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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징 : 심볼(symbol) |
일원상은 하나의 심볼, 도본(圖本)입니다. 심볼은 종교마다 다양하지요. 기독교는 십자가지요. 저희는 형체가 아니라 심체(心體)입니다. 일원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일원상 자체가 진리인 것이 아닙니다. 일원상은 진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2. 이명(異名) : 법신불(法身佛), 진여(眞如), 여래(如來), 하나님, 무극(無極), 상제(上帝), 법왕(法王), 심군(心君), 본심(本心), 천지모(天地母) |
일원상에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①법신불(法身佛)
법신불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모두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도 쓰이고, 법신, 보신 화신 중 하나로서 법신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도 쓰입니다. 일원상의 다른 이름이 법신불이라고 얘기할 때, 법신불은 법신/보신/화신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②진여(眞如)
진여(眞如) ‘참 진, 같을 여’입니다. 여여(如如)하다.“참되고 그대로 같다”는 말입니다.
③여래(如來)
여래(如來)는 ‘온 것 같다’는 뜻입니다.
④하나님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원불교에서 일원상과 같습니다. 물론, 약간 다른 점이 있긴 합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인격화 된 대상으로만 본다면, 이는 일원상과 완전히 맞지는 않습니다. 원불교는 전체신앙이거든요. ‘A가 부처님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일 수도 있고, 맞는 말일 수도 있어요. ‘다른 이들은 부처가 아닌데, A만 부처다’라고 말한다면 틀린 말이지요. ‘다른 이들도 부처이고, A도 부처다’라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고요. 하나님도 부처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인격화된 대상으로서의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보고 인격화된 대상인 아닌 것들은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때의 하나님은 일원상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⑤무극(無極)
⑥상제(上帝), 법왕(法王), 심군(心君)
⑦본심(本心)
⑧천지모(天地母)
일원상은 천지를 낳아주신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천지는 부처님일까요? 천지‘만’ 부처님이라 말하면 틀린 말이지만, 천지‘도’ 부처님이라 표현한다면 맞는 말이지요.
[일원상에 대한 정전대의 해설]
사은의 본원(四恩 之本源) = 우주 만유의 본원(本源) 여래의 불성(如來 之佛性) = 제불제성의심인(心印), 일체중생의본성(本性)=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 |
대산종사 정전대의 내용인데요.
대종사님께서 일원상 그림 밑에, ‘사은의 본원’, ‘여래의 불성’이라 직접 쓰셨습니다.
[사은의 본원]
일원상은 첫째, 사은(四恩)의 본원입니다. 정전에 ‘일원상의 진리’를 보면 일원상이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면 사은과 우주만유는 어떤 관계일까요? 같습니다. 사은은 우주만유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우주만유 전체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본원(本原)에서 나왔습니다. 천지도 부모도 동포도 법률도 전부 우주만유의 본원에서 나왔습니다.
본원은 ‘근원이면서 실제다’라고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원이 따로 있고, 사은이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설명을 하기 위해 방편으로서 나눈 것입니다. 사실은, 사은과 본원이 동시에 있거든요.
[여래의 불성]
일원상은 둘째, 여래의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일원상의 진리’에서는 ‘제불제성의 심인’,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표현했습니다.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제불조사·범부중생의 성품’이라 표현했습니다.
<신앙문 / 수행문>
유인물 4쪽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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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
사은(우주만유)의 본원 = 리(理) 인과보응 = 음양상승(陰陽相勝) 변(變) = 무상(無常) 타력(他力) 외적 위력
체(體) : 사은(四恩) 용(用) : 사요(四要) | 여래의 불성,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성(性) 불생불멸 = 진공묘유(眞空妙有) 불변(不變) = 유상(有常) 자력(自力) 내적 속성(체성)
체(體) : 삼학(三學) 용(用) : 팔조(八條) | ||||||||||||||||||
진리 신앙 처처불상, 사사불공 복(福) | 사실 수행(훈련) 무시선 무처선 혜(慧) |
일원상은 불이문(不二門)입니다. 둘이 아닌 문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문’이라는 용어를 종종 쓰지요. 문(門)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면서, 안이기도 하고 밖이라는 의미에서 쓰는 말입니다. 경계이지요.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
일원상은 첫째, 신앙의 대상으로서 일원상입니다. 이때의 일원상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마찬가지지요.
