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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성결교
(1) 성결교 연대기(1907~1977)
1907.5.30. 김상준, 정빈,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 설립
1909.11. 한국최초의 “관주신약성경” 이장하에 의해 번역 출판
1910.4. 한국최초로 “부표 관주 신약성경” 이장하에 의해 번역 출판
1910.4.10. 토마스 선교사 한국 감독 취임(1대), 제1회 성결총회(선교회 총회)
1911.3.13. 성서학원 설립(현 서울신학대학교)
1912.4. 제3회 교역자 총회개최(성서학원), 성서학원 1회 졸업식(이명헌)
1914.4.22. 제5회 성결총회, 제1회 목사안수 거행
1917.9. 제8회 성결총회 개최
1918.12.8. 김상준의 “묵시록 강해”출판
1919.3.1. 3.1운동 민족대표로 김상준, 김기삼, 백신영, 한도숙, 천세봉 목사가 참여
1920.2. 토마스 감독(강경교회서)이 일본경찰에 의해 총상입고 영국치료
1920.3. 헬슬롭(W.Helslop) 2대감독, 성서학원 원장취임
1921.2. 헬슬롭 감독이 부인의 병으로 귀국
1921.3. 길보른 총리 3대감독 취임
1921.6.13. 김상준의 “사중교리” 출판
1921.9. 제12회 성결수양대회(제1회 연회) 개최: 고문제도 실시
1923. 제14회 성결대회(제3회 연회)
1925.3.25. "교리와 조례”제어 : 최초헌법
1929.2.26.~3.3 지금까지의 가 연회가 정식 제1회 연회 개최
1930. 3.26~29 제2회 연회개최(성서학원)
1931.3.17.~22 제3회 연회
1932.3.22.~27 제4회 연회(지방신학교:신의주)
1932. 김상준의 “다니엘서 강의”출판
1933.2. 임시 약법이 제정(반 감독제)
1933.4.12.~16 제1회 총회(1000교회 목표, 당시 200교회 2만 성도)
1934.4.23.~28 제2회 총회
1934.9.10. 부인회 창립
1935. 제3회 총회(36년 개정헌법에서 이사를 총무부에서 선출 -감독제로) 변남성 총회장 당선, 동양선교회와 중앙대의원 무효선언으로 분열조짐
1936.11.25. 하나님의 교회(나사렛교회-성교회-나사렛 하나님의 교회)로 분열
1940.3.22.~25 제7회 이사회, 41년 총회 조직
1940.5.31. 성서학원 대학 인가(경성신학교)
1940.10.22.~25 임시연회 및 제1회 총회 개회
1940.11.5. 경성신학교 개교식
1941.4.10. 경성신학교 제1회 졸업식(7명 졸업)
1941.4.9~13 경성신학교서 북부연회, 4.16-21 대전교회에서 남부연회
1941.6.24. 조선내 일본 기독교단 창립(장감성을 하나로)
1941.12. 활천 폐간(통 228호) “기쁜소식” 11월부로 발행 7년만에 폐간
1942.1.1. 성결교 출판부 발행, 광고 정지로 활천분량 감소
1942.4.17.~19 제2회 연회가 남북 연합연회로 경성신학교에서 개최
1943.5. 제3회 총회, 조선기독교단 통합반대로 일본과 친일파의 박해(해방전마지막총회)
1943.5.24. 남여 교역자 200명, 평신도 100여명 투옥과 예배 금지령
1943.9. 전 성결교회 폐쇠령(이명직, 이건 투옥) : 강제서명
1943.12.29. 성결교회 해산명령서와 성결교회 해산
1943.12.31. 이명직, 이건 출옥
1944.8.15. 박봉진 목사 출옥후 순교
1945.8.15. 해방후 1947년까지 완전 자립 복구
1945.8.19. 장,감,성을 중심으로 “조선 기독 청년연맹” 조직
1945.9.20. 한국교회 재건원칙 발표
1945.9. 첫주일 300여명 재흥예배 개회(경성신학교)
1945.11.9. 재흥준비위원회구성,제1회 재흥총회(총회장:박현명,총리:박현명,총회장:천세광)
5개교구 분리(서부:평안남북도,황해도, 북부:황해남북도, 중부:경기도,강원도, 충호: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 영남:경상남북도(교단 명칭변경 :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1945.11.20. 서울신학교 개교
1946.1. “활천” 복간
1946. 북한 기독교 박해로 지하 또는 남하
1946.4. 부인회명칭변경 : 성결교회 신생부인회
1946.4. 충호교구 분할 : 충청교구, 호남교구
1947.10.7. 제2회 총회, 지방회 조직(1000교회 신설계획)
1948.8.17 제2회 임시총회(3회), 인천영화 초급중학교 인수 결의(전도 6팀 구성)
1949.4.18. 제4회 총회 교단명칭변경 :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1950.7.4. 6.25로 서울을 탈출한 교역자가 대전제일교회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 조직
1950.7.23. 논산에 진입한 인민군이 122명을 창고에 감금후 고문
1950.8.23. 신학교 복구를 제의한 공산당에 속아 이건, 박현명, 최석모 목사 납북
1950.9.11. 성동면 일대 인사 600여명이 학살당함(병촌교회 66명 순교)
1951.5. 피난 중 부산에서 제6회 총회 개최(수정동 교회)
1951.6.14. 부산 온천동 교회에서 서울신학교 개교(신과)
1951.7.1. 여자부 별과 마산에서 개교함(학생수 150명)
1952.4.9.~13 제7회 총회, 대구 봉산교회에서 개최
1953.4.22.~26 제8회 총회(수정동교회), 최정원 제명(재림론) : 대구신학교
1954.4.20. 제9회 총회, 서울신학교에서 개최(57년, 희년사업준비)
1957.4.28. 희년기념예배(서울신학교), 목회중심에서 전도중심 교회로 전환 강조
1957.9.1. 50주년 기념교회 기공(중앙교회)
1958.12.1. 희년기념교회 준공
1961.5.30. 독립문 교회에서 보수총회를 조직 예성 설립
1961.11.6. 동양선교회가 16회 총회가 합법적임을 천명 총회측을 지지함.
