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활 특집] 부활과 관련된 상식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기쁨으로 특별하게 지내
부활 시기는 예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50일 동안이다. 주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 8일 축제, 부활삼종기도 등 부활 시기만의 특징들이 있다. 가톨릭교회가 부활 시기를 특별하게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기쁨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부활 시기의 특징들과 예수 부활의 증거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부활 8일 축제, 부활삼종기도
그리스도 부활의 기쁨은 주님 부활 대축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 시기의 첫 8일 동안을 축제로 지내는 이유도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을 누리게 된 신앙인들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부활 8일 축제의 기원은 파스카 성야 때 전통적으로 이뤄지는 세례식에서 새 영세자들은 흰 옷을 입었고 교우들도 영세자들과 함께 새 옷을 입고 세례 서약 갱신을 하면서 세례의 은총에 감사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한 주간을 자신들의 축제 기간으로 여기던 전통에서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부활 8일 축제가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활 8일 축제 전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의 삼덕으로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부활 시기 특징 가운데 ‘부활삼종기도’를 빼놓을 수 없다. 부활삼종기도는 부활 시기인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경 강림 대축일까지 바친다. 부활삼종기도에는 평상시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온 세상을 기쁘게 했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엠마오는 어디인가
주님 부활과 관련해 신약성경에 나오는 ‘엠마오’라는 지명은 신자들에게 익숙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유다 지방의 한 시골 마을 이름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엠마오는 신약성경 루카복음 24장 13절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라는 구절에서 등장한다.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에 해당한다.
엠마오에 관한 이야기는 루카복음 24장 13~35절에도 나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사람과 동행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초대를 받아 저녁 식사를 같이 한 뒤 사라졌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사라진 후 두 사람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라고 말한다.
엠마오에 대해 오늘날까지 알 수 있는 것은 루카복음에 전하는 내용뿐이다. 교회사 전승에 의해 엠마오로 추정되는 장소는 네 군데가 있다.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33㎞ 떨어진 암바스, 역시 예루살렘 서쪽으로 대략 15㎞ 떨어진 시골 마을 아부 고쉬, 예루살렘 서쪽 약 6㎞ 떨어진 칼로니에,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약 11㎞ 떨어진 엘쿠베베이다. 1901년 프란치스코회가 엘쿠베베에 기념성당을 세우면서 엘쿠베베가 공인된 엠마오로 정착된 측면이 있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클레오파스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엠마오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함께 그곳으로 동행했던 상징적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부활의 증거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부활은 신앙의 본질이지 과학적,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연법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믿지 않는 경향이 강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졸도했거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예수 부활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신약성경이다. 신약성경 4복음서에는 세부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다른 부분이 있지만 예수 부활을 풍부하고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4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안식일 다음날 아침, 예수가 묻혔던 무덤이 비어 있는 채로 발견됐고,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와 얼굴 수건은 무덤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4복음서의 기록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예수 부활의 더 뚜렷한 증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합의 없이 예수 부활을 기록했기에 세부적인 부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예수 부활이라는 사실에서는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의 또 다른 확실한 증거는 제자들의 활동과 교회의 역사성이다. 예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제자들은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의 역사도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 있다”(647항)고 밝힌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활교리] “희망을 결코 빼앗기지 마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단언컨대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살이 안에서 비참함과 억울함을 겪기도 하지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밝혀주실 것이기에(마태 6,4 참조) 희망을 말한다. 또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눈에 구멍이 난 것처럼 한없이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옮아감이고(위령감사송 1 참조), 천국에서 만날 것이기에 희망을 떠올린다. 그리고 인생여정이 큰 아쉬움과 후회로만 가득 찬 미완성으로 끝난다 해도,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완성될 것이기에 희망을 간직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르면 희망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1817항 참조).
