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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창 33: 1-10
옛 성현들은 말하기를 “산과 사람은 멀리 두고 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말은 산은 가깝게 보게 되면 보기 흉물스러운 것들이 많다. 장마로 산사태로 패어 나간 곳이 있을 것이며 잡석이 이리저리 흩어져 딩굴고 죽은 짐승이 냄새를 피우게 될 것이며 쓰레기들이 널려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멀리 바라보게 되면 울창한 산림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인간의 더러운 냄새를 맡게 될 것입니다. 외삼촌 집에서 20여 년을 살았던 야곱은 그토록 좋았던 이삼촌이나 사촌들이 자기에게 실망시키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냄세를맡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망향을 달래면서 고향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고향은 참으로 아름답고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물장구치고 방게 잡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곳이 고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라본다고 하는 말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눈을 들어 보라고 하는 말이 3번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바라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1년이란 긴 나그네 생활을 접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자기형과의 해후하는 장면이 기록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라반의 집에 있을 때 숫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창 31:1-2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이제껏 자기 외삼촌 집에서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외삼촌 집에 복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 붙이는 것을 생각하면 심히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더러운 냄세를 맡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 같은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은 신앙의 사람 야곱의 스타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응답하시기를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역사로 외사촌들을 동원하였고 라반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한 길만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는 길목에 장애와 가로막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야곱이 눈을 들어 에서의 군대 400인을 보았다.
창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자기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형의 400명의 군대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좋은 마음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신앙의 회복이요 약속 성취요 하나님이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길에 야곱에 눈에 비쳐진 장애물은 자기형 군대 400명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야곱은 지난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가족의 장자권과 축복을 훔쳤는데 여기에는 가족의 유업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20여년 동안에 자기 형 에서는 자기 동생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자기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집에서 20년 간을 외유했던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형 에서의 400여명의 군대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가졌던 원한은 대단하였다. 자기의 축복과 장자 권과 가족의 유업을 한순간 앗아간 일을 생각하면 동생을 죽이고자 칼을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기 자신의 잘못이 들어 나고 야비하게 처신하고 행동한 자신의 일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습니까 ? 형의 분노를 피해 20여 년 간에 외삼촌 집에 가 있는 것은 더욱 형의 분노를 사게 한 일이며 자신의 잘못을 입증한 사건이다. 그러나 야곱은 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접한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우애의 중요성
시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한집에 살면서 불목한 일은 죽음이 낳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형제가 화목한 일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 자신의 시정(詩情)을 표현한 일은 높이 평가할 일입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았을 때 에서의 군대가 보이는 일은 어찌하겠습니까 ? 아무리 방향을 바꾼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고 가리워도 보이고 감아도 보이는 에서의 군대 400명이 아른거립니다.
에서의 군대를 바라 보게될 때 야곱은 얼마나 불안합니까 ? 괴로웠을까요 ! 한번 잘못을 저질렀기에 바꿀 수도 없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눈앞에 현실로 400명의 무장한 군대가 버티고 있습니다. 참으로 괴롭고 마음 아픈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 누구를 원망한단 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자기 자신의 잘못을 탓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입니다.
대적할 수도 없습니다.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이고 막강한 힘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피한들 수고만 할 뿐입니다. 이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이 같은 사건들이 비단 지나간 몇 천년 전에 야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내 잘못으로 불목하여 화평하지 못한 사건들이 있습니까 ? 형제간에 불목하여 피차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 많은 시간 속에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여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어찌 하렵니까 ? 야곱이 생각한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야곱의 선택한 방법을 보시기 바랍니다.
Ⅱ. 야곱이 눈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창 32:22-3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감지한 나머지 열심히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하는 일로 하나님을 만나게된 것입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한 야곱입니다. 형과의 화해는 어떤 선물로 해결하려했지만 진정한 해결의 실마리는 하룻밤에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된 것입니다.
변화산하에서 되어진 사건
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먼저 하나님을 만남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한 야곱입니다.
