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불교의 역사는 곧 교단의 역사다. 상가(교단)가 지속되지 않았다면 오늘에 이르는 불교의 전승도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불교사는 쉽게 말하면 이같은 교단의 분열과 흥망성쇠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교리의 전개도 있었고 또한 인도 이외의 광대한 지역으로의 전파도 있었다. 동시에 주로 책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사상적으로 유럽과 미주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모으면서 영향을 넓혀 나가고 있다.
불교교단의 역사적 전개는 시간적으로는 2천5백년, 공간적으로는 세계적인 확대를 해 온 것이므로 그 전체를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 남북방으로 전파돼 각기 독특한 양식의 불교를 이루었다. 이른바 '대승불교(북방불교)'와 '상좌부불교(남방불교)'가 그것이다. 대승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한국·일본·베트남·티베트·몽고 등지에 퍼진 주로 한역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다. 이에 비해 상좌부불교는 스리랑카를 거쳐 미얀마·타이·라오스·캄보디아 등지에 퍼진 팔리어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다.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가 큰 줄기라고 한다면 그 속에는 다시 작은 특징들이 나타난다. 교단과 고리의 발전과 더불어 생긴 작은 가지들은 지역문화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상을 섭취하면서 숱한 종파와 학파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불교사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의 탐구와 상호영향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즉 교단의 성립과 흥망성쇠에 관한 교단사(敎團史), 교리의 발전과 특징을 구명하는 교리사(敎理史),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과 상호영향 관계를 살피는 교섭사(交涉史), 등에 관한 종합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한국에 이르는 불교전파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동일한 교단의 규제(律)에 따라서 통일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의 확장과 더불어 내부에 의견대립이 생기고 율의 해석을 둘러싸고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와 대중수행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파로 갈라졌다. 보수파를 '상좌부', 진보파를 '대중부'라 부른다.
보수·진보파가 갈라서게 된 계기는 금전을 저축하는 것 등 이른바 10사(열 가지 계율문제)'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있었고 수행의 완성자로서 아라한의 성격에 관한 5사(五事)의 해석이 서로 틀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분열하지 않는 점이 있지만 근본분열 이후의 교단은 또한 지역과 교의(敎義)의 차이 때문에 세분화되고 드디어는 부파 불교시대로 들어간다. 부파의 수는 모두 20여 개였다고 하는데 상좌·대중부를 근본분열, 그 이후의 세분화를 지말분열이라 한다. 부파불교시대는 교단의 분열이 특징이란 점에서 그 이전의 시대는 부처님의 재세시를 포함해 '원시불교' 또는 '초기불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다른 면에서는 불교교단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즉 광범한 지역으로의 불교전파 과정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B.C.3세기 이후 마우리아 왕조에 의한 인도통일국가의 출현과 왕조의 3대째 왕인 아쇼카(阿育王: B.C.286년 즉위)에 의한 보호가 큰 힘이 되었다. 스리랑카(실론)와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스리랑카는 전설에 의하면 아쇼카의 왕자 마힌다가 전도해 개교되었다고 하는데 그후 현재까지 매우 번창하고 있으며 상좌부(테라바다) 불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이런 정세는 오히려 불교를 북방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계의 왕 가운데는 메난드로스(B.C.150년 경 재위)처럼 불교에 귀의했던 인물도 있었다. 이후 북인도는 스키타이(샤카족)족의 지배를 받는데 이때 불교는 중앙아시아(西城) 각지의 여러 민족 사이에 수용되었다.
북방지역의 불교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A.D.1세기경 중앙아시아 출신의 대월씨(大月氏)의 한 종족이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에 걸쳐 건설한 쿠사나 왕조였다. 불교는 그 사이에 중앙아시아로부터 더욱 동으로 진출해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이때가 A.D.56년이다. 북인도를 영토로 하고 간다라 지방에 도성(都城)을 두었는데 특히 북인도에서 번영하고 있었던 유부(說一切有部)를 보호했다. 이런 영향으로 유부는 그 후 가장 유력한 부파가 되어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떨쳤다. 그리고 실유의 법을 상호관계에 따라 '연기'로 설명했다. 이런 주장은 부처님의 교법을 여러 가지로 분류 정리하며 조직체계화한데서 생겨난 것으로 아비달마(법의 분석, 해석)라 부른다.
대체로 각 부파는 근본성전으로 법 즉 '경'과 '율'을 가지고 있었다. 율은 지역적 시대적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조금씩 특색과 차이를 가졌으며 경 또한 전승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었다. 그러나 각 부파가 무엇보다도 특색을 발휘한 것은 '법의 해석'이었다. 이같은 법의 해석은 각 부파가 '논(論)'이라는 형태로 제작하여 전승하면서 독특한 교의를 전개시켜 갔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부는 여러 부파 가운데서 가장 조직적인 교의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2백권이다. 《구사론》은 이런 유부의 강요서(綱要書) 가운데 대표적인 논서이다. 약간의 부파가 한역불전(漢譯佛典)중에서 논서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 외는 유부의 교리에서 이름만 보일 뿐 논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부파불교는 '교의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큰 공적을 남겼는데 그 주체가 된 것은 출가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왕이나 부호들의 보호아래 안정된 생활을 하며 학문과 수행에 전념하므로써 아비달마 불교를 확립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교의를 번쇄하게 함으로써 불교의 생명을 잃게 하고 신앙을 메마르게 했던 경향은 부정적인 일면이다. 이런 점에 대한 재가자들로부터의 반발과 출가자 내부의 반성이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것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재가의 집단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오로지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고 부처님에의 신앙을 중심으로 살았다. 이런 가운데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생각도 생겨난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마침내 자신들의 손으로 그런 사상을 표명하는 도구로써 새로운 경전을 편찬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이 만인구제를 지향하는 '큰 탈 것(大乘物)'이라는 뜻에서 '대승(大乘)'라 부르고 재래의 부파 불교를 출가자에게만 한정된 길이라는 뜻에서 '소승(小乘)'이라고 낮춰 불렀다. 또한 소승이 출가중심인데 반해 대승은 재가중심의 불교라는 특징이 있다. 재가중심의 대승불교는 부처님 전생의 호칭인 '보살'과 보살로서의 이타행에서 가르침의 기본을 찾아냈다. 그리고 부처님을 대신해서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 이름했다. 동시에 법에 관해서도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 그 진의를 밝히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새로운 가르침은 점차 발전해 갔으며 교리상의 특색으로는 '공'사상이 기본이 되었다. 또한 부처님을 절대화하고 부처님이 하는 일로는 '반야(般若)'와 방편(方便;자비행)'이 강조됐다. 신앙불교로서의 대승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미타경》등의 정토교에서 볼 수 있다. 주로 기원후 2세기에 남인도에서 태어난 나가르주나(龍樹)와 5세기 경 굽타 왕조 치하에서 활약했던 바스반두(世親) 두 사람에 의해 교리가 확립 조직되었다.