첫째, 희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실 신구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전해지는 주님의 약속은 ‘함께해 주신다’이다. 주님의 사명을 받고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전해진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였고, 선교활동을 하며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바오로에게는 “두려워하지 마라. (…) 내가 너와 함께 있다.”(사도 18,9-10)는 말씀이 울려 퍼졌다. 무엇보다 마태오 복음서는 첫 장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마태 1,23 참조) 임마누엘 하느님을 선포하고, 그리고 똑같이 마지막 장에서도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동일한 주님의 약속을 전해준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란 소설은 천주교 신자들의 실제 박해상황을 토대로 쓰여 졌다. 하지만 책 제목인 ‘침묵’의 뜻은(많은 이들이 쉽게 떠올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침묵’이 아니라, (저자가 밝혔듯이) ‘하느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고 계신다’이다. 사실 밤에 갓난아기가 몸이 불덩이이면 갓난아기와 엄마 중에 누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엄마는 밤새 뜬눈으로 아이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감당하고 버틸 수 없을 만큼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느님의 침묵은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느님의 침묵만을 단정 지어 말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삶의 어둠과 무거움을 마주했을 때, 과연 누구에게 기대고, 부르짖고 그리고 하소연할 수 있겠는가! 『어린왕자』의 명대사처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삶의 시련과 고통도 쉽게 간과할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과 동행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하고, 기억해 보자. 사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로마 8,25)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둘째, 희망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세례식 때, 하느님의 교회에서 신앙을 청했고, 그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믿음을 고백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강생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현세적인 행복을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히브 11,40) 마련해 주셨음을 갈망하며, 어떤 상황에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주어진 삶을 묵묵히 버티고 살아낼 수 있다. 단, 희망만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면!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는 어떻게 정해지나요?
올해 주님 부활 대축일은 4월 9일입니다. 작년에는 4월 17일이었지요. 내년에는 3월 31일이 됩니다. 부활절은 성탄절과는 달리 매해 날짜가 바뀝니다. 그 이유는 부활절이 이스라엘의 파스카 축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며,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의 절기를 정하는 ‘유다력’에 따르는 까닭입니다. 유다력에 의하면, 파스카 축제는 우리 달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 니산 달 14일에 지냅니다. 참고로, 유다력의 하루는 일몰에서 시작해서 그다음 날 일몰까지기에, 그들의 ‘14일’은 우리에겐 ‘14일 일몰부터 15일 일몰까지’가 됩니다. 유다인들은 파스카 축제를 위해서 춘분 이후 첫 만월(滿月, 보름달)을 맞는 14일 오후에 파스카 양을 잡았는데, 바로 그날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파스카 축제일은 안식일(금요일 일몰~토요일 일몰)과 겹쳤는데, 그다음 날인 “주간 첫날”(요한 20,1)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춘분이 지나 맞이하는 만월 이후 첫 번째 주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절 날짜를 최종 확정한 건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에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지내는 부활절의 날짜를 보면, 종종 다릅니다. 사실 두 종파는 16세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날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1582년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이 그동안 사용하던 율리우스력 대신 새로운 역법 체계를 도입하면서 차이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기존 율리우스력이 달의 삭망(朔望)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반면, 그레고리우스력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계산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력을 도입한 1582년에 두 역법 체계는 10일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2023년 현재는 13일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계산하는 날짜에 따라 어느 해는 부활절이 다르고, 어느 해는 같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는 문제를 두고 물밑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정교회를 대표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는 최근 튀르키예 언론 인터뷰에서 “양측 대표가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며, 곧 합의안이 나올 거로 기대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부활절 통일은 2025년 희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라며 두 교회가 2025년을 목표로 정해놓고 논의하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2025년은 가톨릭교회의 희년인 동시에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를 공식 선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지 17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가톨릭 신학09]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2) 섭리하시는 하느님
섭리라는 말은 뭔가 하느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뜻인 것 같아 좋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제로 잘 체험되지 않아서인지, 혹은 인간 주도적인 세상이어서인지 친숙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근대 사상 중에 이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창조 이후에는 인간 역사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입니다. 반면 교회는 창조가 정적인 것이 아니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을 유지하실 뿐 아니라 그 궁극적 목적으로 이끄신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활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섭리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창조 신앙이 어떤 순간의 사건만이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우주의 완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에페 1,3-10에서는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는 그 완성을 향해 일어난 사건이고, 그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성경에도 나타납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런데 이레네오 성인이 ‘성자와 성령은 창조에 있어 성부의 두 손’이라고 표현하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창조에서 성령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교회의 전통 안에서는 종종 언급됩니다. 예를 들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신데 성령께 대해서도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창조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이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서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입니다.
