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동서남북
[동서남북] 이번에도 ‘전기료 포퓰리즘’ 정권인가
조선일보
전수용 기자
입력 2023.04.04. 03:00
https://www.chosun.com/opinion/dongseonambuk/2023/04/04/XRDSWY5HGFBHVOCLXZXTCQAZ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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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막은 2분기 요금 인상
前 정부 포퓰리즘 비난하더니
빚더미 한전, 하루 이자 38억원
2분기 못 올리면 정상화 멀어져
지난해 한국전력공사의 영업손실이 32조6034억원을 기록하면서 대표적인 에너지 공공요금인 전기료 인상 압박이 더욱 커지고 있다. 사진은 2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전력 서울본부의 모습. 2023.02.27. /뉴시스
지난달 31일 예정됐던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 발표가 전격 취소됐다. 인상도 동결도 아닌 어정쩡한 결정이었다. 근데 이번 요금 인상 논의 과정을 보면 가관이다. 전기 요금은 전기사업법에 따라 한전이 조정안을 작성해 산업부에 신청하면 산업부 산하 전기위원회의 심의·의결 절차를 거쳐 산업부가 최종 인가한다. 이 과정에서 물가안정법에 따라 산업부가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거친다. 하지만 이번에는 여당이 나섰다. 그동안 물가를 고려한 청와대나 여당 입김이 요금 결정에 반영되기도 했지만 이번처럼 여당이 전면에 나선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난달 29일 당정협의회에선 “요금이 적정하게 조정되지 못하면 2023년 한전 적자는 최대 15조원, 가스공사 미수금(사실상 적자)도 13조원까지 누적될 우려가 있다” “그동안 인상에도 여전히 원가 이하 요금으로 한전·가스공사 재무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 자릿수냐 두 자릿수냐 인상률에선 동상이몽이었지만 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정이 뜻을 같이한 것이다. 30일 산업부와 한전은 요금 결정에 필요한 절차인 전기위원회와 한전 이사회 개최를 예고했다. 하지만 자정쯤 전기위원회, 이사회는 취소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맥이 빠진다”고 했다. 결국 31일 요금 인상 발표는 없던 일이 됐다. 산업부는 2일에도 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예고했다가 돌연 취소했다.
국정 지지율 하락에 놀란 여당은 이틀 만에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손바닥 뒤집듯 했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요금 인상을 보류해 한전·가스공사를 망가뜨렸다고 비난하던 여당이었다. 전(前) 정부 포퓰리즘을 비판하더니 이젠 자신들이 포퓰리스트를 자처하고 있다. 여당의 정책위의장은 “좀 더 여론 수렴을 한 뒤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제 문제를 여론으로 풀겠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가 책임 회피용으로 즐겨 쓰던 공론화위원회라도 만들겠다는 건지, 찬반 여론조사라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비정상적인 전기 요금이 고착화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은 한둘이 아니다. 작년 한전 적자는 32조원이다. 올 1분기도 5조원대 적자라고 한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전기 사 올 돈이 없어 회사채로 빌린 돈이 작년에만 37조원이다. 올해도 원가회수율이 70% 정도에 불과해 9일 간격으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매년 6~7조원 수준인 송배전망 투자가 위축되면서 전력망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전 손실은 한전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손실은 대주주인 산업은행으로 연결되고, 산은의 자기자본 비율이 떨어져 기업 자금 지원 여력이 줄게 된다. 고물가 핑계를 대지만 비정상적인 에너지 가격은 에너지 소비 증가, 무역 적자 심화, 환율 상승, 수입 물가 상승,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물가 관리를 담당하는 이창용 한은 총재가 전기 요금을 적정 수준으로 올려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고 언급한 이유다. 빚더미 한전이 내야 하는 하루 이자만 38억원이다. 1년이면 1조4000억원이다. 요금 인상을 계속 미루면 결국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모두 국민 부담이고 전기를 많이 쓰는 고소득 가구, 대기업이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다.
냉방비로 전기 요금이 치솟는 3분기, 난방비 부담이 커지는 4분기, 총선이 있는 내년 상반기에 요금 인상 총대를 멜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있겠는가. 요금 인상 충격을 그나마 줄이려면 에너지 사용이 가장 적은 2분기가 적기다. 이것저것 고려할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회색 코뿔소(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대처를 소홀히 하다 당하는 위기)에 들이받히기 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