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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1주)
“나다”(I AM)의 메아리
창37:1~4,12~28; 롬10:5~15; 마14:22~33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야곱의 브니엘의 경험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누군가(“이쉬”)와 밤새도록 씨름하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가끔 경험하는 심오한 경험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태생적으로 뭔가 성취하고, 이루고, 차지하려는 성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먼 타향에서 스무 해가 넘는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씨름이 단순히 형을 두려워하고 형의 분노를 풀어보려는 계략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두고 씨름하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뒤꿈치라도 붙잡고 늘어지던 그 씨름을 얍복강에서 결정적으로 다시 한번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씨름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또는 “자기의 자기”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자기 힘의 본체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에게는 부서진 “야렉”(엉덩이뼈)였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그렇게나 힘을 쓰며 살던 그 힘의 근원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본 것입니다. 사실, 얍복강에서의 씨름은 야곱의 일생 가운데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야곱이 본 자신의 모습은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ness)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경험을 일컬어 dread, 즉 불안, 두려움, 전율의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내 삶은 어째서 의미가 있는 거지?” “어차피 죽을텐데, 뭘 이리도 아등바등인가?” 이런 근원적 질문은 우리를 근본적 두려움/전율/불안으로 이끌며, 삶 전체를 다시 보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근본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삶에서 자주 반복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혹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의지해 왔던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ness)이 되어 버리면서, 오히려 삶은 가벼워지고 자유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일상의 씨름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씨름입니다. 야곱의 평생에 걸친 씨름도 결국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그걸 막아보려는 씨름이었습니다. 그렇게나 회피하고 어떻게든지 내가 낫씽이 아닌 썸씽이기를 증명해 보이려고 했던 그 씨름에 종지부를 찍는 씨름이 바로 얍복강의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주 갖는 “낙심”이나 “혼돈”, “무기력”은 이 불안/두려움을 보지 않으려는, “아무것도 아닌 것”(낫씽니스)를 보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낙심이란 자신감을 잃고, 이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은근슬쩍 확신해 버리는 감정입니다. 과거의 (미숙한) 수준에서 얻었던 “만족감”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이때 사실은 계속해서 썸씽을 유지하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릴 준비가 된다면, 낫씽이 될 준비가 된다면, 우리는 낙담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서 탈출할 유일한 탈출구는 진정한 “희망”(하나님의 희망)뿐입니다.
혼돈이나 무기력은 어떻습니까? 무력감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어 스스로 마비되는 것이고, 혼돈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계속 발동되는 것은, “그래도 내게 뭔가가 있는데/있어야 하는데...” 라는 썸씽에 대한 일말의 기대입니다. 바로 자신이 갇혀 있어 스스로 마비되고, 스스로 길을 잃은 그 것이 바로, 자신이 붙잡고 있는 “썸씽”임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 안에 갇혀 버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이게 남에게서는 잘 보이는데, 자신에게서는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실 여기서 탈출할 진정한 탈출구는 참된 “믿음”, 순수한 믿음입니다.
사실, 종교는 우리에게 그 썸씽을 붙잡는 대신 낫씽을 붙잡으라고 권고하는 곳입니다. 종교의 종(宗)자가 무엇입니까? “마루 종”, “일의 근본, 근원”이라는 뜻의 종(宗)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는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곳입니다. 참된 종교라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얘기 하러,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썸씽을 붙잡는 대신 낫씽을 붙잡으라는 말이 허황된 말이고,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슨 교양단체나 자기계발 단체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썸씽을 붙잡는 대시에 낫씽을 붙잡는다는 일이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정말 허황한 말이고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이 일은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삶에 깔려 있는 기본 운영체계 프로그램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언제나 “수행”을 권고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서 저자가 말했지요. 마찬가지로, 수행이 없는 종교는 죽은 종교입니다.
