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소설의 인물의 욕망에서 나타난 욕망은 '본능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 그리고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나눠진다. '본능적 욕망'은 성과 물질에 대한 욕망이고, '사회적 욕망'은 복수와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마지막 '구원에 대한 욕망'은 죽음과 관련되어, 운명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나라 전통종교 중 하나인 불교가 욕망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 종교적 성향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는 모든 욕망을 부정한 종교, 또는 경제적인 활동에 매우 소극적이거나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종교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물질적 충족 등의 욕망을 결코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경은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거운가 하면, 빈궁의 괴로움이다.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는 않으리라"라고 설파한다.
불교가 오히려 가난을 인류의 적으로 보고 있으며, 욕망에 대해서 긍정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선지식들은 욕망을 가진 주인공인 인간이 영위하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바로 부처의 삶이며,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 그곳이 바로 불국토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불교가 이윤의 무한추구까지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내 것'이라는 생각은 숱한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불경 속에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행복이 주로 욕망의 조장과 충족을 통한 것이라면 불교에서 가르치는 행복은 욕망을 덜어내고 다스림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이다.
타인을 돕는 보살행을 통해서 나의 행복이 더 커진다는 불교의 욕망 방정식은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모두가 오래가지 않는다.
소금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고운마음씨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3퍼센트 고운마음씨에 기대해본다.
김석 교수가 연합뉴스에서
사람은 평생 돈, 명예, 권력, 사랑, 행복을 좇으며 욕망에 매달린다. 하지만 욕망은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다.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더 큰 욕망이 우리를 유혹하며, 죽을 때까지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에게 욕망은 무엇일까.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김석(53)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는 '욕망' '나르시시즘' '사랑' '자아' '무의식'을 연구하는 철학자다. 개별적인 인간의 심리가 사회적인 현상과 결부돼 어떻게 집단 심리나 사회 병리적 현상을 유발하는지 연구한다.
김 교수는 현재 한국 사회를 가치관이 병든 '정신병적인 사회'로 규정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갈등과 폭력, 우울증, 자살 등 사회병리적인 현상을 치유할 방법을 자아성찰과 사회 병리적 구조의 개조에서 찾는다. 김 교수가 진단한 한국 사회의 정신병과 해결 방안에 귀를 기울여봤다.
◇철학자로서 관심 분야는 무엇입니까.
▲ 욕망과 그것의 반영인 사회병리 현상입니다. 욕망의 중요성, 욕망 때문에 겪는 고통, 폭력과 같은 타자와의 갈등, 이념 대립 같은 집단 심리, 이런 사회심리현상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연구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며 사는데 욕망이 억압되면 고통을 겪고 다양한 병리적 증상을 표출합니다. 이것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예컨대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타고난 폭력성향이 있다고 하거나 사회 부조리의 희생물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핵심을 놓칠 수 있지요. 사회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물질만능주의나 경쟁적 풍토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바라봐야 합니다.
--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게된 동기가 있나요.
▲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그랬을 테지만 저도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갈등과 부조리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후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욕망과 동기, 그리고 심리적인 것이 다양한 사회 문제에 결부돼 있다고 판단하게 됐죠. 특히 프랑스에서 정신분석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쓰다가 사회병리에 더 관심을 두게 됐어요. 기존 정신분석학자들은 임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저는 철학자로서 사회병리나 집단심리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 '욕망' '나르시시즘' '무의식'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욕구를 모두 표출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죠. 억압하거나 변형시켜야 할 부분이 반드시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 다를 수 있죠. 이런 차이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폭력적 형태로 표출할 수 있어요.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욕망, 나르시시즘, 무의식을 잘 이해하고 조절하며, 사회 환경이나 사랑과 미움 같은 타인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들여다봐야 하죠.
-- 욕망은 무엇인가요. 욕구와는 어떻게 다릅니까.
