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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쟁사(전爭史)
이 문 열
일본 침략군으로부터의 실지(失地) 회복 또는 일시적 강점(强占) 상태로부터의 국토 수복을 독립 이라 이름하는 것에 못지않게 싸가지 없는 짓거리가 그 투쟁 기간을 무슨 식민 시절 어쩌고 하는 나불거림 이다. 앞서 말했거니와, 우리는 일본에게 잠시 국토를 점령당한 적은 있어도 주권을 넘겨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미 말했거니와, 2차 세계 대전 때 불란서는 분명히 전 국토를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그 괴뢰 정권까지 섰지만 그 시절을 독일 식민지 시절이라 말하는 불란서인은 없으며, 더 멀게는 나폴레옹이 한창 때 유럽 각국이 그의 점령 아래 들어갔지만 어떤 나라도 그걸 불란서 식 민 시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지도부가 존재하고 민족이 한 가지로 저항을 계속하는 한, 그 세월이 좀 길다 해도 그것은 다만 좀 지루한 전쟁 기간일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부쩍 자주 듣게 되는 소리 중에 더 속터지는 게 독립 운동사(獨立運動史) 어쩌고 하는 소리다. 독립이니 운동이니 하는 말이 골 없고 밸 빠진 말이라는 제1차 수복 전쟁사에서 벌써 얘기했으니 다시 곱씹지 않는다 쳐도, 굳이 삼십육 년에 결친 민족의 성전(聖戰)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저의를 헤아려 보면 절로 치가 떨린다. 필시 우리 사이에 스며 있는 한자(韓子)와 양(洋)튀기, 되〔古月〕튀기들이 저희 핏줄 끌리는 나라를 덕뵈기 위해 지어 퍼뜨린 수작들일 것이다. 그것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 중의 일부가 지각 없이 받아 써서 그런 고약한 말이 공식화(公式化) 될 판이다.
하기야 이미 얘기한 바 있는 제1차 수복 전쟁 또는 기미 평화 전쟁은 그 수단에서 우리가 전쟁이란 말에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과는 좀 거리가 있다. 거기다가 하도 터무니 없는 일을 당한 뒤끝이라 망연자실해 보낸 그전 몇 년은 우리의 저항이 소극적이고 산발적이라 자칫 우리가 일본의 도래(渡來)를 수긍한 것으로 의심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그 동안 싸움을 멈춘 적은 없으니 식민지 시절이란 말은 아무리 확대 해석한다 해도 우리에게는 당치 않다. 하물며 뒤이어 벌어지는 제2차 수복 전쟁 또는 25년 전쟁에 있어서랴. 한 치 한 치 이 땅을 우리의 피로 물들이며 되찾아간 그 25년은 전쟁이라도 치열한 전쟁의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역사에 독립 운동사란 욕된 이름을 붙인 자는 앙화 있으라. 그것을 그대로 믿고 퍼뜨린 자도. 아니, 그냥 듣고 있었던 자도. 더군다나 그 기간의 일을 토막내고 줄여 오직 식민지 시절의 고만고만한 저항 운동으로 비하시킨 자들에게는 억천만 조령(祖靈)의 저주가 있을 진저 .
그러하되,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엄연한 기록에도 사(邪)가 인다. 한동안 찍소리 못 내고 숨어 지내던 한자(韓子), 양튀기, 되튀기들이 옷솔기의 이처럼 스멀스멀 기고, 머리 검은 우리 젊은이 중에는 물색없이 낯선 것 새 것만 찾는 축이 늘어간다. 그 모든 게 서로 죽이 맞아 뒤엉키다 보면 거짓은 참이 되고 자랑은 욕이 될 수도 있으니 방금의 못된 개념 규정, 돼먹잖은 시대 구분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이에 재주 없으나마 본 바, 들은 대로 우리의 25년 전쟁을 얘기 하려니와, 아는 이는 아는 대로 다시 한 번 그 감격을 함께 되새기는 데서 뜻을 찾으시기를.
제1차 수복 전쟁에서 패퇴한 우리가 잠시 이 땅을 비워두고 남북으로 나누어 길 떠난 얘기는 이미 했다. 북쪽으로 떠난 페는 장백산맥에 자리잡고, 남쪽으로 떠난 패는 이어도에 닻을 내려 피로 피를 씻는 국토 수복전의 채비에 들어갔음도.
하지만, 그 무렵은 섬오랑캐 일본이 초장 끗발에 취해 얄〔속의 작은 말〕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을 때였다. 말이 쉬워 남북으로 떠났지, 우리가 목적지에 이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가 못했다. 일본이 싸움에 맛들인 군대와 한창 손에 익은 새 병기로 우리를 뒤쫓은 까닭이었는데, 그 바람에 25년 전쟁의 첫 막은 바로 그 추격을 뿌리치는 전투로 시작됐다.
먼저 일본과 전단(戰端)을 연 것은 장백산으로 이동하던 북로군(北路軍)의 단후(斷後) 대대였다. 일군(日軍)의 악착같은 추격에도 불구하고 노약자와 아녀자를 감싼 선발대가 장백산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연락이 오자 일군의 추격을 뿌리치는 일을 맡고 있던 단후대대는 한 차례의 복격전(伏擊戰)을 결심 했다. 그대로 두면 장백산까지 추격해 와 우리가 잠시 의지해 전열을 정비할 본거지까지 귀찮게 굴 것 같은 일군(日 軍)들이라, 그쯤에서 대타격을 주어 다시는 뒤쫓을 엄두를 못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25년 전쟁 첫해, 서력으로는 1920년 구월 초순의 일이었다.
전투라면 먼저 갖춰야 할 게 정보여서 우리는 그 쪽부터 시작했다. 산 잘 타고 길 잘 아는 이들은 산 속으로 흩어져 복격전에 알맞은 지형을 찾으러 나섰고, 날래고 눈치 빠른 이들은 저잣거리로 내려가 우리를 뒤쫓는 일군의 동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며칠 안 돼 저잣거리로 내려갔던 이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알아 내 먼저 돌아왔다. 그들은 이곳저곳 쑤시고 다닐 것 없이, 한 군데 부엉이집 같은 곳을 털어 일군에 대한 정보를 무더기로 빼냈다. 바로 만주 혼춘(琿春)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 영사관은 침략의 전초 기지라 그 서류함 속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모두 있었다. 거기 따르면 일본군의 추격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치밀했다. 병력은 14사단, 15사단, 구리고 21사단에 만철(滿鐵) 수비대까지 합쳐 오만을 넘고 있었으며, 작전 형태도 단순한 추격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의 포위 섬멸을 기도하고 있었다. 곧 우리의 목표지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삼면으로 포위 공격해 아예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밖에 그 정보에는 일본군의 움직이는 방향과 행군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15, 14단은 만주의 주둔지에서 장백산의 장고봉(長鼓峯)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에 있던 21사단은 도문강(圖門江)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 수비대는 송화강(松花江)을 건너 서진해 우리를 삼면에서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나남에서 북상해 오는 21사단만이 추격군의 전부인 줄로 알았던 우리는 그 뜻밖의 정보에 적지아니 위축되었다. 단후대대(斷後大隊)가 비록 그때 우리의 가장 정예한 부대였지만 머릿수는 겨우 천오백에 수복전 초기여서 화기(火器)도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전단을 서둘러 열기보다 그대로 장백산의 본대와 합류해 소규모의 산악 게릴라전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이 일어 우리의 전의가 흔들리고 있을 때, 산악으로 지형 정찰을 나갔던 이들이 반가운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서 멀지 않은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의 백운평(白雲坪)으로 드는 골짜기에서 복격전에 알맞은 지형을 찾았노란 것이었다. 길이 팔십 리에 짙은 밀림이 덮인 골짜기 양편의 경사는 성벽을 기어오른 것만큼이나 가파로워 몇 개 사단이라도 매복할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그 사이로 난 길은 적의 대군이 반드시 지나야 할 길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런 천혜(天惠)의 지형이 있다는 게 먼저 우리의 흔들리는 전의를 다시 굳혀 주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의 진행을 그대로 용인하면 본거지로 예정 한 곳이 포위되어 아직은 항전의 채비를 갖추지 못한 본대가 위협 받을 염려 때문에 모두의 의견은 곧 거기서 일전을 치르자는 데로 모아졌다.
우리는 본대 호위 병력에서 일천 명을 추가로 지원받고 화기도 최대한 그 전투에 참가할 부대에 집중시킨 뒤 강행군을 시작했다. 우리가 먼저 그 골짜기에 들어가 매복하기 위함이었다. 합쳐 이천 오백의 병력에다 일백 대가 넘는 치중(輜重) 마차까지 딸린 행군이었으나 우리는 남하하는 일본군 부대보다 한발 앞서 그 골짜기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거기서 기다리다 먼저 오는 적 부대를 치고, 다시 몸을 빼쳐 북상해 오는 부대에게 기습을 감행할 작정이었다.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오는 부대는 우리에게 그 두 번의 싸움을 치르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타격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아직 남하하는 적군의 부대가 우리의 매복망에 걸려들기도 전에 놀라운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나남의 적 21사단이 벌써 오십 리 남쪽까지 진출해 왔소.”
우리 대부분은 그런 보고에 걱정부터 먼저 했다. 자칫하면 이 개 사단의 남북 협공에 의해 우리가 오히려 낭패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전투를 잘 아는 이들은 달랐다. 골짜기의 방향도 살피고 얼마 남지 않은 해도 쳐다보고 하던 그들은 오히려 손뼉까지 치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잘됐소. 한꺼번에 두 마리 호랑이를 다 때려잡읍시다.”
“겨우 이천오백 명으로 어떻게 남북에서 협공해 오는 적 이 개 사단을 한꺼번에 칠 수 있단 말이오?”
싸움에 어두운 이들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자신 있게 말했다.
“두어 시간 뒤면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어리석게도 왜적들은 협공을 한답시고 반대 방향으로 진군해 오고 있소. 거기다가 더욱 다행한 것은 양편 적의 도착에 시차가 있다는 것이오. 남하해 오는 적부대는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이 골짜기로 접어들 것이오. 그러나 북상해 오는 적은 이곳의 포 소리를 듣고 강행군을 한다 해도 세 시간은 지나야 이 골짜기로 접어들 거요. 우리는 그 두 시간의 시차를 이용하면 그들끼리 싸우게 할 수도 있소. 먼저 온 적군에게 한 차례 타격을 준 뒤 어둠을 이용해 서편 산등성이를 기어넘어 빠져 버리면 양쪽에서 전진해 온 적 부대는 밤중에 만나 저희끼리 싸우게 될 것이오. 물론 저 험한 산등성이를 기어오르기가 힘들고, 적잖은 치중(輜重) 마차를 잃는 게 아깝지만 대가는 충분히 받을 것이오.”
그제서야 싸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그들이 오히려 기뻐한 이유를 알 듯했다. 이내 마음 속의 걱정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우리가 매복의 장소로 정 한 곳은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 한 오 리 정도의 개활지인 백운평(白雲坪)이란 곳과 만나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 양쪽 비탈의 침엽수림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남쪽 관목숲과 바위 그늘에도 소총 부대를 매복시켰다.
우리의 배치가 끝나고 오래잖아 적의 척후조가 골짜기 북쪽에서 개활지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왔다. 그때 매복한 우리가 가슴 철렁 했던 것은 적 척후병이 우리 치중 마차를 끄는 말이 흘린 말똥을 발견한 일이었다. 놈은 그 방면에
경험이 많은지 장갑을 벗고 말똥을 만져 보았다. 그 온도로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때는 구월이라도 만주의 구월이라 말똥은 벌써 식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로 우리가 오래 전에 지나간 것이라고 단정한 척후조가 수기 신호를 하자 적은 더 이상의 정찰 없이 개활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위사령(前衛司令)을 앞세운 기병(騎兵), 보병, 공병의 혼성 여단이었는데, 병력은 어림잡아도 만 명은 넘어 보였다.
지휘를 맡은 우리 중의 하나가 적의 전위사령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과 함께 우리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아직 훈련도, 조직도 제대로 안 된 민병(民兵)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기습은 그 뒤의 어떤 전투에서보다 성공적이었다. 우리 기관총의 총구가 벌겋게 달고 소총의 화약 연기가 저녁 이내처럼 골짜기에 퍼져나갈 무렵 개활지는 쓰러진 적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뒷날 밝혀진 저희 기록에 따르면 거기서만 적군 이천이벡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줄이고 줄인 것일 테지만 그걸 믿는다 쳐도 부상자를 합치면 태반이 쓰러진 셈이었다.
하지만, 적군도 그때까지는 패배를 모르던 대일본제국의 군대다웠다. 용케 살아남은 자들은 곧 엄폐물을 찾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거기다가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후속부대가 있어 해질 무렵 해서는 제법 반격의 태세까지 갖추었다. 평가에 따라서는 놀라운 대응 능력이지만 결과로 보면 그게 그들의 피해를 몇 배나 늘리는 요인이 된다.
싸움이 일방적인 매복 기습에서 쌍방간의 화력전으로 양상이 변한 뒤에도 우리는 예정대로 저물 때까지 버티었다. 병력과 화력 모두 적군에게 턱없이 못 미쳤지만 먼저 차지한 지형의 이점이 겨우 우리를 지탱하게 했다. 그러나 양상이 그렇게 바뀌다 보니 우리에게도 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그럭저럭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다쳐 25년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가 퇴각을 시작한 것은 날이 완전히 저문 뒤였다. 먼저 무거운 기관총을 진 부대가 서편 등성이로 기어올랐고, 이어 골짜기 바닥의 소총 부대도 서편 등성이로 붙었다. 그러나 잔류조 오백은 그 사이 북상한 적 나남 사단이 골짜기 남쪽으로 밀고 들 때까지 버티었다. 그러다가 나남 사단이 등뒤로 바짝 다가들었을 때에야 갑자기 돌아서서 한 차례 벼락같은 총질을 퍼붓고 슬며시 서편 비탈로 기어올랐다.
북쪽 입구로 들어온 적의 혼성 여단은 우리의 마지막 병력이 서편 산등성 이로 사라진 뒤에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백 명 잔류조의 위장이 워낙 절묘한 데다 남쪽으로부터 진입한 저희 나남 사단이 예정보다 너무 빨리 온 까닭이었다. 한 차례의 일제 사격 뒤에 우리의 총소리가 갑자기 멀어진 게 조금 이상했지만, 그게 설마 저희 편 사단의 총질로 바뀌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가 한바탕 화력을 집중한 사격 끝에 퇴각을 시작한 줄만 알았다.
비슷한 오해는 골짜기 남쪽에서 밀고 올라온 나남 사단에게도 일어났다. 멀리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저희편 병력이 우리와 조우한 것을 짐작한 나남 사단은 애초의 목적대로 우리를 포위 섬멸하기 위해 강행군을 시작했다. 골짜기 입구에서 그들을 더 깊이 끌어들이기 위해 매복해 있던 몇 안 되는 우리 유인조를 기세 좋게 물리친 그들은 갑자기 우리의 오백 잔류조가 퍼붓는 화력에 몹시 혼란되었다. 이미 물리쳤다고 생각한 적이 그 몇 십 배의 화력으로 기습해 온 데다 앞뒤를 알아볼 수 없는 어둠이 거들어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한 정예한 황군(皇軍) 이기는 골짜기 북쪽으로 진입해 들어온 저희 우군 부대와 다름없었다. 곧 전열을 정비해 반격해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우리의 오백 잔류조가 연기처럼 사라진 뒤라 그들이 총질하는 상대는 뻔했다. 북쪽에서 진입해 온 저희 혼성 여단을 퇴각한 우리 부대로 단정하고 아낌없이 총알을 퍼부어 댄 것이다.