다리오 왕때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기 이전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게되면 자신에게 어떻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알았다. 기도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다니엘의 신앙은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야곱은 자기형이 사 군대 400인을 거느리고 그토록 많은 나날동안에 자기동생을 제거하려 칼을 갈았습니다. 야곱은 이같은 사실을 감지한 야곱은 기도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으로 한판에 약복 너울에서 하나님과의 담판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주효가 되어 자기 생영을 찾고자 찾아온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한 일이 야곱의 다른 노력에 의하여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역사로 분에 찬 형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이웃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증오와 미음에 대상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우리들은 인간의 화해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만 하나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은 순간일 뿐이요 하나님의 은혜는 후유증이 없는 아름다운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Ⅲ. 형님의 얼굴을 보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야곱은 기도 후에 자기형 일행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담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먼저는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히 두려운 가운데 안절부절하는 괴로움속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들을 담대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한 후에 이들을 바라보게될 때 대수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보게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어려움들이 에서의 군대처럼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나게되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웅성 웅성대며 키 큰놈이 있고 작은 놈들이 있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는 놈도 있을 것입니다. 헛기침을 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놈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작난기 있는 군대를 바라보았을 때 너희들이 아무리 야단 법석을 떤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간의 생사와 화복을 다스리는 분임을 만난 야곱은 겁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출발하기 이전에 기도 가운데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군대를 만난후 야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다시한번 약속을 확인한 약속입니다.
에서의 군대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존재한 사실을 아는야곱은 두러움이 없이 자기 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향하여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형님의 얼굴을 외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한 말씀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보게 된 말씀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형님이 분하고 억울한 세월을 보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해 만남이 이루워질 때 문제 해결이 됩니다.
야곱은 큰마음을 먹고 고향을 향하여 자기 권속들과 함께 돌아오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것은 형에서가 사 군대 400인을 거느리고 온 것입니다. 야곱을 시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 야곱은 참으로 군사를 바라볼 때 심히 두려웠습니다.
2) 야곱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3) 기도하고 형님을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되었습니다.
문제해결이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이 한순간 해결되는 순간입니다. 하늘을바라보는 야곱의 정직한 신앙을 본 받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백정에게 형제라고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독교가 전파될 당시만 해도 백정은 천민이어서 어른이 되어도 보통 아이들이 하대를 하던 때였다. 그런데 백정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선교사는 바로 백정에게 세례를 주고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는 야만의 종교요, 서양 선교사는 예법을 모르는 야만족이며 예배당에는 상놈들이나 갈곳이지 양반은 갈 곳이 못된다고 비난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다른 지역 교회들은 모두 활발하게 움직이고 크게 발전하는 데 비해 영주나 풍기읍 교회는 한동안 도무지 발전을 못했다. 이와 같이 지금도 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비슷한 사건들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제도적으로 전통적으로 아직도 인간과 인간사이에 높은 장벽이 가로 막혀 있어 분노와 미음으로 지금도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부지런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통쾌하게 해결 학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에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눈에는 자기 생명을 뺏고자 하는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하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찾는 사람
창 33: 1-10
깜깜한 밤에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습니다. 희미한 불빛이 땅 바닥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때 어떤 사나이가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열심히 찾아보지만 그가 찾는 물건은 거기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 행인(行人)이 무엇을 찾는 사나이에게 말을 합니다. “무얼 그리 열심히 찾으시오?” “제 방의 열쇠를 잃어버렸습니다.” 행인이 사나이에게 말합니다. "분명히 여기서 잃어 버리셨소?" 그러자 사나이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열쇠를 잃어버린 곳은 저기 저곳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칠흑 같이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행인이 어처구니없어서 묻습니다. "저기서 잃어버린 열쇠를 여기서 찾다니요?" 그러자 이 사나이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합니다. "거기에는 불빛이 없으니까요."
