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라, 그러면 열린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칼과 도마 사람 리듬 비트 그리고 에피소드, 1억원의 제작비, 여기에 송승환의 아이디어, 이것으로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대박 `난타`는 송승환의 또 다른 이름이다. 두드려서 그는 결국 열고 찾았다.
난타의 영문 제목은 `쿠킨(Cookin`)`. 요리(Cooking)의 줄임말이지만, 무언가에 몰두한 `무아지경`이란 뜻도 갖고 있다. 아역배우, 영화배우, 연극배우, TV 탤런트, 음악ㆍ영화ㆍ연극제작자, MC, 하루를 셋으로 나눠 사흘처럼 산다 말할 정도로 바쁜 CEO, 코스닥 입성을 앞둔 거부(巨富), 이 모든 것을 압축하면 송ㆍ승ㆍ환 이름 석 자가 브랜드인 기업가다.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장이`, 송승환 PMC프로덕션 대표는 문화예술에 `쿠킨` 대박을 터뜨린 사람이다.
◆세계를 두드리라=난타는 말이 없다. 비언어극이기 때문이다. 대사를 `듣지 않고` 소리를 `보는` 난타는 일단 세계화의 기본 요건은 갖췄다. 언어로 나누어진 국경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시대 흐름에도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개념을 덧씌웠다. `한국적인 것으로 언어를 극복하자.` 이것이 난타의 출발점이었다. 사물놀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네 가지 악기를 놓고 두드리는 것은 말 그대로 두드림만 있을 뿐 연극의 기본인 드라마가 없다. 소리가 가장 많은 부엌, 이곳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버무린 것, 그게 난타의 모든 것이다.
"멀티플렉스 시대를 맞으면서 영화는 10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유통 문제가 해결된 거죠. 영화는 연극에 비해 쌉니다. 그러나 연극은 가격이 부담스럽죠. 게다가 유흥문화에 젖은 30, 40대를 연극판으로 끌어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극이 성공하기 위해선 해외 시장을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습니다."
그의 눈은 처음부터 세계로 고정돼 있었다. 스타의 정점에서 미국 뉴욕으로 홀연히 사라져, 싸구려시계 좌판상을 하면서 고학을 자처했던 것도 세계를 향한 그의 눈이다.
◆97년 10월, 그리고 99년 8월=지난 1997년 10월 10일 난타의 막이 올려졌다. 생각대로 처음 예매율은 저조했다. 그러나 입소문이 퍼졌다. 안 보면 후회한다는…. 그리고 2주 뒤부터는 표를 달라는 아우성이 있었다. 그 즈음 송 대표의 작은 꿈이 이뤄졌다. "`극장 문짝 한 번 부서지는 것 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길했었죠. 그런데 실제로 인파 때문에 공연장 로비에 대형 유리창이 깨졌던 것이죠." 그러나 목표는 이게 아니었다. 해외로 나가겠다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 난타 공연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꾸려 다시 뉴욕 등 다섯 나라를 돌았다. 그러나 실패였다. `한국에도 연극을 하느냐`란 조롱을 들었다.
결국은 정공법이다. 세계적인 연극축제인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로 향했다.
"에든버러에 가기 전에는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했죠.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어느 날은 대박 터지는, 어느 날은 실패하는 꿈을 꾸곤 했죠. 주위 사람들에게 난타를 띄우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죠."
난타는 50년 역사의 페스티벌로 간 최초의 한국 작품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기자를 대상으로 한 프레스프리뷰 시간. 오이, 당근이 등장하고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는 난타가 시작되자 그 동안 졸고 있던 기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거의 모든 언론사에 대문짝만 하게 난타가 소개된 것이다. 그리고 운명의 날, 난타가 해외에서 첫 공연을 하던 그날, 한곳에서 네 작품이 동시에 막을 올렸다. 극장 입구에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모두 난타 입장권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난타 공연 기사에는 최고 평점인 별 다섯 개가 찍혀 있었습니다."
에든버러의 갈채는 해외 시장 진출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22개국 120개 도시에서 공연했다. 한국에도 연극이 있느냐는 소리를 들었던 난타는 지금 미국 브로드웨이에 전용관을 마련하고 오픈런(무기한 공연)에 들어갈 정도로 갈채를 받고 있다.
비언어극 분야의 정상인 `스텀프` 못지않다. 미국에서 난타 입장료는 65달러. "스텀프는 60달러입니다. (스텀프보다 많이 받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죠. 투어를 했던 나라 수도 스텀프와 비슷하죠." 스텀프에 뒤질 게 없다는 자신감이다. "스텀프는 끝나 가는 작품이고, 난타는 이제 시작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앞으로 성공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망해도 나는 일어선다=난타 홈페이지에는 `난타(亂打)`란, 권투 시합의 난타전처럼 마구 두드린다는 뜻`으로 정의했다. 아역배우로 출발해 청춘스타, 난타 제작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답게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살았다. 한참 잘나갈 때는 스포츠신문 하루치 여러 면에 사진과 이름을 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그늘이 배어 있다. 인생의 난타전이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 무대에선 `아역배우`, 집에선 `소년가장`이란 두 가지 몫을 해야 했다. 부친의 사업이 망하면서 어린 송승환의 출연료가 생활비의 전부였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한때는 말 그대로 폭삭 망했죠. 집은 빚쟁이들에게 넘어갔고, 부모님은 단칸셋방으로, 나는 친구집 등에서 지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낙천적이다. "집안이 어려워도 방송을 했고 연극을 했죠. 내 할 일은 내가 합니다. 외아들이어서 그런지 책임감이 몸에 뱄습니다. 고비를 많이 겪어서 자신감도 있습니다. 망해도 일어서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송승환이란 브랜드가 있기 때문이다.
