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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3편
주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
박길현 목사(언약교회)
주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시23)
씨 에스 루이스가 쓴 어린이 동화집 나니아 나라 이야기 4권에는 재미있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슬란이라는 거대한 사자가 위기에 처한 나니아를 구하기 위하여 네 사람의 아이들을 나니아의 돌탁자 언덕으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나니아를 위험에 빠뜨린 못된 왕의 군대와 싸워서 나니아를 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네 아이들을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네 아이 중의 맨 막내인 루시에게 자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루시에게 오빠들과 언니를 깨워서 자기를 따라 오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만약 오빠들과 언니가 따라 오지 않으려고 하면 루시 혼자라도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루시는 가서 자고 있는 오빠들과 언니를 깨웁니다. 하지만 고된 여행에 지쳐서 곤하게 잠이 들어 있는 오빠들과 언니를 깨우려니 잘 일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큰 오빠를 깨워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오빠, 일어나, 어서! 아슬란님이 여기 계셔. 그분 말씀이 당장 자기 뒤를 따라 오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큰 오빠는 "알았어, 우리 네가 그러자면 그럴게."라고 말해 놓고는 돌아 누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다음에는 언니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언니는 깨어나기는 했지만 짜증을 내면서 말했습니다. "루시, 넌 꿈을 꾼 거야. 다시 잠이나 자"라고 말했습니다.
막내는 다시 둘째 오빠를 깨워서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째 오빠는 좋아라 만세를 부르면서 아슬란님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합니다.
그래서 루시는 사자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거기는 아슬란이 루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시가 오빠들과 언니를 깨워서 데리고 자기 뒤를 따르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막내 루시 외에는 아무에게도 거대한 사자 아슬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승강이가 있은 후에야 언니와 오빠들은 겨우 루시를 따라 나서게 됩니다. 거대한 사자가 앞에서 가는데도 루시 한 사람에게만 그 사자가 보입니다. 그래서 루시는 사자만 보고 따라 가고, 오빠들과 언니는 루시만 보고 따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한동안 따라 간 후에야 서서히 다른 사람들도 아슬란이 앞에서 자기들을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루이스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는 영문학자요 기독교 변증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린이 동화도 썼습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나니아 나라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 동화로 쓰였지만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한 책입니다. 저는 이 동화에서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를 읽다가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동화 속의 아슬란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는 듯이 그 분을 믿고 따르고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듯이 허둥되면서 따라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믿으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잘 못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대략적으로나마 이야기는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략적인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도 그 분이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을 어떤 것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략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에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했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믿음의 출발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고 그 나라를 향해서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해 볼 때 이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난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약 4100년쯤 전에 자기가 살던 집과 부모와 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어디인지도 모를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가족 중심으로 살 던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 나도 가족들이 힘을 모아서 물리치던 세상이었습니다. 때문에 자기의 가족과 친척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가 의지하고 살던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닥쳐 올 다른 족속의 침공에서 자기를 지키는 길은 가족과 친척인데 이것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위험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게 된 것은 자기가 똑똑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강력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자기 고향을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식과 상황을 뛰어 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서 믿음의 길을 시작하게 하시고, 또 계속해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요, 참으로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박에 없는데, 그렇게 시작한 믿음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앞서서 인도해 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믿지 않다가 믿게 된 사람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집에서 살아 온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집에서 자라 온 경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성하여서 된 나라입니다. 조상 때부터 믿는 집안의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라고 해서 믿음이 쉽게 받아들여지거나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노예로서 살다가 해방이 되어 나오게 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한 나라가 자기들이 종으로 부리던 노예 민족을 내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애굽의 바로가 노예 민족으로 부리던 이스라엘을 내 보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광야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농사도 짓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내리시는 하늘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주변 열국을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윗 시대아 솔로몬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은 엄청난 범죄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망한 그곳에서 이방 나라 왕 고레스의 특명으로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의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시는 형식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조상이 아무리 신앙으로 살았다고 해도 조상의 신앙은 여러분의 신앙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 속에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인생의 관문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신앙을 버릴 뻔했던 위험한 순간도 여러 번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도 지금까지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생애에서 함께 계시면서 앞서서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여러분은 보십시오. 여러분의 조상의 신앙 때문도 아니고, 자신이 똑똑한 것 때문도 아닙니다. 주님이 앞서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의 여러분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는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가장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인도하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아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위에서 아들을 아버지는 어디로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로 인도하셨습니다. 죽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인도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죽는 길로 아들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이 세상과 반대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인도였습니다.
여러분의 생에서도 이점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을 닮지 아니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해 왔으며, 또 그 고통을 능히 당하는 힘이 주어져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그것을 감당해 왔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 속에서도 여러분이 찬송하고 기도했다면, 여러분은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니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켜서 감방문을 열고, 묶었던 쇠고랑을 다 풀어버리고, 간수와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복음 전파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사역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인간의 상황과 상식을 넘어서서 믿게 되어서 신앙의 길로 걸어 온 경우, 이스라엘 백성처럼 초월적인 간섭 속에서 믿음의 삶이 보존되어 온 경우, 예수님의 경우처럼 십자가로 죽으면서도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경우, 사도들이 갔던 것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도하며 찬송하면서 지난 온 경우가 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이 세상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곧 십자가를 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기의 삶에서 주님이 자신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 좀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까? 여러분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것이 분명히 보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은 여러분을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도는 여러분의 이 세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 육신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지, 이 육신 생활을 벗어나서 어떤 신령한 세계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육신 생활 속에서도 있습니다. 육신 생활이 어떤 것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더 살도록 하신다면, 그렇게 만드실 것이고, 육신 생활이 망하고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죽지 않고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살도록 남겨 두실 이유가 있어서 남겨 두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강력하게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재주와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 때문에 육신 생활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나 육적인 면에서나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을 깨닫고 바라보십시오.
어쩌면 지금은 그분이 보이지 않는 분들도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루시에게만 보이든 주님이 루시의 뒤를 따라 가다가 보니 나중에는 모두에게 보이듯이, 지금은 주님이 보이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먼저 보고 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집안에서 먼저 주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뒤를 열심히 따라 가십시오. 그렇게 가다가 보면 주님이 보일 것입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자비로운 분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우연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주 하나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고 있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끌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보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