▲ 욕망은 한 마디로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고 문명을 꽃피우면서 삶을 개선할 수 있었죠. 욕망은 인간에게 발전과 풍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욕구와 욕망을 구분해야 합니다.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으로 필요한 것에 대한 바람이에요. 즉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되죠. 하지만 욕망은 욕구와 달리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해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과 평가를 받는 것이 욕망에서 중요하죠.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애인으로 삼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죠. 이 남자의 심리를 분석해보면, 그 남자는 그 여자 자체를 좋아할 수도 있지만 사실 자신이 예쁜 여자와 함께한다는 것을 남이 인정해주길 바라는 욕망이 있는 거예요. 즉 욕망은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자기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성공해도 행복감이 오래 지속하지 않는 것도 성공에 대한 욕망이 자기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욕망이 충족되면 또다시 새로운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영원한 불만의 상태로 남게 되죠.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서 시작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타인을 많이 의식해요.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나의 직업이나 재력이 어떻게 판단될까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타자의 욕망에 너무 매달리다 보니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어요. 사회가 부여하는 욕망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소외에 빠질 수 있습니다.
-- 욕망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잘못된 욕망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맞습니다. 욕망은 실현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욕망의 억압이나 잘못된 욕망이 문제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증상으로 설명합니다. 내부의 갈등은 억압하고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부에 갈등이 있으면 신경증이나 불안증으로 나타나죠.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마련이에요. 인문학자는 증상을 통해 표출되는 욕망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하고,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 욕망의 사회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자기를 잘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만의 것을 찾기보다 사회가 부여한 기준을 좇아가는 경향이 커요. 예를 들어 자기가 요리에 소질이 있으면 요리사가 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대학을 가서 법학이나 경영학 등 전혀 다른 공부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다니는 거죠.
결국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체성을 찾고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알기 위해 자기성찰을 해야 하죠.
-- 자기를 성찰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 공자는 논어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했어요. 배우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날 생각한다는 것은 성찰과 소통을 뜻한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제대로 된 배움과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나의 지식이 잘못돼 있다면 독(毒)이 될 수 있잖아요. 자기성찰과 소통의 방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대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은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을 육성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곳이 돼버려 아쉽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각종 강연을 하는 등 노력하고 있지만 인문학자 한 명의 힘으로는 안 되죠. 또 한 가지 우려하는 점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문학을 교양처럼 생각한다는 거예요. 인문학의 주된 목적은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자극을 주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김석 교수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욕망을 좇다 보면 정신적으로 궁핍해진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 자기를 실현하려면 욕망이 있어야 하죠.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기 전에 무턱대고 사회가 이상화하는 욕망을 좇다 보면 잘못된 욕망을 추구할 수 있고, 소외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욕망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욕망을 채우려고 하죠. 돈, 권력, 사회적인 성공, 남들의 인정과 사랑으로는 결코 근원적으로 결여된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욕망은 결국 자기 존재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인데 그것을 모른 채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면 아무리 쌓아도 만족할 수 없는 거죠. 그러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겠죠.
◎지금 우리나라에는 절망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 개인에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있듯이 사회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상당히 정신병적인 사회입니다. 정신병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정신병적인 구조에 빠지기 쉽죠.
예를 들어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묻지마' 폭행이나 살인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에요. 임상적으로 보면 정신병이 이런 구조죠. 정신병은 자아 내부에서 분열이 없어서 갈등도 없고 자신의 망상으로 외부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 구조입니다. 정신병적인 사회는 자기중심성이 너무 커지고 나를 중심으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심리가 일상화된 사회를 말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범죄를 쉽게 저지르고, 사회병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 인간에 대한 가치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탓이죠. 효율, 성과, 생산력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소외되는 문제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죠. 세월호 사건도 이런 경우죠. 이런 사회에서는 자살률이 높고 범죄가 증가하고 우울증 같은 병리 현상도 증가하죠. 당연히 행복지수와 만족도도 낮죠. 성장을 위해 달리기 전에 먼저 경제 성장이 왜 필요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인간에 대한 가치를 회복해야 해요.
◎ 정신병적인 한국 사회, 치료될 수 있을까요.
