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옥동네’라는 곳이 있는가?
이 말은 실제로 그러한 동네를 가상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상징적인 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대구에 그런 동네가 실제로 있었다. 말을 듣고 나면 아마도 대부분의 도시에 그런 동네나 부락이 존재했었다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 소설 속의 그 동네는 대구의 원대동(지금은 그 일대를 ‘고성동’이라고 하는 것 같다.)에 있었다. 팔달교에서 경부선 철로를 너머 시내로 들어오는 구 도로(지금은 그 도로가 폐쇄되다시피 되었다.)변 현재의 달성초등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 동네는 현재 아마도 대구KT고성 빌딩이 있는 자리에 대구방송국이 있었다.
그 대구방송국이 개국될 당시(일제강점기 말) 방송국 직원의 사택으로서 왜식 주택 단지를 조성한 곳이 바로 왜옥동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동네를 와야마찌[和屋町]이라고 불렸다고 하는 곳으로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말로 직역한 것이 ‘왜옥동네’일 것이다.
대충 20여호의 꼭 같은 모양의 왜식 단독 주택을 반듯하게 줄 지어 조성한 이 동네의 주민들(왜인 방송국 직원, 일부 서울 쪽에 본가를 둔 조선인 직원 포함)이 해방과 함께 버리고 간 주택들을 미군정이 적산(敵産)으로 몰수 관리하다가 연고자 위주로 다시 불하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방송국 직원들에게 일부를 우선 배정하고, 거기 살던 일본인이 거느리고 있던 조선인 연고자가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았음을 확인하면 그들에게도 우선 배정했다. 그럼에도 몇 채가 남자 대구 거주자로서 무주택 언론인과 무주택 목사에게도 무상 불하했는데 그 덕분에 달구신보 편집국장 황현준도 한 채 불하되는 혜택을 받았다.
집 구조는 남향이면서 동서로 일(一)자 형으로 된 건조물로 방 세 칸, 마루와 변소가 한 칸을 차지해서 네 칸집 구조인 셈이다. 세 칸의 방들 중 동쪽 끝방이 안방, 서쪽 끝방이 건넌방, 가운뎃방 등이다. 그런데 가운뎃방은 부엌과 함께 남북으로 이어져서 한 칸을 이루고, 나머지 한 칸은 가운뎃방과 건넌방 사이에 마루, 현관, 변소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개의 방은 모두 다다미 방이다. 건물의 동쪽 벽과 남쪽은 온통 유리창으로 두르다시피 되어 있다. 본채 뒤 쪽에 따로 된 건물로서 창고가 있었다.
동네는 다섯 채씩 한 줄로 넉 줄로 되어 있었는데, 두 줄이 한 단지를 형성해서 두 개의 단지를 이루고 그 사이에 소방도로가 있었다. 이 단지들 동쪽에 이웃하여 자리한 주식회사 남선메리야스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을 동네 사람들은 ‘다오루 공장’이라고 불렀다. 타월과 양말, 그리고 윗도리 속내의가 되는 메리야스를 생산하고 있었다.
단지의 서쪽에 팔달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국도를 동네 사람들은 ‘행길’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큰길이라는 뜻으로 ‘한길’의 변한 말일 것이다.
이 왜옥동네 주위에는 대부분 초가로 된 조선인 민가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해방 공간의 우리 민족은 마치 이 왜옥동네의 주민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 동네 주민은 대체로 인텔리 계층이었다. 신문사 편집국장, 방송국 직원, 학교 교사, 목사, 약국 등. 그러나 그들 대부분 주민이 태어날 때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성장하면서 일제의 제도하에서 왜식 교육을 받았고, 일부나마 일본으로 유학까지 가서 일본 교육을 받아 왜식 사고방식으로 완전 감염된 상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을 거의 온전히 적시고 있는 왜색 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듯 독립국가의 자주적 한민족의 의식으로 살아가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군정기에 민족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회복하고 지키고 선양하는데 있어서 어린이로부터 청소년과 청년들이 민족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반도 남과 북 삼천리 강산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거기 터잡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왜색 문화라는 것은 하나의 굴레이며 치욕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바로 이러한 굴레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중요한 의도로 보아주기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