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해서 떠난 곳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난다.
사람도 만나고 자연도 만나고 그 속에 깃들인 이야기들을 만난다.
안렴대에서 잠깐 만난 문화해설사의 이야기 , 호국사 불타 없어진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50년도 더 전인 1968년에 처음 들었던 절 이름 호국사(護國寺) , 그때는 불타 없어졌다는 이야기만 들었었다.
그냥 산만 구경하고 안국사(安國寺)만 돌아보고는 내려갔던 시절이다. 돌멩이 던져 잣도 따먹으면서.
이곳 적상산에 산성이 있었는지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가 있었던 것도 몰랐던 그야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이었다.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눠 보련다.
먼저 호국사라는 절 이름부터 본다. 나라 국(國)자에 지킨다는 뜻의 호(護)자 이름이니 벌써' 호국의 절'임을 알겠다.
'안국사' 역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일 테니 그말이 그말인셈이다. 그런데 산 하나에 나라 지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절이 두 채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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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안국사 일주문을 들어서니 호국사 주차장이 나온다.
웬 안국사 경내에 호국사가 ?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자세히 현판을 들여다 본다. 분명 호국사(護國寺) 임을 알리는 현판이다.
건물 한 채만 덩그렇게 있다. 그것도 스님들이 거처하지 않는 듯, 나간 집 행색이다.
건물 앞 단풍나무 사이로 호국사지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비각 같은 것이 보인다. 일단 내려가 본다.
비각이다.
이끼 잔뜩 머금은 비석 겉면에 글씨는 전혀 보이지 알아 볼 수 없다. 전서로 쓴 비석 머릿글자를 오른쪽서부터 이리저리 맞춰보니 "赤裳山城護國寺 ?" 겨우 알아 낸다. "적상산호국사비" . 어느 때 세운 비인지, 무슨 내용이 있는지 ?
이웃에 있는 안내판에 의지할 수 밖에. 찾아간다.
적상산성 호국사비 안내판이다.
창건 과정을 기록한 비. 조선 인조 때 지었고, 1949년 여순사건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터만 남았단다.
고려 말에 최영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인데(*그래서 안렴대라는 곳이 고려 때 벼슬 이름 안렴사에서 나왔구나! )
광해군 때인 1610년( :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이네 )에 국난에 대비해 부분적으로 성을 쌓았단다.
그후에 사고를 설치하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를 보존하게 한다. 비로소 적상산성의 가치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인조 때 사고(史庫)를 지키기 위해 승군을 모집하고 이 호국사를 짓게 되었다는데. 1949년 여수순천 사건때 불타버리고 터만 남았다. 여기까지만 알려준다.
나중에 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본다.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석문] 농대 위의 비신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라고 한자로 두전(頭篆)이 각자되어 있고, 아래로 본문을 새겼다.
뒷면에는 ‘순치 2년 10월 일건(順治二年 十月 日建)'이라고 새겼다.
(*순치 2년은 1645년이고 우리나라 순조 임금 23년인 셈)
[현황] 현재는 마모가 심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赤城誌)』「적상산성」에 비문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적상산 사고의 설치 경위와 과정, 사고 방비의 허술함, 호국사 창건 경위 등을 담고 있다. 특히 전라 감사가 자신의 봉급에서 호국사 창건 비용을 부담하고 승장(僧將)이 사역(使役)을 담당하였으며, 무주 현감(茂朱縣監)이 물자의 조달과 감독을 맡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통해서 호국사는 본래 적상산성 안에 있는 사고를 수호하기 위해서 동원된 승병들의 숙소로 건립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사고가 폐지(廢止)될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한 역사 지킴이의 도량(道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국사는 *1949년 여순 사건 당시 경찰의 소개 작전(疏開作戰)에 의해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이 부분.즉 1949년 여수 순천 사건 당시 사연을 문화해설사로부터 듣게 된다. 비록 짧은 시간에 들은 내용이지만)
호국사 터 앞으로는 전망이 좋다. 적상산성 부분이 마치 돌담장처럼 생겼다. 육중한 백제산성 식이 아닌..
저 아래로는 치목 부락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적상산성에 접근하는 길은 예전에는 오직 세 곳만 있었다.