일원상은 둘째, 수행의 표본으로서 일원상입니다. 제가 법당을 들어서면서 인사할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에 일원상을 늘 봅니다. 신앙의 대상으로만 일원상을 바라본다면 일원상을 굳이 바라 볼 이유가 없어요. 그러나 원불교인은 늘 일원상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난 뒤 늘 일원상을 쳐다봐야 해요. 왜냐하면, 일원상이 나와 둘이 아닌 내 마음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표본으로서 내 마음자리이기 때문에 쳐다보는 것이지요. 제가 법회를 보기 위해 법당에 들어설 때는, 본래의 내 마음처럼 오늘 법회를 보겠다는 의미로 일원상을 제가 보는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신앙의 대상으로서도 바라보지만, 수행의 표본으로서도 일원상을 보셔야 해요.
<리(理) / 성(性)>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사은(우주만유)의 본원 = 리(理) | 여래의 불성,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성(性) |
일원상을 ‘성리’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리(性理)’에서 성(性)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성품, 성질, 성격이지요. 리는 이치를 의미하지요. 인과의 이치 같은 거죠.
일원상은 신앙의 측면에서 ‘사은의 본원’입니다. ‘우주만유의 본원’이지요. 우주만유는 천지만물(天地萬物) 허공법계(虛空法界)입니다. 유형의 천지만물, 무형의 허공법계ㅡ 이 모든 것의 본원입니다.
일원상의 수행의 측면에서 ‘여래의 불성’, ‘제불조사 범부중생의 성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원상이 범부중생의 성품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범부중생이어도 여러분의 본성으로서 일원상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본성(本性)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에 녹차 티백을 넣었다치면, 물의 색깔이 초록색으로 변하지요. 그러나 물의 본성은 투명한 것이었습니다.
원불교는 ‘내가 중생이니까 열심히 수행적공해서 열심히 닦아서 부처님의 존재로 향해간다’는 식의 공부가 아닙니다. ‘내가 본래 부처였는데 여러 생을 살면서 구름에 가린 달과 같이 무명업장(無明業障)으로 가려졌다. 무명업장을 벗겨내고, 무명업장을 꿰뚫으면 본래 내 자리를 회복 한다’라는 식의 공부입니다. 원불교는 복성설(復性說)입니다. 성품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본성(本性)을 회복한다는 말은 견성(見性)으로 본성이 있음을 깨닫고, 양성(養性)으로 본성을 관리하고, 솔성(率性)으로 본성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인과보응(因過報應) / 진공묘유(眞空妙有)]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인과보응(因過報應) = 음양상승(陰陽相勝) | 불생불멸(不生不滅) = 진공묘유(眞空妙有) |
일원상은 인과보응의 신앙문이고 진공묘유의 수행문입니다.
인과보응은 음양상승과 같은 말입니다. 육조대사 혜능이 있는 곳에서 스님이 법문을 하는데, 스님 두 명이 싸우고 있었대요. ‘번동(旛動)’이냐, ‘풍동(風動)’이냐, 즉,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가’ 라고 싸우고 있었답니다. 육조대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심동(心動)’입니다.”
‘번동(깃발이 움직인다)’, ‘풍동(바람이 움직인다)’는 신앙문 쪽 이야기입니다. 깃발이나 바람은 변화하는 것이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육조 대사는 변화하지 않는 ‘마음(心)’을 말했습니다. 불변의 마음이 변화하는 깃발과 바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람과 깃발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둘이 아닌 불이문’을 한쪽을 ‘진여문(眞如門)’ 다른 한쪽을 ’생멸문(生滅門)‘이라 표현했습니다.
