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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6일차(2022.11.7)
40. 죽림굴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현재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근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렸다.
폭 7m, 높이 1.2m 규모지만 입구가 낮아 눈에 잘 띄지 않아
은신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Catacombae)였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홍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 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비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 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다.
어제 방문하려고 했다가 단풍객들로 인해 포기하고 다시 찾은 죽림굴.
순례자들이 가장 난코스라고 하는 곳 중의 하나로 왕복 3시간을 걸어야 한다.
전에는 언양성당에도 순례도장이 있었지만, 죽림굴을 방문하진 않는 경우가 많아
지금은 죽림굴 안에 도장이 비치되어있어 직접 등산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언양숙소에서 6시 출발 6시 30분에 등산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몸이 불편해 주차장 바로 아래에 있는 김밥.어묵파는 집에서 기다리게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주위의 단풍을 보며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앞에는 등산객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오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시로 보이는 안내판에는 죽림굴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걱정이 되었지만 안내책자 지도를 보니 맞는 것 같아
더욱 빨리 오르다보니 50분 만에 간월재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죽림굴은 찾을 수가 없었다.
휴게소에 이미 간월산 억새를 보기위해 올라온 젊은 연인 한 쌍이 있어
죽림굴을 찾는다고 지도를 보여주자 이리저리 길을 찾더니
잘못 올라온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일정도 빡빡한데 2시간 가까이 허비한 것이다.
내려올 때는 거의 뛰다시피하여 내리막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올라오는 등산객을 차례로 6팀 정도 만났는데
그 중에는 나에게 간월재가는 길이 맞느냐고 물어와
친절히 가르쳐주는 가이드 역할도 했다.
등산로 입구인 주차장에서 6시 반에 출발했는데
1시간 40분 후인 8시10분경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리도 아프고 허기가 졌지만 김밥과 오뎅을 허겁지겁 먹고
아내와 함께 다시 올바른 등산로 입구를 찾아 차를 몰았다.
한참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니 위의 표지판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다시 죽림굴을 향해 올라갔다.
왕복 2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마음은 급했지만 이미 2시간 가까이 등산을 한 후라
몸이 조금 전만큼 말을 듣지 않았고, 조금 전 올라갔던 길보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계속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입구에서 20분 쯤 오르는데 앞에서 젊은 남녀가 내려온다.
청년이 앞에서고 뒤에 여자가 따라오는데 청년이 나에게 묻는다.
간월재 가는 길이 맞느냐고?
조금 전 나는 간월재를 다른 길로 갔다왔기에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차를 가지고 왔느냐고 묻자, 아래 주차장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죽림굴을 가려고 조금 전 잘못 찾은 주차장을 설명하자
여자친구가 '그것봐! 제2 주차장이라고 했잖아!' 하면서 투덜거린다.
두 분이 이 일로 기분상하지 않고 좋은 산행이 되길 빌며 다시 오른다.
나는 왕복 2시간을 허비했는데 그들은 1시간 이내니 나보단 상황이 나은 편이다.
거의 다 온 지점에 모녀가 산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70대 정도이고 딸은 40대 정도로 보였다.
죽림굴 가느냐고 물으니 간월재를 간다고 했다.
그들은 조금 아래 자연휴양림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간월재에서 죽림굴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 길도 몰랐고 아내가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었기에
올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고 자위해본다.
그들을 추월해서 산을 오르니 50분 만에 죽림굴에 도착했다.
죽림굴을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그들을 만났다.
어머니 말씀이 '건강해서 좋습니다' 하고 나에게 말했다.
순간 기분이 좋아지면서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30분만에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었다.
결국 죽림굴을 갔다 오는데 4시간 가까이 소요된 것이다.
울산에 들러 양산에서 점심약속이 있기에 서둘러 울산으로 출발했다.
오늘 죽림굴 순례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다리도 후둘거리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울산으로 가는 차에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며 생각해본다.
길을 잘못 들었기에 평생 가보지 못할 수도 있는 영남알프스라 일컫는
간월산과 신불산 갈래길인 간월휴게소와 억새군락지를 갈 수 있었던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기쁘다.
41. 울산병영순교성지
울산 병영 순교 성지는 예전에는 장대벌 성지라고 불리었습니다.
장대벌은 장대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인데
장대는 지휘관이 병사들을 지휘할 때 올라가던 돌로 쌓은 대를 말합니다.
당시 병영은 군사를 훈련하는 장소이면서 중죄인을 처형하는 장소로도 쓰였습니다.
첫번째 순교자인 오치문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난 진목정성지,
경주관아와 옥터에서 설명드린 세 분의 복자도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허인백이 한 말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사람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어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ㆍ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이들은
1868년 9월 14일 참수형을 받았다.
아내의 은사인 김** 선생님과 남편을 찾아뵈었다(12시 30분)
양산 아파트로 찾아가 댁을 방문하여 잠시 기도를 한 후
죽림굴에서 시간을 많이 낭비했기에 곧 바로 근처 식당(화화갈비)으로 갔다.