나가르주나는 《반야경》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공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구명해서 《중론》을 저술했다. 또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반야경》을 주석하면서 대승의 교의를 정리했다. 때문에 그는 중국·한국에서 '8종(八宗)의 조사'로 추앙받고 있다.
제자로는 아리야데바(提婆)가 있는데 그는 《백론(白論)》을 저술했다. 뒤에 형 아상가(無着)의 권유로 대승에 들어가 형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이런 체계는 나가르주나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마이트레야를 시조로 한다고 하는데 주석을 쓰는 동시에 몸소 《유식30송》등을 저술했다. 한역의 《성유식론(成唯識論)》은 그 주석서다.
이 유가행파의 유식설은 마음의 분석을 주로 하는데 유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아비달마적 경향을 가진 번쇄한 교학으로 변해갔다. 양자 사이에 눈부시도록 화려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서 디나가(陳那)와 달마키르티(法稱)의 노력으로 불교의 논리학(因明學)이 대성했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적 발전은 대승불교를 결국 출가승려에 의한 전문불교·학문불교로 연결시켜 본래의 재가불교적 색채를 점점 잃어가게 했다.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승이 출가자 중심으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승만경》과 《열반경》에서 보여지는 '여래장 사상'과 불성에 관한 것이 있다. 이것을 조직화한 논서로서는 《보성론(寶性論)》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만들어졌다. 학문의 계통상으로는 주로 유가행파에 속하는 것이다. 중관(中觀)·유가행(瑜伽行)의 두 파가 있었고 부파 불교에서는 유부와 경량부 그리고 정량부 등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초기의 신선함을 잃는 것과 함께 밀교(密敎)가 일어나 마침내 인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재가신자들 사이에서 그것을 배제하는 일은 불가능했었다. 재가신자들에게서 흥했던 대승불교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했다.
한편에서는 공과 같은 심오한 철학을 탄생시키면서도 경전은 대부분 다라니 따위의 주문을 설교했으며 그 효과를 가르쳤다. 부처님의 법신이란 이론도 이런 범신론적 경향에서 신비주의와 쉽게 결합하고, 오히려 신비주의적 해석 안에 불교의 구극적 입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해서 대승불교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형태로 밀교의 교의가 성립되었다. 그 시기는 7세기 경 최초로 나타난 《대일경(大日經)》과 때를 같이 한다. 조금 뒤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나타나 대승과는 다른 밀교의 특색이 명료해졌다. 밀교에서는 제불과 보살, 명왕(明王)의 세계를 묘사한 만다라(蔓陀羅)를 장식하여 그 앞에서 인계(印契)를 맺고 진언(眞言;만트라)을 외우고 요가를 수행한다. 진언은 '주(呪)'라고도 해석되지만 '다라니(陀羅尼)'란 말로 그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진언 수행을 실천의 주안으로 삼는 까닭에 밀교를 진언승(眞言乘)이라고도 한다.
밀교 독특의 요가가 발달함에 따라 그것에 부응해 그 교리와 예법이 상세하게 규정되고 여러 가지 유파도 생겼다. 금강승(金剛乘)이라든가 시륜승(時輪乘)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는 좌도밀교(左道密敎)라 불리우는 쾌락주의의 사도(邪道)까지 나타났다. 반야(般若)와 방편(慈悲)의 합치라는 이상경(理想境)을 반야는 여성, 방편은 남성으로 내세워 그 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밀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 즉 행(비밀행:三密)을 극기에 의해 단련하는 면이 적고 현실긍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환영받았지만 동시에 타락의 위험도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탄트라란 말은 힌두교에서 성전이란 뜻으로 사용하던 말로 밀교에서도 사용됨으로써 밀교를 널리는 '탄트리즘'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승의 좌도밀교는 힌두교의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 불교는 밀교 일색이었으며 그것은 거의 힌두교와 구별이 안 되는 것이었다. 13세기 초 이슬람군대에 의해 벵갈지방의 대사원이 파괴되고 불교의 근거지가 상실되자 출가수행자와 학승들은 경전을 가지고 위난을 피해 네팔과 티베트로 갔다. 그리고 교단 조직의 붕괴와 함께 불교는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인도불교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 등에 의한 인도 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붓다가야 불탑의 보수와 불교도에 의한 관리가 실현되었다. 이 운동은 '대보리회(大菩提會)'가 중심이 되었다. 반(反)힌두의 표상으로 사성평등(四姓平等)의 불교를 신앙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부처님 열반 2천 5백년을 기념하는 붓다자얀티(1956)에 암베드카르를 지도자로 해서 불교에의 집단개종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인도에서의 불교도 수는 놀라운 증가를 보였다. 이밖에 티베트 사태로 티베트인들의 유입, 일본불교의 진출 등으로 불교는 활기를 되찾고 있으나 아직은 힌두교가 지배적이다. 2) 티베트의 불교 당시 중국은 당나라 초기로 티베트 불교는 네팔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수입에 의해 성립됐다. 그러나 지리적·문화적으로는 인도와 관계가 깊으므로 중국과는 정치적 관계가 희박해지는 동시에 중국불교의 영향도 감소되어 9세기 이후는 오로지 인도로부터의 수입이 계속되었다. 그사이 인도승려와 중국승려사이의 논쟁이 있었으나 중국승려가 패배했다고 한다. 이것이 8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대부터 티베트로 들어온 불교는 대승불교로 밀교를 동반한 것이었다. 특히 이슬람의 침입에 따라 많은 인도승려의 티베트 이주는 밀교융성에 박차를 가했다. 티베트에는 고유의 샤머니즘적 본교가 있었는데 밀교와 융합해서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제파(諸派)를 성립시켰다. 순수한 대승의 학설을 티베트에 이입(移入)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것이 티베트 불교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뒷날 쫑카파가 나타나 개혁을 주창할 때 사상적 근원이 되었다. 쫑카파는 아티사의 학설을 계승한 것임을 선언했다. 13세기에 몽고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원조(元祖)를 세우자 티베트도 그 치하에 들어갔는데 샤카파의 파스타는 오히려 황제를 귀의시키고 그의 후원으로 몽고의 밀교를 전파했으며 동시에 티베트의 정권까지도 불교교단이 획득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타락의 원인이 됐다. 14세기에 쫑카파의 등장은 이처럼 타락된 불교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쫑카파는 자파(自派)를 '겔크타'라 칭하고 계율을 엄중히 지킴으로써 개혁을 실천했다.
