 벌써 20여년이 지났고 아들도 가정을 꾸렸는데 지금도 나에게 아주 냉담해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하나요 신부님?”
그 형제님은 끝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아버지는 큰 상처라고 하시지만 아드님의 상처도 상상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사춘기 학생이 옷이 벗겨진 채 문밖에서 추위에 떨며 느꼈을 창피함은 상상 이상의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이사악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든 옛 생각이다.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브라함의 늦둥이 아들, 이사악은 번제물로 바쳐지기 전 성화에서 보여주듯 공포 그 자체였을 것 같다. 아버지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아들을 향할 때 이사악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해주던 아버지가 칼을 들고 갑자기 어린 아들인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사악이 순종적이라 아버지를 밀치지 못했을까? 죽음 앞에서 그 누구든 본능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생각할 여유나 이유도 없이 사고처럼 닥친 상황에서 이사악은 그 자리에 그냥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악에게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상대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카리스마와 할아버지와 손주같은 나이 차이를 고려해 봐도 그렇다. 성경에서도 부자(父子)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이사악은 도전이나 갈등과 다툼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닮은 면도 있었다. 이사악이 그랄 지방에 머물며 살게 되었을 때 예쁜 레베카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에게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 위기를 넘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악은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너무 답답하고 소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악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보통 우리들도 위기가 오면 비슷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6) 모든 것 희생하고 자녀 얻은 사라
구약시대에 여자는 그저 남자의 재산목록 중 하나였고 매매가 가능한 하찮은 존재로 생각됐다. 그래서 여인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됐으며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는 존재였다. 구약의 여성들은 종교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연중행사인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예배에 참례할 수 없었고 성전에도 여성들만의 자리가 따로 존재했다. 당연히 여성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학문의 총체인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존경받는 율법교사가 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은 가축을 지키고, 밭일을 하고 식사와 빨래, 옷을 만드는 등 안팎의 일을 다 감당해야 했다. 결혼한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사회적, 법적지위에 많은 위협이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여자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결혼한 유다인 여성이 일반 여자 노예와 법적으로 다른 것은 결혼 때 지참금 액수를 적은 혼인증서였다. 이 혼인증서는 훗날 담보가 되어 부인이 남편과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었을 때 부인에게 지불되었다.
하느님께서 오래전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보다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 부부가 노인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자녀가 없었다. 사라는 가장 믿을 만한 여종, 하가르를 남편의 소실로 들여 아들을 낳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집안 갈등의 화근이 되어 아브라함은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쫓아낸다. 이스마엘은 아랍부족의 선조가 되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이 장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결국 사라를 선택한 것은 마음의 빚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대도시를 떠나 이름도 모르는 타지로 가면서 묵묵히 함께 동고동락했고,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파라오에게 죽지 않기 위해 사라는 남편이 시킨 대로 ‘남매지간’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남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사라를 아브라함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창 더운 대낮의 어느 날 아브라함 앞에 나그네 세 사람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달려가 땅에 엎드려 인사를 하며 물로 발을 씻게 하고 나무 아래에서 쉬도록 한다. 사라를 시켜 고운 밀가루로 반죽하여 빵을 굽게 하고 하인에게 좋은 송아지를 잡아 손님을 극진히 환대했다. 나그네들은 내년 이맘때 다시 올 텐데 그때에는 아내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 덕담을 했다.
사라는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다가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빵(?) 터졌다. 이미 둘은 나이 많은 노인들로 임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꾸짖었다. 사라가 이미 늙었다며 임신은 말도 안 된다고 웃으며 주님의 권능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라는 두려워져 “저는 웃지 않았다”고 발뺌을 했지만 “아니다. 너는 웃었다”며 입을 닫게 했다. 어쨌든 나그네에 대한 극진한 대접으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늦은 나이에 자식을 얻는 축복을 받게 된다. “하느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 (창세 16장-18장 참조)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8) 다니엘서
영원한 나라 세우실 하느님의 주권을 드러내다
히브리어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타낙」은 다니엘서를 지혜문학에 가까운 성문서로 분류해 에스트라기와 에즈라기 사이에 배치합니다. 다니엘은 우리말로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다니엘서를 음차한 헬라어 구약 성경 「칠십인역」은 ‘Δανιηλ’,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Daniel’,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우리말 「성경」은 ‘다니엘서’로 표기하지만, 예언서로 분류해 에제키엘서 다음으로 놓았습니다. 아울러 가톨릭교회는 다니엘서를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와 함께 4대 예언서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타낙 성경의 다니엘서는 총 12장으로 히브리어(1,1-2,4; 8,1─12,13)와 아람어(2,4-7,28)로 쓰여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람어 작품(2-7장)에 히브리어로 쓰인 시작 글과 마지막 부분을 덧붙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집자가 이 자료들을 다시 다니엘과 하난야ㆍ미사엘ㆍ아자르야 네 유다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첫째 단원(1-6장)과 다니엘이 혼자서 보는 환시들을 소개한 둘째 단원(7-12장)으로 구분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다니엘서에는 타낙 성경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인 내용뿐 아니라 헬라어로 쓰인 고유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헬라어로 쓰인 내용은 다니엘서 3장 24-90절의 기도문 곧 ‘아자르야의 노래’와 ‘세 젊은이의 노래’, 13장 수산나 이야기와 14장 벨 신상과 큰 뱀의 일화 내용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헬라어로 쓰인 이 부분들을 제2 경전으로 인정해 제1 경전인 타낙 성경의 다니엘서와 함께 편집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 제2 경전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바빌론 유배 시대(기원전 587~538년)에 활동하던 다니엘 예언자의 작품으로 제시됩니다. 