[변(變) / 불변(不變)]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변(變) = 무상(無常) | 불변(不變) = 유상(有常) |
그런데 헷갈리시면 안 됩니다. 이쪽 세상이 있고, 다른 쪽 세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창문을 열면 안쪽 바람이 밖으로 불어가는 동시에 바깥바람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성입니다. 변과 불변이 하나로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당 벽이 소나무로 된 게 있는데, 춘향목이라는 좋은 소나무라서 1000년 지나도 안 썩는답니다. 그러나 그 소나무가 2000년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대로 안 있겠지요? 소나무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천년 이상 가니까요. 그러나 오만 년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나무는 금방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왜 일원상 진리를 어렵다고 생각할까요? 오늘날 과학 탓도 있고, 교육 탓도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은 사진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을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종교가에서 보기에는 어떤 물체라도 1초전과 1초 뒤의 모습이 다릅니다. 종교가에서 유가 있고, 무가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입니다. 영화 필름과 같습니다. 사진 여러 장을 빠르게 돌려버리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요. 모든 물체가 고정된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가 다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有)는 유(有)가 아닌 것입니다. 유이비유(有而非有)라 합니다. ‘있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변을 ‘무상(無常)’이라, 불변을 ‘유상(有常)’이라 합니다. 일원상 서원문에는 ‘유상으로 보면’, ‘무상으로 보면’이라 표현하셨지요. 이 말은 유상/무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상의 관점에서 보자면’이라는 뜻인 것이지요. 일원상에 대한 설명 방식이 ‘유상’, ‘무상’으로 다른 것입니다.
[타력(他力) / 자력(自力)]
수행은 내적(內的)이면서 자력적입니다. 수행은 자기 인격 관리입니다. 신앙은 외적(外的)이며 타력적입니다.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타력(他力) | 자력(自力) |
[외적 위력(威力) / 내적 속성(體性)]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
외적 위력
| 내적 속성(體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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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 서원문에서 ‘위력을 얻고’, ‘체성에 합하도록 까지’라 하지요. 위력은 외적인 것으로서 신앙의 부분이고, 속성은 내적인 것으로서 수행의 부분입니다.
일원상의 신앙문은 ‘보여지는 것’입니다. 한편, 수행문은 ‘보는 그 자체’입니다. 개교의 동기에서 ‘현하(現下)’라 표현했는데, ‘현하’ 그 자체가 ‘보는 그 자체’로서 일원상입니다.
(1) 외적 위력 : 천지/부모/동포/법률
신앙의 대상은 외적 위력입니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그 위력 덕분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보은해야하고 신앙해야합니다.
외적 위력은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천지/부모/동포/법률입니다. 우주만물 네 가지로 쪼갠 것이기도 하고, 우주만물 은혜의 위력을 네 가지로 쪼갠 것이기도 합니다. 천지/부모/동포가 있고, 이를 받쳐주는 것이 법률입니다. 이렇게 사은이 나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부모를 쪼개면 부모 안에 천지, 동포, 법률이 섞여 있어요. 사은은 우주를 4가지를 대체로 분류한 것일 뿐입니다.
(2) 내적 속성 : 공(空)/원(圓)/정(正)
일원상의 내적 속성은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원/정입니다. 공/원/정이 하나의 통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空)은 ‘비었다’는 말인데, 무엇이 빈 것일까요? ‘욕심이 비었다’는 뜻입니다. 사(私)가 비었다는 뜻입니다. 돈공(頓空)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도 공(空)은 공(空)인데 공이불공(空而不空, 비었되 비지 않았다)입니다. 텅 비었는데 욕심이 비고 사가 비었습니다. 그래서 지공무사(至空無私)이지요.
원(圓)은 ‘두렷하다’, ‘밝다’는 뜻입니다. 광명(光明)이지요.
정(正)은 조화를 의미합니다. 돈공과 광명의 조화를 의미하지요. 정이 그대로 인과로 갑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총부에서 구두장 장사꾼에게 구두장을 샀는데, 그 상인이 구두장을 며칠날 들고 오겠다고 약속해놓고, 며칠 늦게 가져왔습니다. 마침 밥 때가 되니까, 대종사님이 ‘그 사람 밥 주지 마라’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느 제자가 몰래 밥을 줬대요. 대종사님 말씀하시기를 ‘너는 참 자비롭고, 나는 아주 자비롭지 않은 사람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댓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대종사님 뜻이었지요. 그게 정(正)입니다. 약속을 안 지키면 밥을 안 준다는 점을 가르쳐야한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안 지켜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면 정(正)이 아니에요.
종교가는 약자보호를 무조건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에요. 시험공부 안 한 사람, 잘 한 사람 둘 다 시험 붙게 하면 어떡합니까? 잘 한 사람은 붙고, 안 한 사람은 떨어지는 것이 정(正)이고 조화이고 인과이고 진리이고 은혜입니다.
① 삼학(三學) : 수양(修養)/연구(硏究)/취사(取捨)
삼학은 내 안에 공원정의 속성을 그대로 갖다 쓴 것입니다.
