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7>땀비 적신 가야산 등산 끝, 고요한 바다 해인사에 '합장'
4.2km 3시간 '난코스' 절경 파노라마..8.2km 깨달음을 얻다
가야산 전경. 만물상의 기원바위 뒤로 칠불봉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거친 바위길 등산은 한마디로 빡쎄다 © 뉴스1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가야산(伽倻山)이라는 이름에 대해, 가야국에서 가장 빼어난 산이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고, 인도에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마을 이름(부다가야)을 따 왔다는 설이 있다. 여러 자료를 보니 가야국의 가야(가락/가리)는 불교의 가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처음에는 가야국을 상징하는 가야산으로 부르다가, 가야국이 망하고 해인사가 들어서면서 점차 불교적 의미의 가야산으로 불리지 않았나 추측한다.
산 꼭대기가 행정구역 경계일 때 '최고봉이 어디냐'고 다툼하는 사례가 있다. 가야산의 최고봉은 어디인가? 과거에는 경남 합천군 상왕봉(1430m)을 최고봉으로 쳤으나 국립지리원에서 측량한 결과, 경북 성주군 칠불봉(1433m)이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가야산의 정상은 칠불봉(七佛峰)이다. 그렇더라도 상왕봉(象王峰)은 천 년 이상 해인사와 가야산을 상징해 온 봉우리기 때문에 그 종교적·문화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가야산은 삼재(三災, 전쟁·가뭄·수해)가 들지 않는 명산이었지만, 산보다는 해인사와 홍류동계곡이 더 유명했다. 그러다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험준한 산악의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전시설을 갖추면서 등산 대상지로 면모를 갖췄다. 특히 갖가지 모양의 바위가 수놓은 만물상과 남산제일봉의 다이내믹한 풍경이 널리 알려지고, 홍류동계곡에 둘레길 개념의 소리길이 생기면서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가야산 등산은 해인사나 백운동계곡에서 상왕봉과 칠불봉에 올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8.2㎞)와 청량사에서 남산제일봉에 올라 해인사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4.9㎞)가 있고, 홍류동계곡을 산책하듯 걷는 소리길(6㎞)이 있다.
◇ 백운동–만물상-서성재 2.8㎞ "난코스, 심장안전쉼터서 쉬자"
등산로로 향하는 아스팔트 바닥에 만물상은 핑크색 '매우 어려움', 용기골은 파란색 '보통'으로 난이도를 써 놓았다. 두 길은 서성재에서 만난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만물상 탐방로는 "초입부터 경사가 가파르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7번 반복하는 난코스이므로 산행초보자는 용기골로 가는 게 좋다"고 권고한다. 따라서 원점회귀를 하는 사람은 용기골로 올라 만물상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하지만, 정상에 올라 해인사로 넘어가는 사람은 만물상 '난코스'로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가야산 최고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모든 물건이 다 있는' 잡화점을 만물상(萬物商)이라 하듯, 가야산 만물상(萬物相)에는 모든 형태의 바위가 다 있다. 이 코스를 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탐방 예약제(3월~12월, 340명)를 할 정도다.
만물상 전경. 온갖 바위의 조각품들이 전시된 바위백화점 내부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 뉴스1
만물상 코스는 입구부터 이곳 사투리로 '빡씨다.' 이런 긴 오르막에서는 '천천히 천천히'가 원칙이지만, 몸의 습관은 자꾸 '빨리빨리'를 따른다. 5분이나 지났을까, 체력을 초과하는 숨소리가 빨라지고 땀이 솟는다. 만물상까지 10분마다 한번씩 나오는 '심장안전쉼터'마다 사람들이 호흡과 땀과 옷을 정리하는 모습이다. 등산로를 비켜나 숨을 돌릴 수 있는 '포켓안전쉼터'도 간간이 나온다. 산악사고에서 부상은 골절이 가장 많고, 사망은 심장사가 가장 많다. 그러니 호흡이 거칠면 무조건 심장을 쉬게 해야 한다. 전망이 트이는 곳마다 뒤를 돌아다보고, 멋진 바위가 나올 때마다 요리조리 둘러보며 쉬는 것도 오르막 산행의 요령이다.
미끄러질 듯 말 듯,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흔들바위 © 뉴스1
드디어 암릉이 이어지며 갖가지 모양의 바위가 나타난다.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만물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야산에서는 만물상 위와 사이를 걷는다.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보는 흔들바위, 기도바위, 칼바위, 소나무바위 등등을 지난다. 바위마다 사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요즘 탐방객들은 뒤태와 옆태를 많이 찍는다. SNS에 올리기 위한 인증작품이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의 바위들은 공중에 솟는 불꽃과 같은 석화성(石火星)이다"라고 칭송했다. 그런 '불꽃 바위'들을 지나며, 배낭을 벗고 비집고 나가야 하는 바위틈을 지나, 가야산의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면서, 오르다 내리다 끝에 어느덧 만물상의 '마지막 불꽃' 상아덤을 바라본다.
상아덤은 상아(미녀)와 덤(바위)의 합성어로, 서너 개의 길쭉한 바위가 왕관 모양으로 하늘로 솟을 듯 서 있다. 가야산의 여신과 하늘의 신이 상아덤에서 부부의 연을 맺어 형제를 낳아, 그들이 각각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가야국의 건국신화가 탄생한 성지(聖地)다.
