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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책망(호2:2-4 ) 대민성결교회 이석민 목사
[1]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에 빠진 것은 실수나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거역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한두 번 유혹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정조를 잃었고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음행을 행하였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영적 간음을 행하였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이방의 우상 숭배는 언제나 육체적인 간음을 동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간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금하신 육체적인 간음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음행으로 표현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남녀가 결혼을 할 때 언약을 맺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에게 대하여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는 그들에게 복을 주어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우며 모든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보호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디럭스 바이불]
우상을 숭배하는 등의 하나님께 직접 짓는 죄악 이외에도 모든 인간이 짓는 죄악들로서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주목해야 할 죄악은 이 세상을 살면서 도덕적으로 짓는 모든 형태의 죄악들입니다. 즉 살인, 음행, 호색, 술수, 분쟁, 시기, 분냄, 분파 조성, 술 취함, 방탕, 강탈, 토색, 압제 등이 그러한 도덕적 죄악들입니다(참조, 갈 5:19-21). 이러한 죄악들은 하나님께 직접 짓는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는 죄상들이기 때문에(참조, 계 20:12-13),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를 피하려면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죄악들을 범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호세아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음행을 자기 앞에서 없애라’라고 촉구함으로, 그들이 도덕성을 지키려면 처신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였습니다. (호세아 2:2) 우리의 경우에도 무엇이든 타협하게 할 만한 상황은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의 학교나 거주지 근처에서 반복적으로 유혹에 직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나 거주지를 옮길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유혹이 되는 상황에서 멀리 떠나 있고, 그리하여 ‘음행을 자기 앞에서 없애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알리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하고 존중심 있는 태도로 자신의 가치관과 믿음을 설명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우리는 여호와의 높은 표준을 유지하기로 다짐했다는 것을 반드시 알리시기를 바랍니다.(아모스 5:15) ‘음행을 없애는’ 또 다른 방법은 음란물과 의심스러운 오락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잡지를 없애 버려야 하거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새로운 벗을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미가 7:5)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부도덕에 오염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1.음란과 음행을 제하게 하라 하십니다.(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의 비극적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 고멜을 취하여 아내를 삼아라 해서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멜이라는 여인은 버린 바된 자기를 그래도 아내로 삼아 준 남편 호세아에게 감사하며 호세아 만을 바라보고, 호세아만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고멜은 그의 음란한 과거의 습성을 잊지 못해서 다시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음행하고, 심지어 호세아가 그에게 선물로 주었던 물질까지도 그녀와 행음한 간부가 준 것으로 알고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치장하여 음행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고멜의 모습은 당시 북쪽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한 남자가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남자(호세아)는 아내(고멜)에게 간음을 시인하라고 말하고, 남자는 자녀들에게 너희 엄마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옷을 벗겨서 내쫓거나 목말라 죽게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자녀를 낳은 이 여자는 ‘그들(바알)’이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을 준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그 길을 막아 절대로 그들에게서 그것을 받지 못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한 가정에 생긴 불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자녀들에게 우상숭배를 끊지 못하는 어미와 논쟁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인하고 도적질하는 여러 범죄에 대해서 쟁론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에게 바알 숭배하는 자들을 향하여 논쟁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그런 우상숭배자들에 대하여 “저는 나의 아내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1절과 바로 다음 구절인 2절의 말씀이 다릅니다.
여기서 「논쟁하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말싸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법적 소송을 벌이다’ 혹은 ‘고발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참된 성도들이 그 타락해 가는 조국의 죄악된 행위를 꾸짖으면서 당장 회개해야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에 있어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범죄 행위를 백일하에 고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핏줄을 나눈, 아니 그 핏줄에서 태어난 자식이 그 어미를 상대로 쟁론하고 소송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럽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만이 그 어미를 진정으로 구해낼 수 있는 길이라면, 자식은 그 어미와 쟁론을 벌여서라도 회개시켜야만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너희 음녀인 어미와 같이 이스라엘이 타락의 길로 나가고 있는데, 끝까지 따지고 싸워서 그 악에서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중단하게 하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이 옳지 못함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감정이나 세상 욕심을 위하여 따지거나 싸워서는 안 됩니다. 죽고 사느냐, 흥하고 망 하느냐, 화가 되고 복이 되느냐, 성공이냐 실패가 되느냐 하는 진리 문제, 신앙 양심 문제, 죄 문제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히12:4) 하신 말씀대로 쟁론하고 논쟁을 해야 합니다.
너희 어미인 신앙 선배, 교파, 교리, 신조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 무조건 맹종이나 방종으로 따르지 말고, 성경대로 쟁론해서 성경을 근거로 끝까지 따지고 싸워서 잘못된 악,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것이 옳지 못함을 말해 수정해 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자식일 지라도 어미의 죄악에 동조해선 안 된다는 것이며, 그 죄악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민족의 죄악을 분명히 직시하고 이를 악한 것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을 민족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즉 호세아는 민족이 당할 가혹한 심판에서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자기 어머니의 죄악을 비난함으로써 동일한 운명을 겪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그와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되면 그 심판은 그들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랑게 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음란(우상)은 숨겨진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얼굴이 빤빤하게 음란을 범하고 그 얼굴과 가슴에서 이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도움이 없으면 죽는 줄 모르고, 말은 하나님이 준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 이 주는 줄 알고 세상 따라가고 실은 세상 것만 있으면 된다는 행동이 음행입니다.