교단은 그 후 달라이라마라 불리우는 법왕에 의해 계승되는데 그 계승법은 사사(師嗣)가 아니고 전생(轉生)이라는 독특한 방법에 의한다. 제5대 달라이라마가 정권까지 손에 넣은 후 티베트는 법왕국이 되었으나 현재는 중국(中國)에 합병되어 달라이라마 14세는 인도에 망명중이다. 근대유럽의 학자들은 티베트 불교를 라마(스승이라는 뜻)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라마교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것이 불교와는 별개의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라마교라 하지 않고 '티베트 불교'라고 부른다. 기원전 3세기 경 아쇼카왕의 아들(또는 동생) 마힌다 장로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경·율·론 삼장을 스리랑카 문자로 서사(書寫)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가지 남방불교에서 성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팔리어성전이다. 5세기 경에는 '붓다고사'라는 대학장(大學匠)이 나와 거의 모든 성전에 주석을 만들어 교의를 집대성했다. 스리랑카 불교는 이후 그에 의해 확립된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킬 것을 전통으로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수적이고 소승적(小乘的)이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실 계율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상가의 청정성을 유지하는 것 등은 배워야 할 점이기도 하다. 스리랑카 상좌부는 11세기에는 미얀마로 이식되었고 13세기에는 타이로 전파됐다. 타이에서 다시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남부지방까지 전파돼 오늘의 남방불교를 완성했다. 한때 스리랑카 상좌부는 법통이 단절된 일도 있었으나 미얀마로부터 승려를 영입, 부활되었고 다시 법통이 끊기는 사태가 생기자 타이로부터 승려를 맞아들였다. 남방불교에서는 이처럼 상가를 교류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동일한 법통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는 이밖에도 과거에 말레이반도에서 수마트라·보루네오 등에 걸쳐서 많은 불교도가 존재했었다. 이들 지역에 들어온 불교는 8∼9세기 경 동인도와 남인도에 의한 식민지 건설과 함께 보급된 것으로 힌두교와 혼합된 밀교적 대승불교였다. 오늘날에는 유적만 곳곳에 남아 있을 뿐이다. 밀교와 대승불교가 이 지역에서 사라져 갔다는 사실은 불교본연의 자세에 대해 무엇인가를 사사해 주는 것이다. 대월씨국(大月氏國)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이 낙양에 와서 ≪42장경(章經)≫을 번역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B.C.2세기 말에 전한(前漢)에 의한 서역경영(西域經營)의 결과로써 서역인들에 의해 서서히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전래되던 초기 한민족(韓民族)은 유교를 국시로 하고 그 문화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이국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삼국의 동란을 거쳐 서진(西晋)시대가 되자 노장사상이 귀족사이에 번져 나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불교는 노장사상에 합치하는 것이라 하여 점점 한민족 사이에 침투하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불교는 노장사상을 매개로 해서 이해되었으며 경전의 번역에도 노장(老莊)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그보다 앞서 서진(西晋)이 새외민족(塞外民族)의 세력에 쫓겨 강남땅으로 옮겨 동진(東晉을 세웠다는 사실이 불교가 남쪽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법화경≫을 비롯해 많은 대승경전과 용수의 ≪중론≫, ≪대지도론≫등 주요한 논전들을 번역했다. 그의 역경사업에 의해 중국인은 처음으로 불교교리의 정통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구마라습 이전에도 많은 불전이 번역되었다. 돈황보살이라는 별호를 받았던 축법호(竺法護, 3세기)와 같은 우수한 번역가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번역은 중국문(中國文)으로서는 큰 호감을 얻지 못했다. 때문에 구마라습에 의해 대치될 수밖에 없었다. 구라마습 이전의 번역을 오늘날 '고역(古譯)'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전통 속에서 후에 삼종이 탄생하고 또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천태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중국 정착이라는 점에서는 구마라습에 앞서 도안(312∼385)에 의한 역경의 정리와 계율의 정비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334∼416)에 의한 선정과 염불행의 실천 및 그 구체적 운동으로서 백련결사(白蓮結社)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중에서도 동진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359∼429)에 의한《화엄경》역출(譯出)과 북경의 담무참(曇無讖:385∼433)에 의한 《열반경》역출은 그 후의 중국불교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열반경은 '여래상주 무유변이(如來常住 無有變易)'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교의가 반야의 공과 일견 상반되는 듯하기 때문에 번역 당초부터 상당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중국인은 어느 쪽인가 하면 부정적인 표현보다는 《열반경》과 같은 적극적 긍정의 입장이 이해하기 쉬웠던 듯, 이 교의는 급속도로 퍼져 나가 중국불교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이 점은 불교보호자였던 양(梁)의 무제(武帝)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다. 북조는 국가 불교의 색채가 강했다.
이것은 뒤에 수·당 시대로 이어져서 중국불교의 일대 특색을 이루게 된다. 특히 북위는 그 오랜 지배기간(386∼534)동안 때로는 불교배척을 명했던 태무제(太武帝)등이 있었지만 그밖에는 모두가 불교를 열렬히 신봉했으며 이로 인해 불교는 크게 발전했다. 운강(雲崗)과 용문(龍門)의 석굴도 이 때의 소산이다. 그러나 승려들 사이에는 황제를 여래로 인정하는 사상들로 나타났다. 이것은 혜원(慧遠)이《사문왕자불경론(沙門王者不敬論)》을 저술한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북위시대의 번역사업으로는 6세기 초 보리유지(菩提流支)등에 의한 유식설 소개가 중요하다. 이 계통은 바스반두의 《10지경론》을 소의로 해서 교의를 전개했으므로 지론종(地論宗)으로 불리운다. 유식학 계통에서는 그 뒤 양나라 말기 진제(眞諦,499∼569)에 의해 번역된 《섭대승론》을 소의로 하는 섭론종이 별립했다. 이 학설은 남쪽에서는 수용되지 않았고 북쪽에 전파되었다. 지론종은 뒤에 이 계통으로 흡수된다. 진제는 《십대승론》외에도 유명한 《대승기신론》을 번역해냈다. 여래장 사상을 설법하는 이 논서는 지론종에 의해 일찍이 북쪽에 전파되어 마침내 뒷날 중국불교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의라는 면에서 볼 때는 인도불교의 수입과 소화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곱씹어 정녕 중국 독자의 불교를 확립한 것은 수·당시대에 들어와서다. 그것은 먼저 일정한 해석에 근거한 교리의 체계, 즉 학파이지 서로가 남을 배제하는 '종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어도 남북조시대까지는 대체로 특정한 경과 논의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그룹이었다. 그런데 남북조 말기가 되자 엄청나게 많은 숫자에 이르는 한역경전 중에 어느 것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는가 하는 여러 가지 기준이 생겨나고 거기에 따라 우열을 정하고 그것에 의해 부처님 일대의 설교를 통일정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 출여서 교판론(敎判論)이라 부른다.
