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곤 金逸坤 (1912 ~ 1943)】 " 마지막 남은 수류탄을 일본군들에게 던지고 전사"
1912년 3월 29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금성면(金城面) 대성리(大成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문명철(文明哲), 한광(韓光)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으나 미성년자라 반년 만에 석방되었다. ‘요시찰인’으로 상시 감시받자,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1931년 3월 전남 원잠종제조소(原蠶種製造所) 부설 실업강습소에 들어가 교육받고 수료하였다.
1933년 9월 의열단(義烈團)이 난징(南京)에 설립하여 운영하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의 입교생 모집원 정의은(鄭義銀)의 권유로 중국 망명을 결심하였다. 정의은의 아우 정부은(鄭富銀, 정율성), 사촌동생 김승곤(金勝坤) 등과 함께 밀항하여 서해를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곧장 장쑤성(江蘇省) 강녕현(康寧縣) 증조사(曾祖寺)로 가서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고 의열단에도 가입하였다. 같은 해 9월 16일부터 시작된 제2기 과정의 전술학 교관 김종(金鍾)은 숙부이기도 했다.
졸업 직전인 1934년 4월 중순에 김구(金九)의 요청을 수락한 김원봉(金元鳳)의 지시로 동기생 14명과 함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으로 전학하였고, ‘한광’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듬해 4월 졸업하고 난징으로 가서 대기하다 7월에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립되자 입당하고 특무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3월 당원 하진동(何振東)·장평산(張平山) 등과 함께 추천 받아 난징무전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던 중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같은 해 12월 1일 후뻬이성(湖北省)의 중앙육군군관학교 싱쯔분교(星子分校) 제6기 특별훈련반 제4중대(통칭 ‘조선중대’)에 동지 82명과 함께 편입학하여 훈련받았다. 12월 12일 난징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12월 29일 후뻬이성 장링(江陵)으로 옮겨가 훈련을 계속하였다. 1938년 5월 24일 특별훈련반을 졸업하고 김홍일(金弘壹)의 인솔 하에 후뻬이성 우창(武昌)으로 이동하여 대기하다 같은 해 10월 10일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될 때 참여하여 제1구대 대원이 되었다.
곧 이어 구대원들과 함께 중국 국민군의 제9전구(戰區) 사령부로 배속되어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 1939년 1월 말에 전선으로 나가서 막부산맥(莫阜山脈)의 오동산(梧桐山) 진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봄에 후뻬이성 퉁청(通城)·쑹양지구(崇陽地區)에서 일본군 탱크 2대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워 중국정부로부터 광영훈장(光榮勳章)을 받았다.
1939년 11월 후난성 헝양(衡陽)에서 제1구대 병력의 절반은 제1지대(支隊)로, 나머지 절반은 신입대원과 혼합하여 제3지대로 재편될 때 제3지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그 직후 강서전선으로 파견되어 제19집단군 사령부 예하 중국군부대들에서 대적(對敵) 선전공작에 종사하였고, 이후로도 지대장 김세일(金世日)의 지휘 아래 후난·후뻬이·광시성(廣西省) 등지를 넘나들며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1940년 9월 제3지대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명령에 따라 충칭(重慶)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 1월 충칭을 떠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으로 가서 봄에 황허(黃河)를 건너 7월 초에 타이항산(太行山) 지구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 3개 지대의 북상병력 총원이 태항산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로 재편되고 예하의 3개 대(隊)로 분속될 때 김일곤은 제2대 대장 김세광(金世光) 휘하 제2분대 분대장 손일봉(孫一峰) 부대에 소속되었다. 또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진기예지회(晉冀豫支會) 제2지회 제2소조장 직책도 맡았다. 이때부터 1942년 3월 말까지 중국공산당 팔로군(八路軍) 관할 하의 태항군구(太行軍區) 제1분구 지역인 원씨(原氏)·찬황(贊皇)·임성(臨城)현 일대에서 무장선전 활동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1941년 12월 12일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도 치렀다. 1942년 5월 태항산 반소탕전(反掃蕩戰) 때는 화북지대 유일의 기관총수로 활약하였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된 후 9월에 진서북(晉西北, 산시성[(山西省)](의 서북부) 지구로 파견되어 조선의용군 진서북지대 책임자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김세광·최영(崔英)·최채(崔采)와 함께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 진서북분맹(分盟)을 창립하면서 조직위원이 되었다. 1943년 초부터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2월에는 10여 배 병력의 일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기관총을 빼앗아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등 남다른 용맹성을 보여주었다.
1943년 4월 14일 산시성 취현(祁縣, 흔주시[(忻州市)]() 합색향(合索鄕)의 황룡왕구촌(黃龍王溝村)에서 100여 명의 적들에게 포위되자, 두 명의 중국인 전우와 함께 자기 위치를 지키면서 수십 명의 적군을 사살하였다. 그러다 탄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남은 수류탄을 일본군들에게 던지고 전사하였다. 시신은 일본군이 물러간 후 그 마을에 묻혔다. 5월 4일 팔로군 군구 주둔지에서 특별 추도대회가 열린 가운데 영용한 감투정신과 불요불굴의 혁명절개, 대중과의 적극적 연대 행동 등이 칭송되고 모범으로 역설되었다. 『항일일보』에서도 특집을 내고 추모사를 실었다. 5월 6일에는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청년혁명학교 3개 단체가 타이항산 북부의 모처에서 집회를 열고 추모하였다. 1997년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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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관련 일제 측 문서(1939. 6. 29)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