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7) 에제키엘서
완전한 멸망에서 일어설 용기 · 희망 주시는 주님
히브리어 구약 성경 「타낙」은 에제키엘서를 ‘예헤즈케엘’이라 표기합니다. 예헤즈케엘은 우리말로 ‘하느님은 강하시다’ ‘하느님께서 강하게 힘을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 「칠십인역」은 ‘Ιεξεκιηλ’,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Ezechiel’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에제키엘서’로 음역해 표기합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에제키엘은 차독 계열 사제인 부즈의 아들로 기원전 597년 제1차 유다인 유배가 있을 당시 예루살렘에서 사제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1차 바빌론 유배 때 유다의 여호야킨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에제키엘이 임금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유다 사회의 유력한 지위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에제키엘은 유배 중 기원전 593년께 바빌론의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후 그는 기원전 571년까지 22년간 예언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맥을 잇고, 제2이사야보다는 조금 앞선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제키엘의 활동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됩니다. 전반부(에제 1-32장)는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기원전 597~587년)으로 아직은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기 이전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 사제 시절 이미 치드키야 통치하의 유다를 위해 예언을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행되고 있던 우상 숭배를 신랄히 비난하면서(에제 8장) 하느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경고합니다. 후반부(에제 33─48장)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붕괴되고 제2차 유배가 단행된 이후(기원전 587~571년) 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너지자 에제키엘은 하느님 구원에 대한 새롭고 희망적인 약속을 선포합니다. 아내의 죽음(에제 24장)이 그의 예언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하느님께 변함없이 충실하도록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구원을 선포합니다.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당대에 대부분 기록되고 그의 제자와 추종자들에 의해 편집돼 유배 시기가 끝날 무렵 최종 완성됐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짐작합니다. 에제키엘서는 당대까지의 신학, 곧 호세아, 아모스, 제1이사야, 예레미야 등 이전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신학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해 놓았습니다. 이는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의 신학이 균형 있게 종합돼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전기 예언서와 관련된 전통들도 발견됩니다. ‘주님의 손에 사로잡힘’, ‘영에 사로잡힘’ 등이 그것입니다.
에제키엘서는 ‘소명 사화와 주님의 현현’(1-3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 선포’(4-24장), ‘주변 민족들에 내린 심판 선포’(25-32장), ‘이스라엘에 내린 재건과 위로, 새로운 성전과 새 땅에 관한 환시’(33-48장) 네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에제키엘서는 두 개의 지리적 장소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바빌론 니푸르 부근 크바르 강가의 텔 아비브(에제 1,1.3; 3,15.23)와 예루살렘(에제 8,3; 11,23; 40,1-2) 입니다.
‘소명 사화와 주님의 현현’ 부분에선 에제키엘이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는 환시가 소개됩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는데 그 두루마리가 꿀처럼 달았습니다. 이후 에제키엘은 주님의 영과 손에 의해 유배지로 옮겨집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 선포’ 부분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행해졌던 신탁이 수록돼 있습니다.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를 보게 되는데 성전이 더럽혀지고 우상이 세워지며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결국 크바르 강가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가게 됩니다. ‘주변 민족들에 내린 심판 선포’ 부분은 암몬, 모압, 에돔, 필리스티아, 티로, 이집트의 이민족들에게 내리는 신탁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에 내린 재건과 위로, 새로운 성전과 새 땅에 관한 환시’(33-48장) 부분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상황에서 에제키엘이 유다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미래의 회복을 전합니다. 이러한 미래에 있을 회복은 이스라엘의 내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돌같이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새 마음, 살처럼 부드러운 심장을 넣어 주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서로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아 올라오며 살갗이 덮인 후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자 모든 사람이 되살아납니다. 에제키엘은 마지막으로 재건된 새 성전을 중심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남북의 분단 없이 하나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할 것이며, 떠나가셨던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신다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성전 문턱에서 솟아나오는 은총의 물로 비옥해진 새 이스라엘에서 하느님께 새로운 경신례가 바쳐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에제키엘서 18장에는 매우 독특한 내용 하나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느님과 개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다인 개인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행동과 삶에 책임을 진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구약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제로 유다이즘 신학의 배경이 됩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 한발자국 내딛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묵상할 때 늘 떠나는 것에 초점을 두었는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묵상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김미소진(마리아) 작가의 「그래도 앞으로 가보지, 뭐!」를 읽으면서 마음에 두려움을 간직한 채 하느님을 믿고 삶을 한발자국씩 내딛는 작가와 아브라함이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편안한 안주에 대한 미련, 미지에 대한 두려움, 갈까 말까하는 망설임, 그런데 그때 내딛는 그 한발자국이 인생의 지도를 바꿔버린다.