성도는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과 진리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고 족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는 것을 이치로 깨달아 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라”는 것은 정숙한 아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눈이 있는 곳이요, 마음이 표현되는 곳입니다. 얼은 겉으로 내세우는 간판, 선전, 운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신부된 이스라엘은 진리와 영감을 내세우며,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가서 살 실력 영광 존귀를 준비토록 해야 될텐데, 돈만 내세우고 간판만 내세우고 세상이 부러워 전부가 세상과 짝하는 것만 준비하고 내세우니 그것을 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려면 이스라엘은 그의 얼굴에서 색욕을 없애야 합니다. 그의 젖가슴에서 음행의 자취를 지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음란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얼굴에 있는 음란을 제하라는 말씀은 드러난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유방 사이의 음행을 제하라는 말씀은 드러나지 않은 죄를 모두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새로워지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주시고 다시 복을 주십니다.
2.목말라 죽게 할 것이라 하십니다.(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우리 몸의 70%는 물입니다. 혈액의 대부분이 물인 것은 물론 뇌와 심장, 근육의 75%, 심지어 뼈의 22%, 지방 분자의 10%도 물입니다. 소화도, 세포 간의 정보 전달도, 노폐물 배출도,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 물입니다. 물이 부족하면 우리 몸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목이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나 음식, 멋진 옷이 아니라 한 모금의 물입니다. 따라서 그토록 갈급하게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한 모금의 물을 사 마시고자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음란과 음행의 죄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라 하였습니다.
'광야'나 '마른 땅'은 모두 고통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났던 곳은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하여 40년간 그들이 생활했던 곳 역시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는 광야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즉 광야생활을 하고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하늘의 양식을 공급해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이스라엘 즉 하나님 대신에 그들 앞에서 세웠던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도 보았고, 쓴 물이 단물로 변하여 마실 수 있는 기적을 끊임없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광야만 보였고, 마른 땅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아시스 앞에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사막과 같은 광야생활을 스스로 택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같은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갈지라도 찬송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스스로 눈을 가리고 생수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식주 문제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해결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생수와 단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들을 개척해야할 마른 땅만이 눈에 들어와서 걱정 근심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2-4)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광야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가인과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내버려두셔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그것은 우준하게 되어 광야와 같이 메말라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로 걸어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메마른 광야를 지날 때에도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말라 비틀어져도, 모든 것이 풍족하지 못한 곳에서도, 가도 가도 끝없는 목마름만 있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만은 마르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권고하십니다.
모든 생물은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모스 8장11절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는 음란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말슴을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외에도 여러가지 갈중이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은 갈증은 물론, 문화적인 갈증, 정신적인 갈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시고 채워도 계속해서 목마른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목마름에 대한 근원적인 갈증 해소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수다,나를 마시라, 그리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해답을 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양하지만, 해답은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해답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에서 취하는 물은 다시 목마르지만 우리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름이 없습니다(요4:13,14). 예수님만이 생명수 샘물이 되사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십니다(계21:6).
3.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다 하십니다.(4)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의 역사, 그 사랑과 긍휼의 힘으로써만이 우리는 날마다 형통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롬9:16, 슥4:6).
생명 있는 운동은 하나님의 긍휼이 움직일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곳에 우리에게는 소망의 문이 열려집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거듭된 죄악에는 긍휼을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죽어가도 죽어가게 하는 그 일들을 통해서 깨닫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의로웠던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긍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9장16절 말씀처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긍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죄나 실수로 인해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할 순간에, 가장으로서 어깨는 무거운데 능력은 바닥나고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순간에,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일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긍휼이 임하면 사방이 막혀있는데서 길이 생겨납니다. 살길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본문4절에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복은 자손 대대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데,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을 가리킨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과 관련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모든 국가와 민족은 백성 개개인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민족과 국가의 범죄는 백성들이 연대적인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백성들 개인의 죄악이 합쳐져 민족과 국가 공동체의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실제 이스라엘의 죄악은 백성들의 죄라고 합니다.
호세아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한 우상 숭배 문화 가운데서 태어난 세대들이다. 따라서 저들은 우상 숭배 문화를 통해서 탐욕과 부도덕, 우상숭배밖에 배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저들을 하나님 자녀로 여기지 않고 바알의 소생으로 취급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의 ‘그 자녀’라고 한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 자녀’란 하나님 자녀가 아니고, 당시 바알을 숭배했기에 바알의 자식이란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고멜을 통해서 두 번째 딸을 낳자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란 천명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낳은 아들을 ‘로암미’라 하여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저들이 바알의 소생과 진배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음란한 어머니처럼 자녀들도 역시 음란했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호세아와 소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았습니다.
사실 어미가 음란한데 어떻게 그 자식이 음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호세아서의 말씀은 교회가 지체를 죽이지 않고 행위를 하고 있고 또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음란 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자기만 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절대 없습니다,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시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지체를 죽이지 않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미의 음란한 죄 때문에 무고한 어린 자식들이 하나님에게 긍휼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당합니다. 이를 볼 때 지도자, 부모, 개척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착한지 아닌지, 회개했는지 아닌지를 초월합니다. 악한 이들에게도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듯이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악을 초월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긍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상에서 우리의 실상이 어떠함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놀라운 위로와 힘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1.음란과 음행을 제하게 하라 하십니다.(2)
2.목말라 죽게 할 것이라 하십니다.(3)
3.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다 하십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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