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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Lc 1,39-56):
En aquellos días, se levantó María y se fue con prontitud a la región montañosa, a una ciudad de Judá; entró en casa de Zacarías y saludó a Isabel. Y sucedió que, en cuanto oyó Isabel el saludo de María, saltó de gozo el niño en su seno, e Isabel quedó llena del Espíritu Santo; y exclamando con gran voz, dijo: «Bendita tú entre las mujeres y bendito el fruto de tu seno; y ¿de dónde a mí que la madre de mi Señor venga a mí? Porque, apenas llegó a mis oídos la voz de tu saludo, saltó de gozo el niño en mi seno. ¡Feliz la que ha creído que se cumplirían las cosas que le fueron dichas de parte del Señor!».
Y dijo María: «Engrandece mi alma al Señor y mi espíritu se alegra en Dios mi salvador porque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por eso desde ahora todas las generaciones me llamarán bienaventurada, porque ha hecho en mi favor maravillas el Poderoso, Santo es su nombre y su misericordia alcanza de generación en generación a los que le temen. Desplegó la fuerza de su brazo, dispersó a los que son soberbios en su propio corazón. Derribó a los potentados de sus tronos y exaltó a los humildes. A los hambrientos colmó de bienes y despidió a los ricos sin nada. Acogió a Israel, su siervo, acordándose de la misericordia -como había anunciado a nuestros padres- en favor de Abraham y de su linaje por los siglos». María permaneció con ella unos tres meses, y se volvió a su casa.
«Saltó de gozo el niño en mi seno»
Mons. F. Xavier CIURANETA i Aymí Obispo Emérito de Lleida
(Lleida, España)
Hoy contemplamos el hecho de la Visitación de la Virgen María a su prima Isabel. Tan pronto como le ha sido comunicado que ha sido escogida por Dios Padre para ser la Madre del Hijo de Dios y que su prima Isabel ha recibido también el don de la maternidad, marcha decididamente hacia la montaña para felicitar a su prima, para compartir con ella el gozo de haber sido agraciadas con el don de la maternidad y para servirla.
El saludo de la Madre de Dios provoca que el niño, que Isabel lleva en su seno, salte de entusiasmo dentro de las entrañas de su madre. La Madre de Dios, que lleva a Jesús en su seno, es causa de alegría. La maternidad es un don de Dios que genera alegría. Las familias se alegran cuando hay un anuncio de una nueva vida. El nacimiento de Cristo produce ciertamente «una gran alegría» (Lc 2,10).
A pesar de todo, hoy día, la maternidad no es valorada debidamente. Frecuentemente se le anteponen otros intereses superficiales, que son manifestación de comodidad y de egoísmo. Las posibles renuncias que comporta el amor paternal y maternal, asustan a muchos matrimonios que, quizá por los medios que han recibido de Dios, debieran ser más generosos y decir “sí” más responsablemente a nuevas vidas. Muchas familias dejan de ser “santuarios de la vida”. El Papa San Juan Pablo II constata que la anticoncepción y el aborto «tienen sus raíces en una mentalidad hedonista e irresponsable respecto a la sexualidad y presuponen un concepto egoísta de la libertad, que ve en la procreación un obstáculo al desarrollo de la propia personalidad».
Isabel, durante cinco meses, no salía de casa, y pensaba: «Esto es lo que ha hecho por mí el Señor» (Lc 1,25). Y María decía: «Engrandece mi alma al Señor (...) porque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Lc 1,46.48). La Virgen María e Isabel valoran y agradecen la obra de Dios en ellas: ¡la maternidad! Es necesario que los católicos reencuentren el significado de la vida como un don sagrado de Dios a los seres humanos.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2019. 5. 31. 금)(루카 1,39-5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을 경축하는 것은,
그 일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은 메시아와 메시아의 선구자의 만남이기도 하고,
신약과 구약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서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 일이고, 엘리사벳의 인사말을 통해서
성모 마리아 태중의 아기가 ‘메시아’ 라는 믿음이 처음으로 고백된 일입니다.
또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쁨에 동참하라는 초대를 받은 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두 사람만의 사적인 대화가 아니라,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에 대한 공적인 선포이고, 고백이고, 증언입니다.
