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22
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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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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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K5M3BzAp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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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은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주님이십니다!>
올봄에 심은 무화과 묘목들을 돌봐주다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한 그루 비유가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과일 나무를 심는 밭주인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하겠습니다. 묘목이 빨리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이겠지요.
저희도 매실나무 밭에 무화과나무 열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름 여기 저기 묘목 심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물도 듬뿍듬뿍 주고 거름도 넉넉하게 주며 어서 빨리 묘목이 자리 잡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그루만 남기고 나머지 8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아있는 두 그루에 지극정성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양질의 퇴비도 추가로 뿌려주었습니다. 무성해진 잡초도 제거해주었습니다. 정성 탓이었는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잎도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밭주인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실속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데, 결실이 없는 나무가 부지기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결실 없는 나무 중에 한 그루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재배인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장 7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우리 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한번만 선처해주실 것을 신신 당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하고 감싸 안아주실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장 8~9절)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셔서, 배은망덕과 고집불통의 명수인 우리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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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90i2xBIw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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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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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3,1-9 :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올바로 서있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항상 회개하는 삶으로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주인은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7절)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앴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 나무는 남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 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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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은 ‘행위와 결과’, ‘인과응보’, ‘상선벌악’이라는 분명하고 명확한, 그래서 기계론적이기까지 한 신앙의 논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면 ‘상’과 ‘복’을 받지만, 그러지 않으면 ‘벌’과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생명을 잃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는 등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죄의 결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손에 죽은 사람들, 실로암의 탑에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이 유다인의 눈에는 죄의 결과로만 비쳤을 뿐입니다. 나아가 죽지 않은 자신들이 그들보다 의롭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행위와 결과’라는 도식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려는 유다인들에게 두 번이나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의로움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죄를 많이 지었는지, 죄의 대가로 벌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 곧 회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일까요? 먼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특별히 큰 죄는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 하느님 말씀보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이야기에 귀를 더 기울이는 것,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의 이름은 잊고 살아가는 것 ……,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에서 하느님을 조금씩 밀어내는 행동들이 죄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과 귀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동안 하느님을 향하며 살아가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마음에 조금씩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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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의 저자인 배철현 교수의 강의 ‘나는 누구인가?’를 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렵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나는 주어진 삶을 극복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상황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영웅은 큰 업적을 이룩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웅은 용기를 가지고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다신교를 믿던 인류에게 일신교를 이야기했던 사람이 있는데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과 히브리인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있다고 합니다. 아크나톤의 신은 태양신이며 태양이 모든 곳을 비추듯이 그 신은 풍성하게 해 주는 신이었다고 합니다. 유일신을 이야기했던 아크나톤은 그러나 이집트의 역사에서 기억되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모세의 신은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알고 있는 신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을 아픔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신이라고 합니다. 유일신은 다른 신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신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알아주고, 치유해 주는 신입니다. 다시 말해서 풍요롭게 해주지 못하고,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하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신의 속성은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거룩함에는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다름’입니다. 우리와 다른 특별함 때문에 그 앞에서면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매력입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에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름, 신비, 매력’은 신의 거룩함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모세는 신에게 묻습니다. ‘내 백성에게 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알려야 합니까?’ 신은 모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나로 있는 나다.” 모세의 신은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이사악과 함께 했던, 야곱과 함께 했던 신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도 하느님을 모세와 비슷한 방식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지진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천둥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은 떨림과 같은 바람 속에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침묵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 나 자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가 느꼈던 하느님, 엘리야가 느꼈던 그 하느님을 월트 휘트먼은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이야기합니다. 휘트먼은 시를 통해 각자의 활동이 그 차이를 초월해 하나의 본질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하나의 본질 속으로 융합되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질은 바로 시인의 자아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인류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내 안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시오.”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할 줄 아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어도, 어느 시간에 있어도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신앙의 꽃은 기쁨, 평화, 감사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꽃을 힘들고 지친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직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지금 하느님의 편에 있는지, 아니면 악의 그늘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서 나는 좀 더 겸손해 질 수 있고, 주님께로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 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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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주님께서는 나에게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며 부지런히 살라고 또 하루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회개의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였으나 삼 년째나 허탕을 친 주인이, 이 나무를 잘라 버리려 하자, 포도 재배인이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현재 내가 살아 있는 이 하루는, 튼튼한 나무로서 열매를 맺으라는 하느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회개하여 열매를 맺으라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며 부지런히 살라고 또 하루를 주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주신 하루를 힘차게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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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님]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많은 사고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 테러와 재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는 인도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기에 살아있는 우리들로서는 심각한 무력감에 빠집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됩니다. 왜 그런 일들이 생기나,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허무한 질문 앞에 우리는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액면 그대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보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될 것이다.”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무화과 나무의 주인의 심정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주인은 언제든지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나무는 주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주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 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무화과 나무가 주인이 자신을 언제라도 베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회개를 미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하리라, 내일 하리라 하는 것이지요. 참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결국은 못하게 되겠지요. 무화과 나무 주인이 마지막 기회를 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결국 잘려버리고 말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것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하게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참 어이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복음 말씀을 한번 다시 듣고 소리내어 읽어보아야 겠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든 어떤 모습으로 죽든 그 모든 것은 주인이신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셨고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실 주님 앞에서 내 생명의 가치를 잘 살아내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복된 날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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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무화과나무의 교훈>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 37?-100) 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20살쯤에 로마의 통치를 수용하는 바리사이파의 일원이 되었으나, 66년경 유다의 민족주의자들과 더불어 총독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독립정부 건립을 위해 갈릴래아 지휘관으로 싸우다 자신의 요새가 함락되자 로마군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Titus Flavius, 9?-79) 장군에게 투항하여 로마로 압송된다.