공원정의 속성을 회복하자는 것이 수양입니다. 수양의 첫째는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번뇌가 많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신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서원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비워야 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보다 몇 배 이상의 욕심이 있으므로, 본래 내 마음 자리인 공(空)의 자리를 수양해야 합니다. 공의 자리가 온전한 나의 본래 자리입니다.
수양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비우면 맑아집니다. 연못에 동전이 떨어졌을 때, 동전 찾으려고 연못 휘저으면 동전이 보이겠어요? 가만히 놔두면 연못이 맑아져야 보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비우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마음이 맑아집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마음의 지혜광명이 밝아집니다.
수양이 없는 깨달음은 없어요. 수양 그 자리가 그대로 연구로 이어집니다. 수양이 없는 연구는 지식은 되겠지요. 그러나 연구는 관조(觀照)로서 반드시 깨쳐야하는 것이지요. 관조는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수양으로 되는 것이 관조예요. 그래서 수양이 없는 연구는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취사는 우리 본래 마음이 그대로 조화가 있어지는 그 마음 그대로를 가져다 쓰자는 것입니다.
② 정(定)/혜(慧)/계(戒)
불교에서는 삼학을 정/혜/계라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수양 위주의 선정(禪定), 연구 위주의 교종(敎宗), 취사 위주의 율종(律宗)이 따로 있는데, 대종사님은 삼학을 병진해야한다고 하셨지요. 공/원/정은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삼학을 병진해야한다고 보셨습니다.
③ 양성(養性)/견성(見性)/솔성(率性)
공/원/정을 양성/견성/솔성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수양을 하면 조금 밝아집니다. 그러면 견성을 하게 돼요. 견성을 하면, 양성이 필요합니다. 견성이 10의 에너지라면, 양성과 솔성은 990입니다. 한번 깨치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한 번 깨치고 만 사람은 드뭅니다. 두 번 세 번 깨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도 한번 깨친 다음에 변산에서 새로 깨쳤어요.
견성을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다 갖추기는 했으나 아직 힘이 없습니다. 더 자라야하지요. 어린아이가 힘을 키우는 것이 양성, 솔성입니다. 예전에는 견성만 해도 도인(道人)이라 말했어요. 그러나 견성은 해도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고 업력은 그대로 남아있거든요. 진짜 공부는 견성 뒤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원불교는 처음에 일원상 나오잖아요. 견성부터 공부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원불교 염불법도 견성하라는 공부이고요.
④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
법신/보신/화신도 공(空)/원(元)/정(正)에서 나옵니다.
⑤영(靈)/기(氣)/질(質)
영/기/질도 마음의 공/원/정과 연관됩니다. 다 따로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의 세 부분과 다 연결됩니다.
[체와 용]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체(體) : 사은(四恩) 용(用) : 사요(四要) | 체(體) : 삼학(三學) 용(用) : 팔조(八條) |
수행의 체(體)는 삼학이고, 용(用)은 팔조입니다. 신분의성(信忿疑誠)으로 수양, 연구, 취사를 각 하는 것이지요. 정신수양도 신분의성으로 합니다. 사리연구도 신분의성으로 합니다. 작업취사도 신분의성으로 합니다.
신앙문에서는 사은(四恩)이 체(體)가 되고, 사요(四要)가 용(用)이 됩니다. 인류간 상호불공법인 사요입니다. 사은 중에서도, 그중 특히 인류에 대해 하는 불공법이 사요인 것이지요. 사요를 실천하면, 천지/부모/동포에 대한 보은도 어느 정도 실천이 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복(福) / 혜(慧)]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진리 신앙 | 사실 수행(훈련) |
원불교는 진리신앙이면서 사실수행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수행을 훈련이라고도 표현하셨지요. 견성(見性)/솔성(率性)/양성(養性)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훈련입니다. 삼학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 훈련이지요. 동시(動時)와 정시(靜時)에서 훈련하고, 상시훈련과 정기훈련으로 이 마음을 훈련하고요.
[처처불상 사사불공 / 무시선 무처선]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처처불상(處處佛供), 사사불공(私私佛供) |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신앙을 묶으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입니다. 수행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선(禪)입니다. 무시선 무처선입니다.