상아덤. 하늘로 솟을 듯한 불꽃 바위. 가야국의 건국신화가 비롯된 곳이다 © 뉴스1
◇ 서성재-칠불봉-상왕봉 1.4㎞ "지옥계단 올라 꿈 같은 전망"
상아덤 전망대서 지나온 만물상 풍경을 바라보고, 평탄한 길을 따라 서성재에 도착한다. 가야산성의 성터였던 이곳에서는 충분히 쉬며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칠불봉까지 만물상 코스에 버금가는 '지옥의 계단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야산성의 흔적 옆으로 난 완만한 오르막을 슬슬 가다가, 칠불봉을 800m쯤 남겨둔 지점부터 힘을 짜내야 한다. 급경사 철계단에 올라설 때마다 또 다른 계단이 나타나고, 바뀌는 계단마다 끝에 하늘만 보인다. 어떤 철계단은 경사가 거의 수직이라 난간을 꽉 붙잡고 올라 선다. 계단이 바뀔 때마다 뒤를 돌아다보면 고도를 높인 만큼의 장쾌한 뷰가 펼쳐져 위안으로 삼는다. 거친 암릉에서 도도한 자태로 폼 나게 서 있는 소나무들도 "천천히 가라"고 멋진 사진 배경이 돼 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 칠불봉 직전에, 아름다운 동양화 풍경 사이로 올라가는 철계단. 이 사진을 본 지인이 ‘지옥의 계단’ 아니냐고 물었다 © 뉴스1
정상의 시커먼 바위능선이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다가,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칠불봉에 도착한다. 4.2㎞를 3시간 걸려 올랐으니, 이렇게 어려운 코스는 국내에 몇 없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대로 여기서 바라보는 사방팔방의 조망은 광활하고 시원하다. 산 넘어 산, 산 옆에 산이다. 가야산의 옛 이름이 우두산(牛頭山)이었듯, 산 모습이 소가 엎드려 뼈들을 드러낸 자세다. 상왕봉을 거쳐온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여가 정상이네? 3미터 더 높다 아이가?"
칠불봉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부처가 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지리산에는 칠불사가 있는데, 가야산에서 공부하던 일곱 왕자가 지리산에 들어와 부처가 된 것을 기념해 창건된 절이다. 한편, 지리산에서 풍류를 즐기던 최치원이 불일폭포 밑 동굴을 통해 가야산에 들어와 신선이 됐다는 전설도 있다. 명산과 명산 사이에 가교가 있는 것일까. 그런 전설을 사실로 입증하려는 듯, 지리산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그 머나먼 가교를 넘어와 가야산에서 동면 중이다. 여기서 남쪽을 바라보니, 과연 여러 산줄기를 넘고 넘어 지리산 천왕봉이 아스라이 조망된다.
칠불봉(왼쪽)과 상왕봉. 3m 차이로 칠불봉이 더 높으나, 봉우리 모습은 상왕봉이 더 위용이 있다© 뉴스1
◇ 상왕봉-중봉-해인사 4km "고요의 바다 해인사에서 마음 정리"
칠불봉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상왕봉은 서운할 것이다. 뾰족한 칠불봉에 3m 차이로 최고봉을 내주어 서운하고, 한 가지 더 서운한 것은 정상석에 '伽倻山 牛頭峰(가야산 우두봉)'이라고 크게 쓰인 한 편에 '상왕봉'이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있다는 것이다. 공식 지명인 상왕봉을 대우해 주고, 요즘의 한글세대에 맞춰 정상석에도 한글 표기를 하는 게 좋겠다.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봉이라 불렀다는 평편한 암반을 걸어보고, 소의 코에 해당하는 곳에 물이 고였다는, 하얗게 언 우비정(牛鼻井)을 둘러본다. 고개를 드니, 산너울의 중간에 덕유산 능선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이제 하산이다. 정상 일원에 잔설이 얼고 찬 바람이 몰아쳤는데, 남쪽으로 내려오자마자 햇볕이 환하고 물기 마른 등산로에 먼지가 폴폴 인다. 세 개의 길쭉한 돌이 돌출된 구름다리 '포토존'을 지나, 약간의 급경사를 내려가서, 산죽이 이어지는 평탄한 숲길을 걷는다. 만물상 오르막에 비하면 에스컬레이터 길이다. 길이 편해서 그랬는지 잡념이 생길 즈음 해인사에 닿는다.
해인사는 우리나라의 대표 절이다. 해인사에 올 때마다 특별히 느끼는 것은 그 많은 절 건물에, 그 많은 스님과 손님들이 들락날락하면서도 무척 고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해인(海印)이란 이름 때문일 것이다. 고요한 바다란 뜻이다. 격랑의 바다로부터 온갖 번뇌를 물리친 깨달음의 상태로, 이 절은 언제나 고요하다. 따라서 나도 고요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과 경판전이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유명한 장면은 따로 있다. 어느 겨울날 새벽에, 어느 작은 전각에서 젊은 스님이 끊임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을 둘러보고 그 전각을 다시 스치게 되었는데, 계속 절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장삼이 땀으로 흥건했고, 스님 목과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정말 엄숙하고 결연한 장면이었다.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느티나무와 전나무의 거목이 도열한 풍경. 나무들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언제나 풍경이 다르다 © 뉴스1
일주문 바깥에 성철스님의 부도(浮屠, 사리를 안치한 묘)가 있다. 스님들에겐 호랑이라고 불렸지만, 국민에겐 누더기에 해맑은 표정을 한 황소 이미지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한 법어는 곧 "본질과 원칙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다. 나는 "자연처럼 살라!"는 말로 해석한다.
오늘 가야산 탐방로의 절반을 다녀왔다. 나머지 절반은 남산제일봉 바윗길과 홍류동계곡의 소리길이다. 파란 하늘과 초록 소나무와 하얀 바위가 어우러진 남산제일봉의 암릉, 단풍에 물들어 계곡물이 붉다는 홍류동계곡, 그리고 가야산에 어린 ‘풍운아’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서 다음을 기약한다.
stone1@news1.kr
Copyright ⓒ 뉴스1코리아 www.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