1961.12.19. 합동추진위원회(이명직)를 보수측에서 구성
1962. 보수측 17회 총회개최 : 예수교대한성결교회 41회총회(1921년 기준)
1965.7.10. 이명직 합동권유서 전국교회발송, 예성 황성주, 기성 이진우 합동 추진
1965.7.23. 기성은 아현에서, 예성은 신촌에서 임시총회 개최, 해산결의 저녁 8시 아현교회에서 4년만에 합동(총회장:이진우, 525교회)
1967. 교단창립 60주년, 교단 상징화 작업(뺏지, 로고 제작)
1973.7.10. 신촌교회에서 2차 합동 환영 행사(740교회).
1977. 교단창립 70주년 기념관 건축(총회회관), 세계선교 시작
(2) 동양선교회 한국선교(성결교의 전신,1907년)
1897년,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Wesley, J.)의 성결운동과 내외적 죄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며,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신앙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회개와 “중생과 성결과 신유와 재림”을 복음의 중심적 교리로 하는 미국내 성결운동이 활성화하면서 오하이주 신시내티에서 “국제성결연합과 기도연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이 설립되고 “순례성결교회”(Pilgrim Holiness Church) 교단이 창립되었습니다. 1900년, 국제성결연합의 “마틴 냅”이 오하이주 신시내티에 “하나님의 성경학교”(God's Bible School)와 “선교사훈련원”을 설립하고, 이것을 토대로 조선의 성결교운동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1901년 4월 일본, 미국 북감리교 소속 전도사로서 무디성경학교를 졸업한 “나카다 쥬지”(일본교회감독,1870~1930)와 무디성경학교 동문으로서 미국 오하이오주 전신기술자 출신의 전도사 “카우만”(Cowman, C.E.,1867~1924), 그리고 회사동료인 “킬보른”(Kilbourne, E.A.)이 동경 간다 지역에 “중앙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습니다. 개인전도와 노방전도 등 직접전도 방법으로 전도관이 성장하면서 하층민 계층과 평민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1905년 11월, “사사오데츠라브로”(1869~1914)와 “길보른”(E.A.Kilbourne)이 함께하여 성경교실과 전도집회를 개최하면서 서민층 중심의 교회로 성장하였고, 지역마다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전도집회와 성경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은 “중생”(重生,Regeneration), “성결”(聖潔,Personality), “신유”(信癒,Faith healing), “재림”(再臨,Second Coming)의 “사중복음”(Four fold Gospel)을 전도표제와 가치이념으로 하였습니다. 1911년 11월, 중앙복음전도관은 “동양선교회”(One Mission Society)로 새롭게 태동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의 공식적인 조선선교는 1907년에 시작되었으나 조선에서의 복음활동은 1904년, 경성(서울)과 송도, 평양, 선천, 의주와 만주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한 나카타 쥬지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1907년, 연동교회 청년회원으로서 “동경백목성서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김상준”과 “정빈”이 경성으로 귀국하여 종로1가 염곡에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Mission Hal)을 설립하고, 1911년에는 “성서학원”(Bible Institute,현,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면서 조선선교는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였습니다. 복음전도관에서는 8회의 기도회와 4회의 집회를 가졌고 초기 36명이라는 결신자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1200부의 전도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3명의 결신자를 만났습니다. 이로서 복음전도관이 설립된지 6개월만인 1907년 5월30일, 272명의 결신자가 있었습니다. 1908년, “이장하”가 동경백목성서학원에서 훈련을 받고 경성으로 합류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들 세사람에 의해 복음전도관과 학교가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1백명이 수용가능한 기숙사와 6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선교강당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1909년 5월, 장로교인의 지원으로 기생촌 환락가인 무교정에 “신성결장막”(New Holiness Tabernacle)으로 불리우는 “경성중앙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소외 기피계층 복음전파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921년, 감독제 정치를 기초로 하는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가 조직되었고 초대감독으로 길보른이 취임하였습니다. 1933년 4월, 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하여 조선 자치연회를 개최하였으나 1936년, 교회내 정치적 갈등으로 목사들이 교단을 떠나 “하나님의 교회”를 별도로 설립한 후 1948년 4월, 정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와 통합하였습니다. 일제시대, 천황을 거부하고 재림론을 주장하여 일본과 조선의 성결교는 강제로 교단이 해산되어야만 했습니다. 해방후 1945년 9월, 총회가 재건되었고, 1949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설립되었으며, 6.25전쟁 당시 지도자들이 공산군에게 순교들 당하며 교단이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196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별도로 “예수교 대한성결교회”가 설립되었고 그와 함께 학교도 새로운 “성결신학교”(현,성결대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성결교단은 2,700여개의 교회와 80만성도로 성장하였으며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3) 동양선교회(성결교회) 총회(1929)
1907년 5월30일, “염곡복음전도관”과 1908년, 경성 무교정 “구리개전도관”을 중심으로 동양선교회(One Mission Society)는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는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信癒), 재림(再臨)”의 “4중복음”을 영구표제로 성결교회의 가치와 이념적 지표로 삼았습니다. 동양선교회는 시작부터 자립을 주도하여 동경성서학원 출신 “김상준”과 “정빈”이 “동양선교회 예수교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습니다. 두사람은 신규교단설립을 하지 않은 선교단체로서 직접전도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미국의 성결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동양선교회는 “카우만”(Cowman, C.E) 선교사가 조직하여 1908년,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혁준”이 “전남포교회”를 설립하고, 1909년 “강태온”이 “개성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장로교 연동교회 조사 이명헌, 집사 원세성, 배선균, 박용희, 여조사 이명신이 성결교회로 이명하여 동양선교회 창립회원 발기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10년 12월10일, 영국인 “존 토마스” 선교사 부부가 제1대 “조선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1911년 3월, 구리개전도관에 임시 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하고 교회 지도자 양성에 나섰습니다. 