[복 / 혜]
신앙의 대상 | 수행의 표본(標本) |
복(福) | 혜(慧) |
신앙을 하는 것은 복족족(福足足)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께서 교당에 오신 이유도, 여러분이 행복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잣집 아들이 공부를 안 하면, 살림이 서서히 말아 먹게 되잖아요.
복(福)과 혜(慧)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부처님은 복혜양족(福慧兩足)한 분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관리 한쪽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에 가보세요. 팀워크가 필요하지요.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잘하면서 자기관리가 잘 안되어도 곤란하지요. 자타(自他)간에 기가 막힌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일원상>
유인물 3쪽을 다시 봅시다.
[무생법인]
무생법인(無生法印) |
무생법인에서 무생(無生)은 불생(不生)입니다. 무생법인은 불생하는 법인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장, 印)은 불변을 의미합니다. 도장은 찍을 때마다 똑같습니다. 변하지 않지요.
일체중생에 대해서는 ‘심인(心印)’이라는 말을 안 쓰고, ‘본성(本性)’이라고만 표현하지요. 중생은 도장 같은 마음이 아니라, 감정에 따라 상에 따라 찌그러지는 마음이거든요. 그러나 제불제성의 마음은 도장처럼 찍을 때 마다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제불제성의 심인’이라 표현합니다.
무생(無生)의 마음, 즉, 생이 없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내가 잘 났다’라는 생각은 ‘생(生)’이 있는 마음이에요.
진짜 마음은 무생의 마음이에요. 그 마음이 체(體)가 된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그 마음을 깨쳐알아서 여기저기에 가져다 쓰는 것이 진정한 공부인이지요. 그러나 무생공부를 안 하면, 상(相)으로 살고, 나타나는 세계에 에너지를 쓰며 사는 것이지요.
[삼세제불의 도본, 천만경전의 근원]
삼세제불의 도본(圖本), 천만경전의 근원 |
그리고 일원상은 삼세제불의 도본입니다. 삼세에 A, B, C라는 부처님이 각각 있지만, 사실은 다들 일원상을 그 시대와 인심에 맞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천만경전도 일원상에서 나온 것이고요. 대종사님은 서당 다닌다가 마신 분이에요. 그래도 일원상을 터득해서 회복해서 사용하니까, 거기서 천만경전이 다 나올 수 있습니다.
[대적광전]
대적광전(大寂光殿) = 공적영지의 광명(空寂靈知光明) |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전(殿)은 집을 의미하고, 대(大)가 적(寂)을 꾸며주고 또 광(光)을 꾸며줍니다. 즉, 대적광전은 크게 적적하고 크게 빛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이라 하기도 합니다.
적(寂)은 사(私)가 없다는 뜻이고, 욕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적은 고요함입니다. 적과 반대되는 말은 요란함입니다.
‘고요하고 두렷하다’라는 말에서 ‘고요함’이 적이고, ‘두렷함’이 광입니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표현하기도 하지요. 적적(寂寂)은 적(寂)이고, 성성(惺惺)은 광명입니다. 적적, 성성이 쌍으로 맞돌아 갑니다.
저를 보고 눈을 감아 보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청중 : 예). 여러분이 예라고 말한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예”라고 대답하는 말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것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예”라는 말이 나온 그 구멍은 어떤 색깔이고, 어떤 크기입니까? ’일원상 진리‘ 설명할 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시 눈 뜨시고요.
대산종사께서는 항마위가 되려면 소적광(小寂光)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출가위는 ‘중적광(中寂光)’이고, 여래위는 ‘대적광(大寂光)’이지요. 항마위가 되려면 ‘대적광명’은 아니더라도 ‘소적광명’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진장의 보고]
무진장의 보고(無盡藏寶庫) |
일원상은 무진장의 보고입니다. 고시 패스하거나, 좋은 회사 다녀서 보물을 얻는 것이 아니에요. 보물창고가 따로 있지 않아요. 일원상이 보물창고입니다.
[복혜의 원천]
복혜의 원천(福慧源泉) |
일원상은 복혜의 원천입니다. 복혜의 물줄기가 나오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일원상 자리에서 복과 혜가 샘솟듯 계속 솟아오릅니다.
[일념미생전 소식]
일념미생전 소식(一念未生前消息) 부모출생전 소식(父母出生前消息) 천지미분전 소식(天地未分前消息) |
일원상은 일념미생전 소식, 부모출생전 소식, 천지미분전 소식입니다.