▲ 당장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1980~1990년대 오로지 성장 위주로 달려오며 성찰할 기회가 없었죠.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회적 부조리와 병폐는 성장주의가 낳은 폐단이자 후유증이기도 하죠. 그런데 지금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는 것은 우리가 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 인문학 강연이나 책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고무적인 현상이죠.
또 하나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선진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경제 규모나 부의 측면에서는 선진국을 따라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이 지체돼 있죠. 덩치는 커졌는데 정신이나 내면은 성장하지 않은 비정상적인 모습이죠. 자기 물음을 시작할 때가 된 거죠.
◎나르시시즘은 무엇이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 우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내면이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는 남들이 어떻게 볼까 상상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남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마치 남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내 모습이 과잉되게 부풀어지면서 여기에 온통 집착할 수 있어요. 이게 바로 나르시시즘이에요. 나르시시즘이 있으니까 자신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자기실현의 욕망도 생기는데 이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되죠.
'연기성 성격장애'라는 것이 있어요. 자기를 영화나 연극의 주인공처럼 생각하면서 오로지 남들이 어떻게 볼까만 마음을 쓰는 사람이죠.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고 때로는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감정이나 욕망을 숨기면서까지 과잉되게 행동하기도 하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릿이 이런 경우입니다. 요즘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는 청소년이 많습니다. 연예인이 되는 것에 소질이 있으면 모르지만 대부분은 연예인에 대한 동경 의식이 부풀려진 자아를 만들어서 그런 거죠. 이건 잘못된 나르시시즘이 만들어내는 병폐죠. 이런 결과는 욕망을 상품화하고 대량 유포하는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욕망이나 나르시시즘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너무 지나쳐도 안 되죠. 욕망이나 나르시시즘을 적절히 조절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그리스 사회에서는 철학, 예술, 체육을 통해 시민들을 교육했습니다. 우리도 그릇된 욕망이나 과잉된 나르시시즘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도록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라캉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실은 우리 자신의 자아"라고 했듯이 사랑도 일종의 나르시시즘인가요.
▲ 사랑 자체가 나르시시즘은 아니지만 그 중심에는 나르시시즘이 내재해 있습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투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즉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만들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식을 키우려고 한다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생각이나 기호, 행동이 서로 같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이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차이를 극복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사랑의 본질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과 타자의 발견이 사랑의 진정한 기능입니다. 사랑할수록 나르시시즘으로 빠지라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존재를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거죠. 사랑하면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차이를 극복하려는 순간 폭력이나 억압이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자를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제가 가장 관심이 높은 주제가 자아실현이에요. 그리고 자아실현을 통한 행복입니다. 자아실현은 자기계발과는 전혀 다른데 우리 사회에서는 동일시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아실현을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계발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죠. 자아실현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시민교육을 할 때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는 자기 배려를 강조했어요. 몸매를 가꾸거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영혼, 즉 내면을 돌보고 가꾸는 것이죠. 자기를 비판적으로 보고,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점검을 하라는 거죠. 결국 나 혼자만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사회적인 배려를 하라는 겁니다. 자기 배려와 소통을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는 공동체적인 관계가 무너지고, 각자도생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개인이나 가족의 불행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인 거죠. 남이 아픈 것을 보고 나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가능하겠죠.
이런 사회를 위한 출발점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거예요. 지금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죠.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연합이매진] "인간의 욕망은 무엇일까"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에 실린 글.