그 어이없는 저희끼리의 총격전은 밤새 계속되었다. 더구나 이튿날 새벽 그 골짜기에는 짙은 안개까지 끼어 일본군의 희생은 더욱 늘었다. 그러다가 둘 중 더 성미 급한 사령관이 ‘도쯔께기 (돌격)’ 를 외쳐 양군이 육박전으로 엉킨 뒤에야 그들은 비로소 그 어이없는 희비극을 막내릴 수 있었다. 하도 무참한 일 이라 일본의 전사(戰史)에서조차 빠져, 그날 밤 그들이 입은 피해를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인근 만주인들에 의하면 옮겨지는 시체만도 살아서 옮기는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백이십 리나 달려 적의 포위망을 완전히 빠져나온 우리는 갑산촌(甲山村)이란 곳에 이르러 또 한 차례 적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정보 하나를 얻었다. 거기서 멀지 않은 천수평(泉水坪)이란 곳에 적의 기병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 쪽 병력이 훨씬 우세해 우리는 거꾸로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 했다. 용케 도망친 넷을 빼고 중대장을 비롯한 중대원 전원을 사살하고 나니 다시 큼직한 정보 하나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사살된 적 중대장의 몸에서 나온 정보 문서로서, 거기에는 적 19사단이 어랑촌(漁郞村)이란 곳에 포진중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틀 밤낮에 걸친 전투와 강행군으로 지쳐있었지만, 대단한 정보를 손에 넣고도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길가다 쓰러지지 않을 만큼 짧은 휴식을 취한 뒤 어랑촌에 정찰부터 보냈다. 사단이라면 최소한 우리의 네 배는 되는 병력에 중화기(重火器)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덤빌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돌아온 정찰조의 보고는 우리를 더욱 자신 없게 했다. 적은 사단이라지만 지원 부대가 더 있어 병력은 이만에 가까웠고, 그 곳은 포진한 지도 오래 되어 진지 구축이 견고하기 짝이 없더라는 게 그들의 정찰담이었다. 그런 적을 이천오백의 지치고 화력조차 변변찮은 병력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때껏 싸움에서 그토록 멋진 지략과 담력을 보여 주던 이들조차도 그 보고에는 자신 없어 했다. 거기다가 그때까지의 전과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어서 우리의 중론은 강한 적을 우회 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 선택권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정찰을 보내고 의논을 모으느라 지체하는 사이에 우리 부대의 접근이 적의 척후에 걸려 버린 것이다. 기마대에 자동차까지 있는 적군이 이만 병력을 풀어 추격전을 벌인다면 아무리 산악을 탄다 해도 무사히 뺘져나가기는 글러버린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으로 돌파합시다. 정히 안 되면 우리 모두가 죽을 때까지 싸워 배달 겨레의 기백을 보여줄 뿐이오!”
지략보다는 담력과 열정으로 우리의 우러름을 받던 이가 그렇게 비장한 결의를 내놓았다. 그때 우리 중에서 가장 싸움의 경험이 많고 전술에 뛰어난 이가 침착하게 우리의 섣부른 체념을 막았다.
“이제 이 거룩한 전투에 나선 이상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오. 빼앗긴 삼천리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의 몸은 겨레의 도구요, 밑천으로서 소중히 보살펴져야 하오. 옛말에 이르기를 죽기로 나아가면 오히려 살 길이 열린다 했으니 우리 한번 그 길을 찾아봅시다. 먼저 찾을 수 있는 한의 유리한 지형을 찾아 방어전을 펴되, 하나가 백을 당한다는 각오로 싸운다면 안 될 것도 없소이다. 임진년 저들의 침략 때 행주(幸州)나 진주(晋州)에서의 큰 승리가 병력이 많아서 였소, 화력이 우월해서 였소?”
그러자 그 말에 무슨 암시를 받았던지 정찰조로 나갔던 사람 중에 하나가 미뤘던 지형 정찰 보고를 뒤늦게 냈다.
“비록 강물을 두르지는 않았지만 행주산성과 매우 흡사한 고지 하나를 봐두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마록구(馬鹿溝)란 곳에 있는 고지인데, 뒤편은 적 이 우회해서 에워싸기 불가능한 산맥으로 이어졌고, 좌우는 산짐승도 기어오르기 어려울 만큼 가파르며, 오직 전면만 보병의 접근이 가능했습니다. 그 전면에 우리 화력을 집중하면, 설령 적이 사단 전체를 들어 쳐올라온다 해도 막아낼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이어 용기를 되찾은 우리는 곧 마록구로 이동했다. 과연 멀지 않은 곳에 정찰조가 말한 그 봉우리가 있었다. 대개 알려진 대로였는데 더 좋은 것은 적의 접근이 가능한 전면의 폭이 좁아 우리의 방어에 훨씬 유리하리라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그 봉우리 부근에는 차도는커녕 우마차 다닐 길도 닦여 있지 않아 적은 보유한 야포(野砲)조차 활용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고지를 점령하는 데는 예상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적들 또한 그 고지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 그 위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중기관총을 지닌 일 개 소대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지키기 좋은 곳이라면 빼앗기 어려운 법, 고지 위의 적에 비해서는 백배의 병력과 화력을 지닌 우리였으나 제 목숨을 던져 적의 기관총 좌지(座地)를 날린 젊은이가 우리 중에 셋이나 나오고서야 겨우 그 고지는 우리의 것이 되었다.
적의 본대가 그 고지를 에워싸고 공격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안 되서였다. 먼저 전면 경사가 완만한 비탈로 돌격을 감행한 것은 저희편 기병 중대가 갑산촌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에 격분해 있던 적의 나머지 기병 중대였다. 하지만, 장한 것은 다만 기세였을 뿐이었다. 몇백인지 모를 기병대가 까맣게 경사면을 치달아 왔으나 육부 능선에도 이르지 못하고 우리편 기관총에 쫓겨 밀려났다. 그때 돌아가는 말에 임자가 타고 있는 것은 절반이 채 안 되었 다.
이어 악에 받친 적 보병의 육탄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련에서 여순에서, 노문한에서 톡톡히 효과를 본 그들의 돌격 방식이었으나 워낙 전면 비탈의 폭이 좁아 시체에 시체를 쌓을 뿐 역시 육부 능선도 돌파하지 못했다.
두 번의 공격에서 실패한 적은 한편으로 전열을 정비하면서 한편으로는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포는 끌고 오지 못했으나 박격포와 척탄통(擲彈筒)은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충분한 야전 축성(築城)을 못한 우리는 머리 위를 뒤덮는 듯한 포탄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격의 효과를 감지한 적은 세 번째의 공격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보기 (步騎)의 혼성 공격파였다. 쉴 새 없는 적의 포격 때문에 우리의 화선(火線)이 엷어져 그때부터 제법 본격적인 고지 공방전이 벌어졌다. 적은 그 공격에서 팔부 능선까지 돌파했다가 우리의 안간힘을 다한 반격에 밀려났다.
그로부터 꼬박 이틀 밤 이틀 낮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됐다. 저 행주산성의 전투가 어떠하고 진주성의 전투가 어떠했는지 잘은 모르나 그때 우리가 겪은 것보다 더 치열하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잠에 떨어지곤 하는 서로를 꼬집어 가며 쉴 새 없이 총질을 했다. 기관총은 물을 퍼부어도 총열이 벌겋게 달아 나중에는 총탄이 발밑에 툭툭 떨어질 판이었다.
아무리 지형이 절묘하고 우리의 투지가 매서웠다 해도, 워낙 적의 인원과 화력이 우세하다 보니 희생이 없을 수 없었다. 그 이틀 밤 이틀 낮 동안 백 명에 가까운 형제들의 넋이 조상의 영령들이 계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 전투에서 일본군이 치른 대가는 아무리 적이지만 참혹했다. 뒷날 그들의 전사(戰史)는 마록구 전투에서 전사자를 일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맹세코 우리는 전투 진에 결의한 일당백(一當百)을 이루었다. 그 산비탈에 켜켜이 쌓인 적의 시체들 중에서 한 켜만 걷어도 이천은 넘었을 것이다.
우리의 퇴각은 그 고지에서 이틀 밤을 새운 뒤의 새벽에 이루어졌다. 이틀 밤낮의 격전으로 식량과 물뿐만 아니라 탄약까지 부족하게 된 우리는 그 여명에 있었던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물리치는 그 즉시 퇴각을 결정했다.
채비를 마친 우리는 여러 곳에 모닥불을 피워 남은 탄알을 한 줌씩 던져 놓고 뒤편 산록으로 접어들었다. 우리가 첫 번째 봉우리로 접어들 무렵 아물거리는 우리의 모닥불 쪽에서 콩볶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 줌씩 묻어 놓은 총알이 모닥불의 열기에 드디어 터져 이미 텅빈 진지를 아직도 우리가 남아 완강히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뒷날 그 전투에는 ‘청산리 싸움’ 이란 이름이 붙여지고, 우리와 일본 간에 벌어진 첫 번째의 근대적인 전투로 공식 인정됐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 전투의 세세한 경과나 성과를 말하는 데 이르면 다시 듣다가 분통 터져 죽을 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무슨 전투는 내가 지휘했느니, 무슨 전투는 누가 지휘했느니, 아무개가 중대장이고 아무 개는 무숙 사령이었느니, 거시기는 총을 몇 방 쏘았고, 머시기는 수류탄을 몇 발 깠느니, 죽인 건 몇 명이고 죽은 건 몇 명이라느니, 누구는 무슨 주의자(主義者) 였고 누구는 무슨 파(派)였느니 그 싸움의 진행은 이러했고, 효과는 저러했느니 ― 그런다고 뭐 얻어걸릴 일 있는 줄 알고 달린 입이라고 이리저리 씨월거리는 자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그러는 게 아니다. 싸운 것은 다만 ‘우리’ 였으며 목적은 국토 수복이었고, 효과는 그 목적을 위한 전열정비의 시간을 번 것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사람 죽이는 재미로 싸운 것도 아니고, 뒷날 자랑 삼자고 싸운 것도 아니며, 그 자랑 코에 걸고 한 자리 얻자고 싸운 것은 더욱 아니다.
이어도로 간 남로군(南路軍)도 섬오랑캐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한바탕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대강이긴 해도 북로군의 첫 싸움을 꽤나 길게 얘기했으니, 그 남로군의 싸움도 수캐 이 잡듯이나마 줄거리는 잇도록 해 보자.
이어도 ― 지도에도 없고, 환웅과 웅녀의 자손이 아닌 이들에게는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러나 우리가 외적의 침노로 고달프고 어려워질 때면 어김없이 돌아가 힘을 기르며 뒷날을 기약하는 그 곳, 저 북쪽의 장백산과 나란히 겨레의 우러름을 받는 그 남쪽 바다의 성지(聖地)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 섬을 다만 시인의 감상이나 소설가의 들큰한 상상력으로 함부로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남쪽으로 길을 잡은 우리가 그 이어도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북로군이 장백산으로 들기 두어 달 전이었다. 그러나 남쪽 우리의 이동과 집결은 북쪽 우리의 그것에 비해 좀 수월했다. 당시 이 땅으로 진출한 일군(日軍)은 육전(陸戰)을 위주로 한 편성이어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우리에게는 악착을 떨 형편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저희 해군은 청일(淸日), 노일(露曰) 양 전쟁에서의 승기를 해전에서 잡았던 터라 우리의 해상 세력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바람에 우리 남로군(南路軍)은 반도를 떠나 이어도로 집결할 때까지는 북로군(北路軍)과 같이 추격전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처음에는 해안에서 우리가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반도 남쪽이 통째 비어 가기 시작하자 일본군도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그리고 남아 있던 한자(韓子)들에게 수소문해 남쪽의 우리가 이어도로 옮겨갔다는 걸 알자 뒤늦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감히 누가 내 배 다치랴 하며 한껏 제끼고 앉은 저희 해군에게 추격과 수색을 의뢰하는 한편 지상군을 쪼개 해안 지대에 배치하고 그 수색조도 풀었다.
그때 해상 수색과 추격을 맡고 나선 게 제1차 세계 대전도 끝났고 해서 심심하련 차에 잘 걸렸다는 식으로 시모노세끼를 떠난 야마모도(山本) 함대였다. 사령 장관은 뒷날 진주만 기습 때 반짝했던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五六)의 맏형 야마모도 이찌니(山本―二)였는데, 노일 전쟁 때 동해에서 고물 러시아 군함 몇 대 가라앉힌 결로 이십 년이 다 돼가는 그때까지 기세가 대단했다.
그 야마모도가 기함(旗艦) ‘데이고꾸(帝國)’ 호와 호위전함 두 척, 구축함, 순양함 각 세 척씩에 적지 않은 어뢰정까지 딸리고 남해로 들어서자 이어도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이 생겼다. 섬과 본토 사이가 차단됨으로써 국토 수복전에 필요한 물자의 반입이 막힌 까닭이었다. 이어도가 원래 물산(物産)이 넉넉해 우리가 먹고 입는 것은 그럭저럭 댈 수 있었지만, 병기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광물이나 화약까지는 넉넉하게 내놓지를 못했다.
거기다가 이어도의 우리를 더욱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추격이 뒷북이 되고 만 야마모도 함대의 수색을 핑계로 한 횡포였다. 그들은 우리를 찾는답시고 뭍에 올라가 우리의 항구를 부수고 집을 불태우는가 하면 다도해를 샅샅이 뒤져 재물을 약탈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남은 사람들 ― 피에 왜(倭)물이 튀어서 였건, 양(洋)물이 튀어서였건, 되〔古月〕물이 튀어서였건 ― 그들도 우리가 이 땅을 수복한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와 이 땅에서 무리지어 살 사람들이 아닌가.
아무런 저항이 없자 방자한 만큼이나 집요함을 더해 가는 그들의 수색도 손 처매고 들어앉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데가 있었다. 우리의 이어도란 게 비록 피를 달리하는 족속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요행 찾아냈다 해도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그 곳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실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물러설 마지막 땅인 동시에 기대어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겨레의 은밀한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적당한 선에서 그들의 추격과 수색을 끊어버리는 것이 장백산의 우리들 못지않게 이어도의 우리에게도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력으로 1920년 구월, 청산리에서는 북로군의 단후전(斷後戰)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무렵, 이어도의 우리도 추격군과의 일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물론 그전 십 년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전의 성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본질은 북로군과 같이 단후전이었다.
하지만, 싸움이란 게 본시 결의만으로는 되는 게 아니다. 그렇잖아도 전투가 못된 세월따라 점점 사람보다는 병기에 의존하는 정도가 늘어나 있는 데다, 우리의 선택도 어쩔 수 없이 해전(海戰)이 될 수밖에 없어 더욱 그랬다. 벌써 오래 전부터 해전에서는 결의, 용기, 순국열(殉國熱) 같은 전사(戰士)의 개인적 미덕보다는 성능 좋은 전함과 우수한 화력(火力)이 승패를 가름하는 조건이 되고 있었다. 사백 년 전 임진란 때 자랑스런 조상들이 저들의 조상을 무더기로 수장할 수 있었던 것도 거북선이란 성능 좋은 전함과 현자포(玄字砲), 지자포(地字砲) 같은 우수한 화력의 도움에 힘 입은 바 크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어도의 우리가 가장 먼저 힘을 쓴 것은 신식군함으로 짜여진 적 함대와 맞설 싸움배와 화력(火力)의 마련이었다. 우리 중에 머리 좋고 꾀 많은 이들이 이 궁리, 저 수단을 짜냈다. 궁하면 통한다고, 칼 안 들고 간 내먹기도 바이 길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여러 날 의논 끝에 대강 두 가지로 방책이 세워졌다.
그 한 가지는 우리 안에서 마련하는 길이었다. 눈알 푸른 것들의 몹쓸 문명에 이제는 한물 간 걸로 구박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든 조선술의 전통이 있었으며, 사거리가 짧고 화력 또한 신통찮아도 화포(火砲)의 제작 또한 한때는 남에게 뒤지지 않은 이력이 있었다. 거기다가 나라 문이 열리면서 새로이 들어온 기술 몇 개 얹으면 전함이건 대포건 꼭 못 만들 것도 없었다.
다른 한 길은 ― 비싼 값을 치러야겠지만 ― 적에게서 빼내 오는 것이었다. 손자(孫子)가 이르기를 적에게서 하나를 뻬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내게 둘을 더하는 것과 같다 했다. 만약 우리가 야마모도 함대에서 어뢰정 한 척만 빼낼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두 척이 생기는 효과를 준다는 뜻인데 우리 젊은이들은 바로 그것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었다.
세상 모든 일읖 어둡고 어렵게만 보는 이들에게는 기적 같게도. 그 두 가지 방책은 두 달도 안 돼 우리에게 바다에서의 싸움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배와 화포를 마련해 주었다. 배로는 거북선 두 척에 판옥선(板屋船) 다섯 척, 순양함 한 척. 어뢰정 한 척 이요, 화포로는 불랑기(佛朗幾) 백여 문(門)에 천자포 이백여 문, 신식 산포(山砲)는 야마모도 함대와 일본 지상군에게서 가져온 것 이었다.
그렇지만 거북선·판옥선이라 해도 옛 거북선은 아니었으며 불랑기·천지·포도 옛대로는 아니었다. 우리들은 틀림 없이 조상의 법을 바탕으로 거북선을 모았(지었)으나 장갑(裝甲)은 두 치 두께의 철판에 스무 쌍의 노는 두 대의 어선용 발동기와 스쿠류로 바뀐 신형(新型)이었다. 적의 기함 네이고꾸 호의 십구 인치 주포(主砲)만 정통으로 맞지 않는다면 견뎌 낼 쾌속철갑전을 만들어 낸 것 이었다. 판옥선도 옛대로는 아니어서 칠감은 없어도 돛과 노는 발동기로 갈아 속도만은 적 함대의 어떤 배에도 뒤지지 않았다.
불랑기와 천자포도 왕조(王朝) 시대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달랐다. 장영실과 박연(밸테브레)과 이장손의 자손들이 물려받은 솜씨에다 새로이 받아들인 기슬을 더해 불량기는 한 관짜리 포탄을 사천 보(步)나 날리고, 포신(砲身)이 짧아 사거리(射距離)가 보잘것 없었던 천자포도 관반(貫半)짜리 포환(砲丸)을 삼천 보나 날렸다. 거기다가 최무선의 자손이 화약을 개량하니 한 관짜리 포탄만으로도 한 치 철갑을 찢을 만했다.