1912년, “경성 성서학원”이 별도 신축건물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교육체계를 도입하고 성경중심의 지도자 양성과 신구약성경을 신학교육의 근간으로 하였습니다. 1914년 4월22일,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이 한국성결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상준목사는 성서학원 교수와 사감, 아현교회 주임목사로 임직을 받고 본격적인 동양선교회 개척에 전념하였습니다. 1916년, 김상준 목사가 성서학원을 사임하고 개성교회 주임목사로 발령을 받은 후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감리교회 부흥목사로 이적하였습니다. 이에 그동안 김상준과 상호분쟁이 있었던 정빈이 북간도에서 귀국하여 김상준의 자리를 대신함으로서 정빈이 사실상 유일한 동양선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토마스 감독이 일본에 의해 집단 구타를 당하고, 영국인 “헤슬롭”감독이 내한하였으나 1년만에 귀국결정을 내림으로서 1921년, 동양선교회 부총장으로 있던 “길보른”이 제2대 감독에 취임하고 한국선교를 총괄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는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변경하고 선교단체에서 교단성격의 단체로 전환하였습니다. 동양선교회는 전국 33개소의 전도관과 수천명의 교세로 확장하면서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 한국의 3대교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22년, 성결교회는 감리교의 “신학세계”와 장로교의 “신학지남”에 이어 교단지 “활천”(活泉)을 창간하여 이명직 목사를 편집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922년, 성결교단 교리와 조례, 정치, 성례전규정, 행정조직, 지방치리제도를 규정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교리급 조례”를 발간함으로서 교단설립의 법적 절차적 단계를 밟아 갔습니다. 1921년 4월, 교역자 총회기구설립을 위한 “교역자간담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교역자회”로 변경 발전하였으며, 1929년, “연회”로 개편되었습니다. 경성학원에서 개최된 1회 “총회”에서 초대의장에 해리우즈, 부의장에 박영순, 서기에 이상철, 부서기에 이건이 선출되었고, 58명의 “평신도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32년, 제1회 “성결교회 총회”를 개최하고 한국성결교회의 사부(師父)로 불리우는 “이명직” 목사를 한국성결교회 제1대 총회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1933년, 총회에서는 “박현명”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로 1943년,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4) 성결교의 부흥(1928~1933)
성결교는 1907년, 272명에서 1928년, 3,500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전기를 마련하면서 1934년, 총회설립년에는 200교회, 20,000명 성도로 급성장하며 감리교와 대등한 교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21년, 가을 김익두 부흥운동이 전개되면서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회개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성서학원 교수인 이명직 목사의 간증을 계기로 학생회개운동과 남녀 기도회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후 1931년, 한국성결교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간중에 사중복음을 강조하며, 성결과 회개의 복음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감독제도에서 의회제도로 교회정치를 전환하고 자립, 자치, 자전을 도입하여 국내외 선교, 통일된 신학교육, 능력있는 교역자 양성, 문서전교의 적극성을 통하여 교단전체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불과 6년만에 3,5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➀ 전국부흥순회장막전도대 조직(1932)
1932년 6월, 성결교회는 “전국부흥순회장막전도대”를 조직하고 정남수 목사, 곽재근 목사, 이성봉 목사를 중심으로 순회 천막대형집회를 전개하였습니다. 1922년 11월25일, “활천”(活泉)을 창간하여 성결교회의 복음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성결교회의 부흥기에 교단의 제도적, 교리적 원칙을 정하였습니다. 1921년, 교역자 간담회는 1924년, 교역자회, 1929년, 연회, 1932년, 성결교회 제1회 총회로 확대 정립되는 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1925년, 용정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만주선교를 본격화 하였습니다. 동만 순회사에 이정원 목사, 남만 순회사에 김광준 목사를 임명하여 26개 교회, 10개 기도소, 37명의 포교자, 2,000명 교인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김광남, 김기삼을 중심으로 동경 재일성결교회를 설립하여 재일조선인의 안식처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7년, 중국, 태국, 러시아 선교를 착수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 선교교단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교역자의 심령부흥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앞장서서 기도와 전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길보른 선교사는 생각하였습니다. 교역자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완전한 경건의 태도를 보이는 그리스도의 모범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교역자의 비결은 교역자의 성결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사회개혁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므로 교회가 영혼구원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성결교회의 선교관이었습니다. 교회의 사회화는 교회의 세속화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대로 사회가 교회화 하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명직 목사는 성경의 역사가 죄악과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요한과 선지자들이 죄악과 싸우다 핍박과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모든 승리의 출발점에는 죄의 발견과 영적각성과 회개운동이 있었다는 것이 성결교회의 성경관이었습니다. 성결교의 교역자는 강단에서 죄를 말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하며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용도의 부흥회”와 “적극신앙단의 신흥우“가 남녀문제로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교역자들 가운데 윤리적인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명직 목사는 한국교회가 죄에 대한 영적각성운동보다 농촌운동과 사회운동에 더 많은 집중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교회는 입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자성하였습니다. 회개는 원하지 않고 부흥만 원하는 한국교회의 영적 부패함을 지적하면서 교역자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였습니다.