Advisors 김보희
Abstract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욕망은 결핍된 상태이며 인간은 이 결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외부세계를 탐색한다. 욕망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원동력이지만 결코 충족될 수 없는 허상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이 외부세계의 허상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완전한 행복인 것처럼 보이며 가장 가까운 눈앞에서 가장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허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허상은 현실이 아니므로 행복이 될 수 없지만 허상은 분명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완벽할 수 있으며 더욱 위대하게 보인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허상은 그 자체로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결핍된 욕망을 해결하지는 않기 때문에 허상으로 인해 얻어지는 즐거움은 진정한 행복과 위안이 되지 못한다. 단지 행복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허상은 실재하지 않는 외부세계를 맹신하게 만듦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다. 허상은 결코 행복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결핍은 충족되지 못하고 또 다시 욕망을 생산한다. 욕망은 허상을 바라봄으로써 다시 결핍으로 돌아온다. 허상에 대한 실망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분노를 일으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문제를 깨달아도 오히려 회피한다. 이러한 상황의 사람들이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욕망으로 왜곡된 외부세계의 허상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를 이러한 허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허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떻게 인간을 미혹하는지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이 몰두하고 있지만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한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허상을 그림으로 실현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욕망이 향하고 있는 외부세계의 허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그 외형의 범주에 대한 탐닉일 뿐 내면의 의미 영역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은 외부세계의 허상을 추구함으로써 위안을 삼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그 욕망의 조형적 의미와 표현방법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외부세계의 허상은 완전한 신체의 획득이며, 영원한 삶, 최고의 우위관계를 점령하는 권력 등으로 구체화된다. 본인은 본 연구를 통하여 욕망과 행복에 대한 조형작업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본인 그림의 궁극적인 목표인 인간의 욕망과 불행의 관계를 통해 행복에 대한 의미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향하기 쉬운 헛된 행복을 쫒기보다 내면세계로부터의 자율적인 행동으로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외부세계에 대한 성찰의 태도를 갖는 것이라 본다.
Humans have desire; simultaneously, they seek happiness. Desire is lacked and humans explore the external world to fulfill this lack. While desire is the driving force for human’s survival but it is also a thirst for something elusive--illusion--that can never be satisfied. But the reason why humans cannot resist illusion in the external world is because it seems like a perfect happiness and looks attainable, within a reach. Illusion never seems unattainable. Although illusion cannot be turned into happiness since it is not reality, illusion can be more perfect than imagination and looks even greater. Thus, illusion can be mysterious, beautiful, and pleasing by itself. Nevertheless, pleasure gained from illusion cannot be true happiness and comfort since it does not relieve the thirst for the lack. It is just that we want to believe that it is happiness. By making one blindly trust the external world that in fact does not exist, it deludes us of the essence of body and spirit. Since illusion never provides happiness, lack cannot be satisfied; it further creates another desire. Desire delude the nature of body and spirit by making one blindly trust the external world that does not exist. Illusion does not offer happiness and thereby lack cannot be satisfied and desire is produced once again. Facing illusion, desire returns to lack. Disappointment about illusion makes humans powerless or enrages them. Nevertheless, many people cannot face such problem. Even if they realize the problem, they try to avoid it. In that case, people face the illusion of the external world, distorted by their desire. I believe that human beings are miserable because of such illusion; I searched what illusions look like and how they tempt human beings; I also tried to the illusion that exists in the external world which is filled with desire many people are infatuated with but can never be fulfilled. However, actualizing the illusion of the external world that desire turns to is merely indulgence of the external; it does not express the meaning of the internal. This paper aims to theoretically analyze human desire to comfort oneself by pursuing the illusion of the external world and to research the formative meaning and expression method. Illusion in the external world is acquisition of a perfect body and it is specified by an internal life and power that dominates the top of the hierarchy. Through this research, I expect to establish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formative arts projects regarding desire and happiness and to find out the ultimate goal of my painting: the meaning of happiness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desire and unhappiness. Rather than to pursue vain happiness, easily driven by desire, it is to achieve an introspective attitude regarding the external world in order to achieve a selfhood through autonomous action from the intern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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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간의 욕망은 제한적인 것이다.
첫째,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망도 없다. 테레비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테레비젼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없다. 즉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욕망의 첫째 조건이다.
둘째,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획득할 수 있다면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대상을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욕망이 생성되는 것이다. 결핍이야말로 욕망의 조건이다. 만족은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 그러나 결핍은 욕망을 불처럼 끓게 하는 것이다.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익숙해져서 자신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승용차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과거가 행복했다는 것을 반추하게 된다. 또한 승용차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이웃의 승용차를 보고 욕망에 사로잡힌다. 욕망은 만족이 아니라 결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세째,
획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은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러한 욕망을 포기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음이 올 줄 알고 있지만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왜 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충족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욕망의 조건이다.