순양함과 어뢰정을 애기하자면 먼저 그것을 얻기 위해 산화한 수십 명의 젊은 우리의 넋에 대해 묵념부터 드려야 한다. 순양함 ‘쇼오리(승리)’ 호는 수색을 핑게로 갑판원의 대부분이 인근 항구에 내려가 분탕질을 치는 사이 맨몸에 칼 한 자루만 입에 문 젊은 우리에게 점령당했는데, 우리 또한 남아 배를 지키던 그들 수병(水兵)의 발악에 열여섯의 꽃다운 복숨을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뢰정 가끼하찌마루느 함대를 벗어나 다도해 사이를 헤집고 다니나가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던 것을 우리 바다 사나이들이 나포란 것이지만, 그 역시 겨레의 씩씩한 사나이를 다섯이나 조상의 영령 곁으로 보낸 뒤에야 우리 손 안에 들어왔다. 다만 산포만은 우리 군자금에서 나간 황금 몇 덩이로 저들 지상군의 썩은 지휘관에게서 사들인 것이었다.
그 경위야 어쨌건 그렇게 대강이라도 채비가 갖춰지자 우리는 곧 어느 곳을 전장(戰場)으로 삼을까를 의논했다. 먼저 옛일에 밝은 이가 말했다.
“한산도 부근이 어떻겠소?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께서 크게 적을 무찌르신 곳이니 조령(祖靈)의 가호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바다 싸움에 대해 잘 아는 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적과 우리의 힘이 비슷해서 바다 위에서의 용전(勇戰)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싸움배에서도 화포에서도 적에게 어림없고 다만 사람의 머릿수와 필사의 각오에서만 앞설 뿐이오. 사람의 머릿 수가 그대로 힘이 될 수 있는 뭍에서의 싸움을 곁들이지 않는다면 이길 가망은 전혀 없소.”
“배 위에 탄 적을 어떻게 뭍으로 끌어올린단 말이오?”
처음 한산도를 들고 나온 이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바다 싸움을 잘 아는 이가 받았다.
“적이 배에서 내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뭍에서 싸울 수 있으면 되오.”
“뭍에 있으면서 멀리 바다에 떠 있는 적과 어떻게 싸운단 말이오?”
다시 누군가 그렇게 의문을 나타내자 바다 싸움을 잘 아는 이가 이미 보아 둔 곳이 있는지 자신 있게 말했다.
“해협을 전장으로 삼으면 되오. 우리의 포탄이 닿을 만한 해협 양쪽에 포대를 설치하고 적의 함대를 그 곳으로 유인해 들이면 우리는 뭍에서도 배를 탄 것처럼 싸울 수 있소이다.”
“하지만 그런 맞춤한 해협이 어디 있겠소?”
“다도해요. 여기서 서북 백여 리쯤 되는 곳의 다도해에는 섬과 섬 사이가 오천 보를 넘기지 않게 몰려 있는 곳이 있소. 그 곳 해안에 우리가 가진 모든 화포를 건 뒤에 적의 함대를 꾀어 들이면 비록 우리의 싸움배가 적고 화력이 약해도 크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여러 가지로 미뤄 우리가 싸움배를 마련한다, 화포를 만든다 분주하던 그 두 달 동안 그는 남해안을 샅샅이 뒤지며 우리에게 알맞은 전장을 찾아다닌 듯했다. 그가 몇 마디 더 보태기도 전에 바다 싸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면 모두 그를 편들고 나서 전장은 이내 그가 말한 곳으로 결정되었다.
전장이 결정되자 곧 그에 따른 전투 준비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화포는 좁은 바다를 포위하듯 둘리선 여섯 개의 작은 섬으로 은밀히 옮겨서 설치되고, 우리 함대는 그 무렵 부산 앞바다에서 얼쩡거리는 야마모도 함대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우리의 유인 작전은 적의 지상군이 주둔하는 진해 앞바다의 무력 시위로 막을 열었다. 우리는 거북선 두 척과 순양함 한 척, 어뢰정 한 척으로 함대를 구성한 뒤 이어도에 있는 수백 척의 고깃배까지 모조리 이끌고 그 곳에 이른 뒤 지상군의 진지에다 함포를 퍼부었다.
자신들에게 대항할 무력이 이 땅에는 남은 게 없는 줄 알고 있던 적 지상군은 당연히 놀랐다. 고깃배건 나룻배건 바다에 뜬 것은 모조리 전함으로 헤아려 야마모도 함대에게 숨 넘어가는 소리로 알렸다.
우리가 수백 척의 함정을 이끌고 상륙전을 감행하려 한댜는 지상군의 무선 연락을 받은 아마모도 함대의 사령장관은 깜짝 놀랐다. 두 달이나 이 잡듯 서남해를 뒤져도 코끝도 안 보이던 우리가 갑자기 대함대로 나타난 까닭이었다. 곧 야마모도 함대는 비상이 걸리고, 부산포에 상륙해 해롱거리던 일본 수병들은 달려온 사관들에게 귀쌈까지 얻어 맞아 가며 배로 끌려 돌아왔다.
하지만, 경박한 만큼 재빠르기도 한 게 그들 섬나라 족속의 특징이라 함대가 출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무력시위를 시작한 지 한나절도 안 돼 적의 함대는 벌써 동쪽 수평선 위로 점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이미 비전투전은 모두 이어도로 돌려보낸 뒤였던 우리 함대는 그들을 자 미련 없이 퇴각했다. 그러나 무턱된 퇴각은 아니었다. 우리가 고른 전장은 거기서도 아직 삼백 리 길이 넘어 한두 번은 더 강한 자극이 있어야 적의 함대를 그리로 끌어들일 수 있는 까닭이었다.
예상대로 적은 퇴각하는 우리를 보자 거침없이 추격을 해왔다. 함대랄 것도 없는 우리 선단의 규모에, 저희 눈에는 중세의 구닥다리로밖에 비치지 않는 거북선까지 두 척 끼어 있자 우리를 한껏 얕본 것이었다. 지난날 청(淸)의 북양(北洋) 함대며 아라사의 발틱 함대와 맞서 이겨 온 기억이 있는 그들로서는 그럴 법도 했다. 우리 함정이 수백 척이 넘더라는 저희 지상군의 전문은 물론 가볍게 무시되었다.
우리는 적 함포의 사정 거리를 간신히 벗어난 상태로 적 함대를 한산 앞바다로 유인 했다. 적이 추격에 싫증을 내기 전에 한 번쯤 타격을 주어 자극하려고 미리부터 정해 둔 곳이었다.
대단찮은 편싸움에서도 유난스레 나서서 설쳐 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듯이 야마모도 함대에서도 그런 배는 있었다. 적 호위전함 간또오(關東) 호가 바로 그 배로서 해군 사령부의 책상물림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바다에 나온 함장 아까끼(赤本) 대좌는 섣부른 공명심으로 함대와의 거리도 무시하고 앞장서 우리를 뒤쫓아왔다. 우리로 봐서는 안성맞춤인 먹이었다.
먼저 한산 앞바다에 이른 우리는 그 옛날 충무공의 전법을 본받은 배치를 했다. 함대의 주력은 섬그늘에 감추고 판옥선 몇 척과 어뢰정만 우리 사냥감의 미끼로 서남쪽 바다에 띄위 놓은 것이었다.
오래잖아 거기가 제 죽을 곳인 줄 모르고 적 전함 간또오 호가 뛰어들었다. 함장 아까끼 대좌 이하 삼백의 성질 마른 일본 수병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나포되어 저희에게 어뢰를 쏘아붙이는 가끼하찌마루에 눈이 뒤집혔다. 앞뒤 살피는 법도 없이 천방지축 포를 쏘아 대며 한산 앞바다 깊숙이 뒤쫓아왔다.
적함이 뒤돌아서기 어려울 때쯤하여 섬그늘에 숨어 있던 우리의 선단이 일제히 내달았다. 그 옛날처럼 학익진(鶴翼|陣)은 아니었으나, 외톨이가 된 간또오 호를 에워싼 듯한 함대 배열은 오히려 그 예날보다 더 위력적이었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적의 함장 아까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함대와의 걸를 확인해 보니 기함 데이고꾸는 최대 속력으로도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에 처져 있었다. 급해진 아까끼는 배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선미 쪽에는 잃어버린 저희 순양함 쇼오리 호와 이상스레 위압적인 거북선이 포탄을 퍼부으며 길을 막고 있었다.
아까끼는 앞을 헤치고 넓은 바다로 나가려고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안 될 일이었다. 판옥선이며 거북선 어뢰정이 겉보기에는 한없이 어수룩해도 많은 수로 이곳저곳에서 포화를 퍼부어 대니 그 화력이 여간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마땅찮아 간또오 호가 우왕좌왕 하는 사이 어뢰 한 발이 선미를 쳤나. 그리고 거기 당황한 적 수병들이 제대로 응사하지 못하는 틈을 타 우리 선단이 벌떼처럼 간또오 호를 덮쳤다.
하지만, 진함 간또오가 원래 그리 허술한 배가 아닌 데다 우리의 화력도 그들이 느끼는 것만큼 대단하지는 못했다. 화력의 대부분은 결전장이 될 다도해의 해안 포대로 빼돌린 까닭이었다. 거기다가 적의 후속 전함까지 생각보다 재빨리 접근해 와 우리는 애석하지만 그을다만 간또오 호를 버려두고 서둘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도해의 결전장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두 번 더 야마모도 함대를 자극했다. 바다가 우리 바다인 만큼 더 밝은 지형지물에 대한 지식을 활용한 매복과 기습으로, 거기서 우리는 다시 함대에서 이탈한 적 순앙함 한 척을 그을고, 어뢰징 한 척을 격침시켰다.
그 동안 완전히 노출된 우리 함대의 보잘것 없는 구성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적은 우리가 바란 이상으로. 약올라 하며 커다란 덫과도 같은 결전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마땅히 지녀야 할 경계심도 침착성도 모두 팽개친 미구다지 추격이었다.
유인을 시작한 날로부터 이들 뒤인 새벽 우리는 마침내 처음부터 결전장으로 점 찍어 둔 해역에 이르렀다. 올망졸망 흩어진 섬 사이로 좁게 난 해로가 삼십 리쯤 이어진 곳으로, 그 양편 섬에는 우리의 해안 포대가 치밀한 화망(火
網)을 구성하고 있었다. 만약 적의 함대가 그 좁은 해로로 끌려 들어오기만 한다면 그 섬 들은 그대로 흔들림 없는 함포를 장비한 거대한 전함으로 바뀔 것이었다.
그 해협으로 들기 직 전의 넓은 바다에서 우리는 마지막 유인전(誘引戰)을 벌였다. 약간의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우리의 전함선을 동원해 정면으로 야마보도 힘대와 충돌해 본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단 삼십 분 간의 해전에서 우리는 그때껏 요긴하게 싸웠던 어뢰정과 판옥선 두 척, 거북선 한 척을 잃었다. 특히 거북신은 그 옛날처럼 적함 사이를 이리 저리 싸우다가 적 기함 데이고꾸의 주포(主砲) 한 방을 등허리에 맞고 남해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다.
거기 비해 선박 손실이 한 척도 안 난 적의 함대는 기고만장해졌다. 우리 선단의 남은 배들이 다도해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숨어들자 그들은 앞다투어 추격해 왔다. 선박의 손실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바란 대로 적 함대를 그 해
협으로 끌어들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적의 선두 전함 뎅구(天狗) 호가 비로소 역전의 전함다운 감각을 회복한 것은 이미 해협 속의 추격 십 리나 진행된 뒤였다. 함장 구키 요시다까(九鬼嘉隆) 대좌는 자신의 배가 한 줄로 길게 늘어선 함대의 선두로 해안 포대의 사거리 안에 있는 섬 사이의 해로를 항진하고 있음을 깨닫자 섬뜩해졌다. 해로가 너무 좁아 그리된 것이지만, 만약 강력한 해안 포대라도 설치돼 있으면 함대 전체가 한 척 한 척 정조준된 지상 포화(地上砲火)의 밥이 될 우려가 있었다.
요시다까는 급히 그 우려를 무전으로 기함 데이고꾸에 알렸다. 그때는 데이고꾸 호도 해로 깊숙이 진입한 뒤였다. 그러나 요시다까의 전문을 받은 사령 장관 야마모도이찌니는 태연했다.
“운요오호(雲揚號)를 잊었는가. 조센징들에게는 그만큼 사거리가 긴 포가 없다. 있다면 일 인치 철갑도 뚫지 못하는 포탄에 유효사거리 몇 백 미터밖에 안 되는 구식 화포뿐일 것이다. 요시다까 군(君) 두려워 말고 전진하라. 대동아의 꿈에 감히 맞서려는 무리를 섬멸해 황은(皇恩)에 보답하라.”
그런 답신으로 요시나까의 전진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 전문을 받자 요시다까도 약간 마음이 놓였다. 하기는 이제 와서 함대를 돌려세운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분 나쁘지만 이대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그런 생각으로 수병들을 몰아 앞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요시다까가 저만치 마주 선 섬 사이로 넓은 바다가 열린 걸 보고 막 인도의 숨을 내쉬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도 달아나기에만 바쁘던 조선인의 선단이 갑자기 돌아서서 포화를 퍼부으며 몇 겹로 해협을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껏 무인도로만 보이던 작은 섬 이곳 저곳에서도 포탄이 날 시작했다.
우리의 반격이었다. 우리는 적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빠저들기를 기다려 총공세에 들어갔다. 해협 출구를 막고 있는 배들은 화력보다는 그 자체가 바로 출구의 마개었다. 버티고 응사하다가 적의 함포에 피격되면 그대로 가라앉아 물길을 막았다. 섬 뿌리가 맞닿아 벌로 깊지 못한 물목이라 웬만한 배 몇 척만 가라앉아도 적의 전함은 이미 지나갈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적의 함대는 일렬로 늘어선 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지한 목표물에 대한 수백의 해안 포대가 정조준한 포탄을 퍼붓는 게 우리의 노림이었다.
뎅구 호가 화력을 뽐내며 물목의 우리 배들을 격침시킨 게 모든 걸 우리 뜻대로 만들어 갔다. 우리 승무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피격된 배를 버리고 섬으로 헤어 가고 배들은 연이어 가라앉아 출구가 될 해협의 물길을 얕게 만들었다.
해안 포대의 포격으로 벌써 여기저기 상처가 난 뎅구 호는 물 위가 열린 것만 보고 전속력으로 항진했다. 어서 빨리 그 불구덩이 같은 해협을 빠져나가기 위함이었으나 결과는 한층 더 굳게 저희편 출구를 틀어막은 꼴이 되고 말았다. 가라앉은 우리 배에 걸려 배 밑바닥이 여기저기 뚫린 뎅구 호가 서자 야마모도 함대가 그 해협 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돌아서는 길밖에 없었다.
적 함대의 사령장관 야마모도이찌니가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한 것은 이미 기함 데이고꾸의 갑판에도 우리의 포환이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모든 함포는 적의 해안 포대를 건제하고 후미부터 차례차례 배를 돌려 빠져나가라. 대화혼(大和魂)으로 감투하기를 빈다.”
야마모도는 황급히 그런 전문을 띄웠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좁은 해협에서 대소 함정 여남은 척으로 된 함대가 선수를 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배는 포격에 약해 미처 뱃머리를 돌리기도 전에 우리 해안 포대에 격침되고, 좀 큰 배는 뱃머리를 돌리느라 꾸물거리는 통에 너무 많은 포탄을 맞아 가라앉았다.
우리에게는 통쾌해도 적에게는 참상인 만큼 그 날의 싸움을 길게 얘기하는 건 삼가자. 어쨌든 그 한나절의 싸움 끝에 야마모도 함대에서 반파(半破) 상태로나마 그 해협을 빠져나간 것은 단 네 척 뿐이었다. 기함 데이고꾸에 구축함 두 척, 순양함 한 척이었다. 다만 인명 피해는 함정에 비해서는 좀 덜 심했다. 한 번의 대 타격으로 적의 계속적인 추격과 수색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던 우리는 적의 목숨에는 그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적은 이미 시체가 되
어 바다에 뜬 천여 명을 빼고는 저희 수병을 모두 건져갈 수 있었다.
우리의 철수는 놀라고 겁먹은 적이 뒤도 안 돌아보고 황급히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에 이루어졌다. 근처 섬그늘에 미리 숨어 기다리던 우리의 고깃배들과 싸움을 거치고 남은 배들은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그 자랑스런 전투에 참가했던 삼천의 우리를 태우고 무사히 이어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번 데인 일본 해군은 필승의 태세를 완비하기 위함이란 핑계로 다시는 이어도 근처에 얼씬 않아, 우리 남로군은 그로부터 삼 년 뒤 본토 상륙전을 감행하기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북로군의 청산리 싸움에 못지않게 멋진 단후전(斷後戰)이었고, 빛나는 승리였다.