이것이 이장(二藏) 삼전법륜(三轉法輪)을 주장하는 길장(吉藏)의 삼론종이며 지의의 5시 8교(五時 八敎)에 의한 천태종 등이다. 이렇게 해서 수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에 걸쳐 성립한 종파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삼론종(三論宗) - 이 종은 구마라습의 제자들이 전했던 계통인데 교리의 확립은 수나라 때 길장(549∼623)에 의해서다. 삼론이란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 아리야데바의《백론(百論)》을 말한다. 길장은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저술해서 그 교의를 설명했으며 많은 경전의 주석을 써서 공·반야의 교의를 고취시켰다. ②천태종(天台宗) - 이 종은 혜문(慧文)과 남악의 혜사(慧思)의 뒤를 이어 제3조 지의(智 , 538∼597)에 의해 교학이 대성됐다. 그는 천태산에서 선정체험을 쌓고 그것을 토대로 지관(止觀)이라 부르는 독자적인 수행체계를 조직했다. 그리고 법화경을 교학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그 선포에 주력했다. 천태의 교학은 삼제원융(三諦圓融), 일념삼천(一念三千)을 표상으로 해서 십계호구(十界互具)의 성구설(性具說)을 주창했다. ③삼계교(三階敎) - 북제말 말법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시대에 걸맞는 종교로서 신행(信行)에 의해 제창되었다. 삼계교는 불교의 발전을 시대에 따라 정(正)·상(象)·말(末) 세 단계로 나누고 제 3단계인 현재는 보불(普佛)·보법(普法)을 숭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파는 실천을 존중하고 신도들이 결사(結社)를 했는데 국가는 이들을 불순하다고 하여 탄압했다. ④정토교(淨土敎) - 삼계교와 마찬가지로 말법시대에 상응하는 가르침으로 정토왕생을 교리로 한다. 이 가르침은 북위의 담란이 세친의《정토론》에 주를 써서(往生論註) 칭명(稱名)염불을 주장한데서 비롯된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도작(道綽:613∼681)이 나와 관무량수경에 근거한 교의를 확립하고 그의 제자 선도(善導:613∼681)에 의해 대성됐다. 《관경소(觀經疏)》는 선도의 정토사상을 담은 것으로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일종의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그 후 오랫동안 중국민중들에게 신봉되어졌다. ⑤선종(禪宗) - 북위시대 보리달마에 의해 전해졌던 것을 초전(初傳)으로 하는데 오늘날 볼 수 있는 것 같은 선의 기초는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에 의해 굳혀졌다. 그후 강서의 마조(祖)와 호남의 석두(石頭)에 의해 뒷날 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위앙의 5가 7종으로 발전했다. 그 이전에는 우두종(牛頭宗)·북종선(北宗禪)·하택종(荷擇宗) 등의 계통이 성쇠를 되풀이했다. 선종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모토로 하는데 이것은 혜능 이후에 확립된 교의다. 소의의 경(經)을 가지지 않고 있으며 이 점은 오히려 독자의 사상을 전개하는 요인이 됐다. 그대신 어록(語錄)이라든가 공안(公案)등을 많이 남기고 있다. 사사상승(師嗣相承) 존주하는 것은 이런 특색 때문이다. ⑥법상종(法相宗) - 현장(玄 :600∼664)은 처음에 섭론종으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했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올바른 유식설을 찾아 인도로 유학했다. 18년간 공부한 후 돌아와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성유식론(成唯識論)》등 많은 유식학 관련의 논서를 전했다. 또한 《대반야경》6백 권을 비롯 다수의 경론을 번역해서 역경삼장(譯經삼藏)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이전의 유식설 관계의 번역을 부정확하다면서 자기의 번역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현장 이전의 번역을 일반적으로 '구역(舊譯)' 현장 이후를 '신역(新譯)'이라고 한다. 현장은 번역가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그의 제자 규기(慈恩大師:632∼682)는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법상종을 창시했다. 종지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기본으로 해서 학설을 조직했으며 또 《구사론》등의 아비달마교학도 존중했다. 오성각별(五性各別) 일분불성불설(一分不成佛說)을 주장했기 때문에 일승설에 서있는 천태종 등의 주류로부터 비판받고 뒤에 법장(法藏)에 의해 화엄종이 대성함에 이르러 급속도로 힘을 잃었다. ⑦화엄종(華嚴宗) - 《화엄경》이 전역(傳譯)된 후 여기에 기초한 해석학자와 실천자가 속출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두순(杜順:554∼640)을 개조로 해서 지엄(智儼:602∼712)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학설의 조직체계화가 완성됐다. 그의 학설은 지론종을 이어 《대승기신론》의 여래장 연기설을 매개로 해서 《화엄경》을 해석하는 것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중생 개개인에게 여래의 덕성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것을 '성기(性起)'라고 부른다.
법장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마음에 들어 그녀의 보호아래 화엄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 배경에는 법계연기의 사상이 당제국(唐帝國)의 이데올로기를 지키는 세계관이 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교학은 자가약롱(自家藥籠)한 것이 되어 선종(禪宗)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화엄의 교학은 천태와 나란히 중국이 낳은 최고이 불교철학이다. ⑧율종(律宗) - 중국의 교단제도는 도안(道安)에 의한 계율정비로 시작된다. 그후 《사분율(四分律)》에 근거한 수계작법과 여러 제도의 연구에 따라서 계율연구의 여러 학파가 성립됐다. 도선은 불교사가(佛敎史家)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율장을 정비하고자 하는 의욕은 그보다 앞서 법현(法顯)의 인도유학으로 나타났다. 법현은 《5분율(五分律)》을 번역하고 《불국기(佛國記)》를 저술 구법승(求法僧)이었다. 또 당대(唐代)에 와서는 의정(義淨:635∼713)도 인도로 떠나 《근본설일체유부율(根本說一切有部律)》을 가져왔으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지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불교교단 실상을 보고하고 있다. 중국사회 관습과의 위기감에서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인 규율을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선종(禪宗)에서 일어났다. 이것을 '청규(淸規)'라고 하는데 일상생활의 모든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청규를 확립한 사람은 백장회해(百丈懷海:720∼814)다. 청규의 특색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작무(作務), 즉 노동이다. 이는 승원(僧院)의 자급자족 생활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도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⑨밀교(密敎) - 중국 밀교는 선무외(善無畏:637∼735)의 《대일경(大日經)》 번역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에 의해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번역되어 인도의 밀교가 고스란히 수입되었다. 선무외와 불공의 가르침은 각각 일행(一行)과 혜과(惠果)에 의해 전해졌고 점차 중국사회에 뿌리박기 시작했는데 아직 종파가 형성되기 전 회창(會昌)의 파불(破佛, 845)을 만나 발전의 싹을 짓밟혔다. 밀교는 중국에서보다 혜과의 제자 공해(空海)에 의해 일본에 전래돼 크게 발전했다. 송의 이학(理學)은 불교의 철리(哲理)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반대로 불교를 공격했다. 불교측은 응전(應戰)을 위해 유불도(儒彿道) 3교 융합을 강조했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독자성을 상실해갔다. 티베트의 라마교가 도입돼 중국불교를 일변(一變)시켰다. 원대의 라마교 숭상은 중국불교가 특유의 독자성을 잃고 민간화로 이행하는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수·원대에 와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정테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말기적 징후가 라마교라는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이같은 현상은 명·청대가 되어 더욱 표면화되었다. 그 직접적 원인은 수·당대의 불교에서 볼 수 있었던 찬란한 교학의 전개가 끝나고 관음신앙이나 염불회 또는 방생회·수계회 같은 의례중심의 불교로 변모해간 것에 있었다. 물론 이같은 신앙의례 자체가 불교를 쇠퇴시킨 것은 아니지만 유구필응(有求必應)이라는 현세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불교가 도교나 민간신앙과 습합하여 고유성을 잃어간 때문이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명·청대의 불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무렵 재가불자 특히 거사들에 의한 불교부흥운동에 자극받아 출가승려들 사이에서 자각운동이 일어난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공산정권 아래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써였다. 