요셉은 감옥에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황제가 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자 예언의 공(功)으로 풀려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는 그를 총애하여 시민권과 연금과 토지를 하사한다. 감사의 뜻으로 요셉은 자신의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개명하고 역사 저술에 몰두한다.
플라비우스가 남긴 불후의 명작은 《유대전쟁사 7권, Bellum Judaicum》, 《유대고대사 20권, Antiquitates Judaicae》, 《아피온 반론 2권, Contra Apionem》 등이다. 이들은 당대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의 《유대고대사》는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년)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한 책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고대사 제18권을 보면,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5년경 가리짐산(고대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남쪽 13Km 지점에 위치)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빌라도 총독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소환되었고 그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이 소개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학살사건(1절)이 실제적인 사건인지는 의문스럽다.
실제로 있었다면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희생물로 짐승을 바치다가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빌라도의 두 가지 대량학살 사건을 하나로 뭉친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예수께서 달리 언급하시는 실로암 탑의 붕괴로 18명이 죽었던 사건은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쪽 성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이라는 샘물을 유다왕국의 히즈키야(B.C 716-687) 왕이 터널(히즈키야 터널)로 연결하여 성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저수장(貯水場)이다. 따라서 실로암 탑의 붕괴는 성벽의 붕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뜻하지 않게 당하는 참사는 모두 당사자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와 실로암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가 당시 그곳에 살면서 죽음을 면한 사람들의 죄보다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신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사건의 잘잘못이나 죄의 대소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들을 염려하여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5절)
회개의 촉구는 다음에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6-9절)에 잘 나타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들과 같은 죽음을 불사(不辭)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는 세 가지 주체가 등장한다. 이는 포도원에 심겨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와 포도원지기와 포도원주인이다. 비유를 풀이하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주인은 하느님을 뜻한다.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주인에게 포도원지기가 말미를 청한다. 말미는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와 포도원 지기의 정성과 거름이다.
포도원지기가 나무와 연대(連帶)하여 주인에게 말미를 청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창세 18,23-33)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소돔은 단 10명의 의인(義人)이 없어 결국 멸망하고 만다.(창세 19,24-25)
이와 같이 오늘의 무화과나무도 포도원지기의 도움을 받아 다음 철까지 열매를 맺을 기회를 가진다. 만약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소돔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말씀에는 여지없이 당장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바램이 담겨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회개하고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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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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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고,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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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회개의 기적!>
https://www.youtube.com/watch?v=HvX7H7A6FU4
며칠 전 함께 공유했던 두 냉담 자매님들께서 이번 목요일 저녁에 오셔서 면담성사하고 기쁘게 미사 참례를 하셨다고 합니다. 한 분은 10년 냉담하셨고, 한 분은 1년 냉담하신 분이신데, 미사시간 내내 울면서 미사를 드리셨다고 하네요. 예수님도 기뻐서 함께 우시지 않으셨을까 ㅎㅎ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회개의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의 기적'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회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을 언급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
하느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모시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에 관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될 것이고, 생명과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입니다.
'회개의 기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예수님과 우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를 보면 포도밭 주인이 삼 년째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주인님께 이렇게 사정합니다.