그런데 그 싸움에 대해 근래 억장 무너지는 소리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한다. 곧 그런 싸움 같은 것은 없었으며, 그 얘기는 다만 일 없는 문사(文士)가 정신적인 수음(手淫)으로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깨강정이 난 조상들이 사명당(四溟堂) 얘기를 지어내고, 월남에서 개피 본 미국 사람들이 람보를 지어내듯이 .
우리네 앞사람과 뒷사람, 늙은이와 젊은이를 이간질하는 소리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한 일은 어떻게 하든 깎아내리고 깔아뭉개 스스로를 값어치 없고 낮게 느끼게 만들려는 못된 종자들의 수작이다. 일본이 입 싸악 씻고 앉았고, 세월도 벌써 칠십 년 가까이 흘러 어제 오늘 일같이 뚜렷하지 않겠지만, 정히 못 미덥거든 당장이라도 다도해 서남단의 무명 군도(群島)를 찾아가 보시라. 하다못해 바닷속에서 이제는 물고기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어 있는 야마모도 함대의 잔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남북 양로군(兩路軍)의 본토진공전 (本土進攻戰)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본거지를 의연히 이어도와 장백산에 두고 소규모의 부대를 출동시켜 치고 빠지는 식의 전투를 한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령부까지 본
토로 옮겨와 대규모의 국토 수복전에 들어간 단계이다.
첫 단계, 곧 유격전 형태의 본토 진공전을 먼저 시작한 것은 북로군이었다. 청산리에서 적에게 대타격을 입히고 추격을 뿌리친 우리 북로군은 그로부터 삼 년, 장백산을 근거로 이를 악물고 국토 수복의 성 전을 준비했다. 젊은이들은 일당백의 전사(戰士)로 자라기 위해 산악과 들판을 내달으며 피나는 훈련을 했고, 늙은이와 부녀자는 그들을 기르기 위해 밭을 일구고 논을 떴다. 광맥에 밝은 이는 금맥 실한 금광을 찾아내고, 말 잘하는 이는 장개석과 스탈린을 찾아가 군자금을 얻어 왔다. 이재(理財)에 밝고 거래에 능한 이는 만주를 중심으로 상로(商路)를 열어 군자금을 키우는 한편 봉천의 무기 시장이며 아라사를 떠나는 체코 여단에서 흘러나온 신식 무기를 사 모았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가자 북로군의 전력은 눈에 띄게 불었다. 청산리 싸움에서는 삼천을 못 채운 병력이 이만으로 늘었으며, 무기도 중포(重砲)와 전차는 못 갖춰도 경보병(輕步兵)의 편성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되자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본토 진공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청산리 싸움에 참가했던 젊은이들의 눈에는 이제 그만한 전력이면 세상에 겁날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이 든 이들의 눈으로 보면 달랐다. 그들의 식견과 사려에 비추이 보면 아직은 국내 진공을 서두를 때가 아니었다.
“자네들은 섬오랑캐의 군사가 얼마나인지 아는가. 이에 건너온 것만도 강병(强兵) 백만에 아직도 그 다섯 배는 저희 땅에서 더 긁어모을 수가 있네. 공연히 숲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했다가, 저것들이 모진 마음을 내어 일시에 이리로 몰려오면 우리가 오히려 의지할 근거지만 잃고 말 걸세.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저 것들은 이미 동아(東亞)에 살겁 (殺劫)을 일으켜 그 피바람을 타고 있네. 절대로 이대로 멈추지를 봇할 것이네. 머지않아 중국과도 전단을 열고, 어쩌면 그 때문에 전 세계와 대적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 되면 강병 백만을 그대로 이 땅에 묶어 놓을 여유가 없고, 그때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네. 그때까지만 꾸욱 참고 힘을 기르세.”
나이 든 이들은 젊은이들을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도 들을 만한 주장은 있었다.
“만약에 저것들이 지금의 상태로 자족하여 지키기만 하고 있으면, 우리는 땅을 삼키우고도 영원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거기다가 청산리 싸움이 있은 지 벌써 삼 년, 아무 저항 없이 저들의 행패를 보고만 있어 온 세월도 너무 길지 않습니까? 비록 저들을 모두 몰아낼 힘 이 없더라도 전단은 열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단을 열지 않으면 저들은 이 땅에 식민(植民)을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저들의 기득권으로 악용되게 됩니다. 자칫하면 우리 역사에 지금껏 없었던 식민지 시대라는 욕스런 시기가 보내지게 됩니다. 또, 세계의 이목을 위해서라도 이제 전단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와 저들과의 싸움이 계속중이라는 걸 세계 사람들에게 기억시켜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외치고 나서자 나이 든 이들도 신중론만 가지고 맞설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한만 국경(韓滿國境)에 가까운 도시를 공격 목표로 한 대일 유격전이었다.
우리는 오백 명 단위의 독립 부대 열둘을 편성해 되도록 장백산의 본거지와 무관한 듯 위장하고 국내로 진공하게 했다. 동으로는 무산·회령·종성·온성·경윈이 목표가 되었고 서로는 증강진·갈전·자성·만포·초산·삭주·의주까지가 공격의 범위 안에 있었다. 주재소를 기습하고 하루쯤 탈환해 있다가 적의 본격적인 토벌대가 나타나면 국경을 건너 만주로 피신하는 형태로, 각 부대는 세 번 출동하고 나서는 만주의 산악을 타고 장백산으로 귀환하여 대기중인 딴 부대와 교대하게 되어 있었다. 그 사이도 장백산의 본거지는 농사와 교역으로 물자를 비축하고, 점점 늘어나는 진투 병력에 부족함이 없이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교대하고 돌아온 부대들의 훈련을 담당하기로 했다.
서력으로 192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하루 도리로 일어나던 한만 국경의 전단은 그렇게 열렸다. 우리는 그 곳의 읍군(邑郡) 소재지를 하루나 이틀쯤 점령했다가 적의 대부대가 반격해 오면 한반도 점령이 완료돼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한두 번이 아니라 거의 매일같이 국경 지방의 어느 도시인가는 우리 북로군의 지배 아래 있게 되니 아무리 보도를 엄하게 통제해도 그 소문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라는 대로 세계는 오래잖아 우리가 일본에게 식민지로 예속된 게 아니라, 일시적인 강점 상태에서 끊임없이 교전중임을 모두 알게 되었다.
북로군이 일본을 상대로 전단을 연 지 얼마 안 돼 남로군도 거의 같은 생각으로 전단을 열었다. 남로군은 주로 작고 빠른 함정과 다도해 부근의 복잡한 지리를 이용해 바다에서 적을 괴롭혔다. 소규모의 수송선단이나 호남에서 쌀을 실어가는 화물배가 목표였는데, 효과는 국경 지방의 도시를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 두 번 바다에서의 공격 이 되풀이되자 세계는 차츰 우리가 바다에서도 일본과 전단을 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힘이 난 남로군이 해안 도시에 상륙전까지 감행하자 거기 거주하던 외국인들을 통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게 한층 더 명백해졌다.
그 시기에 우리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를 일일이 다 얘기하는 것은 지루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전투의 양상이 비슷비슷할 뿐만 아니라 대소 천 회(千回)가 넘는 교전이라 대략만 써도 두터운 책으로 열 권이 넘는 전사(戰史)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양로군에게 있었던 가장 그림 같은 전투 둘만 얘기하겠다.
20년대 말 북로군의 단위 부대에 의한 동홍읍 점령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린 별난 사건이었다. 주재소를 불사르고 수비대를 전멸시킨 것까지는 다른 전투와 비슷했지만 그 뒤 칠십이 시간에 걸친 점령 기간 동안의 연출이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에 있던 일본인들이며 한자(韓子), 되튀기, 양튀기는 물론 서양인 선교사와 의료진까지 모두 불러모아 놓고 사령관 자격으로 단상에 오른 것은 우리의 딸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아리따운 열아흡의 소녀였다. 그녀가 하이얀 한복에 역시 눈빛같이 흰 말을 타고 우리를 사열하며 들어설 때부터 거기 모여 있던 일본인과 튀기들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완전히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자기들의 죽고 사는 게 그녀의 손에 달렸다는 데서 온 두려움보다는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신비한 힘 때문이었다.
그녀는 짐짓 절대의 복종을 연기(演技)하는 우리 전사(戰士)들을 시켜 먼저 영국인 선교사 부부와 독일인 베네딕트 파 신부, 그리고 백계 러시아인 의사에게 술 한잔을 내리게 하고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의 적이 될 것인지 귀한 손님이 될 것인지는 당신들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만일 우리를 도울 수 없다면 하루 빨리 이 땅을 떠나십시오. 여기 남아 저들을 돕는다면 다음에는 저들과 마찬가지로 처단해야 할 침략자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려보낸 뒤 튀기들을 향했다.
“당신들이 우리들을 따라나서지 못함을 우리는 잘 이해합니다. 또, 우리의 집이 허물어지지않고 논밭이 묵지 않게 지켜 주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당신들의 몫을 잘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들의 몸에는 분명 이(異)민족의 피가 흐르지만 당신들이 발 딛고 사는 땅의 무게도 그 피보다 가벼웁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돌아가면 결국 당신들은 우리와 더불어 이 땅에 살게 되리란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희에게 당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정도를 넘는 협조를 하는 것은 뒷날 돌아오는 우리에게 범죄를 구성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사뭇 말투부터가 달랐다.
“돌아가라, 모든 겨레붙이는 각기 살아가기로 정해진 땅이 있다. 이곳은 너희가 살 땅이 아니니 이만 돌아가라. 이번에는 전열(戰列)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 보내지만 전면적인 국토 수복전이 일어나면 그때는 아무도 너희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 때는 그들의 등골에 찬서리가 내리는 것 같았다고 뒷날 어떤 일본인은 술회 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사령관도 아니고, 그저 한 차례 야무진 연기로 우리의 승리를 장식해 주었을 뿐이지만, 그러한 연출의 효과는 우리가 기대한 이상이었다. 한만 국경에 일어난 그 숱한 유격전의 보도에 그렇게도 엄격한 통제를 받던 일본의 언론이었으나, 그 사건만은 ‘비적(匪賊) 미녀사령(美女司令)’ 이 란 제하(題下)에 일제히 호들갑을 떨고 있기 때문이다.
남로군의 해안 활동 중에서는 아무래도 ‘목포 사건’ 이라 불리는 기습전이 먼저 애기되어야 할 것 같다. 20년대 말 남로군의 한 선단이 대남하게도 목포시를 야습해 일본 헌병대를 들부수고, 이튿날 다시 대낮에 배를 보내 미창에 보관돼 있던 쌀 오백 섬을 실어 간 사건이다.
남로군의 해안 도시 기습은 전에도 자주 있었지만, 대개는 이어도와 다도해를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의 작은 포구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호남 제일의 항구요, 일본이 수탈한 호남미를 저희 땅으로 실어 내는 선창으로 쓰던 목포를 기습함으로써 그 사건은 시작부터 이미 이 땅뿐만 아니라 저희 섬까지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항구 그 자체로도 엄중하게 확보되어야 할 곳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자존심의 유지였다. 신예 경비정을 여남은 척씩이나 보유한 해안 경비대와 헌병 연대가 주둔하는 곳이기도 한 지역에 남로군이 상륙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안 경비대로부터 목포 앞바다에 수상쩍은 배 몇 척이 나타나 경비정 두 척이 추격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만 해도 헌병 사령관 사사끼(佐佐本) 대좌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추격나간 두 척의 경비정이 돌아오지 않아 다시 세 척의 경비정을 풀었다는 두 번째 보고에도 사사끼는 흔히 있는 일로만 여겼다. 그런데 저물 무렵, 세 척의 경비정이 되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한 시간도 안 돼 일이 터졌다.
“적 선단이 해안 경비대 본부를 기습해 왔습니다. 나포된 듯 보이는 우리 경비정 세 척을 앞세우고 해안에 접근 갑작스레 상륙 공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저녁상을 받고 있다가 그런 급보를 받은 사사끼는 얼른 연대에 비상을 걸었다. 그 무렵의 잦은 우리 남로군의 활동으로 출농 경비를 나긴 병력이 많아 연병장에 모인 것은 천 명을 크게 넘지 않았다 사사끼가 너무 우리를 깔보지 않았더라면 출동은커녕 자체 경비에도 넉넉지 못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육전(陸戰)에서는 턱없는 자신을 가지고 있던 일본 육군 출신답게 사사끼는 출동을 서둘렀다. 그때 사사끼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든 해안 경비대의 급전이 날아들었다.
“적이 상륙을 시작 본 경비대를 공격하고 있음. 추산 육전 병력 오백 정도 긴급한 구원 요망.”
적 병력 오백 정도라면 소사(掃使) 아이까지 합쳐 이백 남짓한 해안 경비대로서는 어렵겠지만, 자기들에게는 힘 안 들이고 공을 세울 기회같이만 보였다. 거기서 사사끼에게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단념 케 한 결정이 내려졌다.
“각 대대는 환자와 평상시의 경비 병력만 빼고 모두 출동한다.”
그것은 곧 환자를 포함 보초병 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출동한다는 뜻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이십 리나 달려 해안 경비대 본부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사사끼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믿었다. 그들의 도착과 함께 콩볶듯하던 총소리가 그치고 금세 해안 경비대 본부를 함락할 기세로 덤비던 상륙군이 밀물처럼 해안으로 빠저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사끼 연대의 일천 가까운 병력을 그런 상륙군은 물가까지 뒤쫓았다. 우리 상륙군은 아무런 미련 없이 풍덩풍덩 바다에 뛰어들어 멀지 않은 자기들 배로 헤엄쳐 갔다. 원래가 헌병대라 중포(重砲)가 없는 데다, 급히 달려오느라 공용화기조차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 사사끼 연대는 뱃전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를 들을 만큼 멀지 않은 곳에 떠 있는 우리 남로군 배들의 그림자들 보면서도 어찌해 볼 수단이 없었다. 어둔 바다 위로 천방지축 헛총질만 하다가 배에서 퍼부어지는 사격에 쫓겨 해안 깊숙이 물러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사사끼 연대는 처음 우리 상륙군을 격퇴한 것만으로도 공을 세운 양 신나했지만 차츰 이상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적의 선단이 떠나지 않고 계속 바다에 있다가 자기들이 본부로 귀환할 기색만 보이면 다시 상륙을 시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돌아가자니 뒤가 땡기고, 그냥 거기서 밤을 새우자니 텅 비우다시피한 연대 본부가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적이 우리를 여기 붙잡아 두려는 계략인지 모른다. 간편(簡偏) 일 개 대대만 남고 나머지는 본부로 귀환한다.”
이윽고 사사끼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갑자기 연대 본부 쪽 하늘이 환해지더니 오래잖아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사사끼는 얼른 무선으로 본부를 불러 보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무선은 전혀 응답이 없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홱 돌아온 사사끼가 부관을 찾고 있을 때 부관이 숨이 넘어갈 듯한 하사관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경비병은 전멸하고 연대 본부 막사는 적에게 뺏겼습니다.”
그 하사관이 헐떡이며 알린 내용은 그랬다. 아마도 본부에 잔류시키고 온 백여 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인 듯했다.
우리의 노림이 어쩌면 처음부터 자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사사끼는 후회나 근심보다는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대일본제국 육군이 조센징에게 ― 아직도 그런 황당한 감정에서 깨나지 못한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두 돌아간다. 해안 경비대 본부는 자체 방어에 맡기도록.”
작전이고 깻목덩이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된 사사끼는 앙갚음만이 급해 그렇게 명령을 바꾸었다. 해안 경비대 쪽에서 보면 비정하기 짝이 없는 변경 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사사끼 연대는 그 연대장의 경솔함과 속좁음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연대 본부로 귀환하는 도중 벌써 거기까지 나와 매복해 있던 우리에게 걸려 얼빠진 사격전을 벌이다가 그 새 해안 경비대 본부를 불태우고 뒤를 덮친 우리 상륙군에게 또 한번의 타격을 받고 광주 쪽으로 내빼고 말았다.
