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구 한말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던 의병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우선, 1905년 을사조약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전국적으로 민간 의병이 궐기했고 그 분들을 '을사의병'이라 불렀습니다.
을사의병이 일어났을 당시는 대한제국 정부도 일제의 직접영향을 받았고 친일파들이
정부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의병을 반군으로 규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에 따라 대한제국군이 동포인 민간의병과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0...두 번째 의병이 바로 '정미의병' 입니다. 윗 사진은 맥킨지(Frederick McKenzie)가
찍은 것으로, 영국 '데일리 메일'(The Daily Mail) 일본특파원 으로 1904년경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양에 파견된 종군기자였습니다. 맥킨지는 한국의 지식인과
교분을 맺으면서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를 잘 알았으며 누구보다 분개한 '친조선 인사'가
됐다고 합니다.
맥킨지 특파원은 1908년, 취재기인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저술
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의 의병모습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위의 정미의병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는 "한국 의병들은 형편없이 녹쓸고 고장난 사제화승총으로 무장했고,
저런 화승총으로 어떻게 유효사거리 370m인 38식 보병라이플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설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0...사실 구 대한제국군의 개인무장은 화승총이 아니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가 나서서
서구에서 생산된 최신식 볼트액션 라이플을 수입하여 무장했고, 외국 군사교관을
초치하여 사격훈련도 제대로 받았습니다. 1907년 8월1일,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강제 해산시키자 대궐을 지키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이 자결했고
그 소식을 들은 부하들이 격분하여 일본군과 시가지 전투를 벌여 서로간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더 이상 조선의 군인신분을 유지할 수 없자 고향마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민간 의병을 규합,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간 의병들이 손에 쥘 총기라곤, 마을 대장장이가 두들겨서 만든 조잡한
사제 화승총이 전부였습니다.
사진 속 대부분의 의병은 핫바지, 저고리차림입니다.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시골소년과 농민 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단 한사람, 사진 오른쪽
서양식 검정군복 차림에다 반듯한 군모를 쓴 사람 만이 꽤 괜찮아보이는
소총을 들고있는데... 첫 눈에 의병부대를 인솔하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검정 정복차림의 그 인솔자는 구 대한제국군 소속의 군관급 이상 간부였을
것 같습니다. 일반 병졸의 복장이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양을 떠나 고향마을로 돌아와서 규합하고 조직한 '정미의병'이, 요행히도
영국인 기자 맥킨지의 눈에 띠어 저렇듯 "폼을 잡고" 촬영한 것이겠지요.
0...1만여 명으로 불어난 정미의병은 '독립군'이란 새 이름을 짓고 서울주재 외국공사관에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승인해달라"는 공문까지 발송한 바 있습니다. 의병대장 이인영과
허위가 인솔한 1만 여 명 정미의병 연합군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진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 규합된 정미의병은 국경너머 간도와 연해주까지 진출해 항일무장전투를 전개
했는데, 조선군에서 호랑이를 잡던 착호군(捉虎軍)이던 홍범도 대장을 비롯하여 이범윤
장군 휘하의 정미의병은 국내 일본군을 무찌른다는 '진공계획'을 세운 바도 잇습니다.
만주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조선침략 수괴가운데 하나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군 의사도 '정미의병' 출신 이었습니다.

▲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의사도 화승총으로 무장한 초창기의
정미의병 출신으로, 강화화승총으로 나라를
지켰던 개화기 '백두산범포수'의 후예입니다.
0...정미의병을 중심으로한 대한독립군이 일제에 대항하는 괄목할 만한 군대조직을
갖추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1909년 9월 1일,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의병을 색출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근거지를 초토화하는 등 이른바 독립군
말살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항일의병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습니다.
화승총과 볼트액션식 최신 라이플의 화력차이, 그로 말미암아 정미의병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일제의 강제 조선합방(1910년)이후에도, 미력했으나마 한국인의 항일투쟁은
지속적으로 잇대었습니다. 국내는 물로 중국의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대일본군 전투, 침략군 요인 암살, 거국적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던 3.1 만세 등
한국인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찿기 힘든 '강골(强骨) 민족혼' 을 드러냈습니다.
21세기 세계의 강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
그것의 뿌리에는 20세기 초반, 시뻘겋게 녹쓴 화승총 한 자루를 거머쥐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서 나라를 지킨 '정미의병'과 맞닿아 있음이 확실합니다.
- 카페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