➁ 성결교 부흥운동(1931~1932)
1931년 11월11일, 이건 목사가 인도한 함경남도 함흥교회 부흥회(11.11~15)에서 성신의 역사로 중생자와 성결자가 나타났습니다. 11월16일, 강송수 목사와 이건목사가 인도한 함경남도 신북청교회의 부흥집회(11.16~20)에서도 중생과 성결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같은 시기, 경북 의흥교회에서 개최된 부흥회(11.16~22)에서도 성신의 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Miss. 테트 선교사가 인도한 경남 마산성결교회 부흥회(11.11~15)와 이명직 목사가 인도한 함경북도 웅긔교회 부흥회(12.2~6)와 서수라교회 부흥회(12.7), 그리고 경북 경주부흥회(12.11~14)와 충북 청주부흥회(12.26~30)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신의 큰 역사가 임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며 더욱 더 큰 은혜로 이어졌습니다. 1931년 12월30일, 경남 부산교회 부흥회(1931.12.30.~1932.1.5.)와 서울 아현교회 부흥회(1931.12.28.~1932.1.3.)에는 300명과 700명이 함께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성결교 부흥을 예고하였습니다.
1932년 1월5일, 경기도 수원성결교회 부흥회(1.5~10)와 함경남도 예원리교회 부흥회(1.14~17), 조치원성결교회 신년성회(1931.12.31.~1932.1.5.)는 성결교회의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리상철 목사가 인도한 조치원 성결교회 신년성회는 원산부흥운동(1903)과 평양대부흥운동(1907)과 같은 역사를 보여주는 동일한 체험이 일어났습니다. 권세봉 목사가 인도한 부강성결교회 신년성회(1932.1.5.~10)는 조치원성결교회 신년성회의 부흥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제직들은 금식기도운동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은혜의 소낙비를 경험하며 놀라운 역사의 임재를 맞이하였습니다. 부강성결교회의 영적각성과 대부흥은 김창근전도사가 인도한 충북 죽전교회 부흥회(1932.2.5.~8)와 충북 시동교회 부흥회(1932.2.8.~10)를 거쳐 충남 유성교회로 확대되었습니다. 또한 충남 삽교교회 부흥회(1932.2.18.~20)와 이명직 목사가 인도한 경기 수원성결교회 부흥회(1932.2.2.~5)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수원성결교회 부흥회에서는 자녀학대, 도적질, 불신앙, 음란, 음주, 흡연, 고리대금, 사기행각, 우상숭배 등 스스로의 죄악을 공개하고 회개하며 417명의 결신자가 나왔습니다. 곽재근 목사가 인도한 전북 이리교회 부흥회(1932.1.25.~27)에서도 부흥의 은혜가 크게 일어나 전북지역의 성령운동을 견인하였습니다. 강송수 목사가 인도한 함경남도 어포리교회 부흥회(1932.2.10.~14)와 예원리교회 부흥회(1932.2.14.~17), 간평교회 부흥회(1932.2.17.~20)가 오순절적 은혜의 역사로 이어지며 전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결교회 부흥회는 소아회에서도 역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소아부흥회”는 강원도 철원교회 소아부흥회(1932.1.7.~9)로부터 시작되어 1월28일에도 철원교회에서 31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평안남도 진남포교회 소아부흥회(1932.1.21.~24)와 함경남도 홍원교회 소아부흥회(1932.2.17.~20) 등 성결교회의 주일학교 부흥회는 주일학교 부흥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성결교회 부흥운동은 전방위적으로 끊임없이 전개되며 세상과 타협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회령 제4회 청진지방회(웅긔성결교회당,1932.2.13.~17)는 남녀교역자총대 12인과 200여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건 목사를 주강사로 지방회를 비롯하여 심령수양회, 사경회, 구령회 등 4대 집회를 겸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날, 그리스도는 영원불변(사도행전1:13), 둘째날, 그리스도의 인(요한계시록7:28), 셋째날, 재림과 적그리스도, 마귀의 그물에서 벗어나라(디모데후서2:8), 넷째날, 재림과 실생활(데살로니가후서3장), 다섯째날,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라(사도행전1:13~14)와 참평안을 얻으라(요한복음14:27)는 말씀으로 청진 지방회는 성결운동이 실생활속에서 발현되어 불신자들을 인도하는 첩경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서 성진교회, 라남교회, 영안교회, 무산교회, 지나두도구교회, 국자가교회 등 6개지역에 교회를 새롭게 설립하기로 하였습니다. 북선지방 북청읍성결교회 부흥회(1932.2.22.~28)는 장막전도대장 정남수 목사를 주강사로 1주일간 진행되었습니다. 북선지방 1호교회로서 북청읍성결교회는 성령의 단비를 갈급해하는 심령으로 부흥성회기간 내내 은혜의 비가 쏟아지는 정점에 서 있었습니다.
