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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배 수사연구관은 비록 은퇴했지만 아직도 사건현장을 누빌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유사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시작한 ‘강력반 수사백서-잊을 수 없는 그 사건’(수사백서)이 이번 호로 100회를 맞았다. 제1화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으로 시작한 수사백서는 제99화 ‘혈액형 오판이 빚어낸 일가족 참극’까지 이르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강력사건들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그동안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 수 있냐’며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실제 사건이 맞나. 소설 아니냐’ ‘흉측한 사건을 또 다시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며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일부는 어이없게도 기사 속의 가명을 왜 자기 이름으로 썼냐며 트집잡기도 했다. 때로는 사건 피의자와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 일선에 있는 수사관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제82화부터는 경찰청의 김원배 범죄수사연구관의 협조로 사건을 더욱 세밀하게 다룰 수 있었다. 수사백서 연재 100회를 맞아 특집으로 실무수사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 연구관의 인터뷰를 싣는다.
2005년 6월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계 사건반장을 끝으로 30여 년의 경찰 생활을 마친 김원배 수사연구관(61)은 퇴임 이듬해인 2006년 8월부터 경찰청 범죄수사연구관으로 임명돼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현직에 있었던 2004년 9월 이미 수사연구지에 ‘연쇄살인의 특징과 수사’라는 연구결과를 발표, 현장경험과 노하우를 총정리한 바 있는 김 연구관은 현재 잦은 출강과 집필활동 외에도 경찰청 강력범죄수사지원시스템(VISS)을 개발, 수사기?전수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김 연구관은 서울청 근무 당시 전국에서 발생하는 강력사건(살인 강도 강간 방화)을 보고받아 취합, 분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 연구관은 80년대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강력사건들에 대한 모든 수사 기록과 자료들을 갖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연구관은 80년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7000여 건의 살인범죄를 일일이 분석하여 57개의 수사실무유형으로 분류하고 수사기법들을 정리, <한국의 살인범죄 실태와 수사>라는 방대한 수사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치정, 취재, 원한, 성적 욕망, 우발적 범행 등 범행동기는 무척 다양합니다. 피의자와 피해자의 연령과 직업, 성별도 사건마다 제각각이죠. 범행발생 장소도 학교 주택가 노상 야산 등으로 나뉘고 범행 시간대나 범행에 걸리는 시간도 다 달라요. 사체처리 방법이나 범행에 사용된 도구, 살해방법 등도 일일이 구분했죠. 심지어 피의자의 외모 성격 학력 전과 가족관계 혼인유무 정신질환여부 공범유무 범행 후 행적까지도요. 이런 식으로 분류해보니 범죄의 틀이 잡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통상적으로 성범죄는 젊은 여성을 상대로 이뤄진다고 보기 쉬운데 최근에는 60이 넘은 노인까지 성범죄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졸이상의 고학력자나 엘리트 피의자가 많은 특징도 드러났고 범인의 경우 장남일 땐 범행 후 부모 산소를 주로 찾았고, 20~30대의 경우 친구집이나 여관을, 40대는 내연녀의 집을 전전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통계적으로 활용하면 용의자를 추정하거나 추적하기가 훨씬 쉬워지죠.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여아의 성을 목적으로 한 범죄는 여성과의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성적·신체적 결함을 가진 40대 독거남에 의해 많이 발생했습니다. 가족간 변사사건이 발생하면 보험 여부를 먼저 살펴보는 것도 오랜 수사경험에서 나온 노하우죠. 범인 진술과정도 기록으로 남겨두는데 조사과정에서 나오는 뻔뻔한 거짓말도 다 거기서 거기예요.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수사연구서가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책에는 무려 7000건이 넘는 강력사건들이 당시 수사기록과 함께 실려 있는데 언론에는 차마 알려지지 못한 사건의 배경 및 뒷얘기, 수사과정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범인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수사관으로서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까지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를 들면 1991년 여의도 광장 질주사건의 경우 ‘범인 김OO는 선천적 약시로 한 직장에서 한 달 이상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용주들을 원망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는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쏟았으나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약시로 낳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만큼은 거두지 않았다’라고 적었고 93년 10월 ‘박수무당 살인사건’에서는 ‘게이들 간 치정살인이라는 이유로 당시 수사관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지만 동성애자들이 등장하는 범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성향을 우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성적 성향을 가지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동성애 범죄는 더욱 음성화되고 피해가 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김 연구관은 사건분석을 위해 ‘연극적 상황’을 사건에 투시하는 기법을 활용, 주목받고 있다.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68학번인 김 연구관은 한때 연출가를 꿈꿨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수사백서 1화-86년 서진룸살롱 살인 편./수사백서 50화-강남 가라오케 사장 피살 편./수사백서 99화-혈액형 오판 내가 배운 지식을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다가 연극유추분석기법을 개발하게 된 거죠.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연극적 상황으로 생각해보는 거예요. 사건에 등장하는 피의자와 피해자들은 배우들이고 사건현장은 연극무대가 되는 거죠. 사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형사들이 현장에 투입돼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범행이 일어났을 땐 형사들은 그 현장에 없었잖아요. 하지만 연극유추분석기법을 사용하면 범죄 현장에 없었더라도 범죄의 재구성이 가능해집니다. 형사는 피의자와 피해자, 연출가 등 다양한 입장이 돼보는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지곤 합니다. 범인들이 ‘어떻게 알았냐’며 깜짝 놀라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연극유추분석기법을 사용해 해결한 사건의 일례로 김 연구관은 1982년 송파구 여자면도사 살인사건을 들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사진전에 여러 차례 입상한 바 있는 보일러 배관공이 ‘예술적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단골 여자 미용사를 상대로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벌인 사건이었다. ‘사람이 실제로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해야겠다’는 생각에 여자면도사에게 청산가리를 먹이고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었다.