"주인님, 이 나문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13,8-9)
이 말씀은 나 자신의 회개와 너의 회개를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한번 더 회개의 기회를 주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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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괜찮은 세상을 위해 오늘 내가>
루카 13,1-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괜찮은 세상을 위해 오늘 내가>
나만 아니면
괜찮은 게 아니라
너도 아니어야
괜찮은 거야
그러니
괜찮은 세상을 위해
바로 오늘
난 움직이고 싶어
바로 오늘
난 움직일 거야
바로 오늘
난 움직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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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 소년 조니는 항상 학교 가는 길에 성당을 지나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성당 문을 살짝 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그리고는 미소를 짓고는 문을 닫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 소년은 나이가 들어서도 매일같이 성당 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예요. 조니.”
여름에 졸업여행을 가면서도 성당 문을 열고 하느님을 놀라게 하려는 듯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조니는 그만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죽기 바로 직전 조니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조니, 나야. 하느님!”
사후세계를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후세계를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인 세상에서 무조건 사후세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임을, 그리고 우리가 모두 빠짐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 땅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죽인 갈릴래아 사람들과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죄가 크고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삼 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그 다음 해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라고 포도 재배인이 이야기합니다.
열매가 바로 회개입니다. 지금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회개가 일어나야 죽음 이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회개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커다란 후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중요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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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시련. 그러나 선물도 있습니다.>
어느 원로 시인의 에세이를 읽다가 자신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여인으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이라고 적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눈에 반해 고백하고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여인에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심한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든 마음을 시로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그 시가 당선되어 지금까지 시인으로 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그 여인이 자신을 받아주었다면 그런 시를 쓸 수 없었을 테고, 문예지 등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좌절과 절망의 어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커다란 선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다면 반드시 선물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선물인지를 찾아보는 것, 지금의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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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의 때를 놓치지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마음이 흔들비쭉이다.’,‘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 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 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가 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요, 땀입니다.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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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회개는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서 있을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시편24,3-4ㄱㄴ)
지체없는 회개가 답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과 순수입니다.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에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회개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없이는 겸손도 순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주제가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살기 위해 회개를 통한 개방의 준비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회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입니다. 결코 미룰수 없는 즉각적 회개입니다. 아니 숨쉴 때 마다 회개입니다. 새벽에 깨어 일어나 카톡을 보니 지난 밤 조카 글라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신부님, 저희 어머님이 오늘 저녁 9시 37분에 선종하셨습니다. 장례미사에 대한 세부 사항은 확정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난 토요일 병자성사를 드린 99세 큰댁 둘째 형수님 윤여임 엘리사벳이 선종하신 것입니다. 약 3주전부터 미국에서 돌아와 병석을 지키고 있던 글라라 조카로 부터의 연락이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요즘도 계속되는 이런저런 죽음의 소식을 통해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죽음이 우리의 지체없는 즉각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참 자주 인용한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즉각적 회개요, 환상이 걷힌 오늘 지금 여기서의 본질적 삶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바로 오늘 복음 앞부분의 소주제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이게 한 일을 보고 받자 주님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나 이제나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일이나 죽음을 당하면 조건반사적 반응이 인과응보의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벌이 죄인들에게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옳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단편적 견해를 배격하십니다. 그리고 불행한 일에 모든 사람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 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 오랜만에 만난 자매로부터, ‘신부님은 늙지 않을 줄 알았어요!’ 들은 말도,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수도원에 살아도 늙네.’ 들은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공평무사합니다. 수도원에 산다고 병고나 불행이 비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참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불행한 일이나 죽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왜?” 하느님께 묻고 싶은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왜 착하게 살다가 살만한 데 죽게 되었나? 왜 젊은 가장이 암으로 처자식을 남기고 죽어야 하나? 왜 젊은 엄마가 아이를 낳다가 아이는 살고 자기는 죽어야 했나? 왜 어린 나이에 암으로 죽어야 하나? 결혼도 하지 젊은 처녀가 왜 유방암이나 자궁암으로 수술해야 하나?---끝이 없습니다.
얼마전 수도원 미사에 잘 왔던 60대 중반의 부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남편은 뇌경색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 의식불명 입원중이고 부인은 췌장암 수술을 했다 합니다. 부부의 자리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40대 아들이 미사에 가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좌우간 하느님이 어디 계신가? 도대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경솔히 이런 불행을 하느님의 뜻이라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마음 혼란할수록 침묵중에 일체의 판단을 유보하고 더욱 기도하며 열렬히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해야 합니다. 결코 하느님을 떠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요 기도뿐입니다.