그날 작전에 참가한 우리 남로군은 비록 목선이지만 배가 백여 척에 육전병 (陸戰兵)만 이천 명 가까운 대군이었다. 일본군은 그 한 번의 야습에서 수백의 인명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植民), 어쩌고 할 만큼 떠들던 점령군으로서의 체면은 완전히 깎이고 말았다. 해안 경비대와 헌병 연대의 본부가 터도 망도 없이 타버린 데다 거기 있던 무기와 탄약은 그대로 우리의 보급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허파를 뒤집은 일은 다음날에 있었다. 다음날 저희 본토에서 왔다는 일천 톤이 넘는 화물선이 목포항에 들어와 호령까지 하며 미창(米倉)에 쌓여 있던 쌀 오백 석을 실어 내갔는데, 며칠 뒤 그 선원들만 조그만 고깃배에 실려 남해 바다를 떠돌다가 저희 군함에게 구조된 것이었다. 역시 우리 남로군의 솜씨였다. 전날의 아습으로 항만의 일본인들이 얼이 빠져 있는 것을 틈타 나포한 직의 수송선으로 대낮에 공공연하게 쌀을 실어 냄으로써 한 번 더 그들의 허파를 뒤집어 놓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남북 양로군이 본격적인 국내 진공전(進攻戰)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일본이 기어이 만주 사변을 일으킨 뒤가 된다. 서력으로 1932년 허욕에 눈이 먼 일본은 드디어 만주로 출범을 개시해 동북의 네 개 성 (省)을 점령하고 만주국 건설이라는 꼭두각시놀음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국이 아무리 군벌들의 분탕질로 개판이 났다 해도 전혀 시람 없는 게 아닌 만큼, 그 큰 땅덩어리를 공으로 먹을 수는 없었다. 중원에서 쫓겨온 되놈들 모아 만주군이니 뭐니 하며 총알받이를 만들어 보았으나, 그보다는 저희 군대가 더 많이 필요했다. 야금야금 불은 관동군(關束軍)이 이십 만을 넘어서면서부터 이 땅을 메우고 있던 주둔군이 차츰 듬성듬성해져 갔다. 그 나라 계집이 한꺼번에 새끼를 열 몇 마리씩 내지르는 개량종 암퇘지가 아니고 보면,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식이 안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참고 기다리던 그 ‘때’ 가 온 셈이있다.
만주 사변이 난 그 이듬해 어름 마침 국내 진공을 결정한 우리 북로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가 지들의 지배 아래 떨어진 이상 그 쪽 장백산이 더 유리할 것도 없는데다, 큰 싸움 없이 군사만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병력은 늘어 정예만으로 오만, 무기도 항공기를 빼면 대강은 갖추어졌는데도 남는 것 없는 유격전으로만 세원을 보낼 수가 없었다.
국내로 돌아온 북로군은 처음 백두산 남록 원시림에 본영을 세웠다가 다시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묘향산맥으로 본영을 옮기고 기기서부터 수복 지구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국내 진공 초기의 활동은 몹시 조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중국이란 수렁에 발목밖에 빠지지 않은 일본이 우리가 켕겨 만주를 포기하고, 그 앙심으로 이를 갈며 덤비면 싸움이 쓸데없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따라서, 초기의 국내 진공전은 적극적인 국토 수복전이기보다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을 슬그머니 차지하고 근거나 굳건히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정은 역시 북로군과 비슷한 시기에 본영을 이어도에서 뭍으로 옮긴 남로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남로군은 상륙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있는 무슨 무슨 상륙 작전 같은 것과는 달랐다. 일본의 경계가 가장 악한 해안을 골라 야간에 상륙을 마친 뒤 또한 야간 행군으로 가만히 지리산에 숨어든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전투병만도 오만이 넘는 병력으로 지리산에 본영까지 설치했지만 제 홍에 취해 있던 일본은 그저 지리산에 약간의 저항분자가 든 것 정도로 알았다.
“요―오시, 만주만 삼키면 보자. 그깟 한 줌도 안 되는 비적 쯤이야…….”
일본의 생각은 대강 그랬을 것이다. 거기다가 일본이 더욱 마음 느긋이 대륙 쪽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비(非)전투원들의 귀환이었다. 국내 진공을 결정한 날 북로군 본영에서는 전투 요원으로 선발된 이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의논했다.
“우리가 비록 총칼을 들고 전열(戰列)에 설 영광은 얻지 못했으나 함께 돌아갑시다. 전사(戰士)들이 우리 땅으로 들어간 이상 우리도 국내로 돌아가 그들이 놀 물이 되어 줍시다. 늙은이와 여자를 보살피고 어린것들을 기르며, 저들이 필요한 것을 대어 줄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지난 십 여 년 장백산과 이어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다가 ― 피와 땅이 필요로 하면 우리 스스로를 전사들의 총칼로 내던집시다.”
편평족(偏平足)과 근시(近視)로 전사단에 들 수 없게 된 열혈의 젊은이가 먼저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생각 깊은 만큼 걱정도 많은 중년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 말은 옳지만 저 섬오랑캐의 군대가 어떻게 나을런지. 십삼 년 전 저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떠나오던 때를 생각해 보게. 그리고 지난 십 년 우리 전사(戰士)들이 저들을 괴롭힌 걸 생각해 보게. 그 모든 게 전사들 뒤에 우리가 있
음으로써 가능했으니 필시 우리를 반갑게 맞지는 않을 것일세. 만약 그들이 맨손에다 아녀자와 노인들까지 데리고 있는 우리를 총칼로 막는다면 무슨 수로 돌아가겠나. 또,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저들이 이 악물고 괴롭힌다면 무슨 수로 견딜 것이며, 전사들은 또 어떻게 돕겠나? 자칫하면 저들에게 수백만의 포로만 안겨 준 꼴이 되어, 우리 때문에 전사들이 마음놓고 싸울 수 없게 될까 겁나네.”
그때 다른 사람이 나섰다. 앞서 말한 이처럼 생각은 깊지만, 쓸데없는 걱정이 많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벗어날 길을 잘 찾아내는 이였다.
“두 분의 말씀이 다 옳은 만큼 그 좋은 점만 취해 우리의 할 바를 정해 봅시다. 먼저 우리가 전사들과 함께 우리 땅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놀 물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마다할 수 없는 우리의 역할일 것이오. 그러나 또
한 저들 섬오랑캐의 보복이나 적대도 걱정 아니할 수는 없소. 돌아가되, 그 대책을 마련해 돌아가도록 합시다. 바둑판의 눈금 마다에 수가 있다고, 우리 모두가 머리를 짜낸다면 왜 길이 없겠소?”
먼저 그렇게 입을 뗀 그는 마치 오래 전부터 그 날에 대비해 생각해 온 사람처럼 거침없이 이어갔다.
“내 생각에 저들 섬오랑캐는 만주에 큰 전단(戰端)을 새로이 연 이상 되도록 우리 땅은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오. 그들의 그러한 심리를 이용해 속여 봅시다. 욕되지만 우리 모두 일장기(日章旗)와 백기를 들고 국경을 건넙시다. 저들이 신사(神社)에 절하라면 절하고, 천황 만세를 외치라면 기꺼이 그대로 외칩시다. 그러면 저들은 세계의 이목 때문이라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땅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 지배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한층 마음놓고 대륙으로 바다로 전선을 늘려갈 것이오. 물론 우리의 전사들이 적극적인 진공전 (進功戰)을 펼치면 문제가 생 겠지만, 세상에 나라 잃은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참기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소? 죽음조차 마다 않고 내 땅 내 나라를 지켜온 조상들을 돌아본다면 우리가 참지 못할 게 무엇 있겠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비전투원 거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될 싸움에 각오를 다지며 국내로 돌아갈 채비에 들어갔다.
그 비슷한 논의는 남로군에서도 일어났다. 모든 비전투원들은 전사들이 상륙해 국내 진공전으로 들어가면 거의 지원이 불가능한 이어도에 남아 있기보다는, 괴롭더라도 뭍으로 돌아가 전사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거기서 〈출애굽 (出埃及記)〉와 흡사한 우리 비전투원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만주 사변이 나던 해의 겨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한만(韓滿) 국경과 서남 해안은 늙은이와 아녀자를 뒤딸린 우리 비전투원의 귀환 행렬로 메워졌다.
손에 손을 잡고 걸어서, 혹은 조각배에 의지해 우리가 밀려들자 일본의 국경 수비대나 해안 경비대는 처음 우리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다급한 대로 정지를 외친 뒤 상병은 병조장에게, 병조장은 하사에게, 하사는 대위에게, 대위는 연대장에게,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사단장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에게, 어떻게 할까를 물어 올라갔다.
하지만, 가늠이 서지 않기는 당시의 조선 주둔군 사령관 고노에(近衛)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뒤 십 년이 넘도록 이 땅에서는 만나기조차 힘들던 우리가 무리무리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와 어린이까지 있는 데다 무장하지 않은 걸 보아서나, 손에 손에 일장기와 백기를 든 걸로 보아서 싸우려 덤비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정확한 속내를 모르면서 무턱 대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어 조선군 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에게, 육군 참모총장은 대본영(大本營)에, 대본영은 내각에 그 처리를 문의했다. 도오조오(東朝) 내각도 한동안은 그 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으나 결론은 우리가 바란 대로였다.
“그들이 비전투원이고, 또 귀순의 의사를 밝히면 막지 말고 받아들일 것. 단, 그들의 동태에 대해서는 감시를 게을리 말 것이며. 돌발 사태가 있으면 긴급히 보고할사.”
내각은 조선 주둔군에게 그련 진령을 띄우는 한편 대대적인 대외홍보에 들어 갔다. 외국 기자들을 이 땅으로 실어보낸다, 돌아오는 우려의 사진을 통신사에 전송하다, 이 땅의 식민지화를 늦으나마 세계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 분별 있는 이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아직도 외국인들 중에는 간혹 우리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은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때 일본의 선전에 깝북 넘어간 탓일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의 귀환은 그 뒤 모두가 전에 살던 곳에 되돌아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몇 달이나 조선 주둔군의 눈과 귀를 잠아 놓았다. 그리고 그 시끌벅덕한 속에 우리 남북양로군의 국내 전공은 더욱 은밀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며. 어쩌다 조선 주둔군에게 일부가 탐지되어 실제보다 훨씬 작게 취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남·북양로군이 국내로 본영을 옮긴 뒤에도 전면적인 국토 수복의 진단을 열 때까지는 다시 몇 년이 더 필요했다. 첫째는 돌아온 우리 비전투원들이 이 땅에 뿌리 내리기를 기나리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점점 간이 커진 일본이 더욱 넓게 전선을 벌여 우리가 움직여도 뒤돌아볼 겨를이 없을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 두 가지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은 채 무리하게 진면전을 벌었다간 싸움 자체도 몇 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진작에 걱정한 대로 우리 비전투원이 적에게 인질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남북양로군이 국내로 본영을 옮긴지 사 년만에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꼭두각시 황제를 세워 그럭저럭 만주를 삼킨 일본은 그래도 한이 안 차는지 칼끝을 중원으로 돌렸다. 노구교(蘆潮喬)란 곳에서 그러잖아도 제 살 한 덩이 크게 베이고 울근불근해 있는 중국의 귀쌈을 후려 다시 엄청난 싸움을 벌이니 이름하여 중일 전쟁(中日戰爭)이다. 아무리 오졸 없는 중국이라도 그 꼴까지 당하고는 참을 수 없어 덩치로라도 뭉개 보려고 맞주먹을 내지르자 싸움은 제대로 모양을 갖춰갔다.
얼핏 보아서는 이번에도 판은 일본판 같았다. 무인지경 가듯 밀고 든 일본군은 싸움이 시작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중국의 태반을 석권했다. 장개석 정부는 중경 (重慶)으로 달아나고, 철도가 지나가는 도시는 하나하나 일장기가 꽂혀 갔다.
하지만, 실상 일본의 초장 끗발은 이미 그때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전선이 화중(華中) 화남(華南)으로 전개되자 싸움은 전같지가 않고 물렁해 뵈던 장개석도 뜻밖에 집요한 항전으로 나왔다. 거기다가 애숭이 마적 두목이 서안사건(西安事件) 인가 뭔가로 모택동이까지 싸움판에 불러들이니 일은 점점 꼬여 갔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때처럼 한주먹 오지게 앵기고 눈 부룸떠 항복받는 재미는 물 건너가고, 수렁 같은 장기전 (長期fk)으로 끌려들게 된 것이었다.
참고 기다리던 우리 양로군(兩路軍)이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일본이 중일 전쟁의 수렁에 허리까지 잠겨 들어간 뒤였다. 이제는 이 땅으로 대군을 돌리기 어렵다 싶자 먼저 남로군이 움직였다. 지리신의 본영에서 세 방면으로 출격한 남로군은 동으로 함양(威陽), 산칭(山靑). 서로 남윈(南原). 구례(求禮) 네 군(郡)과 남으로 진주시까지 수복 지구(收復地區)로 선포했다. 열한 군데 헌병 분견소와 두 군데 헌병대대, 그리고 다섯 군데 경찰소와 스물일곱 군데 주재소를 쓸어버리고 난 뒤의 진과(戰果) 었다.
남로군의 출격을 뒤따르듯 북로군의 주력도 적유령 신맥의 본영을 나섰다. 그리고 닷새 만에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남로군에 못지 않은 수복 지구를 확보했다. 희천(熙川), 영변(寧邊). 덕천(德川), 개천(介川), 안주(安州) 다섯 개 군(郡)에 세 개 읍(邑)이었다.
우리 남북양로군의 그 같은 움직임에 일본의 조선 주둔군은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그 사이 우리를 얕보는 게 버릇된 그들이라, 우리의 실제 선력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는커녕 관심조차 없는 마구다지 반격이었다. 거기다가 야금야금 중일 진쟁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간 수 또한 적지 않아 전력 자체도 전만 같지 못한 그들이고 보면 결과는 뻔했다
비적 토벌작전이란 이름으로 벌어진 그 한 달의 전투에서 일본의 조선주둔군이 받은 타격은 한 마디로 참담했다. 부족한 전력으로 미리 쳐둔 그물에 뛰어든 격이 된 그들은 지리산 지구에서만도 칠천 가까운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토벌은커녕 수복 지구의 확대조차 막기가 급급해진 꼴이었다.
마침 새로 부임 한 지 얼마 안되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이찌끼(一本) 중장은 잇따라 들어오는 패전 보고에 놀랍고도 분했다. 항상 자신 같은 지장(智將)을 조선 같이 한가한 구석에다 처박아 버린 ‘대본영의 돌대가리들’에게 욕을 퍼부어 대던, 그 자부심 이 유별난 사내는 두 번째의 강력한 반격을 지시했다. 조선에 있는 전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남북의 비적들을 쓸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함부로 덤비다가 한 번 호된 맛을 본 현지 지휘관들은 한 목구멍에서 나온 것 같은 보고를 띄워 올렸다.
“비적의 전력은 예상 이상으로 호대함. 묘향산 지구 추산 병력만도 최소 십오만에 야포까지 갖추었음.”
“지리산 지구 적 추산 병력은 최소 십이만. 섬멸을 위해서는 내지의 증원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이번에는 지나치게 과장된 우리의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찌끼는 전쟁터에서 반평생을 보낸 사람답게 사태의 심각성을 이내 알아차렸다. 만리장성 위에서 오줌을 누면 고비사막에 무지개 선다, 어쩌고 하며 관동군(關東軍)이 북지(北支)에서 허풍을 떠는 사이에, 이미 삼켜 소화까지 된 길로 알았던 이 땅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일 전쟁사를 보면 1938년 9윌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일본군이 잠시 수비 태세로 전환해 그 해를 넘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찌끼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관동군으로 갈 병력과 보급품이 이 땅으로 돌려진 까닭이었다.
“긴급 전문 제1호.
수신 : 대본영
발신 : 조선 주둔군 사령관
본관은 금(今) 오월 조선 주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래. 삼 개윌에 걸친 비적 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던 바, 다음과 같이 엄청난 사실이 드려났으므로 긴급 보고함.
一. 아국(我國)은 이십 년 전에 조전과 합방, 식민지화했다고 믿었으나 이는 오판인 듯함
―. 조선에는 민족 정권과 군대가 존재함.
一. 민족 정권은 원시적인 민족 공동체의 발전 형태인 듯하나 그 응집력 및 일체감은 놀라울 정도임.
一. 군대는 북부와 남부의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바, 병력은 각기 십만 내외로 추산됨.
현지 지휘관 의견 : 조선에 대규모의 병력을 출동시켜 민족 정권 및 군대를 시급히 섬멸할사. 지나(支那) 전선을 일시 동결시키더라도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로 보임.
조선을 장악하지 않고서는 지나 작전도 무망할 듯.”
이찌끼의 그런 전문을 받은 대본영은 발칵 뒤집혔다. 등뒤에 적을 두고 수십 개 사단을 북지(北支)에 전개시킨 꼴이 된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집 안이 망하려면 고집불통이 나오고, 나라가 망하려면 극단파가 득세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꼭 그래서 아직도 대외 정책의 우이(牛耳)는 모든 것을 낙관하는 극단파에 잡혀 있었다. 일이 되려면 지나에서뿐만 아니라 반도에서도 철병해 저희 섬이나 제대로 지키는 게 옳았으나, 이미 패신(敗神)에 홀린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떠오를 리 없었다.
“이번에 지나로 증파되는 관동군 십 개 사단은 조선을 경유한다. 오 개 사단은 지리산 지구를 통과하며 그 곳에 자리잡은 조선 비적을 소탕하고, 오 개 사단은 묘향 산맥으로 들어가 근래 그 일대에 준동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 집단을 뿌리뽑을 것, 조선 주둔군은 정탐 및 안내를 맡는다.”
여러 날의 갑론을박 끝에 일본의 대본영이 내린 결정은 그랬다. 그것도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찌끼의 보고를 믿어주어서가 아니라 ‘관례상의 후방 강화’ 란 명목이었다.