‘마리아의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찬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선포이고, 증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1-45)”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만나셨을 때,
평범하고 단순한 인사만 하신 것은 아닐 것이고,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들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엘리사벳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성모 마리아를 보자마자 마치 로봇처럼 자유의지 없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순전히 성령의 힘으로만,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 마리아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었을 때,
성모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 것이고,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그래서 찬양하는 말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성령의 도움이, 또는 성령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말에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 주님’은 ‘나의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벳은 메시아께서 인간 세상에 오셨음을 믿은 첫 번째 인물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또 ‘메시아(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고백은, “메시아께서 인간 세상에 오셨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1) 엘리사벳이 한 말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엘리사벳처럼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초대하고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미사’ 라는 용어 자체가 ‘파견’을 뜻합니다.
사실 미사를 마치는 예식은 신자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만일에 혼자서 믿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5,15).
감추어진 등불은 꺼진 등불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을 감추는 것은 안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부러 감추는 것은 아니더라도 능동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것입니다.)
2) 엘리사벳이 한 말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에 동참하라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미 엘리사벳 자신이 기쁨에 가득 차 있었고,
자신과 함께 기뻐하자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은,
‘온 백성’에게, 즉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신앙인은 이 기쁜 소식을 기뻐하면서 믿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라고 권고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쁨’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어딘가 고장 났다는 표시입니다.
회개가 부족하거나, 한눈을 팔고 있거나, 어떤 갈등 속에 있거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은 바라지 않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고 있다면,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기뻐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해서 금방 기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별로 기쁘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기뻐하라는 것인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단순히 어떤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안식, 평화, 행복을 얻어 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기뻐하라는 권고는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권고이기도 하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은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고, 은총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은 세속의 즐거움과 재미 같은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듯이,
신앙인의 ‘기쁨’도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다 바쳐 마니피캇을 노래했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와 아인카림의 엘리사벳이 서로 상봉하는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기구하고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길을 걸어 찾아온 여인은 10대 미혼모입니다.
맞이한 여인은 놀랍게도 노산(老産) 중의 노산을 앞둔 호호백발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서로 상봉하자마자 기쁨 충만한 찬가를 주고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두 여인의 뱃속에 든 아기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만남인 듯 한데,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비결은 활기차고 충만한 성령의 현존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위대한 예언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옛 백성 전체를 대변한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새 백성 전체를 대변합니다.
이로서 인류의 두 위대한 어머니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찬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의 서막을 찬양하는 동시에,
마리아의 놀라운 믿음을 칭송하고 축복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복음 1장 42~45절)
엘리사벳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
‘주님의 어머니.’
‘믿으신 분.’
여기서 우리가 꼭 눈여겨 볼 점 한 가지!
마리아는 믿는 모든 이들의 전형으로 등장합니다.
복음사가들이 마리아에게 최상의 칭호를 부여한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의 노래에 이어 마리아께서도 응답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신약 성서 내 여러 찬가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찬가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는
라틴어로 ‘찬미하다.’(Magnificare)라는 동사의 3인칭 Magnificat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마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을 향한 마리아의 찬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위업(偉業)을 노래하는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역사(役事)하심,
그분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니피캇은 종말론적 찬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개인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부족한 자신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후반부는 공동체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제 막 체험하게 될 종말론적 대사건의
해설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니피캇은 마리아의 노래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 각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홀로 감사의 찬가를 부르기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 찬미가를 부를 것을 기대하십니다.
매일 저녁 기도 때 마다 마니피캇을 노래하는 모든 수도자와 사제,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업적을 큰 목소리로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새로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이 노래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냥 적당히 마니피캇을 노래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 삶 전체, 몸과 마음, 정신 전체를 다 바쳐 노래했습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구원자 하느님, 이스라엘을 대표한 마리아 자신에게
큰 자비를 베푸신 사랑의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리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도구로
마리아를 선택하신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권세 있는 자, 부유한 자, 교만한 자,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
비천한 자, 단순한 자, 스스로 보잘 것 없는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잊지 않는
겸손한 자여서 선택하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령 부자 되는 법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밭에서 일을 하시며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시키셨습니다.