당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났던 남성이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살인의 증거가 없었다. 용의자의 집에서 사건 당일 여성이 찍힌 필름이 발견됐지만 실제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이라고 생각한 수사관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 연구관은 사진에 찍힌 피해자의 모습들이 단순히 연출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피해자의 입가에 있는 구토자국이나 전율하는 모습, 근육이 굳어가는 과정, 체모의 모양과 피부 색상의 변화, 리얼한 표정 등은 분장이나 연출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결국 김 연구관은 전문가에게 사진에 대한 정밀감정을 부탁했고, 그 결과 ‘사람이 실제로 죽어가는 모습’이라는 충격적인 소견을 듣는다. “연출해서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고 우기던 범인으로부터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찍고 싶었다”는 실토를 받아냈음은 물론이다.
당시 범인은 사진에 광적인 취미를 갖고 있던 자신의 성향과 촬영된 사진만으로 자신의 엽기적인 행각을 알아차릴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김 연구관은 “사진에 실린 리얼한 장면보다 나를 더욱 소름끼치게 만들었던 것은 눈 뜨고 보기 힘든 상황을 앞에 두고 셔터를 눌러댔을 범인의 행동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실제 범죄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30여 년의 형사생활 중 김 연구관의 기억에 남는 일들은 무엇일까.
80년대 초 시흥에서 20대 남자가 잔인하게 찔려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도무지 해결이 안되는 거예요. 집에도 못 들어가고 수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시내 음식점에서 범인을 만나 설득 끝에 같이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갔었죠. 또 젖먹이 아들을 둔 30대 가장이 생활비 때문에 인삼을 훔친 사건이 있었는데 얼마 후 자수해서 같이 경찰서로 간 적도 있죠. 수사팀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못해 자수를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우유값이라도 쥐어주는 건데 그걸 못해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일선 경찰서에서 강력팀장으로 근무할 때는 강도에게 피습당한 슈퍼마켓 여주인이 몸에 회칼이 꽂힌 채 경찰서로 기어 들어온 적이 있어요.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던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 꿈에 매일같이 나타나 ‘범인 좀 잡아달라’고 어찌나 간절하게 호소하던지…. 결국 사건 6일째 되는 날 범인을 검거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줬던 일도 있습니다. 일선 현장에서 동료들의 안타까운 죽음도 많이 봤어요. 특히 퇴직을 앞둔 당시 동대문 경찰서 형사반장과 서부경찰서 형사 2명이 범인의 피습으로 사망했을 때는 밤새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김 연구관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자신이 현직에 있을 동안 생겼던 미제사건이다. 김 연구관은 미제사건이 경찰에게는 더없는 치부지만 그냥 덮어둘 문제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는 데까지 한다고 했는데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이 있었어요. 사실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미제사건도 수두룩합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수사관이 ‘포기’하고 덮는 순간 이는 진짜 미제사건으로 남게 돼요. 억울하게 죽어간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현직을 떠난 지금도 제가 미제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에요. 요즘 전 미제사건들만 모아서 체계적인 분석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면 ‘왜 해결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올 거 아닙니까.”
비록 은퇴했지만 아직도 사건현장을 누빌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 연구관은 인터뷰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느 시대에나 범죄는 발생했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인간이 어울려 사는 이상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수사관으로서 중요한 것은 범죄가 그 시대 문화에 편승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보험금 범죄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원정범죄, 노인성범죄와 같은 새로운 유형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특히 날로 지능화되는 화이트칼라 범죄와 무동기 범죄 혹은 묻지마 범죄에 대해서는 새로운 수사기법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범인보다 한발 앞서 나갈 때 비록 범죄를 막을 수는 없어도 줄일 수는 있겠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