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船南面 東岩里)에 살고 있으면서 서울에서의 3·1독립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우렁찬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곳 유림들도 이에 호응하여 일으킨 성주읍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성주읍에서는 이미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리(船南面 仙源里)에 사는 이현호(李玄琥) 등이 성주읍 시장에서 만세를 부른 일이 있으나 큰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확대되지 못하였고 4월 2일 유림계통과 기독교계통이 연합전선을 펴 함께 봉기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만세시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이날 성주읍 장날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나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4개월 후인 1922년 3월 9일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註·判決文(1919. 4. 28 大邱地方法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68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