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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자(갑)와 플라톤(을)의 공통입장을 묻는 문제로, 평가원은 ②번을 정답으로 발표했다. ㄹ이 문제된다. ㄹ 선지를 다시 써보면 다음과 같다.
ㄹ.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 자연스럽게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
‘구성원의 역할 분담’은 ‘사회적 분업’을 지칭할 것인데, 이러한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질 때 국가가 이상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공자와 플라톤 모두 강조한다. 플라톤의 주장은 주지의 사실이고, 공자 역시 그런 주장을 했는가?
제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자의 正名(정명)이 바로 사회적 분업을 강조하는 내용이고, 사회적 분업하에서 각자가 해야 할 일을 규정한 것이 바로 ‘예(禮)’다. 공자 정치사상의 핵심이 ‘以禮治國(예로써 나라를 다스림)’이라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논어”를 비롯해서 유가 경전에 “무수히” 널려 있는데, 그렇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더 많은 증거를 가져올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만일 평가원 어린이들이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냥 자신들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더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만 들어보겠다.
공자는 “내가 일찍이 듣기를, 국(國)이나 가(家)를 다스리는 자는 적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균등하지 않음을 걱정하고, 가난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수를 지키지 못함을 걱정한다.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조화로우면 부족함이 없고, 분수를 지키면 나라가 기울어지지 않는다.(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均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論語”, ‘季氏’)라고 했다.
여기서 ‘均(균)’은 단순히 모든 사람(치자와 피치자)이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분업’을 뜻한다. ‘균(均)’이 사회적 분업을 뜻한다는 것은 다음의 글에서도 확인이 된다.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정치를 고르게 하니, 군자는 다스리려 노력하고 소인은 힘쓰는 데 노력한다”(布德於民而平均其政事 君子務治而小人務力)(“國語”)
이는 공자가 한 말은 아니지만 춘추시대 ‘균(均)’의 쓰임새를 알 수 있다. ‘평균기정사(平均其政事:정치를 평균하는 것)’란 바로 ‘군자는 다스리고 소인은 육체노동에 힘쓰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평균(平均)’이란 바로 ‘군자와 소인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평균’이란 곧 ‘사회적 분업’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공자가 그렇게 말한 배경을 보더라도, 경대부가 다른 경대부를 치려고 하자 대부 아래에서 벼슬을 하던 공자의 제자들이 이에 대한 공자의 견해를 물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위 원문에서 ‘국(國)’은 제후, ‘가(家)’는 경대부를 가리킨다. 간단히 말하면, 제후는 제후가 할 일에 충실하고, 경대부는 경대부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으로, 더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 분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國家: 國과 家)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無傾:기울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되는 선지를 다시 써보자.
ㄹ.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 자연스럽게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
평가원은 왜 이 선지는 답이 아니라고 했을까? 처음 이 선지를 봤을 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평가원이 이 선지를 정답으로 발표했더라도 별다른 이의제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 수험생들은 이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선지를 두고 ‘찍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가원 어린이들의 사고수준이 어떠냐에 따라서 수험생들의 희비와 운명이 갈린다. 정말 코미디 아닌가?). 추측건대, 평가원은 ‘이상적 국가’라는 말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만을 연상한 듯하고, 공자는 ‘이상국가’라는 말을 안 했기 때문에 위 선지는 양자의 공통입장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플라톤 역시 ‘이상국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상가가 이론으로써 ‘최고의 국가 상태’를 논했을 때 이를 평가하는 학자들이 ‘이상국가 이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정명론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그의 ‘이상국가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공자가 과연 ‘正名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이상적인 국가’로 보았는지만 보면 된다.
“천하유도(天下有道:정치와 사회의 모든 면이 질서 있는)의 시대이면 예악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천하무도(모든 질서가 무너진)의 시대이면 예악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 제후에게서 나오면 10대 안에 무너지고...(天下有道 則禮樂征伐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自諸侯出 自諸侯出 蓋十世希不失矣...)”(“논어”)
‘천하에 道가 있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인데, 이러한 이상사회에서는 예(禮)가 천자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예를 천자가 정해야 하는데 부하인 제후가 정하게 되면 ‘正名’에 어긋나고, 이는 곧 ‘무도한(무질서한) 사회’라는 것이다. ‘道 ⇒ 禮 ⇒ 正名’의 도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道가 있는 사회가 바로 이상사회(국가)’인 것이다.