여러분, 인간의 불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찾아 헤맨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또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애쓴다는 데 인간의 불행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성공과 실패, 역경의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뒤늦게야 진정으로 행복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까지 헛되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프리드만 교수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해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가 이렇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고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염세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불평이 그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낙관적인 친구가 물위를 걸을 수 있는 개를 발견하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는 비관적인 친구에게 그 개를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아무리 냉소적이라 해도 이 개를 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놀라운 개의 능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 여겨 친구를 데리고 오리사냥을 갔습니다. 이 낙천적인 친구가 총을 쐈고 오리는 호수 반대편에 떨어졌습니다. 개는 물위를 타박타박 걸어가 오리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여주며 비관적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개가 물위를 걸을 수 있다니 놀랍지 않나?" 그랬더니 그 친구가 대답합니다. “글쎄, 저 개는 수영도 못하는 모양이지?” 어떤 일에도 기뻐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낙원에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소가 소유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행복하려면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오래간만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자기 살아온 이야기며, 가정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녀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이 말합니다. “밤낮 돈 드는 일 밖에 없네. 처음에는 자전거 사줬더니 조금 있다가는 자동차를 사달라고 난리야. 눈만 뜨면 자식들이 그저 돈만 요구한다네. 자네는 어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에게도 자네같이 요구하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네. 내 아들은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네. 죽은 내 아들은 내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단 말이야." 사랑할 대상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셋째,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일은 죽도록 하면서도 헛된 일, 마지못해서 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합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그 일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야곱이라는 사람은 한 평생 축복을 얻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고, 피나는 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 추구한 행복>
첫째, 연애입니다.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창29:20). 야곱은 한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인 라반은 그를 속여 사랑하는 라헬 대신 그의 언니 레아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야곱이 항의합니다. 그러자 라반이 말합니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창29:26-27). 그래서 야곱은 또 다시 칠 년을 더 머슴살이하여 도합 14년을 봉사합니다. 야곱은 참으로 로맨틱한 연애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한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여 그 사람을 얻기 위하여 14년 동안을 머슴살이했다는 일 말입니다. 아마 이런 뜨거운 러브스토리는 없을 것입니다. 7년씩 두 번, 14년이라면 청춘을 다 바쳤을 것입니다. 야곱은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만 얻으면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중국에서 태어나 상해에서 결혼을 하신 분인데, 한 50여 년쯤 전의 권사님이 결혼하시던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여자 기숙사로 찾아오는 총각 하나가 있었는데, 날마다 찾아와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하루는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날인데, 그날도 또 찾아왔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고 "내려갑니다"해 놓고는, 그 때부터 천천히 화장하고 느릿느릿 준비를 하면서 무려 두 시간이나 시간을 끌었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나 보자"했더니, 청년은 그 긴 시간을 요지부동으로 서서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면서 말입니다. 보다못한 한 방의 동료 친구들이 채근을 합니다. "얘 그만하면 됐잖니? 이젠 결혼해 줘라." 그래서 내려가 만나주고, 끝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눈 내리는 창 밖에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야곱은 칠 년씩 두 번, 도합 십사 년을 기다린 끝에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많은 가족입니다.
많은 가족을 거느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레아와 라헬, 그리고 빌하와 실바, 이 네 여인을 아내로 두었고, 거기에다 무려 열 두 명의 아들과 디나라는 딸까지 두었습니다. 모두 열여덟 명의 대 가족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말에 행복하게 사는 조건으로 '부귀다남'(富貴多男)이라 하여 부하고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자식은 곧 노동력이었고, 많은 자식을 두면 그만큼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야곱은 아내도 많이 두었고, 또 자식도 많이 낳았던 것입니다.
람세스라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있습니다. 고대 전쟁사에서 알렉산더와 더불어 불멸의 전략가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여자에게서 약 200여 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와 닮은 자식들을 많이 두는 것만이 내부의 음모를 견제하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많은 물질입니다.