저는 막걸리를 받아오며 홀짝홀짝 마시고 그러다 취해 넘어져
주전자에 막걸리를 조금밖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화내실 것 같아서 매우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셨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걱정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만 했던 그 기억은 생생합니다.
누군가가 기뻐할 것을 가지지 못했다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당신이 모신 성령님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자
당신도 기쁨에 넘쳐 찬미를 드립니다.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해 줄 때 가장 기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본성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가져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니 돈을 가져가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돈과 성령님과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을 모으는 것처럼 성령님을 고이 간직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이웃도 기쁘게 하고 나도 기쁠 수 있습니다.
스노우폭스 김승호 회장은 빈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 중에 가장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의 매장은 국내 10곳, 전 세계 1400여개로 연간 4,000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강연에서 돈의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말했습니다.
이 돈의 속성을 잘 이해하면 성령의 은혜를 잘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돈은 인격체입니다.
돈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돈을 소중히 여기고 합당하게 대우해주면 돈도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옳은 곳에 쓰면 다른 친구들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을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돈도 그 사랑에 지쳐 도망가게 됩니다.
또 돈을 너무 무시하는 사람은 돈도 그 사람을 무시해 가지 않습니다.
아낄 때는 아끼고 보낼 때는 흔쾌히 보내주는 사람이라면
돈도 그 사람에게 다시 오고 싶어 합니다.
성령님도 인격체이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자신만 가지고 있으려고 해도 말라버리고,
아무에게나 무의미하게 전해주려 하다가는 무시 받는 것이 싫으셔서 그 사람을 떠납니다.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그에게 전해주려 긴 여행을 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을 전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 자신도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2. 돈은 중력과 같습니다.
중력은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무게감이 크면 클수록 다른 돈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에는 중력의 힘이 작용하기에 1,2,3,4,5,6,7,8의 순서대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1,2,4,8 ...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불어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모신 성령을 통하여 당신 관계를 확장시키셨습니다.
요셉에게만 있지 않고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미래의 세례자 요한에게까지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가족이 형성됩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제자들을 바탕으로 커다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혼자 성령으로 충만한 것보다 성령으로 여럿이 뭉칠 때 성령의 힘은 더 강력해집니다.
성령은 우리를 개인적인 기도생활에만 머물지 않고 친교 공동체를 통해 더 확산됩니다.
성령 강림 때 성령께서 120명이 모인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함께 모인 곳이 더 뜨겁고 더 뜨거운 곳에 성령께서 더 많이 내리십니다.
3. 일정하게 들어오는 작은 돈은 일시적으로 들어오는 큰 돈보다 더 힘이 셉니다.
예컨대 매달 100만원씩 버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에 1000만원씩 버는 사람보다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일정하게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를 관리하고 모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 피정과 같은 것을 즐기면서 일상에서는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성령을 쉽게 잃게 됩니다.
돈도 그렇듯이 성령도 매일 꾸준한 기도를 통해 모시는 사람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십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으셨던 이유가
한 번에 성령을 모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를 꾸준히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4. 고생해서 번 돈은 공짜 돈보다 힘이 셉니다.
현재 보여 지는 가치가 동일한 돈일지라도 돈이 벌어지는 과정에 따라서
그 돈의 무게가 전혀 달라집니다.
갑자기 복권당첨이나 땅값이 올라 큰 부자가 되더라도
꾸준히 모은 적금하고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하지 않고 번 돈은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 그냥 흩어져버립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얻기 위해 인간도 합당한 고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것이 곧 기도와 같습니다.
그렇게 밤새 고생해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TV를 끄고 집보다는 성당에서 기도한다면
같은 시간 기도하더라도 더 충만한 성령님을 모시게 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모신 사람은 남과 머무르며 남을 기쁘게 할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모신 성령님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부자가 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동시에 기쁨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부자가 되는 능력을 키웁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전능하신 분께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와 함께하는 오늘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바람이 주님께 전구되고
가슴에 담았던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기적이 어머니의 청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전구를 통하여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성모님을 통하여 은총을 구하십시오.