1932년 3월22일, 성결교회 제4회 연회(1932.3.22.~27)와 심령수양회는 이명직 목사(새벽기도회)와 정남수 목사(오전,오후집회)가 주강사로 초빙되어 한주간을 인도하였습니다. 경성성서학원 대강당에서 개최된 심령수양회에 새벽에는 600~700명이 참석하였고,오전 오후에는 900~1,230명이 참석하여 성황리를 이루었습니다. 교회지도자와 개교회 목사와 장로와 평신도들이 함께 하나가 되어 같은 은혜를 누리는 일치의 시간은 성결교의 미래를 희망적이고 발전적으로 견인하였습니다. 천세봉 목사가 인도한 경남 김해읍성결교회 부흥회(1932.4.19.~25)는 3년간 준비과정을 거쳐 진행된 영적 부흥회였습니다. 이원근 목사가 인도한 함경남도 함흥교회 부흥회(1932.4.5.~10)와 강시영 목사가 인도한 경북 경주성결교회 부흥회(1932.4.19.~24)에서도 성령의 임재하심은 놀라운 은혜속에 경험하였습니다. 김응조 목사가 인도한 전북 금산성결교회 부흥회와 함경남도 북청성결교회의 기도처소인 구미단기도소, 동자동교회(지교회), 인니망지리교회(지교회) 부흥회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충북 충주교회 특별집회(1932.4.17.~21)와 함경북도 혜산진교회 신유부흥회(1932.4.26.~30)에서 신유의 역사를 경험하였고, 오지의 섬마을, 전남 암태도성결교회 부흥회(1932.4)를 통하여 장년출석이 50명, 소아회가 10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는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대구지방서부연합전도회(1932.5.13.~18)에서는 영적 각성운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인천성결교회(김승만목사) 최영복 성도는 교회종각헌금 5원을 약속하였으나 헌납하지 않은채 거짓으로 어떤 성도에게 5원을 맡기고 간다고 말하였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죄를 고한 후 헌금을 하였습니다. 도마스 목사 특별부흥집회(1932.5.25.~29)가 열린 성서학원 강당에는 3,5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32년, 정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전국순회장막전도대”를 결성하자 미국 성결교단과 미국 교회들이 선교헌금을 모금하여 전도대 전용차량과 6,000~7,000명 수용가능한 대형천막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에서 이러한 순회전도를 위해서 차량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대형천막을 이용해 수천명을 동시에 수용가능하도록 한 것은 당시 협소한 집회장소를 감안할 때 매우 탁월한 생각이었습니다. 1932년6월2일, 사직공원에서 개막식을 거행하고 6월11일, 전국적인 순회전도여행을 시작하여 평양상수리성결교회 후원으로 13~15일 집회에 450~6,5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평양암정교회(1932.6.21.~25) 3,000명 등 진남포, 사리원, 해주에 이르기 까지 장막전도대는 쉴틈없이 전도부흥을 이어 갔습니다. 성결교회는 거짓 부흥이 아니라 참된 부흥을 통하여 회개의 역사를 강조하였습니다.
정남수 목사가 인도한 여주시장 장막부흥회(1932.9.7.~12)는 100명의 결신자를 이루며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여주성결교회(운상현전도사), 장호원성결교회(박봉진전도사), 죽산성결교회(김영주전도사), 근삼성결교회(이용순전도사), 광주성결교회(신신근전도사)로 이어지는 영적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향하는 성결교회의 부흥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경북 상주교회 부흥회(1932.9.3.~7)를 시작으로 비안교회, 군위교회, 이화촌교회, 의흥교회를 순회하는 “대구지방동부연합전도회”는 205명의 결신자를 이루는 성과가 있었으며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성결교회의 부흥은 가는 곳마다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선포를 믿고 순종하여 나아갔을 때 열매와 결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1928년, 3,500명의 성결교단이 1932년, 20,000명에 흐르는 과정속에서 일어난 성결교회의 대 부흥이었습니다.
1932년 9월23일, 평양상수리교회 전도집회(1932.9.23.~10.1)는 평양 부흥의 재탈환을 보는 듯 하였습니다. 4,000명이 회집한 집회 1일차 저녁에 모든 사람들이 회개와 자복함으로 통회의 시간을 보내었으며, 29일에는 5,000명이 회집한 가운데 정남수 목사는 많은 사람들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평양집회는 믿음에서 타락한 후 돌아온 78명의 성도들을 환영하였고 마지막 10월1일에는 8,000명이 회집하여 184명이 결신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어진 신의주 집회와 구의주 집회에서도 성령의 바람은 거세게 휘몰아치며 성결을 원하는 회개의 목소리가 하늘을 향하였습니다. 정남수 목사가 인도하는 장막전도대의 열기와 힘은 지치지 않는 말씀과 기도에서 끊임없이 중보의 역사가 흘러 나왔습니다. 강단에서 쓰러질 듯 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놀라운 파워는 분명 성령의 역사가 임재한 것이었습니다.