불교교의와 공산주의 이론 사이의 유사한 점을 발견하려고 한 점은 불교사상 전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불교와 공산주의는 신이나 개인의 영혼을 부정하고 있으며 논리는 변증법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또 승가의 구성원은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점, 공동생활을 하는 점 등은 공산주의의 원시적 형태를 실천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다시말해 공산치하의 중국불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학습, 봉건적 미신적 사상을 숙청하여 사회의 진화에 보조하며 인간낙토를 완성'하는 도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같은 밀월관계는 1966년 8월 18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시작된 프로레타리아 문화대혁명으로 깨지고 말았다. 신혁명의 기동타격대인 홍위병들은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낡은 풍습의 상징'인 사원을 무차별 파괴했다. 이 광적인 불교박해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중공정부는 개방정책과 더불어 문혁(文革)기간 중 파괴된 사찰을 재건했으며 강제 환속시켰던 승려를 모아 승려증을 다시 발급하고 있다. 승려현황은 1930년대의 통계인 '27만 7천 개의 사찰과 70만 명의 승려'에는 절대 못미치고 있지만 60대 이상의 노승과 20대의 젊은 승려는 상당히 많다. 40∼50대 승려는 문화혁명 때 사찰폐쇄의 공백으로 전무한 것이 특징이다.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순도(順道)스님을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오면서부터다. 다시 2년 뒤에 아도(阿道)스님이 오자 이불난사(伊佛蘭寺)를 지어 머물게 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있는 이 기록은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배를 타고 건너왔다. 《해동고승전》은 이때 왕이 몸소 교외에까지 나가 마라난타를 맞았으며 궁중에 초청해 공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들은 고구려나 백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 사찰들이 거의가 흥국(興國)·흥복(興福)의 사명(寺名)을 보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고유신앙의 반발 등 약간의 난관을 거쳤으나 법흥왕 14년 (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실을 중심한 귀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려움을 쉽사리 극복할 수 있었다. 전국 곳곳에 사찰이 세워지고 국왕으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신앙했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인도로 유학을 가서 불교의 깊은 뜻을 공부했으며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법을 전해주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 승려들 가운데는 중국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사람도 있었다. 구마라습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연구하고 이를 더욱 체계화시켰다. 중국의 무제(武帝)는 중국승려 10명을 뽑아 그가 거주하는 섭산(攝山)에 보내 학문을 계승하게 했다. 또한 신라의 왕손인 원측(圓測:613∼696)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범어·서장어 등 6개 국어를 통달하고 유식학(唯識學)을 깊이 연구하여 존경을 받았다. 방대한 화엄사상을 법계도(法界圖)에 간략하게 요약해 스승을 놀라게 했다. 그는 나중에 귀국해 신라 화엄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의상(義湘)보다 앞서 선배인 자장(慈藏)·원광(圓光)광 같은 신라의 고승들은 호국신앙과 현세이익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 불교가 한국사회에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신라에서는 '이 땅이 곧 불국토(佛國土)'이기 때문에 호국(護國)이 호법(護法)이라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이 깊게 뿌리내림으로써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화려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민중 속에 직접 파고들어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교화에 힘씀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불교정착기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효(617∼686)이다. 그는 99부 2백 40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상가로서 원효는 당시 중국의 불교가 경론(經論)을 중심으로 한 종파가 생겨 자기 종파의 입장만 고수하려는 경향에 대해 일대비판을 가하고 불교 본연의 일미(一味)로 귀일시키려는 화쟁불교(和諍佛敎)를 제창했다. 669년 신라 한반도를 통일하고 917년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백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유지했다. 통일신라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전 ·후기로 특징이 나누어진다. 전기는 원효·원측·의상은 물론 의적·도증·승장·둔륜·대현·현일·신방 등이 활약했던 시기다. 이들의 저술로 보면《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화엄경(華嚴經)》《무량수경(無量壽經)》 선은 중국에서 달마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종파로 성립 발전한 것으로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돈선(南頓禪)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으로 나누어졌다. 우리나라에는 북종선이 전래되었다는 흔적만 있을 뿐 그 자취를 알 수 없고 오직 남돈선 계통만이 크게 유포되었다. 남돈선을 처음으로 전래한 사람은 784년 입당(入唐)해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어 귀국한 도의(道義)였다. 그는 귀국 후 선법을 크게 일으키려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설악산에 은거하면서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등을 전했다.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법맥을 전했는데 그는 나중에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 구산선문의 일파를 이루었다. 구산선문은 가지선문을 포함 홍척에 의한 실상산문(實相山門)·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裡山門)·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도윤(道允)의 사자산문(師子山門)·범일(梵日)의 사굴산문 이엄의 수미산문(須彌山門)·무염(無染)의 성주산문(聖住山門)·도헌(道憲)의 희양산문(曦陽山門)을 말한다. 신라의 뒤를 이어 일어난 고려는 태조왕건 이래 진호국가(鎭護國家), 산천비보(山川裨補)의 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고려불교는 풍수도참의 속신(俗信)과 더불어 기복(祈福)과 양재(穰災)로 흘러 각종 법회가 범람했다. 민족의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을 완성하고 승과(僧科)의 실시로 교단의 질적향상을 꽤해 의천(義天)·지눌(知訥)·태고(太古)와 같은 고승을 배출, 선(禪)과 교(敎)를 중흥시키기도 했다. 의천(義天:1055∼1101)은 당시 불교계가 혼미해짐을 우려하여 교학(敎學)과 관행(觀行)을 함께 닦을 것을 강조했다. 합리적으로 교리를 이해함이 없이 종교적 체험만을 위주로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그 반대로 논리에만 치중하는 것도 불교의 이상을 실천하는데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지눌(知訥:1158∼1210)은 중국에서 발전한 남종선을 그 사상적 근간으로 삼기는 했으나 전반에 걸쳐 폭넓게 공부하여 한국선(韓國禪) 확립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선을 중심으로 하되 선과 교를 혼합하여 독특한 불교를 선양했다. 또 어떤 특수한 종파나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불교의 진수가 되는 것은 자유롭게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종파불교 통합재창조의 노력을 계승한 것이다. 이밖에도 고려일대는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등이 배출됐다. 교종은 나말(羅末)이래 5종이던 것이 여말(麗末)에는 9종으로 늘어났다. 또 선종은 나말(羅末)이래 9산문파가 개창됐으나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선교(禪敎)의 융화를 꾀하자 그 교세가 약화되어 천태종에 흡수되지 않은 문파만 유지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9개 문파로 갈라져 서로 대립과 경쟁을 일삼았다. 이 때 태고(太古)가 나와 사상적 통합을 주도하여 고려불교 혁신에 노력했다. 사탑조영과 불사의 번다로 국가경제마저 곤핍해 했고 교단의 문란으로 승풍은 땅에 떨어졌다. 이같은 폐해는 이미 성종(成宗)때 최승로의 상소에 의해 지적된 후 그 시정을 요구하는 소리가 유자(儒者)들 사이에서 심심치않게 제기됐다. 조선왕조의 출현과 함께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고려말기에 이르러 사원경제의 비대화와 승려의 타락등이 새 왕조의 양반관료들로 하여금 불교를 배척케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극렬한 배불(排佛)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일과 불교재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흥복·흥왕·흥덕사의 창건, 법회의 개설과 인경(印經)사업 등을 국가재정으로 지원했을 정도다. 이에는 무학(無學)과 조구(祖丘) 같은 고승들의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는 3대 태종의 즉위와 함께 무서운 법난(法難)으로 나타났다. 태종은 의정부(議政府)의 상소에 따라 고려이래 내려오던 11종파를 조계(曹溪)·천태(天台)·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총남(摠南)·시흥(始興) 7개종으로 통폐합하고 각 종파의 소속사찰을 극히 제한했다.