네째,
다른 사람들이 그 욕망의 가치를 인정해 줄 때, 욕망은 생성되는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모두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의 욕망은 소멸한다. 금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는 혹성에 표류한 지구인은 금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사회적 선호는 욕망의 조건이다.
다섯째,
욕망은 체감한다. 테레비젼을 처음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테레비젼을 10대 가진 사람이 10배 행복한 것은 아니다. 뱀은 먹이를 삼키면 그것이 소화될 때까지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도 어떤 것에 만족하면 그것에 대한 욕망은 급격히 소멸하는 것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끝없는 욕망,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욕망은 제한적인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나 재화는 유한하다는 경제학의 전제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이러한 욕망의 제한조건을 철폐한다. 산업사회는 인간에게 욕망의 새로운 대상을 끊임없이 인식시킨다. 이제까지 생산된 상품을 모두 갖춘 사람도 다시금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발견한다. 산업사회의 발전과정은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상품, 재포장한 상품을 끊임없이 인간에게 인식시키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욕망에 관한 인식의 제한을 초월한다. 한편 화폐체제는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한다. 만족이야말로 결핍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웃사람의 욕망의 만족, 이웃의 소비는 나의 결핍을 생산한다. 나의 소비는 이웃의 결핍을 생산한다. 화폐체제에서의 경제적 불평 등은 만족과 결핍을 생산하는 구조이다. 그리하여 화폐체제는 만족 가능한 결핍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체제이다.
또한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욕망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확장한다. 과거에는 충족하기 불가능하였던 욕망이 끊임없이 충족 가능한 욕망으로 전환된다. 그것은 소위 경제적 물질적 발전이라고 불린다. 수많은 후진국에서 테레비젼, 냉장고, 승용차, 에어컨, 해외여행, 거대한 저택과 풀장, 요트와 자가용 제트비행기 등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족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다. 여름 날씨가 덥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견딜 수 있으며,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간절히 욕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이러한 것들을 차례로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화폐체제는 불가능에 의한 욕망의 제약을 차례로 철폐한다. 화폐체제는 사람들이 상호간에 서로의 욕망을 생성시킨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와 소비를 보고, 자신들도 그 것을 동경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욕망이 확장되는 것이다. 특정한 것을 한 사람이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그리하여 사람의 욕망은 증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묘한 물품들이
--삶에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 물품들이--마침내 일반적인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화폐체제는 타인의 인정(認定)이라는 욕망의 제한조건을 철폐한다.
마지막으로 화폐체제는 욕망의 체감조건을 철폐한다. 일체의 재화는 소유함으로써 욕망이 체감한다. 그러나 인간은 유일한 예외를 창조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화폐이다. 화폐에 대한 욕망은 체증한다. 더 많이 가지면 더 많이 가질 수록 욕망은 더욱 증대한 다. 1,000달러를 가진 사람보다 백만달러를 가진 사람이 화폐에 대한 더 많은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화폐는 욕망의 체감이라는 제한조건을 철폐한다.
이처럼 화폐체제는 일체의 욕망의 제한조건을 철폐하여, 인간의 욕망을 증대시키고 확장시키고 발전시킨다. 증대되는 욕망은 화폐에 의하여 통합되고 화폐에 의하여 충족되는 것이다. 화폐애(貨幣愛)는 화폐체제의 기본적 동기이고 기동기제(起動機制)이다. 화폐체제는 욕망의 체제이고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동기는 인간의 화폐애인 것이다. 욕망에의 집착은 종교사회에서는 죄에 속하는 것이다. 탐욕 죄는 오만 죄와 함께 서구중세 에서는 가장 중대한 죄였다. 그러나 케인즈의 말과 같이 화폐체제에서 탐욕은 우리의 신(神)이 되고 있다.
