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을 반환한 총리
손 원
옷장으로 쓰고 있는 방구석에서 잡동사니로 가득 찬 정리함 하나가 눈에 띈다. 사인펜, 볼펜, 클립 등이다. 아쉬운 대로 하나씩 꺼내어 쓰기도 하나 그냥 버려도 아깝지 않은 폐물들이다. 부조 봉투를 쓰려면 싸인펜 상태가 좋아야 하기에 가끔 문방구에 들러 새것을 사기도 하여 정리함이 계속 불어 조금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막상 버리려니 망설여진다. 그것 중에는 직장생활 때 모은 것들도 다수 있어 작은 기념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무용으로 지급받은 소모품은 어느 정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버려진다. 필기구 하나도 엄격히 공물이다. 재산적 가치가 있는 물품은 폐기처분도 일정한 절차에 따르는 것이 공물 관리의 원칙이기도 하다.
'타게 엘란데르' (1901~1985)는 스웨덴의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1946년 45세부터 23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그는 재임 중 11번의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마지막 선거에서는 스웨덴 선거 사상 처음으로 과반을 넘는 득표율로 재집권하여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나기도 했다. 엘란데르가 퇴임한 후 어느 날, 부인은 정부 부처 장관을 찾아갔다. 그녀의 손에는 한 뭉치의 볼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장관이 반갑게 맞이하며 방문 이유를 묻자 볼펜 자루를 건넸다고 한다. 볼펜에는 ‘정부 부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남편이 총리 시절 쓰던 볼펜인데, 총리를 그만두었으니, 이제는 정부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접하고 보니, 나의 경우가 생각난다. 공직에 있을 때, 부서 사무실에는 사무용품을 보관하는 공용 캐비넷이 있었다. 그 캐비넷 속에는 볼펜을 비롯한 필기구, 가위, 호치키스 등 각종 사무용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대량 구입한 사무용품으로 필요시 꺼내 사용했다. 물품이 떨어지면 신품으로 채워지기에 볼펜하나도 알뜰히 사용하지 않았다. 아직 사용할 만한데도 새것을 꺼내 쓰다 보니 개인 서랍에는 중고 사무용품이 그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리를 옮기면 후임을 위해 서랍 속을 깨끗이 비워주어야 했다. 중고가 된 각종 사무용품은 버리기는 아깝고, 재사용하기는 싫어 모두 쇼핑백에 넣어 집으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옮겨 간 자리의 서랍에는 물품 담당 직원이 새것들로 채워 주어서 쓰던 사무용품을 재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생각나름이다. 그 자리에서 근무하면서 남긴 낡은 사무용품은 누구에게 주어도 환영받지 못했다. 소모품, 폐품 취급을 하기에 소지한 자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었다. 스웨덴 총리의 일화를 떠 올려보니 나의 처신이 새삼스럽다. 공짜로 주어지는 사무용품을 알뜰히 사용했는가? 쓸만한 물품을 버리고 새것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프린터 용지 이면사용을 얼마나 했던가? 아끼고 절약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부서원들로 확대하여 고가의 사무용품에 대해서 생각이 난다. 개인적으로 탁상용 컴퓨터 PC가 지급되었다. 규정상 내구연한이 5년이지만 10년을 사용해도 일하는 데 별문제기 없었다. 하지만 5년만 지나면 교체를 해 준다. 더 한 경우는 3년도 안 된 PC를 부서별 일괄 폐기하고 교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사무환경에 맞게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사무자동화와 사무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어 성능이 떨어지는 기기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첨단 기기일수록 자주 교체하는 것이 업체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도 한다. 생산업체는 기술혁신과 공급물량을 늘릴 수가 있고, 소비자는 업무혁신으로 효율을 높일 수가 있다. 모든 일은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낭비를 줄일 수는 없을까? 제때 신제품으로 교체할 수도 있고, 몇 개의 부품만 교체하면 새 제품 못지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한지 고민해야 한다. 한 직장에 수십 명 수백 명의 PC에 관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지도자의 행위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된다. 특히 총리의 경우는 파급력이 훨씬 클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비범한 스웨덴 총리의 공물에 대한 인식. 재직 시 사용했던 볼펜을 반납하는 것은 쇼킹할 정도다. 빈손으로 취직하여 반평생 봉직하였고, 퇴직 후 연금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직장을 떠나면서 무엇을 남겼을까? (2023. 3. 15.)
첫댓글 스웨덴 총리의 철저한 공용물에 대한 인식은 본받을 일입니다. 내가 산 물건이 아니어서 물건을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절약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나는 공직에 있을 때 어떻게 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나름대로 사무 용품을 아꼈다고 생각하지만 미흡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