그러나 명목이야 어떠했건 그 십 개 사단의 태도는 우리에게는 적지 아니한 위협이었다. 아직은 초장의 신바람에 들떠 있는 중일 전선으로 증파되는 군대라 사기도 상당한 데다, 병참 또한 당시 일본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인 정예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기세등등하게 부산항에 상륙을 시작하자 그 정보는 곧 우리 남북양로군에 게 들어갔다. 국내 진공 뒤로는 그 전과 달리 통합군(統合軍) 형태로 작전을 펼쳐 나가던 양군은 그런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 북악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었다. 우리의 마지막 임금님께서 우리에게 주권을 되돌려 준 그 자리로, 그 날로부터 거의 이십 년 만이었다.
“적의 주력은 이미 중국이란 수렁에 허리까지 빠져 있소. 쉽게 손을 씻고 되돌아서 나오지는 못할 것이오. 거기 비해 우리는 지난 이십 년 참고 참으며 힘을 기르고 뜻을 벼르었소. 이왕에 전단을 열었으니 내쳐 본격적인 국토 수복전으로 들어갑시다. 서울을 최종 집결지로 하여 남북군이 주력을 움직이는 것이오. 비전투원으로 도회와 들판에 터전을 잡은 이들과 전투원으로 산악에 웅거한 우리가 하나가 되어 밀고 나가면 아니될 것도 없소.”
참기와 기다리기에 지친 주전파가 먼저 일본과의 전면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신중파도 만만하지 않았다.
“일본이 비록 저희 섬에 남아 있는 육천만의 인총(人叢)으로 미뤄 보면 전력이라 할 수 없소. 게다가 최근의 해외정세를 보면 일본의 대륙 진출을 놓고 열강(列强)의 압력이 거센 듯하오. 미국, 영국, 불란서가 가만히 안 있겠다는 눈치고, 독일과 이태리를 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눈길이 곱지 못하오. 머지않아 일본은 새로운 전단을 열고 정말로 죽기 살기의 한판을 치르어야 할 것 같소. 그때까지 다시 한번 물러나서 기다립시다. 이번에 확보한 수복 지구를 모두 내어주고 우리의 전력을 온전히 보전해 각기 산악 깊숙이 움츠리는 것이오. 그러다가 적이 다시는 우리를 돌아볼 틈이 없을 정도로 전선을 확대한 뒤에 우리의 모든 전력을 들어 결전을 치르도록 합시다.”
신중파의 주장은 그랬다. 냉정 하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분명히 사려 깊고 분별 있는 주장이었으나, 이번에는 주전파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신중한 것도 좋고 앞뒤를 잘 헤아리는 것도 좋지만 다시 물러나는 것은 이·니되겠소. 생각해 보시오. 적의 군화가 이 땅을 짓밟은 지 벌써 이십여 년, 우리가 명색 국토 수복전을 시작한 지도 벌써 십팔 년이 지나갔소. 아무리 우리가 전의를 잃지 않고, 싸움을 계속해 왔다 한들 세계의 어느 나라가 알아주겠소? 자칫하면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일본에 대한 예속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우리 자손에게 치욕과 불리를 가져오게 될 것이오. 거기다가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참고 기다리기에 이미 지쳤소. 이미 이십 년을 기다렸는데 또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것 이오?”
“그로 인해 우리의 희생을 단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십 너이 아니라 오십 년을 기다려도 아깝지 않소.”
“하루라도 빨리 저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면 백 명이 목숨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다는 말 또한 가능하오. 자랑스런 즉음의 하루가 욕된 천 날보다 더 값있다고 믿는 이도 우리 중에는 많소.”
“군자의 복수는 백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 벌써 잊으셨소? 그게 국토 수복전을 시작할 때 조급의 유혹을 달래던 우리의 격언 아니였소? 더구나 이제 날은 다 되었소. 짧으면 삼 년 길어도 오 년 안에는 저들 섬오랑캐의 난기
(短氣)가 일을 내고 말 것이오. 아니, 저들이 참으려 해도 중일전쟁이 장기화로 접어든 이상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소. 그 전쟁에 필요한 석유와 고무를 얻기 위해서도 새로운 싸움을 안 일으키지 않은 수가 없을 거요.”
“그렇다면 더욱 싸움을 서둘러야 하오. 저들이 새로운 전단을 열고 안 열고가 우리에게 달린 게 아니라면 외적은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 났소.”
“그렇지만, 지들이 새로운 싸움을 자제하고, 전력을 기울여 우리를 압박해 오는 날이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오. 자칫하면 우리는 다시 이 땅 밖으로 밀려나 또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소.”
그렇게 논의는 점점 열을 뿜어 갔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어떤 겨레인가. 무엇이든 극단론으로 스스로를 망쳐버리는 일은 없는 우리답게 그 두 가지 상반된 주장도 조화의 타협점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꼬박 하루 밤낮의 논의 끝에 남북양로군에게 하달한 원칙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 싸움의 양태는 유격전으로 전환한다.
둘, 수복 지구는 경우에 따라서 포기해도 좋으나 또한 적이 주둔할 수 있게 해서는 아니 된다.
셋, 적이 주력으로 본영을 압박해 오면 대타격을 주어 격퇴한다. 단, 이때에도 추격전으로 수복 지구를 늘리지는 말 것.”
우리의 그러한 결정을 알 리 없는 일본이 십 개 사단의 증원군을 주축으로 공세를 벌이기 시작한 것은 그 해 시윌 초순이었다. 전단은 먼저 지리산을 낀 남로군의 수복 지구에서 열렸다 적 103사난. 105사단, 126사단, 127사단 및 이 개 혼성 여단은 그 일대 주둔군으로 임시 편성된 다섯 개 전투단을 길잡이 삼아 다섯 방면으로 지리산을 압박해 갔다.
적은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찌끼의 과장된 보고 때문에 적어도 사단 규모의 회진(會戰)은 있을 줄 알고 각오들이 대단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도로를 낀 도시에서는 전혀 저항이 없었다. 적은 처음 그게 은근히 불안했으나, 사흘도 안 돼 우리의 수복 지구를 모두 재점령하자 이내 그들의 버릇된 오만함이 되살아났다. 기껏 그들이 되찾은 것은 도시와 도로뿐인 데도, 어림없이 에워싼 지리산을 두고 벌써 큰소리를 쳐댔다.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다. 우리는 닷새면 지리산 소탕을 끝내고, 일 주일 뒤에는 장강(長江)을 건너 장개석 군대의 숨통을 끊고 있을 것이다.”
적은 아마도 지리산을 저희집 뒷동산쯤으로 여긴 모양이지만 싸움은 기실 그때부터였다. 그들이 미처 지리산으로 접어들기도 전에 우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호된 맛을 본 것은 화개면 쪽으로 진입하려던 적 103사단 320연대였다. 내일같이 토벌을 앞두고 이제 막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조심 없이 야영을 하려던 그 연대는 그날 밤 한숨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들판을 에워싼 봉우리마다 횃불이 오르고 꽹과리 소리가 들리는 게 포위가 되어도 몇 겹은 포위가 된 것 같았다.
급하게 된 적 연대장은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한편 이웃 321 연대를 무전으로 불렀다. 하지만, 시골 초등학교를 빌려 야영하던 그 연대도 처지는 같았다. 역시 사방으로 포위된 듯하니 무전을 개방하고 대기해 달란 부탁이었다.
적 연대장은 다시 사단 사령부에 연락해 보았다. 지휘소의 회신은 예하 삼 개 연대뿐만 아니라 포병 사령부까지도 비슷한 보고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연대장은 공명심만큼이나 간이 큰 자였던 듯하다. 밤이 어둡고, 지리를 잘 모르는 만큼 날이 밝은 뒤에 토벌을 시작하라는 사단 사령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겁 없이 수색 작전을 벌였다. 우리에게 일 개 사단의 전 예하부대를 동시에 포위할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중대 단위의 수색대를 푼 것이었다.
그런데 날이 새고 나니 놀라운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전날 밤 수색을 나간 여덟 개의 수색 중대 중에서 성하게 돌아온 중대는 하나도 없는 데다 그 중에 세 중대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태였다.
악에 받친 그 연대는 날이 새기 바쁘게 인근 야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간밤 횃불이 올랐던 봉우리를 중심으로 펼친 철저한 소탕 작전이었으나 해질 무렵까지 그들이 찾아낸 것은 간밤에 나갔다 돌아오지 않은 저희 부대원의 시체 백여 구뿐이었다.
소득 없는 수색으로 하루를 허비한 그 연대는 그날 밤 역시 지리산에는 들지 못하고 대대별로 분산해 야영에 들어갔다. 전날 밤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이번에는 대대별로 야간 작전을 개시해 산봉우리에 흩어진 우리의 소수병 력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병력의 우위를 믿고 한 배치였지만 다음날 아침의 결과는 그 전날보다 더 나빴다. 이번에는 가장 외진 곳에 있던 대대가 바로 야습을 당해 이웃 대대가 구원을 갔을 때는 이미 쑥밭이 난 뒤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상태에 빠진 것이 그 연대뿐이 아니란 점이었다. 지리산을 포위하고 압박해 가던 적의 전 부대가 그 비슷한 상태에 빠져 오도가도 봇하고 있었다. 그대로 지리산 지구에 진입하자니 아직 병력 규모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그 야습 벙력이 마음에 걸렸고, 그들부터 소탕하자니 도무지 그림자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나타날 수 없어 보이는 곳에서 갑작스레 몇 백씩 나타났다가, 한 차례 타격을 주고는 참새떼처럼 흩어져 버리는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오 일 내에 지리산 지구 소탕을 호언하던 적 사단들은 첫눈이 내릴 때까지 지리산에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 채 피곤한 숨바꼭질만 계속했다. 그것도 많건 적건 매일 얼마간의 출혈은 피할 수 없는 숨바꼭질이었다. 대강 시월 초순부터 십일월 중순까지 일로, 그 동안 적 오 개 사단이 입은 손실은 전사 삼천에 야포만도 한 개 포병 사령부를 꾸릴 만한 숫자였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바로 그런 경우를 말함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그런 싸움이 가능했을까. 적의 대공세를 맞아 우리 남로군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편제의 개편이었다. 남로군 본영은 그때껏의 피라미드형 정규 편제를 해체하고 전병력을 육백 명 단위의 전투단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적의 작전이 시작된 날로부터 일정한 시한을 주어 각 전투단에 독립적인 작전권을 부여 했다.
“언제건, 어디서건, 줄 수 있는 타격이 얼마이건, 그 적이 어떤 부대든, 안전한 퇴로만 확보되면 적을 친다. 우군끼리의 구원 의무는 면제되며, 포로도 전리품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각자, 각 전투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첫눈이 올 때까지 적을 지리신 지구 밖에 묶어 둘 것, 천왕봉 본영으로의 귀환은 평야에서의 강설(降雪)이 한 치가 넘을 때로 하며, 그때 만약 적의 추격이 있으면 각 전투단 간의 구원 협조의 의무는 부활됨.”
그게 그 작전에 출동한 전투단이 받은 지시의 전부였다. 하지만 벌써 오 년째 그 연대에서 활동해 지리에 밝고, 정규전보다는 그런 유격전에 훨씬 익숙한 우리 전사들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편제도 없었다. 어둠을 틈타 물 스미듯 다가와서는, 벼락치듯 후린 뒤 참새처럼 흩어져 버리는 우리 전투단을 제국 육군의 전통, 어쩌구 하는 되잖은 격식에 굳어 버린 적이 무슨 수로 당해 낸단 말인가.
우리가 그 전투단의 작진 기한을 강설량에 맞춘 것은 우세한 적의 화력과 수송력이 무력해지기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는데, 그것도 우리 뜻대로 되었다. 적은 우리 전투단이 모두 천왕봉의 본영으로 귀환한 뒤에도 소탕 작전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 동안의 적지 않은 타격에 얼이 빠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경보병만으로 눈덮인 지리산을 뒤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이 년 뒤 중국의 석태선(石太線 ――石宿莊에서 太原까지의 철도) 연변에서 이른바 ‘백 개 연대의 전투’ 라는 큰 싸움이 일본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적이 있다. 그때 투입된 중공의 백 개 연대는 주덕(朱德)과 팽덕회(彭德懷)의 지휘 아래 있었으나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싸워 일본을 대파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것도 중공군이 우리 남로군의 지리산 지구 싸움을 전해 듣고 규모를 키워 활용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말로 속 시원한 승리는 우리 북로군이 수행한 ‘청천강 전투’ 에서 있었다. 아마도 25년 전쟁사 전체를 통해 가장 눈부신 것이 될 그 전투의 경과는 대강 이러했다.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우리 북로군은 남로군과는 처음부터 다른 작전을 구상했다. 곧 남로군이 주력을 백 개의 독립된 소(小) 전투단으로 분산시켜 전형적인 유격전을 펼치기로 한 데 반해, 북로군은 오히려 역량을 한 군
데로 결집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적의 토벌작진을 단념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은 비슷하다 쳐도 화력과 장비에서 적에게 터무니없이 열세인 우리 북로군이라, 그들 역시도 들판에서의 대규모적인 정규전을 벌일 처지는 못되었다. 무언가 적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이점을 활용해야 했는데 그게 그리 흔하지 가 않았다.
“우리에게는 적에게 없는 강력한 협조 세력이 있소. 이 부근에 정착한 우리 비전투 요원만 무장시켜도 오만의 민병대는 얻을 수 있소. 그들을 동원해 머릿수로 밀어붙입시다.”
“그렇지 않소. 아직은 그들을 동원할 때가 아니오. 마지막 섬멸전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우리 비전투 요원들이 적의 경계를 사서는 아니되오. 섣불리 그들을 끌어냈다가는 전국적으로 적의 잔인한 보복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우리의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꼴이 되고 말 거요. 그보다는 이번에도 저 청산리 때처럼 지리를 이용합시다.”
“이 곳은 우리 땅이라는 데서 청산리와 다르오. 적은 그때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지리(地理)를 이용하는 걸 경계할 것이오. 차라리 우리도 남로군이 그러듯 참새떼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진법을 쓰는 게 나을 것이오.”
그렇게 시작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옛일에 밝은 이 하나가 한탄처럼 불쑥 한 마디 했다.
“저기 흐르는 저 청천강은 옛적의 살수(薩水), 을지문덕 장군처럼 저 물로 적을 쓸어버릴 수는 없을는지…….”
그러자 누군가가 빈정거리며 받았다.
“옛날의 싸움법 중에서 화공(火攻) 이나 땅굴은 아직도 더러 쓰인다고 들었소만, 물로 적을 어찌했다는 소리는 못 들은 지 오래요. 또, 물을 모으려 한다 한들 이 같은 가을날에 무슨 물이 있으며, 물이 있다 한들 누가 강물을 막는단 말이오? 어디 그뿐이오? 물이 넉넉한 강을 막았다 한들. 적이 뭣 때문에 강변에 몰려 떠내려가기를 기다리겠소?”
그 말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옛일을 말한 이는 얼굴이 벌개져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날에 이르도록 크고 작은 싸움에서 그 빼어난 슬기와 꾀로 우리에게 려러 번 승리를 안겨 준 이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소 청천강이오. 우리가 의지할 것은 바로 이 강물이오!”
“아니.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아직도 조금 선의 웃음을 다 지우지 못한 우리 중의 하나가 알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가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진심이오. 그 까닭은 바로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오. 첫째는 요즈음은 아무도 싸움에 물을 쓰지 않고. 둘째로 지금 때는 가을이라 물을 쓰려 해도 많지 않으며, 셋째로 누구도 짧은 동안에 강물을 막았다 터놓을 수 없다면 아무도 싸움에서 물 걱정을 않을 것이오. 바로 그 점을 노리면 적을 몽땅 물로 쓸어버릴 수 없다 하더라도 큰 싸움을 우리에 게 유리하게 돌릴 수는 있소!”
그가 그렇게 나오자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폴리지 않는 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불가능해 뵈는 것은 어찌 해결하시겠소?”
“첫째는, 그 점이 오히려 적을 물가에 끌어내기 좋은 점이 될 수도 있소. 더군다나 요즈음의 중요한 병기는 평지에서 쓰기 좋게 되어 있어 강변은 흔히 주둔지로 쓰이지 않소? 두 번째 것도 정말로 안 될 일은 아니오. 물은 비록 실개울이라도 한 시간만 막아 두면 집채를 떠내려 보낼 수 있소. 가을물이 적다지만, 웬만한 내라도 사나흘만 물을 가둘 수 있으면 아래쪽에 한 차례의 홍수는 흘려보낼 수 있을 거요. 그리고 세 번째, 강을 막는 일은 앞서 어느 분이 말한 우리의 비전투 요원을 동원하면 되지 않소? 인근 사람들에게 가마니 열 장씩만 가져오게 해도 몇 십 만 장은 금세 모일 것이오. 거기에다 흙모래를 채워 강폭이 좁고 양쪽으로 언덕이 내민 곳을 골라 막으면 한 며칠 물을 가두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외다. 그런 다음 주력이 그 하류 물가에 있는 알맞은 고지에 집결해 있으면…….”
