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에 관한 자료를 준비 하는 중 울산에서 조금 멀지만 봉화에 김늑의 묘가 있다는 자료를 보고
차를 몰아 갔다.
그러나 쉽게 주소가 나오지 않아(필자가 몰라서 그런 것 같다) 봉화에 김늑 묘 부근 면사무소에 가서
위치를 물어 알아 냈다.
상운면 사무소에서 불과 100m거리에 있지만 신도비와 묘지의 주소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도 쉽게 찾지 못해서 면사무소에 들린 것이다.
봉화의 신도비는 필자가 가진 자료는 김륵과 2좌의 신도비 뿐이다.
자료가 없어 가진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갈 곳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다리를 건너 주차를 할 곳을 찾으니 없어서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걸어가니 먼저 신도비가 보인다.
원래 신도비는 묘를 만들때 세우지만 사후인 정조때 세워 지는데 그 이유는 정조때 시호를 받고 하여
신도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글씨 번암 체제공이 썼는데 번암집에는 신도비명이 보이지 않는다.
거북 머리는 많이 닳아 희미 하지만 비수의 용의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쌍용이 여의주를 보호하고 양발은 그 아래로 조성되고 꼬리는 둥글 원이 보인다.
맨 아래는 구름이 산의 모양을 하였다.
용의 얼굴은 일반적으로 용의 구성요소로 하지만 여기서는 보이는 것은
필자의 생각이지만 범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먹는 느낌이 물씬난다.
김늑의 기록은 여러 곳에 보이지만 필자가 주목한 것은 경상우도 관찰사이다.
그전에는 안찰사를 하였는데 그 당시는 임진왜란이라 전라도와 경상도의 안찰사로 가서 백성을 위무하고
지방관리들을 관리한 것이다.
그리고 경상우도 관찰사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초중기에는 경상도의 관찰사가 우도 좌도 나누어 졌다는 것을
알수 있느데 조선 말기에 그러한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실록에는 경상도가 좌우도로 나누어 진것을 김늑이 다시 합쳐야 한다는 계를 올리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김늑의 기록에 경상도 선생안에 보이지 않는데 대구에 있는 경상도 선생안이 좌도관찰사가 그런것으로생각된다.
김늑의 묘는 신도비 우측산으로 가면 볼 수 있는데 묘비에 보이는 쌍용의 표현이 신도비와 비슷하여
신도비의 용의 표현은 아마 묘비를 보고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김늑의 묘는 우측으로는 조그마한 川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완만한 경사가 있는 동네라 풍수적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형식이 조합된 명당의 자리로 보아진다.
물은 용의 뜻하고 땅은 백수의 왕인 범이 호령으로 하는 것으로 그러한 자리에
묘를 썼으니 명당중의 명당으로 생각된다.
풍수는 깊이 공부하지 않아 글쓸것이 별로 없지만 여러군데 묘를 보니 어느정도 식견이 생겨난다.
김늑의 묘에서 특이한것은 세호이다.
망주석에 새긴 세호는 동은 올라가고 서는 내려 간다 하였지만 김늑의 묘에 보이는 망주석의
세호는 동서의 망주석의 표현은 다 올라가는 것이기에 다른 곳과는 다른 표현이다.
여러군데 묘소를 보니 풍수도 보이고 경상도의 관찰사가 좌우도 나누어진 것이 조선말기가아닌 것을 알았고
세호가 반드시 동서내려가고 올라간다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여러가지로 알찬 답사 였다.
신도비는 보고 묘를보는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