과학은 일념의 세계입니다. 일념의 세계는 부모의 세계, 천지의 세계와 같은 말입니다. 상대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나타난 세계이지요.
그 상대 세계의 이전 자리는 그 상대 세계가 나온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절대 자리입니다.
소식(消息)은 사라질 소, 쉴 식입니다. ‘사라져서 쉰 자리’라는 뜻입니다.
‘일념미생전 소식’은 한 생각 나오기 전 사라져서 쉰 자리입니다.
‘꿈도 없이 잠 잘 때 어디에 있느냐’는 의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예”라고 대답했던 그것은, 꿈도 없이 잠잘 때 어디에 있습니까?
[불법만법위려자]
불여만법위려자(不與萬法爲侶者) |
대종사님께서 변산에 갔을 때 ‘불여만법위려자 시심마’라는 글을 봤습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시심마는 ‘이 뭐꼬?’라는 의두입니다.
‘시심마(是心麽)’라는 화두가 중요합니다. 한국 간화선이 스님들도 간화선을 포기했는데요, 그 이유가 ‘시(是)’에 있습니다. ‘시’를 아는 사람이 ‘시’를 물어야 해요. 그런데 ‘시’를 모르는 사람이 자문자답하면 답이 나올 수 없어요. ‘시(是, 이)’를 먼저 알고 ‘심마(뭐냐)’라고 물어야 해요.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알아채는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자리는 생각으로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라, 간화선으로 관조로 깨쳐 얻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원‘불’교입니다. 원의 진리를 ‘깨닫는’ 종교입니다. 믿는 종교뿐만 아니라요.
[법신불/보신불/화신불]
법신불(法身佛) = 공(空) 보신불(報身佛) = 원(圓) 화신불(化身佛) = 정(正) |
법신/보신/불신은 설명드렸지요.
좀더 풀어 말하자면, 법신불은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입니다. 보신불은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입니다. 화신불은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입니다.
정산종사법어에 화신불이 2가지가 있다는 법문이 나오지요. 화신불(化身佛)에는 정화신불(定化身佛)이 있고, 편화신불(片化身佛)이 있어요. ‘화신불’은 ‘몸으로 나타난 부처님’입니다. 그중에는 출가위 여래위에 올라간 정화신불이 있고, 보통급 특신급 상전급에서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변덕이 심한 편화신불이 있어요. 이때 편화신불도 본성은 일원상인 것입니다.
‘부처’라는 용어가 여러 의미로 쓰이지요. ‘여래(如來)’를 부처라고도 하지만, ‘편화신불’도 부처라고 합니다. 원불교의 처처불상은 신앙의 핵심은 ‘편화신불’에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저 꼴통 놈’도 ‘편화신불로서 부처님’이라는 신앙입니다. 뛰어난 개체만 부처가 아니라, 철딱서니 없는 저 놈도 부처님이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원불교의 전체신앙이요, 처처불상입니다.
[심불]
심불(心佛), 대소유무(大小有無), 원만구족 지공무사(圓滿具足 至公無私) |
심불일원상(心佛一圓相)이라 하기도 하지요.
일원상은 대소유무(大小有無)입니다.
일원상을 마음으로 표현하면 원만구족(圓萬具足) 지공무사(至空無私)입니다. 마음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말이지요.
<개교표어>
유인물 3쪽 보시지요. 개교표어가 나옵니다. 여러분, 경전에 표어가 나와 있는 것 보셨습니까? 원불교에만 있습니다. 깊고 넓은 뜻을 간략히 요약하여 표시한 하나의 강령이 표어입니다. 개교표어를 따라 읽어보겠습니다.
◇ 개교 표어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
대종사님께서 이 말씀을 1932년에 하셨습니다.
개교표어는 원불교의 존재이유입니다. 원불교가 왜 존재하는가? 개교표어 때문입니다. 일원상은 진작부터 있었어요.
대산종사 정전대의에서 개교표어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표로 제가 정리해봤습니다.