3.6.4. 이성과 욕망의 문명
농업사회-신분계급체제에서 사회를 형성한 의식적 기반은 종교적 신앙과 사회적 정감이었다. 사람들의 집합표상은 종교와 도덕의 차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는 공동체적 가치였다. 그것은 농촌공동체와 신분계급체제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
농촌공동체는 경제적 물질적 차원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대단히 빈곤하다고 하더라도 빈곤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개선의 여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농업사회의 사람들은 욕망은 자연적인 제한조건들에 의하여 갇혀 있었다. 그들은 욕망을 자극하는 새로운 재화를 알지 못했고, 결핍은 만연되어 있었지만 그 결핍을 해결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영주나 귀족의 만족이 농민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한 신분계급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농민에게는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분노를 촉발하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업사회의 문화는 물질적 소유에 중대한 가치를 두지 않았다. 청빈함이야말로 돋보이는 가치로 찬양되었다. 성프란치스코나 죽림칠현(竹林七賢)이야말로 만인이 존경하는 인간상이었고 삶이었다. 결핍보다는 만족이 의미를 가지고, 욕망보다는 금욕이 더욱 중요하고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집합표상은 세속과 삶의 욕망보다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신앙을 지향하였다. 또한 사실에 관한 이성적 고찰보다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의 정감적 차원이 더욱 중요하였다. 농업사회와 신분계급체제는 내세와 죽음의 문화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과 물질의 관계보다는 공동체와 신분계급 내세에서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중심이 되는 정감의 문화였다. 사대부의 정신, 선비사상, 농촌적 유대 등은 바로 이러한 정감적 문화인 것이다. 용감성과 명예를 중요시하고 기사도를 가진 전사문화도 정감의 문화이다. 그것은 이성도 욕망도 아니다.
산업사회-화폐체제는 이것을 반대로 전복(顚覆)하였다. 내세와 죽음보다는 현실과 삶의 더욱 중요해졌다. 종교나 도덕적 직관보다는 이성이 중요해졌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정감적 차원보다는 물질과 화폐를 통하여 평가되는 욕망이 더욱 중요해졌다. 우리는 욕망을 풍요라 부르고, 합리주의를 (신중심주의에 대하여) 인간중심주의(휴머니즘)라고 부른다. 우리는 과거사회(근대이전사회)는 빈곤한 사회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로 규정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의 관점에서 보는 일방적인 평가이다.
우리가 관점을 달리한다면 다른 성격이 나타난다. 즉 과거사회는 인간과 물질의 관계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중요했던 사회이다. 과거는 만족과 초월을 중요시했던 만족(滿足)의 문화인데 대하여 현재는 결핍의 문화인 것이다. 왜냐하면 풍요감은 행복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데 비하여 결핍은 불행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인간은 행복보다는 고통에 더욱 민감하다.
중요한 것은 산업사회-화폐체제가 형성하는 문명의 성격이다. 근대사회는 이성과 욕망의 문명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성과 욕망을 찬양하는 문명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성과 욕망의 문화는 대단히 많은 문제를 야기 하는 것이다. 이성은 자연을 정복하는데 있어서는 유용한지 모르나, 자연과 인간의 연 대의식(連帶意識), 인간과 인간의 연대의식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연대란 정감적 차원의 것이다.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정감적인 것이지, 결코 이성도 욕망도 아니다. 공자가 사회적 연대의 기반이라고 한 인의예지(仁義禮智)도 정감적 차원의 것이다.
이성이 인간을 사회적 연대로 통합하는 방식은 순전히 법률적인 것이다. 법률을 준수함으로써 인간을 사회로 통합하는 것이 이성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적극적인) 연대가 아니다. 인간은 개인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다만 게임의 룰을 지킬 뿐인 것이다. 이러한 법률주의는 로마의 통합양식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사회적 연대가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질서폭력이 붕괴하면서 즉시 드러났다. 이성에 의한 사회통합이란 질서폭력이 효과적이지 못하면 즉시 붕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중국과 공자는 인간의 정감적 차원에서 사회적 연대를 지향하였다. 인의예지의 덕목 그리고 도덕과 습관화된 예(禮) 등은 모두 정감의 차원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합리성이란 도덕적 규칙을 도출하는 기반이 될 수는 있으나 이성이 도덕 그 자체가 될 수 는 없다.