그가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 나가자 더는 맞서는 사람이 없어졌다. 결국은 우연찮은 말 한 마디가 그 빛나는 승리를 낚아 올린 작전의 골격이 된 셈이었다.
한번 그 골격이 결정되자 더 많은 그 쪽에 밝은 이들이 거들어 작전의 세부적인 지침까지도 이내 마련이 되었다. 강물을 막을 곳과 적의 대병력을 유인할 곳이 결정되고, 비전투 요원의 동원도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의 완편(完偏) 오 개 사단과 일 개 혼성 여단이 이 개 군(軍)으로 나누어 영변과 순천 두 방면으로 밀고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 북로군이 그 싸움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던 그 해 시월 중순이었다. 지리산 지구보다 출동이 한 열흘 늦어진 셈인데 소문으로는 그게 병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나 그 정확한 까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순천, 안주, 영변 등의 수복 지구에 나가 있던 우리 전사들은 이렇다할 저항 없이 그 곳을 포기하고 청천강을 따라 천천히 철수했다. 묘향산 북쪽 미리 골라 둔 청천강 기슭에 포진하고 있는 본영으로 집결함과 아울러 아직은 초반의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적을 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수복 지구 희천(熙川)의 한 강기슭에서는 흙모래를 담은 가마니와 그 상류에서 떠내려보낸 통나무로 둑쌓기가 한창이었다.
처음 며칠 일본군의 추격은 신증하기 그지없었다. 우리의 포기가 너무 쉽고 철수가 너무 재빨라 의심을 산 탓도 있었지만, 그 지휘관들이 남로군을 토벌하러 갔던 자들보다 신중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순천, 안주, 개천에 이어 영변까지 내놓자 그들에게도 본성 과 같은 경박과 오만이 되살아났다. 사단끼리의 경쟁이 벌어지면서, 포병·공병에 치중 부대까지 갖취야 진군을 하곤 하던 조심성이 사라져 경보병만의 추격이 시작되었고, 삼사십 리나 앞서 보내던 척후와 수색활동에 게을러졌다. 공명심에 들떠 우리의 섬멸을 호언하는 자들이 늘어 가는 것도 그들의 경계가 풀려 가는 증거였다.
그 모든 변화가 우리의 바람대로이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도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일본군의 추격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의 수공(水攻) 준비에 차질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아무리 상류라 해도 명색 강물을 끊어 물을 가두는 일이 그리 쉬울 까닭이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리고 빼돌릴 수 있는 인력은 모두 모여 북쪽 가을의 찬 강물을 싫다 않고 둑쌓기에 들어갔지만 적이 이르기 진에 필요한 만큼의 물이 가둬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벌이게 된 게 어룡(魚龍)이란 작은 포구에서의 전투였다. 후방으로부터 적의 진격을 하루만 더 늦춰 달라는 요청에 따라 우리 전사들은 그 곳에서 소규모의 복격전(伏擊戰)을 계획 했다. 스스로 선봉을 자임하고 앞장서 추격해 오는 적 우끼다 병단(兵團)의 한 기병 중대가 그 희생물이었다.
일 주일이나 이렇다할 저항을 받음 없이 진군해 온 그 증대가 어룡마을에서 방만한 야영을 하고 있는 걸 우리는 오백 명의 전투단으로 야습해 전멸시켰다. 그 싸움에서도 그림 같은 광경은 더러 있었지만, 이틀 뒤에 있을 청천강의 대회전을 위해 감동을 아껴 두자.
은근히 선두 다툼까지 벌이던 적은 그 뜻밖의 일격에 주춤했다. 비로소 조선 주둔군의 보고가 허풍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신중한 진격으로 전환했다. 이튿날 새벽 어룡마을에 이른 우끼다 병단은 그때까지의 무턱 댄 진군을 그만두고, 강 북쪽의 저희 107사단이 오기를 기다려 천천히 밀고 올라왔다.
우리의 주력이 포진하고 있던 곳은 묘향산(山名이 아닌 청천강가의 地名) 북쪽 십 리쯤 되는 곳에 있는 장군봉이란 고지였다. 좌우로 두 개의 무명고지를 거느리고 청천강 상류로 돌출해 있는 고지인데, 강물의 수량(水量)이 많을 때는 그대로 천험의 요새라 할만했다. 그러나 때는 가을이라 가뜩이나 줄어 있던 강줄기가 다시 그 삼십 리 위쪽에서 우리의 비전투원들에 의해 막히니, 고지 아래는 그대로 넓은 평지나 다름없었다.
강 남안(南岸)을 따라 진군해 오던 우끼다 병단이 장군봉 앞에 이르렀을 때는 그해 시월 십구일 오전 열 시경이었다. 우리는 적의 척후대를 통과시키고 본대가 오기를 기다려 고지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섬멸을 목표한 것이 아니라 적의 후속 부대가 합류할 때까지 발을 묶어 두려함이었다.
보기(步騎) 혼성 부대였던 적은 우리의 예상대로 놀라 고지 발치에서 물러났다. 산기슭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넓은 강변에 병력을 산개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우리의 사거리(射距離)는 벗어났지만 엄폐물 하나 변변한 게 없는 강변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우끼다 병단은 잠시 동요가 있었으나 때마침 강 북안(北岸)에 이른 적 107사단이 그걸 가라앉혔다. 이미 물이 줄어 실개천이 되어 있는 강을 건너자 절로 한 덩이가 된 우끼다 병단과 107사단은 그 기세로 장군봉의 전면을 공격해 왔다.
장군봉에 포진한 우리 주력도 병력으로는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장악 아래 있는 그 좌우의 무명고지에서도 화력을 보태니 아무리 적이 정예라 해도 마구잡이 고지 탈환전으로 얻을 게 없었다. 두 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은 다시 원래의 진지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이번은 소소한 빨치산 부대 같지는 않소. 이찌끼 중장이 말한 적군의 주력이 저 고지에 포진한 게 틀림 없소. 병력도 우리에게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력도 상당하오. 거기다가 유리한 지형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돌격전은 애꽃은 보병만 희생할 뿐이오.”
피해만 입고 후퇴한 뒤 변명 삼아 이렇게 의견을 맞춘 우끼다 병단의 사령관과 107사단장은 이어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지형상의 유리함을 자기들의 우세한 화력으로 압도하자는 결정을 보았다. 그들은 아직 몇 리 후방에 있던 예하 포병대를 급히 불러 장군봉 아래의 강변에 포를 방열시키고 장군봉을 향해 포격을 퍼붓게 했다. 병단 포병대와 사단 포사령부의 팔십 문(門)에 가까운 중포(重砲)가 불을 뿜는 데다 크고 작은 보병의 박격포까지 보태지자 그 위력은 대단했다. 우리로서는 개전 후 처음으로 맛보는 본격적인 화력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그 고지에 자리잡아 참호와 교통호를 깊게 판 우리들이라, 그 포격이 위력 있다 해도 위협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한 시간의 포격 뒤에 시도된 적의 두 번째 파상 공격도 그리 힘들지 않고 물리칠 수 있었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실패하자 적은 정말로 심각해졌다. 실패 그 자체보다는 우리에게 그만한 전력이 있다는 게 충격을 준 듯했다. 그 한 근거가 적 107사단장이 선임 사단장이자 방면군 부사령관으로 내정되어 있는 마다하찌 중장에게 날린 전문이다.
“십구 일 열한 시 적 주력 포착. 한 시 현재 우끼다 병단과 합류해 고지에 포진해 있는 적과 접촉중. 2차에 걸쳐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적의 저항은 예상보다도 완강함. 적이 현재의 전력을 유지한 채 묘항 산맥 깊숙이 잠적해 버리면 제국의 우환이 될 것이므로 각하의 결단이 요망됨.”
그런 문면에는 우리를 경시하는 구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적 선임 사단장도 정규의 대규모 작전에 임하는 태도로 답신을 보내고 있다.
“무리한 공격을 멈추고 접촉만 유지할 것. 우군 114, 115사단을 적이 포진한 고지와 묘향 산맥 사이의 개활지로 진출해 적의 퇴로를 끊고, 121사단은 적 측면 무명 고지를 제압할 것임. 적 주력의 전면은 본 사단이 그 지역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는 이십 일 새벽 네 시 이후 공격할 예정. 잠정 H아워는 아침 여섯 시로 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출 것.”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그 작전이 우리의 예상 안에 있는 것이란 점이었다. 그런데도 적은 거기까지는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들의 작전 명령에만 충실했다. 그날 밤 우끼다 병단과 107사단에 의해 밤새도록 계속된 포격과 간헐적인 양동(陽動) 공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음날 노획한 적의 문서에서 앞서 말한 전문들을 발견할 때까지는 그들의 작전 개요를 몰랐으나, 우리는 우리 대로 사전에 수립된 작전을 차질 없이 수행해 나갔다. 우리의 공격 시간은 이십 일 새벽 세 시 그때 우리 주력의 양동 작전이 시작됨과 아울러 상류 삼십 리 지점에서 강물을 가두고 있는 둑이 폭파된다. 우리가 계산한 유속(流速)으로 홍수가 적 주둔지를 휩쓰는 것은 약 삼십 분 뒤, 우리의 주력은 새벽 네 시를 기해 홍수가 휩쓸고 간 전면의 적을 공격 분쇄하고, 좌우 무명 고지의 전사들은 있을지 모르는 적의 지원 부대에 대비한다. 전면의 적을 격파 또는 섬멸한 뒤의 우리 행선지는 적유령(狄踰嶺) ― 대개 그런 순서였다. 우리가 묘향 산맥의 본영으로 귀환하는 대신 적유령 산맥으로 들 계획을 세운 것은 바로 적 114, 115사단이 펼치고 있는 것 같은 차단 작전을 예상해서였다.
적의 포격과 양동 작전으로 밤이 깊어 어느덧 새벽 세 시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 화력을 한꺼번에 구사한 양동 작전에 들어갔다. 비록 소총과 자동화기뿐이었지만 수만의 총구가 한꺼번에 불을 뿜어 대자, 그 엄청난 소리에 삼십 리 상류에서 둑을 무너뜨리는 폭발음은 간단히 묻혀 버렸다.
긴장한 적도 그 어느 때보다 거센 화력으로 응사해 왔다. 그렇게 어둠 속의 사격전이 한 이십 분쯤 계속됐을까. 갑자기 전면의 적 진지가 알아보게 술렁 거렸다. 헝겊으로 가린 전조등을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며 차량 행렬이 적 진지로 들어서는 걸로 보아 증원군이 도착한 듯했다. 바로 적의 선임 125사단이 서둘고 서둔 끝에 예정보다 사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비록 어둠 속이지만, 증원군의 도착으로 오른 적의 사기는 고지 위의 우리에게도 느껴져 왔다. 포들이 전진 배치가 되는 게 금세라도 전면 공격으로 나올 듯했다. 하지만, 오래는 못 갈 적의 사기였다.
갑자기 적의 응사가 뚝 끊어지며 우리의 발 아래서 전과는 다른 음향이 들려 왔다. 사격을 멈추니 쏴아 하는 물소리와 사람의 다급한 비명 소리가 어두운 강변을 메우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아도, 강변에 방열했던 대포와 차량, 치중들이 역시 그 곳에 야영하던 병력과 함께 물에 휩쓸려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안 돼 물소리는 차츰 잦아지고 이번에는 잔여 병력을 모으는 외침과 호각 소리가 요란했다. 물이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고 갔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의 기척은 드러날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그때를 기다려 눈사태 같은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강 남안(南岸)에서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강 북안(北岸)에서는 처음 한동안 제법 거센 응사가 있었으나 그것도 우리의 주력이 강을 건넜을 때는 끝나 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물이 덮치기 바로 전에 도착한 적 125사단의 병력이었다. 포병만 전진 배치하고 전열을 정비하다가 그 지경을 당하자 제대로 저항해 보지도 않고 퇴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싸움에 관한 일본의 공식 기록이다.
“소화 16년 10월 북지(北支)로 가던 아(我) 107, 114, 115, 125, 129사단과 우끼다 병단은 조선을 경유, 묘향 산맥을 근거로 활동 중이던 토비(土匪)들을 소탕하다. 작전시간 십이 일, 연병력 육만을 투입하여 적을 소탕한 결과, 적 점령지 오 개 군(郡)을 탈환하고, 다수의 포로와 무기를 노획하다. 그 작전에서 아군은 가을 장마로 인한 산사태. 홍수 등에 야포 삼 문과 차량 십여 대를 유실했으며 약간 명의 인명 피해도 있었다. 작전 종료일인 십구 일 잔비(殘匪)들은 묘향 산맥의 근거지를 버리고 적유령 산맥으로 도주하다. 아군은 제2차 작전으로 끝까지 잔비를 추적 소탕하려 했으나 대본영의 명에 따라 북지(北支)로 출전한다…….”
아무리 전사(戰史)라는 게 보는 눈 따라 다른 법이지만 해도 너무한 기록이다. 우리의 수공(水攻)을 가을장마로 돌린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쳐도 야포 삼 문, 차량 십여 대 유실에 약간 명 피해라니.
하기야 그날 물에 휩쓸려간 백여 문의 야포와 이백여 대의 차량 대부분은 며칠 뒤 하류의 강바닥에서 건져내긴 했다. 그러나 맹세코 그것은 그만한 수의 고철 덩어리로서였지 야포나 차량으로서는 아니었다.
약간 명의 인명 피해도 그렇다. 그것들의 산술이 원래가 저희 편 죽은 건 머리수를 헤지 않지만 육천 명이 넘는 병단(兵團) 하나가 날아간 게 어찌 약간 명 피해인가. 우리의 주장이 정히 못 미덥거든 1939년 12 월의 북지방면군(北支方面軍) 증원 부대 명단을 보라. 앞서의 다섯 개 사단은 있어도 우끼다 병단은 없다. 청천강 전투 후 다시 사단 편성을 하면서 모자라는 머릿수를 채우다가 보니 우끼다 병단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눈부신 승리에도 적유령 산맥 깊숙이 숨어든 우리 북로군은 거기서 다시 몇 달 은인자중의 세월을 보냈다. 남로군이 눈덮인 지리산에서 조용히 숨어 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되도록 우리의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음으로써 적이 승리를 가장하고 북지를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바란 대로 일본의 증원군 십 개 사단은 그 해를 넘기기도 진에 북지로 투입 되었다. 우리의 활동이 멈추어져 앞서의 거짓 보고가 저희 대본영에 먹혀든 데다, 중국에서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덕분이었다.
답답하게 된 것은 삼 개 사단과 십이 개 헌병 대대만으로 우리를 막아야 하는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찌끼 중장뿐이었다. 이찌끼는 같은 증거를 대 그 십 개 사단이 당한 사실상의 패전을 대본영에 알리고 조선에서의 상존하는 위험성을 일깨웠으나, 대본영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었다. 거기다가 우리 남북양로군까지 한동안 동면 상태로 들어가니, 이찌끼로서는 대본영으로 달려가 할복하기 전에는 우리의 위협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여름부터였다 그해 유월 녹음 짙은 계절이 시작되면서 작전을 개시한 남북양로군은 각기 열흘도 안 돼 이전의 수복 지구를 되찾았다.
우리에게서 쫓겨간 헌병 분견대와 경찰 주재소의 보고를 받은 이찌끼는 펄펄 뛰었다. 이번에는 긴급 전문도 젖혀 놓고 직통 전화를 들어 ‘대본영의 돌대가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관동군을 끈 떨어진 조롱박 신세로 만들 작정인가, 조선을 잃고 지나를 어찌해 보겠다는 것은 칼도 안 들고 간 내 먹겠다는 수작 아닌가고.
대본영도 그때는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아직 조선보다는 중국 대륙에 더 열중해 있었다. 이미 반이나 삼킨 그 기름진 땅덩이에 비해 이 땅은 너무 좁고 척박해 보였다. 그게 투자 우선 순위를 바꾸어 수렁 같은 중국에는 그 한 해만도 열 개가 넘는 사단을 쏟아넣으면서 이찌끼에게는 겨우 애숭이들로 급편성된 후방 사단 셋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귀관은 점령이 완료된 지역의 주둔군 사령관으로서 현지 조달의 원리도 모르는가. 병원(兵員)이 필요하면 징집하고, 물자가 모자라면 징발하라. 조선의 위수(衛戍)에 더 이상의 전투 력을 묶어 둘 수는 없다.”
그런 은근한 힐난과 함께였다.
대본영의 그 같은 결정에 이찌끼는 한숨부터 나왔다. 우리의 전력(戰力)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의 계산으로는 새로운 육 개 사단을 합쳐 봐야 자기들을 지키기도 바빴다.
하지만, 이찌끼는 군인으로서는 훌륭했다. 한번 그런 결정이 나자 그는 대본영에 대한 불평과 험구로 세월을 낭비하는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되도록 방어선을 줄여 현상을 유지하면서 대본영이 그토록 중점을 두고 있는 지나 작전이 성공리에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 결심에 따라 이찌끼는 우리에 대한 공세를 단념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점령 상태의 유지가 불가능한 관북 일대와 소백산맥 이동(以東) 지역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다. 싸움도 않고 우리의 수복 지구를 늘려 준 셈이었으나 실은 가장 현병하게 시간을 버는 길이기도 했다. 저희 우군이 지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의.