이곳 치목길 말고는 북창에서 안국사로 오르는 길과, 서창에서 안국사로 올라오는 길 뿐이었는데,
지금은 적상호 상부댐 덕택에 새로 포장도로가 생겨서 손쉽게 안국사 절까지 차로 올라 올 수 있다..
적상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사진 자료로 들여다 본다.
원래의 안국사 자리는 적상호에 수몰되고 대신 호국사 터 로 옮겨 온다. 사고지도 현재의 곳으로 옮겨지고..
사방이 험준한 절벽으로 생긴 산 모습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금동대향로 모습이다.
그래서 향로봉이란 이름의 봉우리가 있나보다는 생각이 순간 든다..
적상산 사고지로서 천혜의 요험지임을 알 수 있겠다. 사방은 층층 절벽에 올라올 수 있는 길은 단지 3갈래 길뿐 .
그 북쪽에 안국사가 있고, 남쪽에 호국사가 있어서 승군들이 적상산사고를 앞뒤에서 수호한 셈이다.
곁방살이(안국사)기 안채(호국사)를 차지한 셈. 세월이 가니 이렇게 변한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뽕밭이 어느 새 물바다가 되어버린 셈, 붉은 치마 (赤裳)같다 해서 얻어진 산 이름인데, 내보기에는 금동대향로를 연상시키는 산 모습이다. 향로 안에는 생명수인 적상호가 물그릇처럼 들어 있는 곳. 산새도 산짐승도 좋아하겠지...
군사를 두니 무기고도 필요하고 군사들의 군량미 저장 창고도 필요하고, 그래서 서창(西倉)이니 북창(北倉)이니 하는 지명이 고스란히 남아서 옛일을 말해 주고 있다. 적상산도 원래는 상산(裳山)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옛 책은 말하고 있다. 아마도 주(朱)계현, 단(丹)천현 등, 붉을 적, 붉은 단, 붉을 주(朱)의 이름이 들어 있는 무주 지명과 관련된 것은 아닌 가 하고 의심한다.
무주를 대표하는 산에서 얻어진 땅이름일 수도.
적상산성을 수축해서 담을 두르고 승병으로 지키게 하고, 그곳을 관리하는 관청인 무주의 급을 높혀 무주부로 만들고, 정기적으로 포쇄하고 점검한 것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박학사의 포쇄일기' 등이 그렇다.
이렇듯 엄중하게 보존해온 사고가 변란을 당한다.
나라가 망하자 1910년에 일제가 사고를 서울로 옮겨 가버린다. 알맹이가 없어진 곳에 호국사는 주인 잃은 절이 된다.
일제가 망하고 1945년서부터는 미군정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기까지 지속된다. 남북이 38도선으로갈라진 채.
38선 이북은 북한 김일성 공산당이 점령하고, 남한은 좌익우익으로 삼분오열 되고,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기 직전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는다.
총선 직전인 (1948년) 4월 3일에 제주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이 바람에 제주도는 총선도 못 치르고)
소위 제주 4.3사건, 1만 명이 희생 당하고(미확인 추산은 8만까지도) 그 진압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여수, 순천 14연대 내에서 또 좌익분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소위 여수.순천 10.19사건이 발생한다. 반란에 실패한 좌익계 반란군들이 지리산 일대로 숨어들어가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남부군의 이현상이 등장한다. 이 여순 사건이 바로 호국사가 불타버리게 된 단초이다.
< 문화해설사 송재평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1949년 추석 전날이란다.
적상산 호국사에 빨치산들이 몰려 와있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을 했단다.
40명의 경찰들(아마도 '묻지마라 갑자생' 1924년 생 또래들의 전투경찰일듯 싶다)과 대한반공청년단원들일 듯 싶은 주민들 수백 명으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대들이 작전을 개시한다. 힘들게 작전을 하고 올라와 보니 막상 호국사에는 빨치산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헛탕친 셈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경찰 병력을 점검해 보니 한 명이 없더란다. 다시 호국사로 올라와 샅샅이 찾아보니 어디 구석에선가 죽은 경찰 한 명을 찾아냈단다.