욕망이란 자극에 대한 반응이며, 반성(反省)이나 성찰(省察)이 필요 없는 것이다. 욕망은 감각적 자극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야기되는 인간의 반응이다. 욕망이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인지 등등에 대한 반성(성찰)을 하지 않는 것이 그 특색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여러가지 목적이나 가치 가운데에서 욕망은 지극히 단순하고 피상적인 목적이고 가치인 것이다. 화폐는 이러한 욕망을 더욱 단순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욕망이 형성하는 문명은 모든 인간이 목적이나 가치에 대하여 전혀 성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성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목적이나 가치의 양에만 주의가 집중되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의 문명의 특색이다.
학문, 예술, 종교에서 오는 기쁨은 이해와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주관적인 의미의 부여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가치는 경쟁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가치는 주관적이다.
그러나 욕망은 이러한 이해, 노력, 주관적 의미부여 등이 필요하지 않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목적과 가치는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양의 가치를 획득하고 그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경쟁적이다. 욕망의 문화에서는 이러한 점이 사회적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 욕망의 문화는 끊임없이 갈등과 적대를 생산한다. 욕망의 문화에는 객관 적으로 규정되는 목적과 가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의 훈계를 예상하게 된다. 개성대로 살고, 가치관이 부딪칠 때는 서로 인정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모습은 교양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좋은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는
쾌락·명예·윤리·헌신 등 섞여 있어
선택에 따라 다양한 모습 그려질 것
철학여행, 우리 삶의 성찰 계기 되길
찢긴 마음
생각과 가치관의 충돌은 한 사람 속에서도 생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감각적·동물적 본능에서부터 명예욕, 사회적 의무, 이타심, 신앙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망과 의무들이 서로 얽혀 어수선하다. 때로는 서로 부딪치며 갈등하여 마음을 찢는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과 끊고 싶다는 욕구가 충돌하고, 여유롭게 숨을 돌리고 싶은 욕망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충돌한다.
이런 갈등은 나의 마음이라는 한 공간에서 생겨나기에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없다. 어떻게 조율하고 균형을 잡을 것인지를 미루면 당장 오늘내일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일생에 거친 회한이 될 수도 있다.
‘철학이 삶을 묻다’는 철학자들의 사상을 되돌아보며, 어떻게 마음의 주인이 되어 좋은 삶을 가꾸어 갈 것인가를 모색한다. 철학자들이 좋은 삶을 이야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욕망을 살펴보며 앞으로의 여정을 준비해보자. 철학자마다 거론하는 욕망의 목록이 다르고, 강조점도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면서.
쾌락과 성취를 추구하는 마음
마음이 세상을 만나는 입구에 감각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쾌감을 느끼고, 뜨거운 것을 만지면 고통을 느낀다. 진화생물학자들은 해로운 것을 피하고 유익한 것을 추구하여 종의 번식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자연의 조화가 쾌감과 통증을 만들었다고 한다. 진화적인 연유에서든 어떻든 쾌락 추구와 고통 회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자리 잡았다.
잘 사는 사람 하면 돈 많은 부자가 떠오르는 것도 쾌감의 추구 때문이다. 돈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고, 책을 사서 영혼을 살찌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를 부러워하며 주로 상상하는 것은 이런 일이 아니라,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고 비싼 집에서 살고 원할 때 자유로이 해외를 드나들며 멋진 곳에서 쾌적한 시간을 갖는 일이다. 삶의 목적을 감각적 즐거움과 연관시키는 쾌락주의다. 쾌락주의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은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우리의 욕망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언어란 기묘하다. ‘잘 산다’라는 말은 부사와 동사가 결합한 표현인데, 이것을 형용사와 명사로 바꾸면 ‘좋은 삶’이 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고 물으면 돈과 쾌감에 묶였던 우리의 시야가 넓어진다. 마음은 감각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꿈을 꾸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부분이 좋은 삶과 무관할 리가 없다.