평가원 기출문제들을 풀다 보면 오류 선지들이 무수히 많은데, 평가원 어린이들이 왜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그 사고수준이 정확히 고등학생과 일치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명백히 오류인데도 고등학생 정도의 사고수준으로 선지를 고르게 되면 평가원이 생각하는 정답과 일치하는 것이다(실제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평가원이 생각하는 정답을 고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명백히 오류인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학교 내신 문제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출제하는 교사와 그 문제를 푸는 학생들의 사고수준이 유사하다 보니, 명백한 오류인데도 서로서로 오류인 줄 모르고 함께 사이좋게 지나가는 것이다. 그 와중에 ‘달리’ 생각하는 학생이 나오면 그 학생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평가원 기출 선지 중에도 이런 문제가 무수히 많다.). 위 선지도 바로 이런 케이스다.
저 선지가 답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고르지 않은 수험생들은 아마도 우리 교육과정에서 ‘이상국가’는 플라톤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니까 공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이게 아니라면 이 선지를 고르지 않은 학생들은 왜 이 선지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혹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 때문에? 플라톤에서도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이상국가가 실현되고, 공자에서도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자연스럽게’ 이상국가가 실현된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에는 당연히 군주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포함된다. 군주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자연스럽게’ 이상국가가 된다는 것은 유교의 대의 아닌가?
그렇다면 평가원 어린이들은 혹시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해야 하는데 선지에서는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이라고만 했으니까 정답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수험생 입장에서 보면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이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정말 어떻게 이런 '국어적인 문제'까지 수험생들이 알아서 해석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게 무슨 '수능' 시험인가?). 나아가,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이라는 문장은 당연히 ‘역할에 충실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었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위 예에서도, 무도한 국가에서는 제후가 예를 정하는데, 이는 제후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역할이 분담되었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데 무슨 '역할이 분담되었다'고 할 수 있나?) .
평가원 어린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위 선지를 제시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제시했지만, 나는 여전히 평가원 어린이들이 ‘이상적 국가’라는 말은 오직 플라톤에게만 사용할 수 있고 공자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선지를 위와 같이 만들었다고 본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평가원 어린이들의 사고수준은 정확히 고딩 애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평가원은 이의제기에 대해서 매번 “자신 있을 때에만” 해설을 제시해왔다. 평가원은 문제된 위 선지가 정답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자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번에 꼭 그게 왜 정답에 포함되지 않는지, 해설을 공개해주기 바란다.
2.
지금 위 선지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이의제기를 하고 있다. 이 학생들이 정말 공부가 안 돼서 저 선지를 틀렸을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평가원 어린이들도 알 거라고 본다. 오히려 충분히 공부가 된 학생일수록 ‘고민하다’가 틀린 사례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래서 평가원은 정답이 명확하게 나오는 선지들만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며 공부를 해온 수많은 학생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된다. 정말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평가원이 위의 ㄹ 선지를 고른 학생들도 구제해주는 조치를 취해 주었으면 한다. ②번과 ④번 모두 정답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ㄹ이 절대로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평가원이 자신이 있다면, 해설을 공개해주기 바란다. 그렇게라도 해준다면 수많은 수험생들의 피눈물을, 일부나마 닦아줄 수 있을 것 같다.
3.
이번 수능 생윤 문제들의 특징을 보면, 선지 길이를 맞춰 왔던 그간의 관행에서 해방됐다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출제 들어갔을 때에도 선지 길이를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막상 선지 길이를 맞추다 보니 재미도 있었고, 그 길이를 맞추는 것 또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물론 문장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억지로 선지 길이를 맞춘 문제들은 티가 나는데, 문장이 억지스럽고, 촌스러우며, 때로는 이 때문에 오류가 된다.) 그 후부터는 선지 길이를 맞추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아 왔다.
이번에 평가원이 선지 길이를 맞추는 작업에서 해방된 것은, 그 길이를 맞추는 작업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 그건 좋다. 다만 이처럼 선지 길이가 자유로워진 것만큼 수준은 더 높아져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외에도 오류는 널려 있다. 더 올릴지 말지 고민 중이다. 내가 매번 받는 것 없이 우리 평가원 어린이들을 가르쳐주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원이 나에게 오류 지적해주는 1문제당 1억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고 보는데, 우리 평가원 어린이들 생각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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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의제기 게시판에 보니 어떤 분이 을 제시문에도 문제가 있다는 글을 올렸네요. 주요 내용은 '절제'는 생산자뿐 아니라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인데 제시문이 이를 오해할 수 있게끔 잘못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타당성 있는 지적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 문항 볼 때 선지에만 눈길이 가서 제시문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생산자는 절제를 지닌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죠. 큰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예전에 한삶 님이 교과서 오류 중 하나로 '절제는 세 계급이 공통으로 갖는 것인데, 일부 교과서에서는 생산자만 갖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논문이 평가원 게시판에 올라 있다고 여기에 소개한 적이 있죠. 그분이 그 이의제기를 한 것 같은데, 절제를 세 계급이 모두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라서(평가원 기출문제에도 있죠) 출제진 애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생산자가 절제를 발휘한다'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라서 그렇게 제시문을 구성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