물질개벽 | 정신개벽 |
지벽(地闢) | 천개(天開) |
과학문명 | 도학문명 |
빈곤 . 질병 . 무지를 물리치고 의식주의 생활을 개선하자 | 삼학팔조로 마음을 개조하고 사은사요로 세상을 건지자 |
일생의 신낙원(身樂園) | 영생의 심낙원(心樂園) |
종(從) | 주(主) |
외(外) | 내(內) |
지벽(地闢)은 ‘땅이 열린다’는 말인데 과학문명이 발달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고, 천개(天開)는 ‘하늘이 열린다’는 말인데 도학문명이 편만해지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정신개벽이 주(主)이고 물질개벽이 종(從)입니다. 정신개벽은 내적인 것이고, 물질개벽은 외적인 것이고요.
[선후천의 기점]
관련한 법문을 보겠습니다.
o 선후천의 교역(先後天 交易). 기점 : 갑자년 = 원기 9년(1924년) 정월 초하루 |
선후천의 기점은 1924년으로 잡았어요. 이때는 익산에 원불교 총부를 건설한 때입니다.
관련 법문을 보겠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었다. "부처님 말씀에 사람의 수한이 십세 정명 때까지 내려가면 말세라 하였는데, 그는 십세까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백세 이하는 다 십세 정명으로 보는 것이다. 정히 이때가 그때이다. 그러나 갑자년부터는 진급기에 있는지라 앞으로 사람들의 수한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 선외록 도운개벽장 6절 - |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대종사께서는 선후천의 기점을 갑자년 정월 초하루로 잡으셨나니 이때가 바로 천지 개벽이 시작된 시점으로, 갑자 이전은 선천이요 음 시대이고, 갑자 이후는 후천이요 양 시대라 할 수 있느니라. 과거 음 시대는 신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지배했으나 돌아오는 양 시대는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 앞으로 돌아오는 세상에서는 과거의 모든 윤리와 도덕과 철학은 점차 빛을 잃게 될 것이요, 종교도 새 시대 새 세상에 맞는 종교라야 환영을 받게 될 것이며, 개체불 숭배에서 전체불 숭배로, 차별 시대에서 평등 시대로 차차 변화하게 되느니라. 또한 세상의 모든 기운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게 될 것이며, 강자가 먼저 받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먼저 받게 될 것이며, 개인주의·가정주의·국가주의에 머무르던 것이 차차 세계주의로 옮겨지게 되나니, 이때가 되면 반드시 새로운 법주가 나와 새 법을 다시 짜야 하므로 대종사께서는 이를 예견하시고 일체 법을 제정하실 때 원만 평등한 일원주의로 법을 내 주셨느니라.」 - 대산 교리편 14장 - |
과거에는 개인주의, 가정주의, 국가주의에 머물렀을 뿐이에요. 이제는 일원주의, 대세계주의(大世界主義)로 가는 거죠.
원불교는 세계주의입니다., 원불교 사람들은 세계 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 세계주의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간사가 총부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대산종사님께서 “네가 지금 세계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음의 국한을 터야합니다. 마음자리에는 개인/가정/국가의 한계가 없어요. 마음자리는 툭 터져서 국한이 없습니다. 그 마음자리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과거는 선천이고, 지금은 후천입니다. 과거는 음시대고 지금은 양시대입니다.
지금 세상이 혼란하지요. 여명기라서 그렇습니다. 가장 추울 때가 새벽에 해 뜨기 직전이잖아요. 앞으로는 윤리, 도덕, 철학, 종교 모두 완전히 판이 바뀔 겁니다.
예전에는 개체불(個體佛) 시대였습니다. 태양이나, 인격신이나, 당산나무나, 어떤 사람을 신앙하는 시대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동물이나 바위를 신앙하다가, 그 다음 인격신을 신앙하는 것으로 바뀌었죠. 이제는 우주만유 전체를 부처님으로 신앙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신앙입니다.
예전에는 하늘만 신앙하고 땅은 신경 쓰지 않았죠. 예전에는 아버지만 밥상 따로 받던 시대였지요. 예전에는 직업 중에서 사(士) 들어간 것만 좋아했죠.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사(士)가 넘쳐납니다. 변호사나 의사도 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제는 사뿐만 아니라 농, 공, 상, 더 나아가 금수초목까지 하찮은 것이 없습니다. 법률 중에서도 예전에는 입법자만 존중했다면, 이제는 치법자도 존중합니다.