그로부터 이 년 가까운 소강상태는 바로 그런 이찌끼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우리는 갑자기 몇 배나 늘어난 수복 지구의 관리와 방어에 힘이 분산된 대신 이찌끼는 절반으로 줄어든 점령 지역을 집중된 힘으로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과 기호 지방이 완벽하게 그에게 장악되어 있는 한 이 땅은 아직 그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편이 옳았다.
물론 우리가 모든 역량을 집중해 밀고 든다면 승산은 틀림없이 우리 편에 있었다. 화력이 우수하고 훈련이 잘 되었다 해도 이찌끼가 거느린 병력은 십 만을 채우지 못했고, 증원군도 중일 전쟁이 계속되는 한 크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게 그들의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전면적인 수복전으로 들어가기에는 우리에게도 아직은 망설임이 있었다. 첫째로 께름칙한 것은 중국만으로는 탕진될 것 같지 않는 일본의 잠재력이었고. 둘째는 마침내 중국을 포기한 일본이 사생결단 우리를 향해서만 덤벼 오는 경우였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중얼거림으로 문득 문득 앞뒤 없이 끓어오르는 우리의 피를 달랬다. 머지않아 때가 이를 것 같은 느낌도 우리의 무분별한 복수의 유혹을 달래는 데 큰 힘이 됐다.
엉거주춤한 대치 상태에서도 세월은 쉬임없이 흘러 서력으로 1930년대가 끝나고 4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해 십이 월, 마침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다. 중일 전쟁의 장기화와 구미(歐美) 열강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일본이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일본의 초장 끗발은 대단했다. 진주만부터 묵사발을 만들고 시작한 일본은 뒤이어 태평양으로 태평양으로 신나게 밀고 나갔다. 일본과의 결전을 재촉해 오던 우리의 주전파들마저 가슴이 서늘할 정도의 무서운 잠재력이요, 눈이 아릴 정도로 빛나는 승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헤아림 밝고, 사려 깊은 이들은 그게 바로 꺼져 가는 촛불이 마지막으로 한 번 피워 올리는 불꽃임을 알아보았다. 대중화(大中華)·소중화(小中華)를 피바다로 만든 이 살성(殺星)이 이제 제 피를 뒤집어쓰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 댈 날도 멀지 않았구나 ㅡ 나이 든 이들 중에는 그렇게 잘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판단 위에서 남북양로군의 총공세는 시작되 었다.
먼저 공세로 나아간 것은 그때 이미 청천강 이북을 사실상 수복해 있던 북로군이었다.
25년 전쟁 개전 이십이 년차가 되는 1942년 1월 중순 우리 북로군은 본영을 적유령 산맥에서 순천으로 옮기고 총공세에 들어갔다. 육만 병력을 전부 투입해 얼어붙은 청천강을 건널 때만 해도 서울 수복은 며칠 남지 않는 일로 보
였다.
북로군에 호응해 남로군도 그해 정월에는 본영을 지리산에서 평야 지대로 옮기고 공세로 나왔다. 칠만 병력이 일제히 북상을 시작하자 사흘도 안돼 호남의 곡창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앞서 말했듯 조선군 사령관 이찌끼는 적이지만 군인으로서는 훌륭했다. 그는 우리의 공세가 시작되자마자 동경의 대본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이미 오래 전에 세워둔 방어 전략을 실천에 옮겼다. 대동강과 금강을 방어선으로 하여 저희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는 게 그 골자가 되는 전략이었다.
이번에는 일본의 대본영도 신속히 대응했다. 일본은 이찌끼의 급전이 날아든 지 닷새만에 인천에다 사 개 사단을 부려 놓았다. 태평양에서 써먹으려고 길 러 온 사단을 아낌없이 투입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우리의 북로군이 아직 대동강이 얼어 있는 때 건너 두지 않은 것은 작전상의 과오로 지적될 수도 있겠다. 그 이북 지역을 미련 없이 포기한 일본군이 대동강을 방어선 삼아 갑작스게 표독을 부리는 바람에 며칠 엉거주춤한 사이 적의 증원된 이 개 사단이 다시 방어에 가담해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봄을 맞게 된 것이었다.
남로군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 실수를 했다. 후방 강화니 뭐니 해서 수복 지구의 확대에 힘을 분산할 게 아니라 적의 증원군이 이르기 전에 금강부터 건너 두고 봤어야 했다. 그런데 목포나 군산 같은 해안 도시까지 병력을 쪼개 보내는 바람에 적의 증원군이 먼저 금강 방어선에 투입 된 것이었다.
통상으로 공격군의 병력은 방어군보다 두 배는 많아야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비슷한 병력에 화력은 오히려 우세한 적이 대동강이나 금강 같은 자연의 방어선을 끼고 버티니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기세 좋던 공세는 일 주일을 넘기지 못한 채 남북으로 두 강을 낀 지루한 공방전으로 바뀌고 말았다.
거기다가 우리의 수복전을 더욱 지루하고 힘들게 만든 것은 이찌끼의 현명 한 판단과 그에 따른 전략의 구사였다.
“우선은 증파하는 이 사 개 사단으로 조선의 점령 상태를 유지하라, 인도지나와 필리핀 평정이 끝나는 대로 원군을 늘리겠다. 미국이 항복하거나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가 이루어지면 그때는 조선 전토를 황군(皇軍)으로 덮어 그들 대동아 공영(共榮)의 이상에 거역하는 무리를 섬멸할 것이다.”
증원군을 보낼 때 대본영은 그렇게 호기로운 언질을 보탰으나, 이찌끼는 싸움터에서 반평생을 보낸 군인다운 감각으로 그 증원군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당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가망 없는 공세로 병력을 헛되이 낭비하는 짓은 않았다.
“불침 전함(不沈戰艦)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물에 떠 있는 것은 언젠가는 가라앉기 마련.”
일본이 야마도(大和)니 무사시(武藏)니 하는 거함을 만들어 불침 전함이라고 자랑하자 그렇게 내뱉었다는 야마모도 아소로꾸(山本五六) 사령장관에 견줄 만한 이찌끼의 감각이었다.
강을 끼고 한 달 정도의 소득 없는 공방전을 치른 뒤에야 이찌끼의 속셈을 알아차린 우리의 남북양로군도 전략을 바꾸었다. 기다리는 일이라면 이미 삼십 이 년이나 잘해온 우리가 아닌가. 공연한 서두름으로 전력을 낭비하는 대신 우리도 그 교착 상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충청, 경기, 황해, 삼 도(道)를 빼고는 거의 수복된 땅을 근거로 생산을 격려하고 병력을 기르며 새로운 전기(轉機)가 오기를 기다렸다.
새로운 전기는 미처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다가왔다. 그해 여름을 고비로 일본의 초장 끗발은 내려앉아, 미드웨이에서는 그 함대가 미국에게 박살나고, 중국에서도 국공(國共) 연합으로 좋던 세월은 끝나 버렸다. 태평양도 중국 대륙도――一 한창 잘 나갈 때는 화수분처럼 보였건만ㅡ一 밑 없는 독이 되어 저희 젊은이와 물자를 삼켜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해 말 다시 강물이 얼어붙기를 기다려 우리 남북양로군은 제2차 공세에 들어갔다. 그 새 양로군은 모두 전투 병력만도 십만이 넘게 불어 있었다. 거기다가 태평양과 중국에서의 전황으로 미루어 일본이 증원군을 보낼 여유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어상 더 기다려야 할 까닭도 없었다.
하지만, 바다 밖의 저희 우군이야 물고기 밥이 됐건 진뻘에 빠져 죽었건, 일본의 조선 주둔군은 흔들림이 없었다.
“경동(輕動)하지 말라. 조선 주둔군은 건재하다.”
언젠가 이찌끼는 점령 구역에 그런 요지의 포고문을 낸 적이 있는데, 조금도 허풍이 아니었다. 여름내 보루를 높이고 참호를 깊게 한 일본군은 우리의 공세에 완강히 저항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 교과서에 나오는 ‘육탄(肉彈) 십이용사’ 나 ‘장렬 십칠 영령(英靈)’ 같은 얘기는 바로 그때 빚어진 애화(哀話)들이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육탄 십이용사’ 는 금강 도하전(渡河戰) 때 우리 젊은이 열둘이 포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의 포대를 날리고 길을 연 것이며, 장렬 십칠 영령은 적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진 대동강을 헤엄쳐 건넌 우리 전사(戰士) 열일곱이 목숨을 던져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한 얘기다.
남로군이 금강을 건너 충청도로 밀고 들어간 것은 1943년 1월 말이었고, 북로군이 대동강을 건너 황해도로 밀고 든 것은 그 며칠 뒤인 2 월 초순이었다. 양쪽 다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른 도하전이었으나 그 효과는 뜻밖에도 적었다. 적이라도 거듭 칭찬할 수밖에 없는 이찌끼의 빈틈없는 헤아림 때문이었다.
우리가 수복 지구에서 식산을 장려하고 병력을 늘릴 때 이찌끼도 가만히 손 처매 놓고 있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점령 지역의 주민들과 우리의 공격 중지로 여유가 생긴 군인들을 빼내 제2, 제3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즈음 우리 군(軍)도 유사시 방어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형을 골라 참호를 파고 보루와 포대를 촘촘히 설치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북쪽 제2방어선은 해주와 신막을 잇는 선으로서 주로 멸악산맥의 혐준한 지형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3방어선은 개풍군 남단과 연천을 잇는 선인데, 이번에는 임진강을 따라 설정돼 있었다. 남쪽의 제2방어선은 청양, 조치원, 충주 선이었고, 제3방어선은 평택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남북양로군이 그 같은 제2, 제3 방어선을 뚫고 서울로 들어설 때까지의 수없는 싸움들을 여기서 일일이 다 얘기하는 것은 피하자. 스스로 목숨을 내던져 겨레의 터전을 되찾은 이들의 얘기는 아무리 거듭해도 죄될 거야 없겠지만, 어떤 싸움은 그 하나만 얘기해도 사흘 밤이 모자란다. 거기다가 그 대부분은 이미 자랑스런 역사의 일부가 되어 알고 있는 이도 많으니, 그 부분에 대해 특히 자세하게 알고 싶은 이들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낸 《25년 전쟁사》 제십이 권부터 삼십일 권까지 읽으면 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가 죽었고, 적은 얼마가 죽었으며, 무엇이 얼마나 소비되었고, 무엇을 얼마나 노획 했다는 따위 알쏭달쏭한 숫자놀음도 그만두자. 그런 거야 보기 따라 헤아리기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지 않는가.
그렇지만 한 가지 ㅡ 거기서 우리가 흘린 피는 살펴봐야겠다. 이왕에도 우리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 세 번의 방어선을 뚫는 데 흘린 피만으로 이 땅 삼천리를 한 치 빠짐없이 적실만 했다. 곧 우리는 이 땅을 한 치 한 치 우리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셈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땅을 한 치 한 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은 싸움은 남북양로군 모두 제3 방어선을 돌파한 뒤에 있었다. 일 년이 넘도록 버티느라 일본군은 대동강, 금강 방어선 때의 삼 분의 일로 줄어 있었지만 전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맹장 밑에 약졸(弱卒) 없다고, 이찌끼가 있어 그랬는데, 정말로 대화혼(大和魂)이란 게 있어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몰릴수록 더 악착같은 게 그들이었다. 거기다가 방어선의 길이가 줄어들수록 병력 의 밀도가 높아지니 공격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희생이 늘 수밖에 없었다.
다시 피투성이 공방전이 서울 근교를 경계로 두어 달 계속되었다. 비록 희생은 커도 전력(戰力)대로라면 우리는 늦어도 1944년 말에는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일본군이 내놓은 뜻밖의 카드가 다시 전선을 지루한 교착 상태로 몰아넣었다.
북로군의 대부대가 북한산을 좌우로 돌아 구파발과 미아리 쪽을 압박하고 남로군의 전위부대가 한강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강만 얼어붙으면 남북양로군이 일시에 서울을 탈환하려고 기다리는데 일본군 사자가 우리의 총본영 ― 그 때는 이미 남북양로군의 지휘 체계가 합쳐진 뒤였다 ― 에 이찌끼의 친서를 전했다.
“우리 황군(皇軍)은 천황 폐하의 별도 어명이 없는 한 전원 옥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본 사령관은 삼만 장병의 꽃다운 목숨을 가긍히 여겨 천황 폐하께 항복의 재가를 요청하였다. 조선군 총본영도 이에 부응하여 오늘 이후 일 체의 공격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현재 우리 조선 주둔군의 장악 아래 있는 귀국 민간인 백만과 고궁(古宮) 기타 문화 유적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남경 (南京)을 기억 하라. 그리고 사이판
을 기억 하라.”
이찌끼가 보낸 친서의 내용은 그랬다. 우리로서는 실로 뜻밖의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더군다나 말미에 상기시킨 남경과 사이판은 우리의 공격을 중지시키기에 충분한 예(例)가 되었다. 승승장구해 내려가는 길에, 그것도 장개석이 그냥 내주는 바람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 남경에서, 아무런 저항 없는 민간인을 수십만이나 학살한 그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그 무렵은 사이판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 곳곳에서 들리느니 ‘전원 옥쇄’ 라는 그들 특유의 집단 자살 소식이었다. 조선 주둔군 또한 그들과 씨가 같으니 막판으로 몰리면 옥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그때가 되어 악에 받치면 우리 비전투원 백만쯤 학살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얼마를 더 기다려도 그들이 곱게 항복해 준다면, 그들을 섬멸하려 들 때 치러야 할 우리의 엄청난 희생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해봄직한 거
래였다.
“석 달을 주겠다. 그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꽤 강경한 답신을 보냈으나, 그 석 달이 지난 뒤에도 섬멸전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어떤 명분이 동포 백만의 피와 갈음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물이 마르면 가제는 기어나오는 법, 그 무렵 들어 미군 공습에 매일 불바다가 되는 저희 본국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우리를 느긋이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성급한 이들이 그 사이에도 여러 번 섬멸전을 주장했으나, 우리는 그래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 드디어 감격의 그 날, 팔 월 십오 일이 왔다. 오래 전부터 예견돼 왔으나 막상 듣게 되자 역시 갑작스러운 히로히도의 항복 방송이 있고 삼십 분도 안 돼 이찌끼의 사자가 항복 문서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 조선 주둔군의 항복을 통고함. 전 병력은 용산에 있는 사령부에서 귀국의 무장 해제를 기다리겠음.”
이제는 갑작스럽다 못해 허망하게까지 느껴지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울 입성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감격은 실감 있게 되살아났다. 그날 우리는 실로 삼십육 년 만에 이룩한 국토 수복의 감격 속에 온전히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울고 웃었다.
조선 주둔군 사령관 이찌끼는 끝까지 제국의 장군답게 삶을 마쳤다. 우리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러 용산의 그들 사령부로 갔을 때 그는 이미 자결한 뒤였다. 사령부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와 군기(軍旗)를 불태우고, 멀리 저희 임금을 향해 절한 뒤 일평생 아끼던 군도로 스스로의 배를 가른 것이었다. 가이샤큐(할복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칼로 목을 쳐주는 것)를 맡았던 그의 부관 요시다 대위도 그를 따라 배를 갈라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지금도 우리 국립묘지에 가면 이찌끼 중장과 요시다 대위의 묘비가 있다.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에 대한 우리의 예우로 거기 들게 된 것인데, 듣기로 그들의 유골은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열린 그 이듬해 자손들에 의해 그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나 묘비는 그대로 남겨졌다 한다.
이렇게 우리의 25년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한 가지 ― 어쩌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그 일을 새삼 들먹여 지루하리만치 길게 얘기한 까닭을 밝혀야겠다. 특히 어찌 보면 당연히 그 일이 어떻게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 중의 하나가 됐는지도.
만약 그때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 이 땅을 한 지 한 치 피로 물들이며 되찾지 않았다면 그 뒤의 일은 상상만 해도 비참하다. 그리되면 누군가 힘 있는 나라들이 ― 아마도 미국과 소련이 되었겠지만 ― 일본을 이겨 줘야 우리는 일본에서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강대국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은 자신들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그들은 틀림없이 해방자를 자처했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해 왔을 것이다. 물건은 하나인데 빚쟁이가 둘이면 쪼개는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이 나라는 둘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눠진 둘은 새롭게 대치한 두 제국의 변경이 되고……. 정말이지, 가정(假定) 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25년 전쟁을 통해 잃은 땅을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음으로써 바로 그 비참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행복한 오늘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비를 그렇게 힘들었지만 멋지게 넘긴 것이었다. 겨레가 한 땅에서 하나로 사는 이 행복을 위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에겐 이미 덤덤해졌지만, 이데올로기로 요란하게 장식된 새로운 형태의 패권주의에 의해 겨레가 나뉘고 땅이 갈라진 나라들에게는 눈물 나게 부러운 이 행복을 위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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