1933년, 서울 외대현리 장막전도대회(1933.4.26.~30)와 서선지방 겸이포 장막전도집회(1933.5.6.~11)에서도 성령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도서지방 겸이포에서의 고착화된 우상숭배사상을 깨고 200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6,000~7,000이 회집한 선천 장막전도집회와 신의주 장막전도집회에서 장로교인들의 성원과 참여로 장막전도대가 물질적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수산성결교회 부흥전도대회(1933.1.4.~10)는 오기로 했던 강사가 오지 않아 지방감리목사 전성운이 준비없이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지역의 공무원들과 대사업가와 지주들이 참여하여 예수를 믿는 풍성한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1934년, 제2회 총회가 폐막한 후 대구 장막전도집회(1934.5.14.~19)는 7,000~8,000명이 참석하여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509명이 결신하였고 36명이 믿다가 낙심하였다가 다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어진 경북 경주집회(1934.5.22.~28)에서는 170명이 결신하였고, 주류판매업을 하던 50대부부가 회심한후 직업을 바꾸었고, 읍내에서 기생생할을 하던 자매는 기생일을 중단하였습니다. 경남 진주부흥집회(1934.5.30.~6.3)는 장로교와 성결교회 연합집회로 진주장로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성령의 집회가 되었으며, 이러한 각성운동은 경남 삼천포집회(1934.6)와 통영집회(1934.6)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➂ 성결교 부흥운동의 성과와 가치
1932년에서 1934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강하게 일어난 부흥운동은 장로교와 감리교와는 달리 타교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성결교부흥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272명에 지나지 않던 성결교단은 그로부터 20년후인 1928년에도 3,500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면서 1934년, 총회설립년에는 200교회, 20,000명이라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며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우리나라 3대교단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원산부흥운동(1903년)과 평양대부흥운동(1907년)은 원산과 평양에서 발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간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결교회 부흥운동은 전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흥하여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선교부가 후원한 전도차량과 대형천막을 이용한 교통수단으로 학교운동장과 큰 공터만 있으면 언제든지 수천명을 동원할수 있는 “순회장막전도대”(정만수목사)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또한 정만수 목사를 비롯하여 이명직, 이건, 김응조, 이성봉, 이상철, 장원근, 변남성, 박현성 목사 등 외국 유학파와 성서신학원 교수들로 구성된 부흥강사들의 헌신과 열정이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➀ 성결교 부흥운동은 성령의 임재와 함께 강력한 회개운동이 부흥을 견인하였습니다. ➁ 그리고 성경말씀 연구(성별회)와 새벽기도회(청진기도회)가 성결교 부흥의 토대를 구축하며 말씀과 기도중심의 부흥준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➂ 성결교회 부흥회에는 회개한 사람,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 새구도자, 결심자, 낙심후 다시 결심하게 된 사람 등 다양하게 분류하여 각 사람들을 관리하였으며, 특히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수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 사람들의 수효를 성장의 수치로 연결하였습니다. ➃ 성결교 부흥운동은 죄에 대한 회개와 통회함과 영적각성운동이 삶의 개혁으로 실현되도록 하였습니다. 주류업자, 기생업자,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죄악의 불순물이 강한 직업을 즉시 중단하는 등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과 각오가 점진적이 아닌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➄ 성결교회 부흥운동은 열매와 결실에 있어서 중요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1932년, 신규개척교회는 50개에 달하였고, 신규 세례자는 2,000명, 신규 주일학교 학생등록3,000명, 새신자등록 15,000명, 교회성장으로 인한 증축,신축 13개 등 놀라운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➅ 성결교부흥은 1933년, “성결교단 총회”라는 새로운 도약기를 가져왔습니다. 성결교단은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한국의 3대교단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거대한 미국 남침례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성결교회는 지속적인 부흥회를 통하여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치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2만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➆ 성결교회의 부흥원리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섭리와 간절한 사모함이 일체감있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교역자로부터 솔선수범하였고 모든 교인들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감으로서 실현한 놀라운 성과였습니다.
➃ 성결교 신학사상
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복음(四重福音,Four-fold Gospel)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결교회는 요한 웨슬리의 사상과 영향가운데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 4중복음은 무엇인가? 성결교회의 핵심사상을 대변하는 신학적 원리는 교단의 위상정립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중생을 구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초보적인 구원(Initial Salvation)이라면 성결은 구원에 합당한 온전한 구원(Entire Salvation)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유는 중생과 성결과 재림에 이르기 까지 영육간에 이르는 질병으로 부터의 육신적 구원이라고 할 것입니다. 재림은 성도들이 원하는 궁극적인 구원(Final Salvation)으로 마지막이자 영원한 구원이라 할 것입니다.
“중생”(重生,Regeneration)이란 무엇인가? 중생을 흔히 영의 구원 또는 영적 구원이라고 말을 합니다.(에베소서2:1)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거듭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를 믿고 구주로 영접함으로서 시작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거듭남으로 새생명을 얻게 된다(에베소서2:1)는 의미에서 구원은 시기적으로 과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죄의 사면과 함께 죄 용서함을 함께 받게 되고 이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상승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결”(聖潔,Holiness)이란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갈라디아서5:24) 성결한 삶이란 중생에 이른 자가 새생명을 얻음과 같이 그 삶도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중생에 이른 사람 또한 세상 가운데서 여전히 죄에 노출되어 있고, 정욕과 욕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거의 습관과 태도를 완전히 못박지 않는한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영적 각성과 회개는 중요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사도바울도 자신을 매일 죽이는 과정을 거듭하였습니다. 중생한 사람이 성결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이 끊임없이 연결되어 질 때 그 가운데 성결한 삶이 유지되고 정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도바울도 모든 면에서 탁월하였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진정어린 고백과 회개를 통하여 성결한 삶으로의 진행이 진전되는 과정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결신학은 중생과 성결사이에 죄문제 해결이라는 중요한 단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죄문제를 방치하거나 외면한 채, 성결한 삶에 도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각성과 통회함을 통하여 회개의 영이 날마다 승리하고 성결한 삶을 위해 증진해 나가는 것이 성결신학의 핵심가치입니다.
