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박병수
비의 행방 외
저녁은 비가 사는 집
비의 마음이 머무는 곳
세상도 젖어 있나 보려고
비가 밤새도록 돌아다녀
옷이 젖는다
비는 며칠 전에도
세상의 안부가 궁금해서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선 적이 있는데
길이 사라져 버린다면 비는
먼 타지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공중에 박힌 생선가시처럼
흔들리다가
다음 세상을 기다린 듯
저녁에 또 비가 온다
그때 저녁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를 다 먹어 치우고
나눠 먹은 양만큼
다시 구름이 모여들고
비는 사실 꼬리가 없어
걸어온 방향은 모르겠다
당신과 내가
비와 저녁이라고 해도
이것은 누구 때문인가
당신과 나는 우산이 없다
비 때문에 만나고
비 때문에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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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형 장미
왼손이 걱정하는 오른손의 칼처럼
해는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왠지 한 번 떠난 곳으로 꼭 다시 돌아올 것처럼 진다
눈이 내렸고 밤낮없이 강을 건넌 적도 산을 넘은 적도 있던 시절,
눈송이는 곁이 닳지 않고 바닥만 닳은 채로 굴러온다
부끄럽게도 나는 한해가 지난 뒤에도
내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감정을 다 불러내지 못하고, 깨진 들을 태워버린 화염 속의 나는 부레가 팽창해서 떠오른 심해어 같다
왼손으로 오른손에 온기를 전하는 짓이 지친 안구의 정화처럼 따뜻해서
이곳에서 기억을 갖고 가는 일은 고난을 모르는 나에게 고전적인 을야를 한단 두 단 묶어서 가져가는 일
그에 관한 어려움을 침대에 두고 창에 돌을 던지면 거의 귀에 닿을 듯 불러낸 이야기는 추워 죽고 타서 죽는다
쓸쓸히 녹아 없어진 꽃,
붉은 꽃 한 송이 붉은 꽃 천 송이를 떠올렸을 때 창밖에서도 몰락한 거리에서도 눈송이들 늙거나 병든 창부처럼 모여들고 그 순간 눈송이들 바닥 면은 물결 무늬
내가 세상을 지우고 싶은데 왜 눈이 오나
아주 먼 모든 길에 힘센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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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수|2009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사막을 건넌 나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