또 사찰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사원경제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태종은 이밖에도 도첩제도를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게 시행하여 일반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봉쇄했다. 또 고려 이래의 제도이던 왕사·국사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화엄·자은·중신·시흥종을 묶어 교종(敎宗)으로 다시 축소 조정했다. 또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양종의 도회소에서 사무를 관장케 했다. 세종은 만년에 호불(護佛)로 돌아섰으나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앙일 뿐이었다. 왕조에 의한 척불로 급속히 몰락하던 조선불교는 세조대(世祖代)에 이르러 반짝 소생의 기운을 찾았다. 세조는 새로 지은 원각사에 간경도감을 두고 한글로 번역한 《법화경》《금강경》《원각경》《능엄경》등을 간행했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석보상절(釋譜詳節)》을 묶어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했다. 또《경국대전》에 도승법(度僧法)과 선시(選試)제도를 확립해 불교입문의 문호를 넓혔다. 그러나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볼 때 불교사는 한마디로 수의 연속이었다. 연산군 중종대(代)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완전히 몰락하고 승려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별도의 하층신분 집단으로 전락된 상태였다. 국가는 승려를 동원, 축성(築城)과 제방공사의 노역에 투입했고 그 대가로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도첩(度牒)을 발급하기까지 했다. 1백 50년 이상 권력에 의해 박해받던 불교는 1550년(명종5년)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 양종과 승과(僧科)가 부활되어 재흥(再興)의 기회를 맞았다. 보우(普雨)를 판사로 삼아 승과(僧科)가 실시되었으며 교단은 일시적으로 활기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중기 불교중흥의 주역이었던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이 배출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스님이 유자(儒者)들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몰려 제주도에서 장살(杖殺:565)되고 이후 다시 교계는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 의승군(義僧軍)의 궐기와 국난극복을 위한 전쟁참여는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발발로 일어났다. 당시 문약(文弱)했던 정부는 외적의 침입 앞에 변경 신의주까지 몽진하는 사태를 당하자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청허휴정(淸虛休靜)과 금강산에 있던 그의 제자 송운유정(松雲惟政)은 수천의 승군을 조직 국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권력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생을 위해서는 칼을 빼어든 것은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인 호국불교의 절정이었다. 승려들의 이같은 활동은 정부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지만 조선중기 이후 양대문파를 이룬 휴정(休靜)문파와 부휴(浮休)문파의 번성과 교학(敎學)의 활기 등은 어려운 상황아래서 불교의 명맥을 이어온 원동력이 됐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과거에 비해 교리연구나 사상적 발전이 전반적으로 위축을 면하지 못했다. 신라의 원효, 고려의 지눌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계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일컬어지는 휴정(休靜)도 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선초기의 고승 함허당(涵虛堂)의 《현정론(顯正論)》 휴정의 《삼가귀감(三家龜鑑)》등은 이와 관련된 대표적 저술들이다. 명종시대 불교중흥을 꾀했던 보우(普雨)나 기타 고승들의 문집(文集)에서도 이같은 경향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억불정책 아래서 자구(自救)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해석된다. 연담은 각종 사기(私記)를 저술해 교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백파는 《선문수경(禪門水鏡)》등을 지어 선문중흥에 기여했다. 또 초의(草衣)는 내외학문에 정통한 고승으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범해(梵海)는 불교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썼다. 이밖에도 진하(震河)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여래선·조사선을 밝힘으로써 종풍을 떨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불교상황은 승려의 사회적 신분저하로 도성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 치욕적인 법령은 195년 일본승려들의 탄원에 의해 해제되었지만 오랜기간 탄압에 의해 자립의 힘을 잃은 불교계는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시대사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말았다. 한일합병 후 일본은 한국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사찰령을 제정하고 31본산제(本山制)를 운영했다. 그들은 도 한국불교를 왜색화하기 위해 승려의 대처화(帶妻化)를 추진해 전통교단의 순수성을 파괴했다. 3·1운동때 불교계는 한용운과 백용성을 민족대표로 참여시켰으며 많은 선각적 고승들도 독립 운동에 앞장섰다. 해방이후 한국불교는 또 다시 시련을 맞았다. 국토의 분단으로 이북지역에서는 종교활동이 중단됐고 6·25동란으로 많은 사찰과 문화재가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대처측과의 싸움으로 번져 교단은 분열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불교는 최대종단인 조계종을 비롯 18개 종단으로 분립되어 있다.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흠명천왕(欽命天皇) 13년(552)이다. 물론 이것은 공식기록에 의한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백제로부터 건너간 이민들에 의해 불교가 널리 신봉되어졌다. 흠명천황 시절 백제의 성왕(聖王:523∼553)때로 백제에서 불상과 경전을 보낸 사실을 그는 스승이었던 고구려스님 혜자(惠慈)의 가르침에 따라 국가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그가 제정한 17조의 헌법은 불교의 이념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써 삼보에 귀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는 또 스스로 불교를 열심히 배워 법화·승만·유마경에 대한 주석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저작했다고 전한다. 뒷날 일본에서는 성덕태자를 '일본불교의 교조(敎祖)'로 평가하면서 일반에서는 태자를 존중하는 신앙으로까지 발전했다. 일본은 이후 한국으로 뿐만이 아니라 중국으로 직접 유학승을 파견, 대륙불교를 받아들이고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대사원을 건립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고대의 종교와 습속을 지키려는 세력과의 타협책으로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내세웠다. 본지수적설이란 일본재래의 제신(諸神)들이 인도불교의 제불보살의 화현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신불습합(神佛習合)은 이후에도 일본불교의 가장 큰 특색을 하나로 계승되어졌다.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중국·한국의 학적성과를 흡수해 수입경로에 따른 종파를 성립시켰다. 이를 남도6종(南都六宗)이라 한다. 남도6종의 첫 번째는 삼론종으로 고구려의 혜관에 의해 성덕태자 시절에 전해졌다. 