다니엘은 남 왕국 유다 여호야킴 임금 재위 3년 때인 기원전 606년부터 페르시아 키루스 임금 재위 3년 때인 기원전 536년까지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다니엘은 에제키엘 예언서 14장 20절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 저술된 시기는 다니엘이 활동하던 때보다 400년 후인 기원전 2세기 셀레오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 때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다니엘서 내용이 무엇보다도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한 사건을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 10-12장의 정치, 사회 상황이 기원전 2세기 중반 근동과 유다 지역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원전 134~63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기 상권의 저자가 다니엘서를 알고 있습니다. 덧붙여 예로니모 성인도 저서 「다니엘서 주석」에서 포르피리의 증언을 인용,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의 작품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작품이라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서는 다니엘 예언자가 아닌 권위 있는 그의 이름을 빌린 익명의 하시딤(경건주의자)이 저술했고,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죽기 직전인 기원전 164년께 최종 편집됐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봅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다교와 히브리인들의 전통이 자신의 통치와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하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했습니다. 이에 하스모네아 가문의 마타티아스 사제가 저항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저항 운동에 유다교 전통을 고집하던 경건주의자들, 곧 하시딤이 동참했고,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을 벌입니다. 마카베오 가문과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 군대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해 봉헌합니다. 다니엘서도 이러한 역사 배경 속에서 쓰인 작품입니다.
다니엘서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한 묵시문학 작품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유다인들이 ‘학가다’라고 부르는 교훈적 이야기와 묵시문학이 독창적으로 결합한 작품입니다. 다니엘서 둘째 단원이 묵시문학에 속합니다. 첫째 단원에서 다니엘은 뛰어난 현자로서 꿈을 해석하지만, 둘째 단원에서 다니엘은 환시만 볼 뿐 그 의미는 해석하지 못하고 천사가 뜻풀이를 해줍니다.
다니엘서는 여러 이교 문화 앞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으로 세상의 정치권력 역시 그분의 절대 통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정치 권위도 하느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4,22; 5,18-19) 이에 다니엘서는 하느님의 위대성을 고백하는 이교도 임금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2,46-47; 3,31-33)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한 시대는 악이 가득해 온 세상이 캄캄하던 때였습니다. 다니엘서는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이제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으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불어넣습니다. 인간들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흔들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십니다.(2,44)
그러면서 다니엘서는 ‘죽은 이의 부활’을 예고합니다.(12,2-3) 하지만 아직 ‘죽은 모든 이의 부활’을 선포하는 신약 사상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다니엘서는 죽은 이의 전부가 아닌 ‘의인의 부활’만을 선포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5) 욕심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롯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복권 판매액이 급증했다고 한다. 경제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한 번에 천금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더 늘어난다. 로또에 당첨되어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인생은 정말 행복해질까?
보통 사람들은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돈 관리를 잘못하거나 더 큰 욕심을 내서 투자에 실수하거나 사기를 당해 가진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안정감을 지니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많지만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 중에 이혼하거나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는 등 불행한 사례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내가 살면서 주변을 보면 형제간에도 모두가 함께 가난하게 살았을 때는 서로 콩 한쪽이라도 나누는 정다운 모습을 지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자식들이 생기고 재산의 차이가 나기 시작하거나 부모님이 남긴 유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형제지간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인간의 욕심은 한계가 없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고통을 받고 죽음에 이른다. 이런 경우를 잘 드러내는 성경의 인물은 롯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날 때부터 아브라함과 동행한 사람은 조카 롯이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보통 조카가 아니다. 아들과 같은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믿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동지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아브라함과 롯은 양떼와 소, 노비 등 재물이 많아졌다. 아브라함과 롯이 아니라 그들에게 속해있는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아브라함과 롯은 예전과 같은 마음이었어도 식구들의 분쟁이 잦아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저히 같이 살기 어려우면 떨어져 사는 것이 상책이다. 부부사이에도 계속 싸우는 것보다 떨어져 냉각기를 갖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 가난해서 굶주리고 외부의 적을 같이 물리칠 땐 똘똘 뭉쳤던 두 사람도 가진 것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아브라함은 롯과 결별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분가를 권하며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롯은 아주 비옥한 땅인 요르단 분지를 선택했다. 이곳이 바로 겉으로 화려한 소돔 땅이었다.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지만 죄인들이 넘쳐 하느님은 이곳을 심판하려고 결정했다. 하느님은 롯에게 천사들을 보내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라 했지만 쉽게 자신들의 소유물을 버릴 수 없었다.
드디어 소돔 땅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다. 간신히 소돔 땅을 빠져나오던 롯의 아내는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말씀을 어기고 재산에 대한 미련에 뒤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욕심에 집착하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천사들의 권고도 귓등으로 들었던 두 명의 사위는 목숨을 잃고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으로 도망가 차가운 굴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