난타 제작비 마련으로 돈을 빌릴 때도 "반짝이 양복에 하얀 구두 신고 밤무대 나가면 한 업소에 몇백만원쯤 못 받겠느냐"라는 말로 갚을 수 있다는 말을 대신했다.
◆나는 결국 한 가지 길을 걷고 있다=난타를 제작하고 있는 회사는 PMC프로덕션. 공연(Performance) 음악(Music) 영화(Cinema)의 머리글자를 따 온 것이다. 공연이 주업이지만 음악 영화 등 종합 엔터테인먼트회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P`는 난타로 성공했다. `M`은 가수 강수지를 발굴했지만 이후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M`은 뮤직보다 뮤지컬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C`는 어려서부터 꿈이다.
송 대표는 공연판에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유일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연극하는 사람들은 좋은 연극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정단한 줄 아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바닥(공연예술)을 알면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이 그의 성공 요인이다. 어려서부터 상업적인 작업(탤런트)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상업적인 마인드에 일찍 눈을 떴죠. 하지만 진짜 비즈니스하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죠."
난타 매출은 97년 초연 이후 99년에 8억원, 2000년 35억원, 2001년 60억원, 2002년 107억원, 2003년 129억원, 그리고 오는 2007년에는 10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2편의 블록버스터가 3000억원의 수익을 올린 것에 비하면 `난타의 경제 효과`는 크지 않다. 그러나 송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오페라의 유령`은 900만달러를 제작비로 104억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거뒀습니다. `주라기공원`은 7000만달러를 들여 9억달러의 수입을 올렸죠. `오페라의 유령`의 매출을 깬 영화는 아직 없습니다." 1억원의 제작비로 10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는 난타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의 경제학으로는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나은 셈이다.
창작뮤지컬에 관심이 많다. "젊은이들은 외국 뮤지컬을 싫어하죠. 영화로 치면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색즉시공` 같은 한국 젊은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갖고 있는 뮤지컬을 만들 생각입니다." 외국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 뮤지컬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 한국적 정서로 승부하면 상업적으로 성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난타경영=난타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경영 스타일도 자유롭다.
연극은 압축하면 세트라는 `정물(靜物)`과 사람이란 `동물(動物)`이 전부다. 더 압축을 하면 정물은 사라지고, 사람만이 남는다. "사람을 볼 때 창의력을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 사회가 유교적인 관습 탓인지 튀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죠. 하지만 저는 성실한 친구보다는 재기가 있고 튀는 사람이 맘에 들죠."
얘기는 97년 봄으로 다시 간다. 뉴욕을 둘러본 뒤 난타의 스토리를 만들면서 배우 캐스팅에 나섰다. 대본이 나온 게 아닌 데다, 비언어극 오디션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주방기구를 매달아 놓고 맘대로 두드리던 한 친구가 심사위원의 눈길을 확 잡아당겼다. 온 힘을 다해 주방기구를 두드리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프라이팬과 냄비를 머리로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튀던 그 친구`가 바로 난타로 스타 반열에 오른 서추자 씨다.
PMC에는 출근시간이 따로 없다. 몇 시간 근무해야 한다는 탄력근무 개념도 없다. 나오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덟시간 이상 일하는 직원들이 대부분이다. 회식도 사장이 날짜를 잡는 게 아니고 막내가 일을 꾸려 대표한테 알려 주는 정도다. 창의를 앞세운 공연이란 작업 특성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0억원 규모의 뮤지컬의 대본을 작가가 아닌 공익근무요원인 인턴사원에게 맡기기도 한다.
◆돈, 이 정도면 됐다="돈, 많으면 좋죠." 여기까지는 당연한 얘기다. 다음부터는 송승환 식이다. "지금 연봉 1억원 정도 됩니다. 경기도 일산, 공기 좋죠. 풀장이 있는 넓은 집 필요없잖아요? 우리나라 차 좋습니다. 옷요? 협찬해 주는 데가 많습니다. 애도 없습니다. 사교육비까지 들 일 없죠." 내년에 난타 대박과 내년 코스닥 입성을 앞두고 있는 회사의 대표치고는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 옛날처럼 돈 꾸러 다니지 아는 것만 해도 부자라는 것이다. 다른 것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돈이 생기면 연극영화에 쓰겠다는 그의 말은 돈에 대한 상식과 진실이 담겨 있다. 직원들한테 우리 사주도 주고. 해마다 직원들에게 이익의 10%를 나눠 준다. 올해도 10억원 이익이 나서 1억원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