성모님을 통하여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여러분의 모든 바람을 성취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구원능력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맡겨 드려
풍성한 열매를 반드시 얻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늘 곰곰이 생각하고(루카1,29), 마음속에 간직하며(2,19.51) 사셨던
성모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나서 끝까지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컷 도와주고서는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나중에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구지 스스로 해 놓고는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화로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리고 둘은 뱃속에 든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였고, 더욱이 마리아의 방문에 성령을 받아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며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신 하느님, 돌계집의 부끄러움을 없애주신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으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고 또한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석 달가량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가 통하지 않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달프고 미운사람은 봐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해외 교포사회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 반가운 손님, 떠나실 때 더 반가운 손님’이라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의 만남은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풍요로워집니다.
함께 나눌 수 있음이 기쁨입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루카복음 11장 27절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말씀은 성모님께서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라는 것은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행복이란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러이러 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 저러저러해질 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주 하느님을 믿고 믿음에 따르는 실천을 하는 것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복되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 곧 행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저러한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주님 안에 있다는 자체가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리아를 통하여 큰일을 하셨듯이
오늘 우리의 부족함도 굽어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가장 큰 일은 가장 작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야 그 잉ㄹ이 큰 일이라는 것이 역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가장 겸손하고 가장 작은 마음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모님의 영성입니다”(함께야).
이 시간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성모님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둠으로써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함을 굽어보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난한 예수 - 김근수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시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리아여. 당신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31 보시오, 이제 당신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36 당신의 친척 엘리사벳을 보시오.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습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가 1,26-38)
‘마리아 동정탄생’이라는 제목이 흔히 붙는 단락이지만, ‘성령에 의한 마리아의 놀라운 임신’이라고 좀 더 정확히 말하는 것이 좋겠다. 동정 탄생이 주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임신과 아기의 놀라운 미래에 대한 예언이 본문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나자렛은 nazaret(마르코 1,9; 마태오 요한 1,45), nazareth(마태오 21,11; 루가 2,4, 사도행전 10,38), nazara(루가 4,16)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세포리스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갈릴래아 저지대에 있다. 서기 3세기까지 문헌이나 비석에서 나자렛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서기 3세기까지 문헌이나 비석에서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동네였던 것 같다.
27절에서 parthenos는 동정성을 가리킨다. 유다교에서 동정성은 윤리적으로나 신비적으로 가치있게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유다교에서 은둔파인 에세느파는 동정성을 고귀하게 생각하였다. 루가에게 이 전승을 전한 사람들은 동정성을 높이 여기는 유다교내 개혁운동 흐름에 속했던 것 같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동정성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사도행전 21,9; 고린토전서 7,25; 요한묵시록 14,4).
유다교에서 12살 소녀는 결혼 가능한 연령이 되었다. 마리아는 아직 약혼자 요셉과 같이 살진 않지만 약혼을 통해 법적으로 혼인 상태였다. 약혼 때 약혼녀 부친에게 약혼남은 결혼지참금을 지불하고 약혼녀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약혼녀는 아직 부모의 집에 거주한다. 그 후 보통 1년 후에 결혼식이 열리곤 했다. 결혼식 전까지 약혼녀에 대한 보호권은 약혼녀의 부친이 갖는다.
초자연적 존재가 오는 장면(판관기 6,11)이나 부활하신 분이 나타남과(루가 24,15-36) 다르게, 천사가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마치 나그네처럼, 마리아를 방문하고 있다. 천사는 공동성서에서 익숙한 장면처럼(창세기 16,11; 판관기 13,1; 이사야 7,14) 마리아에게 아들 탄생 소식을 알린다. 그 이름은 ‘야훼가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예수다. 루가복음 독자들은 마리아를 방문한 존재가 천사임을 알지만, 정작 마리아는 그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다.
28절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에 몇 성서사본은 ‘여인 중에’ 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33절에서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놀랍다. 로마 식민지 치하라는 유다의 상황 탓에 정치적 메시아사상을 상징과 그림 속으로 숨겨버리고 조심하던 시대에, 루가가 이렇게 당당한 표현을 쓰다니 말이다. 34절에서 마리아의 ‘어떻게’는 나이나 불임이 아니라 동정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물음에 천사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성령 이야기를 꺼냈다.
즈카리야와 다르게 마리아의 답변은 믿음의 모범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언자들이 임무를 받을 때 하는 수락연설처럼 마리아의 답변은 의젓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고 나서 수락 발언의 첫 문장은 “저는 죄인입니다pecator suum” 였다. 그 겸손을 나도 언젠가 따르고 싶다.