바로 그 경찰이 거짓 정보를 흘린 주범으로 여겨지고.. 좌익사상에 물들은 빨치산 프락치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 후 호국사는 빨치산들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의해 소각명령이 내려져 없어져 버렸단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문화재가 불타버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 해서 해인사 8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영환 조종사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어기고, 문짝만 불태워버린 차일혁 경찰대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불태우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 문화재를 만드는 데 천년이 걸린다:는 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문화재 보존 관리가 이렇듯 어렵고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구보니 그 불타 버린 호국사 터에 현재의 안국사가 대신하고 있고, 원래의 호국사는 현판만 걸린 불당 건물의 모습으로 휑하게 재현해 놓은 것임을 이제야 알게된다. 세월의 무상함이여 !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이현상은 충남(당시 전북) 금산 외부리 출생이다.
삼백석지기 부농의 아들로 고창고보를 마치고 대학까지 다닌 인텔리인데, 공산주의의 무엇이 지식인텔리들의 신념을 사로잡았을까?
무산자 계급인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공산당의 허울좋은 선전에 사로 잡힌 시대의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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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에 대한반공청년단 입회원서 보기 : 좌우익 싸움에 희생당한 우리 부모님 세대들
일제 징용과 정신대로 혼나고, 광복 후에는 공산당과 싸워야 하고,
이렇게 해서 1950년 6.25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9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현재의 휴전선으로 고정되어 끝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지리산 , 덕유산, 회문산 일대에서 벌어지는 빨치산 토벌작전은 1955년 4월에야 비로소 종료된다.
그 피폐한 대한민국이 다시 몸을 추스리기까지는 시간이 또 걸린다.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군사정변까지 거쳐서야 안정을 찾기 시작하고.
쓰레기통으로 비유되던 대한민국은 이제는 세계 G7그룹까지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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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적상산성 안내판으로 산성 이야기는 대신한다.
붉은 단풍잎 사이로 보이는 산성, 복원된 모습이 돌담 수준이다.
아래 산성 부분은 산 정상능선 서벽부분에 잔존성벽들이다.
절벽위의 성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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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에 안국사 경내를 들여다 본다. 입구에 있는 노란 은행나무가 단풍이 한창이다.
샛노란 은행잎들.
'청하루' 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나오겠지...
'청하루' 들어가기 전에 안내판부터 들여다 본다.
안국사가 본래는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절이란다. 보경사란 절 이름도 있다는 데.. 조선왕조실록 보관처로 이 절을 지었고 1614년이니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일이다. 임진왜란에 혼쭐이 난 사고들.
청하루를 지나니 대웅전이 아닌 극락전(極樂殿)이 나타난다. 왜 본전이 극락전일까? 절인데?
순간, 왕조실록 보관을 위한 절임을 잊어버린다.
왕실족보 보존 사고를 겸하고 있으니, 아, 그렇다. 역대 왕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찰의 성격을 가진 절임을 .
극락전 앞에 안내판들이 있고 중간 계단 옆에는 당간지주석이 양쪽으로 보인다.
오른쪽 당간 지주 하나(왼쪽)에는 옹정(雍正) 8년이 보인다. 옹정8년은 1731년이다.
영산회괘불탱화를 걸어놓을 때 사용한 것인가? 기우제 지낼 때 걸었다고 한다.
옹정 8년( ) 당간지주 연호.보기:
왼편으로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처마밑에는 부처님상들이 비바람에 나와있다. 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에 안국사 경내를 두루 살피고 밖으로 나온다.
멀리 덕유산 전경이 아름답다.
<덕유산 향적봉 보기 >
덕유산 향적봉 등산시 보았던 사진 자료들을 꺼내서 들여다 본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맛이 다르다. '여산진면목'이라는 말이 있는데.덕유산의 한 자락이 적상산에서 머무른다.
적상호가 보이고, 적상산 전체 모습과 윤곽이 잡힌다.
- 2011년 10월22일 답사시 사진 : 덕유산 향적봉에서 무주 적상산을 바라보고 -
( 오른쪽 작은 하얀 점이 적상호 우측의 전망대이고, 그 앞이 적상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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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사 한쪽 토방 위에 목재 기둥하나가 있다. 나이테를 세어본다.
(다음은 안국사의 핵심인 사고지를 돌아본다.)
( 2024.11.11일(월) 카페지기 급히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