오늘은 구약의 말씀은 이야기가 바뀌어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는 이야기이지요. 이 요셉 이야기는 앞의 나온 족장들의 이야기와는 좀 성격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거나 하나님의 분명한 개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두 인간의 삶의 배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건강한 이성과 바른 식별과 온전한 지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이 요셉 이야기를 지혜문학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 <두 형제 이야기>라고 해서 요셉 이야기와 비슷한 모티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요셉의 이야기에서는 형들의 질투를 받고 이집트로 팔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는 말이 유명하지요. 앞의 이야기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형들에게 순진하게(?) 다 고했을 때, 그 꿈은 곧 형들의 시기를 불러옵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 그리고 “꿈을 이루는 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요. 무엇보다도 절망하거나 원망하면서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냈던 요셉의 삶의 태도는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셉이 미디안 대상들에 의해서 이집트 왕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게 되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창39:2)고 적고 있지요. 또 보디발의 아내의 음모에 감옥에 갇혔을 때도, 성경은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다”(창37:23)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묘사는 우리의 경험과는 매우 다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 남의 종이 되고, 못된 사람의 음모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앞길이 잘 열리고, 무엇이나 다 잘되는” 그런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그런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잃지 않고, “순수한 믿음”을 통해 그는 그런 고난의 하루하루를 잘 견뎌내었습니다. 아니, 견뎌낸 것이 아니라, 고난의 하루하루를 충만한 삶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보통 내공이 아닌데, 성경은 바로 그 내공을 지혜라고 본 것이지요. 성경은 요셉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갖게 되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지혜야말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겉의 드러난 표면/현실로만 평가하지 않고, 그 속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희망을 보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올라오는 수많은 감정이 있고, 수많은 생각이 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이런 저런 행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낙심하기도 하고, 혼돈에 빠지고 무기력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오기와 고집을 부리며 저항하기도 하지요. 그 마음의 날씨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춤을 추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가 아니며, 우리는 그 날씨를 지켜보는 시온산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것을 진정 깨닫는 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말씀도 여러번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후에 제자들은 몹시 흥분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런 움직임에 고무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더 이상 거기 머무르지 말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재촉”하십니다. “재촉한다”(아낭카조)는 말은 “강제로 밀어낸다”, compel, force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강한 어조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뜨도록 밀어내고, 그 동안 무리들을 “헤쳐” 보내신 후에, 당신 자신은 따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마음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흥분시켰습니다. 세상 사는 일, 다 먹자고 하는 소린데, 그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강제로 배를 태워 보내고, 헤쳐 보내고, 당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날 밤 산에서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요? 나한데 이런 일을 맡겨 주십시오, 기도했을까요? 자신 안에 올라오는 유혹을 물리쳐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복음서 기자의 기록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을 썸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이건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거지요), 낫씽으로 보는 일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 다음 장면에서 발견합니다. 바람이 거슬러 불어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불어오는 파도로 인해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에고 에이미> 곧, 영어로 I AM입니다. 그런데 I am~ 다음에 뭐가 없습니다. I am a boy든지 I am a girl이든지, I am a teacher든지 그 뒤에 뭐가 있어야 하는데, 그냥 I AM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낫씽이지요. 바로 이것이 신의 이름입니다. “에고 에이미”, 나다!
여러분, 우리는 거슬러 불어오는 거센 풍랑에 늘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런데 일고 있는 풍랑은 현실입니다. 당장 우리 앞에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갖는 숙명 아닐까요? 그러므로 풍랑이 없다거나, 풍랑이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아니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기온이 몇 도만 올라가도 우리는 숨을 헐떡이고, 오늘 아침 몇 도만 내려와도, 이렇게 살만하지 않습니까? 파스칼이 팡세에서 인간은 연약한 갈대라고 했는데, 우주에서 가장 약한 존재라는 거지요.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수증기나 한 방울의 물이라도 인간을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고요. 그냥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는 거지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그닥 힘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나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밤새 홀로 기도하시며 만났던 “나다”가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의 삶에 “나다”(I AM)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 “나다”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다”(I AM)가 빠져 불완전한 반쪽 인생의 두려움과 불안과 방황이 생깁니다. 이 I am이 빠져있어 그저 뿌리 없는 “boy”와 “girl”과 “teacher”와 “student”들만 떠돌아다닙니다. I am이 빠져있어 뿌리 없는 pastor만 떠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나다”를 경험하는 장소가 바로 “몹시 시달리는 곳”, “바람이 거슬러 불어오는” 한 복판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의 원천이며, 고통의 원천으로 여겼던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장소였다는 역설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역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하루의 흥분을 모두 가게 두고, 모든 것의 I AM을 만나며 홀로 계시는 바로 그곳이 “나다”의 경험 장소였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나다를 메아리쳐 주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나다의 메아리는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미 울리고 있습니다. 너무 세미한 소리라서, 혹은 우리 안에 너무 많은 소음들로 넘쳐나서 듣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홀로 고요히 머물러 보면, 주님께서 울려주시는 “나다”의 메아리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울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