예수 당시 유다교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문화 등 외래사상에 영향 받고 있었다. 점성술과 태양신 숭배가 널리 퍼졌다. 로마황제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관습을 들여왔다. 12월 25일 성전봉헌 축제에서 빛을 축하하는 의식을 열었다.
동정성을 높이 여기는 문화는 이집트에서 늦게 발전된 주제였다. 이러한 외래문화에 영향 받아 만들어진 전승을 성서 저자들은 예수의 참모습을 독자들에게 밝히고 설명하는데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종교학에서 연구되는 성과를 신학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 탄생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비교하고, 세례자 요한이 예수보다 낮은 인물이라는 말을 우리는 실컷 들어왔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연속성과 공통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둘 다 불의한 세력에 저항했고, 둘 다 권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을 때, 예수는 숨거나 물러서지 않고 곧 세상에 등장하였다. 그란데 신부가 살해되고 나서 로메로 대주교는 등장하였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을 이은 것처럼,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를 이은 것이다. 회개에도 예언자에게도 동지와 벗은 있다. 하느님은 덕 있는 사람, 의로운 사람을 외롭게 놓아두시지 않는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는가가? 예수는 영원부터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마리아에서 탄생하는 순간에 하느님의 아들임이 비로소 우리에게 신성이 드러나는가.
성서주석학에서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예수는 영원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묵상하는 자세가 아름답다. 그것을 루가는 오늘 단락에서 강조하고 싶었다.
구원 역사에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하느님의 주도권은 인간의 응답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고 요구한다. 해방 실천에 참여하다가 자주 실망하는 사람들이 특히 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 눈에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악의 세력은 하느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악인은 하루도 편하게 잠들지 못한다. 우리의 저항에 우리가 주저할 필요는 없다.
“39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루가 1,39-56)
마태오복음 1,2장, 루가복음 2장과 달리 요셉의 역할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39절 he oreine는 서쪽으로 쉐펠라, 동쪽으로 요르단 분지, 남쪽으로 네겝 사막 사이에 있는 산악지방을 가리키는 단어다.(민수기 13,29; 예레미아 40,13) 갈릴래아 저지대에 살던 어린 소녀가 높은 산악지방으로 올라가는 일은 평범하지 않다.
마리아의 인사를 들었을 때 태중에서 뛰놀던 요한 이야기는 어머니 레베카 태중에 있던 야곱과 에사우 이야기를 떠올린다.(창세기 25,22)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 자신의 임무를 깨달았다는 것을 루가는 말하고 싶었다. 42절 ‘큰 소리로 외쳤다’는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예언자적 행동을 가리킨다. 예언자 아들을 가진 어머니도 예언자 역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찬미는 언어뿐 아니라 몸동작으로 나타난다. 몸으로 하느님께 찬미하는 모습은 유럽 그리스도교에서 억제되었지만,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하다. Feuerbach 말대로 고통은 생각보다 먼저 오듯이, 기도는 언어보다 몸으로 먼저 오지 않을까.
신학은 언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한다. 여성신학자가 많아져야, 평신도 신학자가 많아져야, 몸을 이용한 기도와 신학이 제대로 강조될 수 있을까. 신학자 대부분 성직자이다 보니, 신학 연구와 가르침에서 아쉬운 부분이 참 많다.
루가는 이미 독립된 노래로 있던 전승을 받아들여 이 대목에 실었다. 비슷한 노래가 공동성서 여러 곳에 보이지만(탈출기 15,1-18;19-21; 신명기 32,1-43; 판관기 5,1-31), 특히 한나의 노래가 주목되고 있다.(사무엘상 2,1-10) 마리아의 노래는 개인 기도로 불려진 것 같다. 공동체가 같이 부르자는 암시는 이 기도에 없다.
하느님이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간접적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 후 이 노래는 교회에서 마리아찬가로 불려왔다. 성서 사본들을 근거로 노래를 누가 불렀는지 논란되어 왔다. 엘리사벳이 아니라 마리아가 부른 것 같다. 마리아찬가에 엘리사벳이나 세례자 요한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46절 이하에 소개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여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칼 라너의 유명한 책 ‘말씀을 듣는 사람’의 좋은 예가 마리아다. 영혼psyche, 마음pneuma은 마리아 자신을 가리킨다.
