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본원경에 대한 강설입니다.-4
지난 시간에 이어서
크게 숭앙받았던 신라의 고승 지장스님 이야기부터 잇겠습니다.
당 고종 영휘 4년(653)에 신라의 왕손인
김교각 스님이 24세에 삭발하고 지장이 되어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청양 구화산에 자리 잡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 뒤 남릉으로 갔다가
어느 청신사淸信士가 주는 《사대부경四大部經》을 가지고
구화산으로 돌아와서 석실에 모셔 놓고
눈을 감고 관법觀法 수행을 했습니다.
그 때 그는 바위틈에 있는
흰 흙을 쌀과 섞어서 삶아 먹고 있었습니다.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지장 스님이 고행하는 것을 보고 큰 절을 지어 주고,
780년경에는 장공암이라는 불자가
화성사化城寺의 현판을 옮겨 달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라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민공이라는 신도는 100명의 승려를 모시고
자주 재를 지냈는데 그 때마다
반드시 지장스님의 자리를 비워두고 청하여 수를 채웠다고 합니다.
하루는 아랫마을 민공이라는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스님을 받들어 절을 짓겠다고 하니
“나는 가사만한 땅만 있으면 되니 알아서 하라.”하였습니다.
이에 민공이 땅을 보시하여 스님이 그 땅에 가사를 펼치자
구화산 전체를 꽃핀 듯이 덮어서 대 도량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민공이 구봉을 모두 보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구각스님에게 출가시켜
도명道明이라고 하였는데
민공은 후에 다시 도명의 제자가 되었다 합니다.
그 후 803년 여름,
대중에게 작별하고 함 속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죽었는데 함 속의 얼굴이 3년이 지나도
살아 있는 것과 같이 그 뒤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최근에 탑 속을 확인한 결과 죽을 때의 모습과 같이
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교각스님을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하고 있고,
그가 물렀던 곳에
육신전肉身殿을 세워 지장왕궁이라 하였습니다.
지금도 구화산에는
신라 지장스님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도 있으며
최근에는 스님의 등신불에 개금을 하여
더욱 그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보살菩薩의 뜻을 보면,
‘보살’은
범어 ‘보디사트바(Bhodhisattva:보리살菩提薩)로서
‘보리’의 ‘보’자와 ‘살타’의 ‘살’자만 떼어서 약어를 만들었습니다.
‘보리’는 ‘깨달은 자[覺者]’ ‘길[道]’의 뜻이 있고,
‘살타’는 ‘유정’, ‘중생’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중생’ ‘깨달을 중생’이라 하고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밑으로는 중생을 제도코자 서원한 사람’,
‘사홍서원의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밝히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본원本願은 원願이라 하면
한 가지 일에 대하여 뜻을 세우고
목적을 달성할 때 까지 전진하는 마음입니다.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는
이것을 ‘서誓’라 하고,
‘뜻이 불분명했을 때 결정하는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을 ‘다라니’, ‘권선징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願에는 총원과 별원이 있습니다.
사홍서원과 같이
모든 원願을 종합적으로 설하는 경우를 총원이라고 하고,
여래 10대 발원문이나 아미타불 48원,
약사여래의 12대원, 관세음보살의 16대원 같은 것은
그 분만이 가지는 특별한 원願이므로 별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6도 중생의 고난을 다 없애주겠다고 서원하였지만
특히 지옥중생들을 다 건지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 원願의 넓고 깊음이 산과 바다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지장경은
지장보살의 본원력과 본행력,
서원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소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배움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못 알고 가면 또 언제 올 날이 오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4년 02월 15일, 오전 06;1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운월야인雲月野人 진각珍覺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