야곱은 많은 물질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 하면, 창세기 32장에 형 에서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형에게 주려고 따로 구별한 양과 염소와 약대와 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창32:13-15). 이것이 형에게 줄 선물의 양이었다면, 자기 자신의 몫은 얼마나 더 많았겠습니까? 야곱은 20년 동안 하란에 거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뭐니뭐니해도 행복이란 돈이 많고, 재산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있어야 나이가 많아서도 손자들이 반가워한다면서요? 돈 없는 할머니 반가워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까 넉넉히 돈을 쥐고 있어야 일년에 한번이라도 아이들이 찾아오지 그렇지 않으면 효도 받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돈이 그만큼 소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저 목숨을 걸고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알려진 세계적인 거부 존 록펠러는 솔직히 고백하기를 "나는 천만 불을 모아 보았으나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 자동차의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도 "돈은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젊어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할 때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벤자민 플랭크린(B.Franklin)은 말하기를 "돈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돈은 공허를 메우기보다는 차라리 또 하나의 공허를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돈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그가 원했던 것은 모두 얻었습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은 다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녀도 가졌고 사랑도 가졌고 물질도 가졌고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평안이 없습니다. 두려운 마음이었고 쫓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그가 나이 많아서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야곱은 이렇게 모으느라고, 이렇게 버느라고, 이렇게 잘 살아 보느라고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자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행복의 참된 요소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고향땅으로 돌아갑니다. 20년만의 귀향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금의환향과도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형 에서가 자기가 고향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400명의 가병(家兵)을 이끌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소식을 듣고 불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난 날 자기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계획을 세웠고 또한 행렬을 나눕니다. 한 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 쪽은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형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그래도 마음엔 두려움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는 얍복강 나루에 홀로 남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행복>
첫째로,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자기의 의자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해 왔습니다. 자기가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재산도 모았고, 사랑하는 여인 라헬도 얻었고, 그리고 많은 자식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간섭과 구속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현실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 앞에, 지금까지 자기가 애써서 모으고 이룬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힘으로도, 자기의 재주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그는 여기서 지금까지 자기가 얻고 성취한 것들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드디어 형 에서와 조우를 하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창33:5상). 그러자 야곱이 대답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창33:5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객지에 나가서 고생하고 수고한 끝에 성공하여 이렇게 대 가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듯 싶은 야곱인데,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거듭 ‘은혜’를 강조합니다. 본문 8절에서는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는 입만 벌렸다하면 ‘주의 은혜’ ‘주의 은혜’합니다. 지금까지 자기 집념과 의지로 살아왔던 야곱인데,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을 뵙고 나서 그는 철저히 ‘은혜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인생, 즉 성실 인생이 있습니다. 성실 인생은 비유컨대 노를 젓는 배와 같습니다. 이 배는 얼마나 멀리 가고 빠른가는 내가 얼마만큼 젓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성실이 그런대로 그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인생입니다. 그런가하면 똑같은 배지만 돛을 단 요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바람이 불 때, 바람을 받아서 가기 때문에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지 않아도 쏜살같이 힘차게 바다를 가르며 나아갑니다. 이 요트 같은 인생을 은총의 인생입니다. 성실만 가지고 인생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화평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일단 도망가기도 했고, 또 오늘 와서는 예물을 보내고, 만일에 형님이 쳐들어 오면 이리저리 도망가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래도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고 합니다. 와서 자기를 죽일건지 살릴 건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남아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전에는 기도제목이 많았을 것입니다. ‘건강주세요, 물질주세요, 자녀주세요’했겠지만 오늘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형님과 화목하게 해주세요.’ 어쨌든지 형님과 화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오로지 화평, 그 하나만을 위해서 밤새 기도합니다. 제발 형제간에 서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만은 없기를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강을 건너서 형님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말씀을 잘 보십시오. 20년 만에 형 에서와 아우 야곱이 만나고 있습니다. 원수되어 20년 만에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원수가 아닌 혈육으로 만나게 됩니다. 20년 동안 원수로 지내다가 이제야 형제로서 만나 화목하게 되는 그 감격적인 순간을 본문은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오니라”(창33:4)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야곱은 너무너무 감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33:10). 형의 얼굴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설을 맞아,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게 도리 텐데, 좋은 마음으로 고향을 찾고, 가족 친지들을 만났다가, 아무 일도 아닌 사소한 일로 가족간에 서로 다투고 상처를 입히고 합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과는 다툴 일도 없는데 정작 가장 가깝고 가장 친밀해야 할 사람들끼리 사소한 문제로 서로 갈등과 아픈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여러분, 이번 명절에 어떻게 형제들을 만나시겠습니까? 야곱은 20년을 서로 원수처럼 여겼던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더니, 형의 모습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명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년 만에 형님과 만나는 이 자리에 어떤 경쟁도 불신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아가 엎드려 일곱 번 절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져, 모나고 강퍅하던 에서의 마음도 녹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것 같사오며”(10절)라고 고백합니다. 왜 얻고도 기쁨이 없고, 왜 성취하고도 행복이 없고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받은 그 은혜를 가지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