창조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이며 그 궁극적 완성을 향해 있다는 가르침은 인간 역사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처럼 하느님은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시대에 당신 아들을 보내셨고, 이 아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으며, 이분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이 선사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들을 믿게 하시는 이가 곧 성령이십니다. 인간 역사를 완성으로, 그리고 각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곧 섭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섭리의 일차 원인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차 원인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고려할 때, 이것은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에 있어 하느님의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로마 8,28을 고백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11.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150항)
공동체 경시 풍조부터 바로잡아야
발등에 떨어진 불
15년간 280조라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실효성이 없었기에 출산율 정책에 대한 논쟁이 거셉니다. 그러나 다른 주요국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산집행이 적재적소에 이뤄졌는지에 대한 비판도 많습니다. 요컨대 예산을 많이 쓴 것도 아닌 데다 효과적으로 사용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추가 정책들이 제시됩니다. 아동수당 증액과 난임부부에 대한 지원 강화, 스웨덴식 남성 육아휴직 제도(연간 90일) 도입, 재택근무 확대 등입니다. 물론 단순히 지원금 인상만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 창출, 출산과 육아를 위한 촘촘한 사회안전망 강화처럼 사회의 근본적인 시스템 정비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학원 보내느라 가족을 못 보는 나라
저출산 주요 원인으로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도 거론됩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사교육비 지출은 26조 원, 사교육 참여율 78.3%(초등학생 85.2%), 학생 1인당 월평균 41만 원이며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성당 미사나 교리교육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학원 때문입니다. 자연스레 신앙교육, 가족·친척과의 만남도 점차 사라집니다.
사견이지만 학원에 가서 행복하다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가겠다고 가는 게 아니라 각박한 현실과 경쟁 때문에 가는 겁니다. 물론 사교육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치열한 입시, 전쟁 같은 취업 상황, 낙오와 도태를 생각하면 학원을 한 군데라도 더 다니는 게 좋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는 정작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고 사는 건 아닐까요? 바로 공동체입니다.
절실히 회복해야 할 공동체
저출산과 관련해서 언급해야 할 것은 바로 ‘공동체의 와해’입니다. 공동체란 가정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곳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서로를 이웃과 동반자로 여기는 마음이지요. 함께 살아가는 것은 힘들 때도 있고 인내와 양보, 헌신과 배려를 요합니다. 그러나 경쟁과 승자독식, 성과에만 몰두해서 가족과 이웃, 함께 사는 삶을 잊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저출산 문제는 이런 공동체 경시 풍조에서 비롯됐습니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여건도 어렵고 늦었지만 삶의 동반자, 공동체가 필요할 것 같아서 결혼을 결심했답니다. 헌신과 희생을 감당한다는 그에게 깊은 응원을 보냅니다. 국가 정책과 더불어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저출산 문제도 서서히 해결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내 옆의 가족과 이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하지 않을까요?
“모든 참다운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선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과 이웃을 위해 선을 추구할 때 진리 편에 서게 된다. 자신의 선과 이웃의 선을 사랑함을 통해 인간은 공동선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안정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50항)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11. 여섯째 계명 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331~2336항)
삼위일체 교리는 부부사랑의 설계도
이번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으로 5만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피해가 큰 하이타주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인구 4만2000명 규모의 에르진에서는 놀랍게도 건물 붕괴와 인명 피해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외케소 엘마소글루 에르진 시장은 “우리는 지진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고, 건물도 무너지지 않아 잔해도 없습니다”라며 “우리는 불법 건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단호하게 이유를 밝혔습니다. 명확한 규범이 적용된 건축물은 웬만해서는 잘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관계나 특별히 부부관계도 이러한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제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째 계명을 살펴볼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야 가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죄가 지진과 같다면 명확한 규정대로 설계된 부부관계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하는 남녀 사랑이 지향해야 하는 가장 완전한 모델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 삼위일체 관계입니다. 교리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사랑과 일치의 소명을 부여하시고, 따라서 그 소명에 따른 능력과 책임도 부여하셨습니다”(2331)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사이의 사랑이 당신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상이 되게 하셨습니다.”(1604)
삼위일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요한 3,34)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다는 것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요한 3,35)을 아드님 손에 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남자가 밖에 나가 아내를 위해 땀과 피가 섞인 돈을 벌어주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여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교회는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꿰뚫린 심장에서 태어났다”(766)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마치 여자가 남편을 위하여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아드님께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할까요? “남녀는 서로 다르지만 그 품위에서 동등”(2335)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아내의 순종이 낮아짐이 아니라 하나되는 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하신 것처럼 교회를 당신 몸으로 삼기 위해 당신께 순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신비가 남녀의 관계로 설명되고 그것이 삶에 적용되지 않으면 모든 관계는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학이 발전하고 확고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만 하지 맙시다. 삼위일체 신비는 모든 관계의 모델이고 설계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신 혼인 계약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준비하는 것”(1612)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는 부부애의 표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1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