혜관은 원흥사(元興寺)에 머물며 삼론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두 번째는 성실종(成實宗)으로 백제의 도장(道藏)이 721년 일본에 와 《성실론》을 가르침으로써 비롯됐으며 나중에는 삼론종에 통합됐다. 세 번째는 법상종(법상종)으로 당나라에 유학한 도소(道昭:629∼700)가 전래해 온 것이 최초인데 이후 일본 유학승과 신라승려가 4차례에 걸쳐 교의(敎義)를 전했다. 흥복사를 중심으로 법륭사(法隆寺)·약사사 등에서 학풍을 떨쳤다. 네 번째는 구사종(俱舍宗)이다. 법상종의 유식학과 쌍벽을 이룬 구사학은 오랫동안 불교학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법상종에 통합됐다. 다섯 번째는 화엄종으로 신라의 심상(審祥)이 동대사(東大寺)에서 《화엄경》을 강설함으로써 비롯했다. 이때 낭변(良辯:689∼773)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일본화엄을 확립했다. 이후 동대사(東大寺)를 중심으로 발전해 오에 이르고 있다. 여섯 번째 율종(律宗)은 당나라 감진(鑑眞:687∼763)의 입국으로 성립됐다. 이로써 일본의 승려들은 수계의식에 의한 득도(得度)가 이루어졌다. 나라시대에는 매년 득도하려는 승려의 수를 국가에서 통제해야할 만큼 불교가 융성했다. 국가의 보호와 관리 아래서 승려들은 직접 민중을 포교하는 공익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이무렵 행기(行基:668∼749)는 국가의 지원 아래 동대사(東大寺) 국분사(國分寺) 불사를 대대적으로 벌였으나 이로인해 민생(民生)은 대단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권력을 등에 업은 승려들의 부패들도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最澄:768∼822)과 홍법대사(弘法大師) 공해(空海:773∼835)가 중국으로부터 천태교학과 밀교를 수입한 것이다. 최징은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교학을 배워 귀국한 뒤 타락한 남도불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승풍진작을 위해 경도 동북쪽 비예산(比叡山)에 연력사(延曆寺)를 세우고 《법화삼부경》과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강의했다. 그는 천태교학의 바탕위에 정토의 염불과 밀교를 혼합시킨 독특한 일본천태종의 개창자가 됐다. 특히 비예산은 남도불교가 소승의 구족계를 받은데 대해 이타의 원행을 강조하는 일본독자의 출가의식을 성립시킨 점은 일본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해는 최징과 같이 유학했으면서도 장안에 머물면서 불공(不空) 삼장의 제자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전수받아 귀국, 고야산(高野山)에 새로운 도량을 세웠다. 그러나 공해는 최징과 달리 남도불교와 대립하거나 새로운 계단을 세우지는 않았으며 천태종과 진언종은 교리상 상호영향을 주고 받았다. 천태종의 경우 최징의 제자 원인(圓仁)이 당에 들어가 밀교를 받아들여 천태교학에 접목시켰다. 이를 태밀(台密)이라 한다. 이에 비해 진언종은 경도의 교왕호국사(敎王護國寺)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일본종파 불교의 원형이 됐다. 헤이안시대 중기가 되자 일본은 전통적인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귀족의 장원이 출현했으며 지방호족과 무사계급의 쟁투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법연(法然:1132∼1212)이 나타나 왕생을 위해 다른 잡행(雜行)을 버리고 오로지 염불만 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천태종에서 공부했으나 독립을 선언하고 정토종(淨土宗)을 세웠다. 또 그의 제자 친란(親鸞:1137∼1262)은 아미타불의 자비에 의해서만 왕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 타력보은의 염불을 강조했다. 그는 다시 정토종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종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최대의 종파가 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다. 법연과 친란은 중국의 담란·도작·선도의 가르침을 계승하되 새롭게 해석하여 독특한 정토교의를 확립했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 비예산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돼 조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민중사이에는 뿌리를 깊게 심어갔다. 정토종과 정토진종의 개종은 종래의 귀족불교가 민중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마꾸라시대에 더욱 확대했다. 선종은 이전까지 최징에 의한 천태의 지관법(止觀法)이 기본이었으나 헤이안시대 말기 송(宋)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수입되어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영서(榮西:1141∼1203)는 중국에 건너가 임제선 계통의 선법을 배워 귀국한 후 건인사(建仁寺)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종을 개창했다. 또 많은 중국승려도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에 선불교를 일으켰다. 한편 도원(道元:1200∼1254)은 처음에는 비예산으로 출가해 천태를 배웠으나 나중에 건인사로 옮겨 선을 배운 뒤 중국으로 유학, 조동종 계통의 여정(如淨)의 심인을 얻어 귀국했다. 그는 조동종이나 선종이란 이름대신 불심종(佛心宗)이라는 이름으로 선법을 폈으나 그의 후계자는 다시 조동종으로 종명을 채택하고 독립교단을 세웠다. 그의 저서로는 본증묘수(本證妙手)·수증일여(修證一如)를 설파한 유명한《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다. 이에 비해 임제종 계통은 중국의 전통적 공안선을 중시하여 공안에 의한 견성오도를 강조했다. 이 파는 가마쿠라와 교토를 중심으로 한 장군과 중앙의 무사귀족의 귀의를 받아 크게 번창했다. 이것은 선의 자기단련과 간결한 교리체계가 행동적인 무사계급에게 인기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건축과 회화, 시문(詩文)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마꾸라시대 새로운 불교운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일련(一連:1222∼1282)에 의한 법화종(一連宗)에 개교(開敎)다. 일련도 다른 종파의 조사들처럼 처음에는 비예산에서 공부했으나 《법화경》하나만을 의지하는 것을 종지로 세우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련종의 교의는 간결한데다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존중하는 등 이밖에도 가마꾸라 시대에는 여러 가지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교의의 중심은 염불과 선, 또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의 불교가 국가주의 또는 귀족주의였던 것과 달리 개인의 종교로 출발해 민중 사이에 교단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 공통적인 특색이다. 교학적으로 뚜렷한 특성이 보이지 않고 가마꾸라시대의 연장이 계속됐다. 그러나 사회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莊園制度)의 붕괴로 여기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던 나라나 교또의 사찰들은 곤궁해졌다. 이런 궁핍상을 타개하기 위해 불교계는 가지기도(加持祈禱)가 유행하면서 밀교화로 치달았다.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한 종파는 연여(蓮如:1415∼1499)에 의한 진종(眞宗)으로 일본재래의 조상숭배 신앙과 습합해 세력면에서 봉건영주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염불을 제창했으며 교단은 비승비속(非僧非俗) 그러나 다음시대인 에도시대(江戶:1598∼1867)에 이르면 가마쿠라 시대 이래 서민화됐던 불교는 다시 국가불교 체제로 바뀌게 된다. 이때의 불교는 새로운 봉건체제 안에서만 활동이 가능했다. 에도시대의 도꾸가와(德川) 막부는 사찰이 강대한 힘을 가지고 농민들과 결속해 체제에 대항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사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때까지 봉건영주화되어 강력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던 불교는 무력을 잃고 국가체제에 예속됐다. 