평등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낮도깨비입니다. 도깨비는 밤에야 힘을 쓰지 대낮에는 힘을 못 쓰거든요. 과거에는 신분이 좋다거나, 인종이 좋다는 이유로 특권을 누린 경우가 있었지만, 양(陽)시대가 되었기 때문에는 이제는 예전처럼 누릴 수 없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완전히 개벽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 시대에 맞게 새로 법을 짜야 한다고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대종사께서 누구나 이 법을 알 수 있도록, 한국사람 뿐만이 아니라 세계 누구라도 이 법을 알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이 정전입니다.
예를 들어 사은 신앙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이 없으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데, 사은을 신앙하지 않고 누구를 신앙하겠습니까? 우릴 사은 없이 1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있겠습니까? 그 위력을 우리가 신앙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대종사께서 그래서 사은 신앙을 내놓으셨지요. 사실, 삼학은 불교에서도 이미 밝혀놓았습니다. 사은이 바로 불교와는 다른 원불교의 특징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은이 전개되면 평화세상이 됩니다. 강자와 약자, 모든 인종, 빈자와 부자 모두 없어서는 서로 살 수 없는 부처님이며, 감사해야 할 대상이거든요.
지금 트럼프가 하는 정책을 가만히 보세요. 국수주의의 과거적 사고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세계적인 지도자는 아닌 것입니다. 탄핵을 받게 되든가, 아니면 트럼프 때문에 미국 자체가 많이 위축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개벽이 되었는데 과거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미래의 지도자는 첫? 시대성이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도 새 판을 짜야 합니다. 철학도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것도 그렇습니다. 이제 운전자가 없어도 차가 갈 수 있는 시대 아닙니까?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병진 (도학과 과학의 병행)]
함께 읽어보시지요.
o 정신과 물질의 병진(도학과 과학의 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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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물질이라는 것은 명예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명예가 없으면 안돼요. 돈이 없으면, 물질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과학이 없어서도 안 되죠.
하지만 첫째, 그것을 ‘구하는 정신’이 어떻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영리로, 거짓으로, 이기심으로 구하지요. 분수를 모르고 구하지요. 그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분수를 알아서 순리로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는 초창기에 저축조합을 시작하셨지요. 제자들을 모아서 근검저축, 절약절식, 금주단연해서 조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숯장사를 해서 돈을 모았지요. 그 다음 방언공사를 하셨습니다. 사실적인 도덕을 내놓으셨습니다. 구할 때, 진리로, 사실로, 순리로 구해야하는 것입니다.
둘째,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어떻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이득만을 생각하여 사용하지 말고, 자리이타로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나를 죽이고 남들만 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원칙입니다. 다만, 남과 나의 이득이 겹쳤을 때는 내가 조금 손해보라고도 합니다. 이건 왜 그러냐 하면, 자(自)와 타(他)가 근본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전망]
미래의 전망 : 원만평등한 낙원의 세계 |
물질개벽, 정신개벽이 되어서, 정신이 주체가 되어 물질을 선용하면, 미래는 낙원세계가 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아직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이죠. 운전하는 차가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시대이지요. 배금주의입니다.
[우리의 과제]
* 우리의 두 가지 큰 과제 우리가 서로 합심 합력하여 영(靈)과 육(肉) 두 방면의 빈곤 ․ 무지 ․ 질병을 물리치자. |
우리가 두 과제 큰 과제가 있습니다.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굶어서 죽고, 누군가는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남깁니다.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형제들인데도 말입니다. 아직도 국가주의와 같은 국한에 매여서 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아직 부족하지요.
한국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합니다. 통일비용으로 돈이 들더라도, 통일이 되면 그 비용을 만회하고도 남습니다. 길이 러시아를 통해서 북유럽까지 뚫린다 생각해보세요. 반도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원불교도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운과 종교운이 함께 하거든요. 우리 나라가 잘 살아야, 원불교도 잘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못 되면, 종교도 잘못되는 거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세금 낼 때도 잘 내셔요. 세금은 아끼고, 다른 방법으로 희사하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건 생색내는 것일 뿐이지요. 세금 잘 내는 것이 가장 애국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좀 어려웠나요? 앞으로 계속 반복하다보면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질문>
일원상이 ‘보여지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 자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답>
여러분이 저를 지금 보고 있지요. 지금 여기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제 목소리를 듣는 지금 바로 그것이 그대로 일원상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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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크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하느라 수고하신 배성해, 김지원, 송밀운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