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9월 제9사단이 추가로 파병돼 남베트남 중부의 뚜이호아(Tjy Hoa)와 판랑(Phang Rang) 일대를 연결하는 1번 도로 주변에 배치됨에 따라 주월사령부 예하의 한국군은 수도사단·제2해병여단을 포함해 명실 공히 군단급 부대의 면모를 갖췄다.
한국군 각 부대들은 부여된 책임지역에서 사단 및 연대급의 대규모 평정작전뿐만 아니라 중대 및 소대급 규모의 소규모 전투임무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이 책임지고 있는 지역이 전 베트남 국토에서 특정지역에 국한됐기 때문에, 한국군 각 부대가 담당하고 있는 지역을 각각 연결해 전체적으로 평정된 지역을 확대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렇게 해야만 각 부대의 개별작전이 반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전체의 노력도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시급했던 것이 반딘(Binh Dinh)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사단과 남부의 판랑에 배치된 제9사단을 연결하는 것인데, 특히 이 두 지역을 관통하는 1번 도로를 확보하는 것은 전쟁이 시작된 이래 남베트남과 연합군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도로 주변에서 활동하던 대규모 베트콩 부대 때문에 66년부터 이 지역에 투입돼 활동하던 미 제101공정사단도 고전을 면치 못할 정도여서 많은 난관이 예상됐다. 하지만 파병 이후 한국군의 전투력 향상에 자신감을 얻은 채명신 사령관은 한국군 2개 사단의 성공적 연결작전을 확신하면서 이를 ‘오작교(烏鵲橋)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수도사단은 67년 3월 15일부터 총 5개 대대를 투입해 작전을 개시했다. 이 사단의 임무는 현 주둔 지역에서 연결지점인 뚜이호아까지 남진하면서 지대 내의 적을 포위해 주력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전이 시작되자 적이 점차 동굴이나 밀림을 이용해서 은거했기 때문에 적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이미 수색했던 지역을 재차 세밀하게 수색하는 이른바 ‘반전(反轉)작전’을 개시해 동굴지역에 은신하던 적들을 색출 및 소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상보다 빨리 연결지점까지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기간 중에 적 사살 608명, 포로 획득 272명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3월 8일부터 북진작전을 시작한 제9사단은 예하 28연대 일부가 옹라산(Nui Ong La) 지역에 도착한 이후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지역 베트콩의 소굴이었던 이 지역에 대한 평정작전은 매우 어려워서 28연대는 오작교작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 여러 차례 베트콩을 상대해야 했다.
한편 4월 10일 베트콩이 28연대 11중대 기지에 대한 기습 침투공격을 감행했는데, 다행히 중대 전체가 붕괴되는 참사는 피했지만 총 34명의 인명손실(전사 12명 포함)을 입고 말았다. 결국 4월 18일 오전 수도사단과 제9사단이 뚜이호아 북방 18km 지점에 위치한 1번 도로상의 호아다(Hoa Da) 마을에서 연결함으로써 오작교 작전이 종료됐다.
두 부대의 역사적인 연결작전 성공에 채 사령관과 미군·남베트남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해 한국군의 작전 성공을 축하했다. 연결작전이 성공하자 각 사단은 전술 책임지역을 재조정하고 각 지역에 대한 정밀한 소탕작전을 실시, 1번 도로 일대에 대한 평정작전에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의 책임지역이 북쪽의 봉손(Bong Son)에서 남쪽의 판랑까지 대폭 확장돼 약 6800km에 이르렀다.
또한 이 지역을 관통하는 1번 도로가 약 400km 정도 확장됨에 따라 남베트남 핵심지역에 대한 경제·사회적 교류가 확대됐다. 반면 베트콩은 한국군의 작전 성공으로 자신들의 활동무대와 해상·육상보급로가 차단됨에 따라 식량공급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됐고, 점차 존립 기반 자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오작교 작전에서 보여준 한국군 2개 사단의 연결작전은 전략·전술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베트남 전쟁 전체에 커다란 전환점을 제공했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아군은 다음해 1월에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가 있기 전까지 베트남 전쟁 전체에서 가장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는데, 바로 이러한 계기를 제공한 것이 오작교 작전이었다.
결국 이에 위기를 느낀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전반적인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고심한 후에 내놓은 것이 바로 구정공세였던 것이다. 한편 2개 중대의 전술기기가 적에게 피습되는 불상사가 없지 않았으나, 오작교 작전에서 면밀하게 검토한 중대급 단위의 전술기지 운용전술은 장차 둑꼬나 짜빈동에서 한국군 중대급 부대가 대규모 베트콩 부대들과 맞서 싸워서 이룩한 승전의 바탕이 됐다.
사진설명:베트남전에 참전한 수도사단 장병들이 밀림지역에서 탐색작전을 펼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