노래 첫 부분에 감사의 대목이 나온다.(시편 9,2-; 30,2; 138,1-) 이름 없는 동네의 비천한 소녀를 하느님이 알아주셨음에 마리아는 감사드린다.(창세기 29,32) 하느님이 마리아를 선택하신 행동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킨 경험과 이어지고 있다.(신명기 10,21) 여인을 차별하던 사회적 통념을 뒤집어 버리는 통쾌한 장면이 루가복음 곳곳에 있다.
48절 비천한tapeinos는 그리스어와 신약성서에서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 해석되는 단어다. 마리아가 가난한 계층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겸손하다.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겸손한 점도 있다. 49절에서 하느님의 크신 일을 마리아는 떠올리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을 철학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역사에서 하신 행동을 기억하는 것이다. 신학은 존재론보다 역사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 서양신학은 역사보다 존재론을 더 중시해온 경향이 있다. 신학은 존재, 본질보다 역사, 현실을 먼저 보아야 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일을 아주 강조하였다.
52절은 잘못된 사회질서와 신분체제를 뒤엎은 해방자 하느님을 노래하고 있다. 유다교에서 하느님에 대한 모든 찬미노래와 기도는 이집트에서 해방체험을 근거로 한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미사, 예배, 기도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때, 이집트 억압에서 해방 사건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하느님은 권력자를 심판하고 부자를 내쫓으며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분이다.(이사야 2,11-17; 욥기 12,14-25)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느님뿐 아니라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버리는 하느님을 강조해야 한다.
원래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불편하고 까다로운 종교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교회에서 잘 대접받고 있다. 교회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부자나 권력자가 얼마나 될까. 교회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아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52절은 공동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명문장이다. 하느님이 해방자이니 예수도 해방자다. 하느님에게 예수에게 해방자라는 호칭을 드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권력자나 부자여서 그럴까. 권력자나 부자를 편들어서 그럴까. 자신이 하느님께 버림받을 것을 벌써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여인이 만났다. 그녀들의 아들 예수와 요한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남자 베드로와 바울이 만난다. 역사는 만남의 연속이다. 예수의 선구자로서 요한의 역할, 해방자로서 하느님의 모습,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하느님의 구원 행동과 약속이 마리아찬가에서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잘못된 사회질서가 뒤집어지기를 바란다. 마리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권력이 없는 자, 굶주린 여인, 가난한 자들의 대표다. 오늘 단락에서 두 여인의 행동은 여성의 진정한 품위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품위는 하느님의 해방 행동을 찬미하고 참여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데 있다.
해방자 마리아에게 해방자 예수그리스도가 나왔다. 마리아는 여성 해방신학자다. 마리아찬가는 현대에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가난을 영성적,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늘고 있다.
성서에서 가난은 우선 사회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은 윤리적 겸손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를 뒤엎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찬가는 전통적으로 보수파 성직자, 신학자들에게 불편한 노래였다.
지금도, 가톨릭에서 대부분 성직자인 신학자들은 여성신학과 해방신학을 멀리 하는 편이다. 여성신학과 해방신학을 학문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신학이 깊이 발전되지 않았다. 여성신학이 깊이 발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은 주교나 신부보다 중요하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가톨릭 신학대학의 교수 절반이 여성 평신도로 이루어질 그날이 어서 오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마리아는 유럽의 귀족 부인이 아닌 아시아의 시골 아낙네다. 마리아는 극보수 우파 평신도가 전혀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군사정권에 의해 납치되고 실종된 자녀들을 찾는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들이 성서의 마리아에 가깝다. 피에타의 성모는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아보기라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녀의 몸을 만져보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 어머니들이 있다. 그 어머니들은 마리아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가르치는 마리아의 모습과 오늘 마리아 찬가에서 마리아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가. 레지오 마리애가 근본주의 계열의 신심운동에 머무르면 안 된다. 교회 내 보수파의 근거지로 잘못 이용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성직자중심주의를 지탱하는 토대로 이용되면 안 된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광화문광장에 나와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기도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은 해방자 마리아라는 성서적 이미지를 어서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