국가권력에 위한 본말사(本末寺)의 행정체계를 확립했다. 막부의 명령은 본산을 통해 곧바로 말사까지 전달됐으며 각 종파는 행정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승려들은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학(宗學)을 발전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막부는 또 그리스도교(切支丹) 금지를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불교로 개종하여 사원에 신자로 등록을 하도록 했고 그 증거로 사찰에서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했다. 이런 일은 기독교도 뿐만 아니라 점차 일반국민에게도 적용되어 혼인·여행·이사 등에도 반드시 사찰이 발급하는 증명서를 가져야 했다. 이것은 일종의 호적제도로서 사찰이 그것을 관리함으로써 일본국민은 누구나 어느 사찰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제도는 나중에 일본불교의 큰 특색의 하나인 단가제(檀家制)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불교는 이 단가제도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됐으나 한편으로는 체제순응적으로 만들어 승려의 관료화와 이에 따른 안일과 타락이 일게 됐다. 명치초기 일본의 국학자들은 신도에 의한 교육추진을 선포하고 신불(神佛)을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자위책의 하나로 더욱 신불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천황과 군국주의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온 세상을 한집으로 만드는(八紘一宇) 성전(聖戰)'으로 찬양하는가 하면 천황에게 신권을 부여하고 불교적 성왕(聖王)인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앞장섰다. 신앙쇄신운동을 일으켜 불교정신 회복에 앞장섰다. 1932년 일련종의 매미의랑(妹尾義郞:1883∼1961)이 주도했던 '신흥불교 청년동맹'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일본불교의 역사적 특색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종파불교다.(祖師佛敎라고도 한다) 일 본의 종파불교는 가마꾸라시대부터 시작되어 무로마찌시대에 완전히 확립됐는데 최징을 조사로 하는 천태종, 공해의 진언종, 법연의 정토종, 친란의 정토신종, 도원의 선종, 일련의 일련종 등이 대표적이다. 가사의 색깔과 모양, 심지어는 독경의 음률까지 틀린다. 이같은 종파는 1945년 이전까지는 13종 56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13종은 법상종·천태종·화엄종·율종·진언종·융통염불종·정토종·정토진종·임제종· 조동종·황벽종·일련종·시종(時宗등이다. 그런데 종전(終戰) 이후에는 화종(和宗)·아함종 등 신흥종파가 더 생겨났다. 일본의 《종교총감》에 의하면 현재 일본불교 종파는 7개 계통의 1백 8파에 이르고 있다. 천태계가 20파, 진언계가 43파, 정토계가 25파, 선종계가 23파, 일련(법화)계가 36파, 기타 33개파 등이다. 이중 전국에 4천 개 이상의 말사를 가지고 있는 종파는 천태·진언·일련·임제·정토진종 등 8개종파로 알려졌다. 에도시대 이후 종학(宗學)불교의 발달을 바탕으로 각 종파가 세운 4년제 대학은 10여 개가 넘고 있으며 2년제 단기대학도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불교학자의 숫자도 많아 대학의 강사급 이상으로 구성된 '인도학·불교학회' 회원은 3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18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부처님은 인도의 숱한 신(神)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서양에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것을 확인할 자료는 없다. 영국의 인도에 대한 관심은 16세기부터 시작되지만 지배권확립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이 무렵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 토지를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인도에 파견되었던 영국인들에 의해 불교의 존재가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고고학·언어학·미술사적인 측면의 것이었다. 19세기말까지 불교는 다만 동양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학문대상이었을 뿐이다. D.라이즈박사의 주도로 창립된 이 학회의 중점사업은 팔리어 경전을 번역해 서구인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영문판 남방불교 성전과 그에 대한 주석서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서서히, 그리고 비교적 정확하게 서구인들에게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유럽의 불교학 전통은 스위스의 인도학 교수였던 C. 리가미의 분류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의 잉글로저먼학파, 소련의 레닌그라드학파, 프랑스와 벨지움의 프랑크벨지안학파로 분류된다. 잉글로저먼학파는 팔리경전학회를 중심으로 상좌부 불교 연구가 중심이었고, 레닌그라드학파는 범어자료와 불교용어정리 등에 업적을 쌓았다. 이에 비해 프랑크벨지안학파는 티베트·중국 등 대승불교까지 연구한 학파다. 그들은 불교를 이론적으로 탐구하면서 그 이론이 가진 진실 때문에 스스로 불교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동서의 문화교류가 시작되자 동양의 불교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전도승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또 서구인들 가운데는 동양의 불교국으로 유학, 승려가 되어 불교를 배우고 귀국해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1950년대의 중국과 티베트의 공산화, 1970년대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승려와 불교도의 유럽이민이 이루어져 이민불교가 뿌리내려가고 있다. 영국·프랑스·독일 그리고 스위스·그리스·덴마크·네델란드·이탈리아·공산권인 폴랜드 등이다. 이민불교도들은 사찰의 문을 열고 교민교화는 물론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교화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미주대륙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사람은 1859년 골드러시 때 광산노동자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에 의해서다. 동아시아계 노동자들은 미주대륙 서부지역에서 이민불교를 확대했다. 동부지역에서도 불교가 관심을 끌었다. 지식인들의 모임인 신지회는 불교가 기독교의 영성(靈性)비교 등을 통해 불교가 세계적 고등종교의 하나임을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스즈끼선사에 의해 선불교가 폭발적인 붐을 이루었다. 풍요한 물질문화에 불만을 품은 신세대 '비트제네레이션'들은 반문화(反文化)운동의 하나로 불교의 선에 큰관심을 보였다. 워낙 거대한 대륙이므로 아시아의 각종 불교전통이 혼재돼 마치 거대한 불교백화점을 방불케 하고 있다. 동양의 이민불교가 주축이지만 서양종교에 식상한 현지인들로부터 상당한 호감과 귀의를 받고 있다. 이민불교가 붐을 이루는 반면 동양의 식민지배 도구로써 붐을 이뤘던 불교를 포함한 동양학 연구 열기가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서구불교가 제대로 꽃피기 위해서는 서구인들에 의한 신앙운동 전개가 필수적이나 그 가능성은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이것은 물질의 풍요에 비례해 종교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퇴조되고 있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불교만큼 포용적이며 평화적인 종교는 없다는 점, 그리고 교리의 합리성은 몰가치화되고 갈등이 확대되는 현대세계에서 최상의 구원의 원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출처: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 원문보기 글쓴이: 태일(太一)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목요연한 글,,잘 보고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