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늘푸른언덕
2주 전 공영방송 KBS 2TV의 주말 예능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불후의 명곡]에서는 가창력이 뛰어난 초대형급 가수들을 초대하여 소위 왕중왕을 뽑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성악가 출신의 김호중 씨가 가황인 나훈아 씨의 테스 형을 편곡하여 커버한 놀라운 무대를 선보여 당당히 왕중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가 부른 테스 형의 가사 중에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최근 이 가사를 다시 한 번 소환하게 만든 사회 뉴스가 세상을 크게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초동 서이초등학교에서 발생한 한 젊은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자살 사건입니다.
이미 언론에서 연일 특종기사로 다루며 교육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사건 소식이라 그 내용을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서울 서초구 소재 서이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한 젊은 교사가 2023년 7월 18일 여름 방학을 불과 이틀 앞두고 교내 교보재 준비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건의 발생 장소가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이라 개인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자살 사건의 본질이 달라 이번 자살 사건은 교육계의 이슈로 접근합니다. 특히 이번 사건은 그동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학부모들의 극성스러운 갑질 논란의 의혹을 사고 있어 전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과 함께 국민적 공분을 한꺼번에 받게 된 사건입니다.
사건의 정확한 진위는 조사 과정에서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만 현재까지 정리된 이번 사건의 핵심은 대강 이렇습니다.
서이초는 학부모 민원이 너무 많았으며, 많은 수가 법조인 학부모들의 민원이었다.
고인의 학급에는 공격적인 학생이 있었으며 어느 날 고인의 학급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의 이마를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일로 가해/피해자의 학부모가 고인의 개인 휴대전화로 수십 통의 전화를 했고 (학폭 가해/피해자 부모의 민원) 고인의 번호를 알려준 학교 관계자는 없었다.
이를 계기로 고인은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려고 했다는 전언이다.
‘선생님 때문이야’라고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르는 학생으로 인하여 고인은 출근할 때 그 학생의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고도 전하기도 했다.
사고 전, 가해 학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와 고인에게 ‘애들 케어를 어떻게 하는 거냐,’, ‘
당신은 교사 자격이 없다.’고 발언했으나 평소 고인은 성실했고, 작년보다 10배 힘들다고 토로했다는 지인의 전언이 었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교육계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 시작하고 교육계 지도자들의 앞다투어 작금의 교육 현실에 대한 자성과 개선을 위한 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으로 이미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교육계에 진정한 교권이 확립되고 내 자식만이 소중하고 우선이라는 학부모들의 님비(NIMBY) 식 갑질 문화가 근절되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육 풍토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번 사건의 진위를 떠나 오죽하면 꽃다운 젊은 나이에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버리고 그 힘과 용기를 죽음에 이르는데 오롯이 써 버렸을까 생각하니 죽음 앞에서 많이 힘들었을 젊은 교사의 깊은 고뇌와 아픔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우선 똑같은 자식을 키우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느끼는 슬픔이 애닯습니다. 24년을 애지 중지 키워온 사랑하는 딸을 졸지에 잃은 고인의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느낄 슬픔의 무게에 눈물이 흐릅니다.
또한 한 때 같은 제도권 교육을 이수한 지성인으로서의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한편 이번 사건을 목도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게 됩니다. 작금의 우리 교육 현실을 돌아볼 때 과연 이러한 시대적 현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과연 옳은 것일까?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2주 전에 들었던 가수의 그 애절한 노랫말이 귓전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세상이 정말 왜 이런가요?
문득 우리들의 어린 시절 교육 문화가 새삼 그리운 기억되어 주마등처럼 다가옵니다.
감히 스승님의 그림자조차 밟기를 조심스러워했던 우리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육 환경하여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다소 촌스럽지만 순수했던 우리들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우리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엄격한 사제지간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들었던 스승의 회초리가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우린 그걸 우리를 위한 사랑의 매라고 애써 우겼던 그런대로의 순진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매 앞에서 스승을 원망하기보다는 그에 앞서 우선 나에게서 부족함을 찾았고 성찰의 시간으로 삼았던 미덕이 있었습니다. 설령 때론 스승의 매에 감정이 섞였든 아니면 진정한 사랑이 담겼든 그때는 그런 체벌과 훈육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교육풍토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 우리들 잘 되라고 하시는 스승의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툭툭 털고 다시 무덤덤하게 살아갔던 그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의 매질을 견디며 그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맷집도 키웠습니다. 우린 그런 체벌을 받았고 때론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인성이 결코 나빠졌거나 나쁜 길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 땐 그랬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 어쩌다 어른이 되고 보니 오히려 그런 사랑의 매를 주시던 스승들이 더욱 그립고 진정한 우리 삶의 잊지 못할 은사로 여겨집니다.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절을 보낸 우리는 아무 탈 없이 잘 자라 지금과 같은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려스러울 정도로 인성이 나쁘게 망가짐 없이….