그리고 즉각적인 회개로 나 자신을 추스르고 유비무환의 자세를,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을 굳건히 하며, 하루하루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베어내자는 주인에게 청하는 포도 재배인은 흡사 우리를 변호하는 예수님처럼 생각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기도요 사랑이요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그러니 살아 숨쉬는 동안 온마음으로 회개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해선 늦습니다. 유비무환,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지체없이 회개를, 사랑을, 기도를, 찬미를, 감사를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 연장되는 날들이요 이래야 후회함이 없는 복된 선종입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닙니다. 죄로부터 떠나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날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을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로마서의 가르침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은 육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자 성령께 활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본능적인 욕망의 육적 삶으로부터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진리와 선,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의 영적 삶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회개, 기도, 성사, 사랑등 모든 수행은 성령의 통로가 되고 이런 수행을 통해 성령은 우리 마음에 흘러 들어와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삶과 성령에 따른 영적 삶은 하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부단히 육적 삶에서 성령에 따른 영적 삶으로 전환시켜주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비를 바라는 이들 위에 머루르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제 그들을 먹여 살리신다.”(시편33,18-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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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루카 13,2)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3,4)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질병이나 사고, 장애나 죽음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온 이스라엘 백성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시려는 겁니다.
급작스레 닥친 사고나 병고를 추스를 틈도 없이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한꺼풀만 들추고 들어가면 우리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누구는 모두 알 수 있게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누구는 성인군자인 양 입을 싹 씻고 산다면, 과연 이기적이고 어설픈 우리의 죄에 대한 판단이 올바른 걸까요?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3.5)
그렇다고 복음 속 두 사건의 피해자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에게 닥친 변고의 원인은 우리 영역 밖의 일이라는 걸 겸허히 인정하고 다만 하느님께 맡겨 드릴 일이지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사실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깨달은 이는 타인의 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심판자의 자리에 자신을 함부로 앉히지 않지요.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로마 8,6)이지 가십이나 뒷담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자신이 억장 무너질 일을 겪어도 곧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넘겨 드립니다. 무지하고 편협한 자신의 심판이 스스로마저 멸망시킬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결과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겪은 비극적 사고와 억울한 죽음이 이 세상에서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회개하지 않는 이에게는 언젠가 닥칠 하느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어쩌면 우리에게도 "잘라 버리라"는 사형 선고가 진즉에 내려졌을지도 모릅니다만, 인내심 많고 자애로운 포도 재배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 덕에 지금 심판을 유예 받고 특별 관리를 받고 있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전투에 승리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로마 8,9)
회개는 육의 법에 끌려가는 존재를 돌려 세워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려 애쓰는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지속적 회개지요. 그래서 그의 영혼은 선과 악, 영과 육의 전투가 크고 작게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영께서 현존하시기에, 타인이 겪는 사건과 사고, 질병과 고통이 가십거리가 되기보다 연민을 자아내고 자신의 그것 또한 하느님을 만나는 지점으로 승화됩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9)
성찰에 무디고 회개에 더딘 우리에게 주님은 이 관대한 유예의 시간이 그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흘려만 들을 수 없는 경고지요. 특별히 거름이 주어지는 지금 여기서, 회개를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라는 촉구로 들립니다.
우리가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여도 열매를 맺으리라는 주님의 기대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용기를 내도 좋습니다. 어던 처지에서든 회개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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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H7xTekCt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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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골고루
번져가는
단풍의
절실함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계절의
참사랑이다.
그러나
한심한 핑계와
뼈아픈 회개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향한
연민과 회개에
있다.
이와같이
사람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회개는 참된
생명의
실천이다.
새로운 시작에는
언제나
회개가 있다.
회개 없이
정화는 있을 수
없다.
회개 하지
않는 것이
멸망이다.
회개의 만남이
복음의 참된
만남이 된다.
회개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생활 속의
회개가
참된 회개이다.
회개는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쁨이다.
다시 행복해지는
길은 회개에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으로
우리자신이
돌아가는 것이다.
관계의 파괴가
아닌 관계의
복원이 바로
회개이다.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회개의 진실한
여정이다.
생명의 바탕
생활의 토대가
바로 절실한
우리의
회개임을
주님께서
일깨워주신다.
새롭게 태어난
삶이 바로
회개의 삶이다.
회개의 삶은
참사랑을 향해서
가는 은총의
삶이다.
삶이 충만한 것은
회개가 있는
까닭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회개에
달렸다.
아름다워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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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흘러 넘치는
단풍의 물결이
바람 따라
쏟아져내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 안에
살고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를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의 여정과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항과 미움의
시간을 지나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함께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깊은 고통과
혼돈의 시간을 거쳐서
빛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는 우리의 과거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를 통해
참된 마음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의 삶 안에
구원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임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이
감사이며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애달픈 사랑이
바로 구원임을 믿습니다.
모든 삶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향한
오늘의 회개이며
구원이 오늘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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