인기있는 업소라 번호표를 받고 10분 기다리다 안내를 받았다.
김**선생님은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 손수 만든 소품과 손편지를
한 해도 거르지않고 우리 부부에게 보내시는 아주 성실한 분이다.
그래서 바쁜 일정임에도 시간을 내어 만나뵌 것이다.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구입한 경주빵을 전하고
점심은 우리가 대접했다.
제주에 돌아와 밀감 1상자를 보냈다.
선생님은 여행중에 먹으라고 삶은 밤을 반씩 쪼갠 것과 숟가락,
삶은 계란, 삶은 고구마 한 보따리를 주셨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것이 무척 좋았다.
조만간 여유있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것을 약속하며
선생님댁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는 김범우묘소로 향했다(14시)
42. 김범우묘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의 묘가 발견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에 근거하여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가족에게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호구단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범우의 유배지가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의 송기인 신부와 김범우의 후손들,
그리고 영남 지방 교회사 연구에 몸 바친 마백락 씨 등은
몇 년에 걸쳐 밀양과 삼랑진 지역을 답사하고 수소문한 끝에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손임덕, 당시 78세, 집안 대대로 묘지를 관리)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43. 명례성지
낙동강 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명례 성지는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일찍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곳이다.
이곳은 네 가지 문화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년)가 출생한 곳이다.
둘째, 영남 지방의 넷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셋째, 명례 본당의 초대 본당 신부이자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이자 한국에서 서품된(1896년) 첫 사제인
강성삼 신부의 사목지이며 돌아가신 곳이다.
넷째, 2011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된
성전 건물의 역사적 의미이다.
1938년 첫 성전을 축소 복원한 내부는 남녀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으며
벽을 향한 제대 및 그 위에 모셔진 십자가와 장미의 성모님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신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진례성당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지를 찾기가 어려워 문의하러 진례성당에 들렀다.
일몰이 가까운 시각에 주차장옆에서 산책을 하고 계셔서 신부님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시는데 반기는 표정이 아니셨다.
묻지도 않았는데 빅토리노 순교자 묘소 순례도장은 묘소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약도를 주시면서 찾아가기 힘들다며 설명을 해 주셨다.
그러면서 성지순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
참다운 신앙생활은 성지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일상생활에서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순례책자를 만든 것 자체가 잘 못된 것이며
그런 결과 천주교의 현실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부님의 의견에 공감하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너무 한 면만 보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신부님에게 조금 맞장구를 쳐드렸다.
성지개발에 있어 너무 편의시설 위주로 생각하다보니 옛 그 모습을 느끼기에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빅토리노 순교자묘는 옛날 그대로라고 강조하셨다.
성당 내부는 잠겨있어 보지 못하고 묘소는 내일 방문키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이전에는 순례도장을 성당에 비치해 놓았는데
순례도장을 찍은 후 묘소를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순례도장을 묘소에 두게 되었는데 지금도 도장을 찍으러
성당에 드나드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은 아닌지~
다음 날 묘를 찾아가 참배하고 보니 우체통처럼 만든 박스안에
도장이 2개 있었다. 성지도장과 진례성당 도장이 함께.
어렵게 찾아왔으니 성당도장도 찍으라는 것인가?
하며 아내와 서로 마주보며 잠시 웃었다.
뮤모텔(숙소)
순례길에 아내의 1년 후배가 운영하는 모텔을 방문했다.
순례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기회라 선택했다.
해가 지고난 후 도착해보니 주위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잠시 라스베가스나 영업사원 시절 부산 남포동에 온 것 같았다.
너무 의외의 모습에 요즈음도 이런 곳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후배를 만나 방을 안내받고 짐을 푼 후
후배가 소개해 준 음식점(어시장)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부산에서 살던 때가 생각나서 꼼장어 구이, 멍게, 조개탕을 시키자
사장님이 굴은 서비스로 주었다.
양이 너무 많아 옆 테이블에서 먹고있던 40대 자매님 4분에게
손도 대지않은 조개탕을 아내가 떠서 건네자 너무 고마워했다.
직장맘 들로서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는 중이라 했다.
아내는 후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하며 먼저 나갔고
나는 식사를 마저하고 계산한 후 거리구경을 했다.
조금 후 아내가 계산하려고 하니 지갑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후 둘이서 차량이랑 숙소에 벗어놓은 옷가지들에서
지갑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스승과 점심식사 후 계산한 이후에는 지갑을 꺼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점심식사한 음식점에 전화했으나 습득한 것이 없다고 한다.
바로 카드사에 정지 신청을 해놓고 배를 탈 때 필요한
신분확인을 위한 서류를 내일 준비하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오는 방과 복도의 조명이 화려해서
내가 젊은 사람으로 착각을 했다.
오늘이 다사다난하고 제일 힘든 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승도 만나고 후배도 만나고 기대하지 않은
여러가지 경험을 한 은총의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육신이 너무나 피곤해서 대충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내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카운터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