분석철학의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분석철학의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20세기 최고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은 굴곡진 삶을 살았다. 철강 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네 형 중 세 명의 자살을 겪으며 자신도 언젠가 자살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젊은 날을 보낸다. 동성애자로서 또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평생을 고립과 어둠 속에서 보낸 후에 자신을 돌보던 의사의 구석진 방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의사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습니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주시오”라고 말한다. 즐거움과 쾌적함이 없는 그의 삶을 부러워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철학에 매진하여 최고의 명예를 성취한 삶을 한편의 훌륭한 삶으로 존경할 준비는 되어 있다.
공감을 통한 윤리와 희생
내가 좋은 삶을 사는지는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이루었는가와 같이 한 개인의 울타리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이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에 한몫한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주변 사람을 이용하며 성공한 악인이 때로 조연으로 등장한다. 비윤리적인 사람이 윤택하고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것에 분노하고, 이용당하는 선한 주인공을 안타깝게 응원한다. 악인을 경멸하는 이유는 비윤리적 행동 때문만이 아니다. 공감이 결여된 빈곤한 삶이라는 판단 역시 작용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게 하면서 나의 감각의 영역을 외부로 확대한다. 윤리가 생겨나는 영양분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공감이 결여된 채 자신의 감각과 목적 추구에만 몰두하는 소시오패스의 삶이 황폐한 이유다.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이 이웃과의 관계를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 범위가 사회적 규범과 윤리를 넘어 확대된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서는 다른 이들에게 베풀며 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는 자신의 현실 건너편에 있는 이상이 마지막 순간에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일까. 공감이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헌신과 희생으로 확장될 때, 우리는 감동하고 박수를 보낸다.
초월을 지향하는 예술과 종교
우리는 때로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 쾌락과 명예, 그리고 관계와 윤리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꿈꾼다. 어떤 이들은 예술이 그런 동경의 산물이라고 한다. 청력을 잃어가며 자살을 생각하던 베토벤은 인류에 남겨주어야 할 유산이 있음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킨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넘어선 영원한 가치, 음악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초월적 숭고함에 대한 추구가 그를 자살로 가지 못하게 했으리라.
영원성에 대한 동경은 종교로 이어지기도 한다. 절대자 또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수도자의 삶을, 사자에 찢기는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신을 찬미하는 순교자의 삶을 우리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가변적이고 유한한 삶 너머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 삶의 의미는 그로부터의 거리로 가늠된다.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삶
좋은 삶에 대한 욕망에는 쾌락·명예·윤리·헌신 등의 여러 재료가 섞여 있다. 다른 재료들이 더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택하는 재료가 달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재료들을 단순히 혼합한다고 좋은 삶에 대한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두 재료를 택하든 부딪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재료가 추가되면 이들을 조율하는 셈법은 더욱 복잡해진다.
철학자들은 산재한 욕망을 어떻게 조율하여 삶의 주인이 될지 고민해왔다. 마음과 삶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필자가 동양철학에 과문하여 서양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은 동서양에 공통적이라는 추정을 위로로 삼고, 학문을 더 쌓아 동양 철학자들의 생각도 소개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하면서.
서양철학의 역사를 보면, 이성이 삶의 조화를 위한 지휘대에 가장 많이 오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이었으며, 이후 칸트에 의해서도 소환되어 철학의 역사를 관통하여 압도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고대가 막을 내리는 혼란기에 즈음하여서는 절대자의 은총과 신앙이 무대에 오르며 이후 천 년을 지배한다.
중세의 두 거목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절대자에 귀의하는 의지를 중심에 올려놓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근대와 더불어 개인이 해방되면서는 이성과 신앙에 의하여 절제됐던 쾌락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 홉스와 벤담은 새로운 시대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여 마음을 해석한다. 19세기의 새로운 과학, 특히 다윈의 생물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신앙과 이성은 더욱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니체는 그 도전의 정점에 선다.
이상의 철학자들과 현대의 사상가들을 4주에 한 번씩 소개할 계획이다. 이들은 자신의 시대로부터 어떤 키워드를 받았고, 이를 통해 마음과 삶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 질문을 쫓아가는 철학적 시간여행이 삶에 대한 생각의 시대적 변화를 추적해 오늘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고, 또 각자의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