“신유”(神癒,Divine Healing)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병에서 깨끗하게 치료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점진적인 치료가 아니라 온전한 치유로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예수께서는 내적 치유를 통하여 질병을 겪고 있는 사람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몸과 마음의 질병이 하나라고 여기셨고 몸의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 때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부터도 온전하게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성결교 헌장에는 “신유라 함은 하나님의 보호로 육신이 항상 건강한 것과 병날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병 고침을 받는 경험을 이름”이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신유를 통하여 몸과 마음이 정결을 유지하였다면 그 또한 중생한 자로서의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신유받은 몸과 마음으로 다시 죄를 향한다면 그것은 분명 불행이라 할 것입니다.
“재림”(再臨,Second Coming)이란 중생이 영의 구원, 성결이 혼의 구원, 신유가 육의 구원이라면 재림은 모든 구원의 완성이라 할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신학에서 삼중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범죄하여 타락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하는 동안 성령의 도우심을 날마다 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빌립보서2:12) 영혼의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입니다. 재림으로 이루어질 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은 죽은 성도의 몸이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며(고린도전서15:51~52), 살아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된 몸을 입을 것입니다.(빌립보서3:21)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임하는 궁극적이고 가장 중요한 축복인 것입니다.
길보른 선교사는 특별히 성신의 세례를 통한 성결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죄사함을 받는 중생이후 죄악의 뿌리를 멸절시키지 않는 한 죄악이 다시 심중에 자라나 항상 괴롭힘을 갖게 되기 때문에 성결신앙으로 계속해서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 만이 최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결교는 사중복음가운데 “성결”을 강조함으로서 나머지 3중복음의 의미가 퇴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결의 신앙이 중생과 재림을 연결하는 중요한 생활신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세상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성도들의 성결함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장로교의 입장에서 성결교의 예전과 부흥방식은 다소 진보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편, 장로교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성결교로 이적하거나 성결교적인 신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1933년 장로교 총회는 성결교회로의 이명에 관한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신앙적 색채가 다른 교단의 문제와 관련하여 신중한 입장을 가진 양측 교단은 상호 교단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신비주의 부흥운동과 금욕주의, 율법폐기론을 배제한 건전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자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예수의 행적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1월3일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등장하였습니다. 청년남녀가 혼숙하고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를 잉태시켜 준다고 추행하는 사이비종교도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면서 그와 동시에 악령의 역사도 놀랍게 성장하여 수많은 청년신앙인들과 예수믿는 사람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성결교는 이러한 불법적인 종교성행은 윤리적 교훈이 동반되지 않은 시대적 악행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와함께 자라나는 자유주의신학 또한 경계해야 할 거짓으로 분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성결교는 이럴 때 일수록 성경과 성경의 권위와 4중복음의 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성결교의 모든 신앙고백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존재하며 그것은 철저한 회개와 대각성에서 시작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➄ 성결교의 성장통과 발전
1921년, 길보른 OMS총리는 내한감독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던중 감독제도의 한계를 느끼고 본부에 “고문회”를 설치하여 의사결정을 반영하였습니다. 고문회는 비의사결정기구로 감독자문과 목사, 장로 안수를 고문회의 승인을 받도록 제도화 하였습니다. 고문회장에 길보른이 취임하였고, 고문직에는 이명직, 이명헌, 브릭스 부인이 임명되었습니다. 1923년, 고문직에 최석모, 이엘 길보른, 우두수(Woods)가 추가되었습니다. 1924년, 길보른 고문회장이 귀국한 후 고문제도를 폐지하였고 감독의 임무를 대행하는 “이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921년, 전국교역자간담회를 결성하여 전국교회의 합의를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제1회 교역자간담회에서 “활천” 잡지 창간을 결의하였을 정도로 간담회는 보다 중요한 의결기구였슴이 분명하였습니다. 1922년, 제2회 간담회에서는 양로국, 전도국, 수양회부를 설치하였고, 1923년, 남녀 교역자와 선교사들로 구성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교역자회”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또한 교역자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이사회를 통하여 실행하도록 제도화 하였습니다. 1925년, 교역자회는 선교사파송을 결정하고 이원근 목사를 만주 용정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11월2주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정하였으며 양로부를 은급부로, 전도국을 기금부로 부서명을 변경하고, 주일학교부, 건축부, 재무부를 신설하였습니다. 1928년, 63교회, 43개 기도소, 장년 3,726명, 주일학생 4,357명으로 교세가 확장되자 1929년 2월27일,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이사회는 미국 총본부의 승인을 받아 정회원 19명, 준회원 48명, 평신도 대표 58명이 참석하여 제 1회 연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임원선거에서 회장 우두수, 부회장 박형순, 서기 이상철, 동양선교회 재단이사 이명직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성결교회는 1928년이후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통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 한국교회 3대교단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1932년, 제4회 연회에서 1933년 총회조직을 결의하였습니다.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 미국본부의 재정지원없이 자급운동과 자립을 선언하였습니다. 1932년, 50개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고, 2,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15,000명의 새신자와 주일학교 학생 3,000명이 증가하였습니다. 1933년, 제1회 성결교회 총회보고에서 한국성결교는 200교회 2만성도로 성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00명의 교역자, 1,000명의 성도, 65명의 회원이 출석한 총회에서 이문현 목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자의 큰 일”(시편6:12)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총회 임원선거에서 회장 이명직, 부회장 곽재근, 서기 이건, 부서기 이상철, 회계 박현명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성결교 총회는 감독정치에서 의회정치로 전환하였으며 자립과 자치를 이루어 가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이명직 총회장은 성신을 받은 결과 다섯가지를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며,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기도에 힘쓰며, 정성을 다해 헌금하고, 모이기를 지극히 힘쓴다는 것이었습니다.