그러면 오늘날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왜 그렇게 극성스러울 정도로 예민할까 생각해 봅니다.
우선 그 부모들 입장에서 마음들을 헤아려보니 십분 이해가 됩니다. 일단 오늘날은 한 가정에 1~2명의 자녀가 전부이고 당연히 그 아이의 교육에 올인해야 하는 부모들의 입장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인권도 소중해지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교육 문화입니다
이 땅에 민주화와 함께 교육계에도 그런 바람이 불어온 것입니다.
오늘날 부모의 마음은 모두 비슷합니다. 단 하나뿐인 내 아이를 온전하게 완성형 인간으로 양육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평등한 처우를 받고 오직 사랑과 칭찬을 먹고 자라는 온실 속의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모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교사도 어느 부모의 귀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자신들의 아이가 어쩌면 장래에 자신들이 갑질하는 대상인 그런 교사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의 권리와 인성과 성공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부모들의 마음과 태도를 폄하하거나 훼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아이들을 지도하는 오늘날의 스승의 존엄과 교권이 땅에 곤두박질 처져 버린 것이 문제이고 그런 상황이 슬프도록 가슴 아픈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주말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랫말이 또 다시 생각이 납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소크라테스 형은 이렇게 대답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너무 똑똑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교육수준도 그 어느 시대보다도 월등히 높은 대중들이 대세가 된 시대라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이 물질적으로 너무 풍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풍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각박한 삶을 부채질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갈수록 철저히 자기중심적이 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이기적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배려는 커녕 내 주변에 무관심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인간적 관계에 사랑이 사라지고 관계가 메말라 버렸습니다. 소망이 사라져 버린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으로 너무나 풍요로워졌으나 정작 우리들의 삶의 질은 갈수록 황폐해져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의 구원과 복음의 은혜에 빚진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시대적 소명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방주안에 갇혀버린 듯한 믿음의 공동체 집단의 현실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보다 더 심한 이기적인 갈등이 영과 진리로 포장된 공동체 안에 함께 혼재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입버릇처럼 외치는 사랑은 어쩌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럴듯하게 당의(糖衣) 된 영적 교만함의 모습이고 자기 위선이며, 영적인 독선의 모습이 있음을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바탕으로 이룬 귀한 영적 진리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서서히 퇴색되고 매몰되어 남보다는 나의 행복을 추구하기가 다반사가 되어버렸고, 내 식구, 내 형제,, 우리 교회를 입에 달고 사는 영적 습관에 빠져 버렸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할 구조선의 역할과 소명을 잃어버렸으며 다만 우리만 구원 받고 행복하면 되는, 마치 호화 유람선 속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통회하며 회개합니다.
이러한 부끄러운 믿음의 식구들로 채워진 공동체를 위해 2000년 전 예수께서는 그렇게 힘든 십자가를 지시며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는가?
오늘날 교회는 부끄럽게도 이념적으로 분열되고 갈등 속에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주의 자녀들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한 지 오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한 이들이 내세울 영적 방어기제가 한편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서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우선 각자가 절박한 가슴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고 옷을 찢으며 통회하는 영적 각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닌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변화의 초점을 세상에서 나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새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혼탁하고 추락해가는 세상을 향하여 얼마 전 절규하듯이 안타까움을 음악으로 쏟아낸 가수의 <테스 형>의 노랫말이 가슴에 절절히 와서 박힙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주여 세상이 왜 이런가요?
이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용서하소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첫댓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어느 젊은교사의 죽음앞에서 기성세대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낍니다.
세상이 너무나 똑똑해지고 풍요의 시대 속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집단이성으로 당의된 언어폭력에 대한 유감을 정리해봅니다.
얼마전 들었던 어느 가수의 애절한 노랫말이 유독 가슴을 저며오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늘푸른언덕>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 어쩌다 어른이 되고 보니 오히려 그런 사랑의 매를 주시던 스승들이 더욱 그립고 진정한 우리 삶의 잊지 못할 은사로 여겨집니다.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