1936년, 곽재근, 정남수 목사 등 성결교회 성장의 중심축이었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교회” 사건으로 분열되어 교단을 떠났습니다. 성결교회가 OMS본부로부터 자립해 가는 과정에서 감독정치파와 의회정치파간의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선교사들과 이명직, 최석모 목사 등 성결교 중앙회는 감독제도 형태로 교단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방교역자들과 소장파 목사들은 의회정치를 원하였습니다. 1935년, 제3회 총회에서 곽재근목사의 막후노력으로 지방출신의 젊은 목회자 변남성이 총회장에 당선되자 동양선교회 이사들과 중앙대의원들이 총회 무효선언을 선포하고 감독제도로 환원하였습니다. 1934년, 순회목사제도가 조직된후 지방회장은 형식적으로 전환하고 실질적인 권한이 순회목사들에게 편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지방회장들의 불만이 가속화 하였습니다. 교리수호에 매우 보수적이었던 동양선교회는 순회목사로 하여금 지방교역자들의 설교를 검증하는 사례까지 발생하자 경성출신의 이명직, 최석모그룹과 서북출신 곽재근, 정남수, 변남성 그룹간의 대립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미국 장기 체류자인 정남수 목사가 선교비 모금방법을 공개하면서 하나님의 교회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칼자루를 쥐고 있는 중앙측에서 변남성 총회장 당선을 무효화 하고 이에 동조한 정남수(1936.1), 서부연회장 변남성(1936.6), 서재철, 김광원이 OMS총무부에서 면직당하였습니다. 1936년 7월, 곽재근이 사면되면서 곽재근, 변남성, 김승만, 오계석, 송태용, 안형주, 서재철, 김광원, 김정기, 정희열, 이태석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1936년 11월25일, 평양 상수리교회당에서 상수리교회, 목포교회, 평택교회, 인광리교회, 청량리교회, 진남포교회, 홍제원교회, 매양교회, 사리원교회, 평양교회, 대두리교회, 양시교회 등 12개 교회가 참여하여 “하나님의 교회 교단”을 설립하였습니다.
OMS 길보른과 웃스 총리가 내한하여 1936년 9월2일부터 10일까지 회의를 개최하여 의회정체인 총회를 감독정체인 연회로 전환하고 이사회가 통치기관으로서 환원하였습니다.상무이사 허인수, 지일우, 이명직, 최석모, 이건, 박현명, 이사(순회목사) 강시영, 이문현,김응조, 박형순, 강송수, 이정원이 임명되었습니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한국성결교회는 감리교 정치제도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1940년, “경성주일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고, 1934년 9월, 아현교회에서 “부인회전국연합회”가 결성되었습니다. 1934년11월, 기관지 기쁜소식이 창간되어 여성신앙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938년, 각교회 전도부인과 여신도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부인심령수양대회”(1938.4.18.~24)가 개최되었고 이것은 매년 정례화하였습니다. 1934년, 성결교 청년운동의 발원지로 “성우청년회”를 조직하여 청년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24년, 성서학원 교수 8명 가운데 2명이 한국인 교수로 선임되었고, 1926년, 이명직 목사가 부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28년, 11명의 교수 가운데 5명이 한국인 교수로 선임되었습니다. 그후 1935년, 이명직 목사가 성서학원 원장에 취임함으로서 성결교회 신학교육의 한국화가 이루어져 가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11년 이후 매년 1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던 성서학원은 1920년대에 매년 2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서 한국목회자의 질적 양적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1925년 3월, 성결교회 최초의 해외선교사 이권근이 북간도 용정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이원근 선교사가 용정교회를 설립하고 천보산 지교회와 소록구 지교회를 설립하면서 간도지역의 선교가 안정적으로 자리하게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조승각, 황성택, 박문익 등 간도출신의 학생들을 경성성서학원으로 유학보내 본격적인 만주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봉천교회를 개척한 박문익 목사와 신원식 목사, 3월, 하얼빈교회를 개척한 황성택 목사, 무순교회의 장두원 목사, 안동교회의 김광준 목사가 각각 남만주에서 목회를 시작함으로서 중국선교의 토대를 구축하였습니다.
1934년 4월23일, 제2회 총회는 해외선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전국교회들의 협력을 요구하였습니다. 전국 주일학교 학생 1인당 매월 1전헌금을 결의하고 해외선교헌금과 기부를 활성화 하도록 하였습니다. 총회는 일본선교를 시작하며 동경성서학원 출신 윤낙영 목사를 1927년 파송하여 동경성결교회 설립을 지원하였습니다. 1930년, 도요하시교회(지교회)를 설립하여 윤낙영 목사가 담임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후 오사카교회와 나고야교회를 추가로 설립하여 일본선교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성결교회 문서선교는 부표신약성경, 활천, 주교지남, 기쁜소식을 발간하고 1907년, 복음성가, 1917년, 곡조복음가, 1919년, 신증복음가, 1930년, 부흥성가 등 찬양집과 성경신학연구집, 전도문서를 지속적으로 발간하여 성결교회의 부흥과 성도들의 영적 학습을 강화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