아브라함은 유다인들이 공경하는 성조(聖祖)이며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인물이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일생 최고의 시련, 아들 이사악 봉헌을 결정했을 때 그는 절대적인 복종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신앙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앙은 때로는 이론이나 합리로 설명이 불가한 초월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칼데아는 당시 최고의 문명 도시였다. 갑자기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요지는 “고향, 아버지가 있는 이 땅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대신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네 편이 되어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시대에 고향을 떠나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이름 모를 깡촌으로 떠난다? 성경의 행간(行間)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왜 나만 갖고 그래?” “옆집 아무개 다른 사람이 가면 안 되나?” “하느님 말씀만 있지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데 미치겠구먼!”
결국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만을 믿고 부모와 고향과 이별한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일행은 네겝 지방에 도착했는데 기근이 들어 풍요로운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이집트의 파라오는 아내 사라에게 흑심을 품었다. 눈치 빠른 아브라함은 자신과 가족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지자 아내를 동생이라 둘러댔다. 생존 앞에서는 체면 등 어떤 가치도 의미 없다.
정작 큰 문제는 나이 지긋한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초조해지면 판단력을 잃는다. 사라는 가장 충성스런 여종 하가르를 아브라함의 침소로 들여보냈고, 다행히 아들을 낳는다. 하가르는 본색을 드러내고 기고만장해졌고 아브라함의 집안은 갈등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하가르는 아들과 광야로 도망쳐 피를 토하며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백 살에 사라에게서 아들 이사악을 안게 된다.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데 행복도 잠시뿐 인생 최고의 시험에 들게 된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 아브라함은 일생의 가장 큰 시련에 빠졌다. 그는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3일 동안 인생의 가장 긴 길을 걷는다. 혼란과 갈등, 고민 끝에 아브라함은 결정했다. 이사악을 바치기로.
아브라함은 일생을 살면서 모든 건 결국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무척 고단했고 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족한 채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인이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요나가 타르시스로 가려 한 까닭은
이스라엘의 서쪽에는 지중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큰 바다” “서쪽 바다”로 소개되는 지중해는 이방인 선교와 깊이 관련된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면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이사 11,9을 떠올리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 ‘요나’가 이방인 선교를 맡았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비둘기’인데요, 과거 비둘기가 전령 구실을 하였듯이(창세 8,8-12) 요나도 먼 니네베까지 가서 주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비둘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기도 하므로(시편 74,19), 요나는 하느님의 맏아들로서 온 세상에 주님을 알려야 하는 이스라엘(탈출 4,22)의 대표격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이방인들이 자기들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길 바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피하려고 비둘기처럼 어리석게(호세 7,11) 행동합니다. 하느님이 바다와 뭍을 만든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면서도(요나 1,9) 그분을 피해 바닷길로 도망가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지중해의 야포 항에서 타르시스행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타르시스행 배를 탔을까요? 그 이유는 타르시스가 옛 이스라엘에서 세상 끝처럼 여겨진 곳이라는 데 있습니다(시편 72,10-11 등). 이사 66,19에는 타르시스가 ‘주님 영광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먼 섬들’과 병행어로 소개됩니다. 이후 야고보 사도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가지요. 타르시스로 추정되는 ‘타르테수스’ 유적지 역시 오늘날 스페인(남부)입니다. 니네베의 정반대 편입니다. 그렇다고 요나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타르시스행 배를 탔던 건 아닙니다. 타르시스가 니네베 반대편의 세상 끝과 같은 곳이니 니네베로 가지 않겠다는, 최대한 거기서 멀어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려 한 건 요나 1,3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나는 주님을 피하여 타르시스로 달아나려고 (···) 야포로 내려갔다. 마침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 배에 올랐다. 주님을 피하여 (···)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한 절에서 “타르시스”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주님의 피하여”라는 구절이 수미쌍관으로 나옵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요나가 항구로 갔다는 의미지만, 주님을 거역하려 했다는 느낌도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서 멀어지려는 시도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전이 자리했던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지금도 ‘올라간다’라는 표현을 씁니다(에즈 1,3; 예레 31,6 등). 요나는 하느님 눈에서 멀어지려고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라는 이름은 다른 사실도 암시합니다. 집을 잊지 않고 돌아오는 비둘기처럼 그 역시 결국엔 주님께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호세 11,11). 이런 상징성 때문일까요? 신약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지중해의 야포 항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사도 10장).
[성경, 하느님의 말씀] 성경, 세상과 인간을 비추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말씀
태초에 하느님께서 온 세상과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큰 뱀들, 소위 고대 신화 속의 용 또는 레비아탄에 비길 수 있는 존재들 또한 있었습니다(창세 1,21). 그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 1,25). 그런데 하느님의 이 말씀은 성경의 또 다른 이야기에서 일련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 및 지혜 전통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그 큰 뱀들을 적대하시고 패퇴시키시는 하느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 27,1; 51,9; 에제 29,3; 32,2; 욥 7,12; 시편 74,13). 사실,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성경 내에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참으로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과 함께 하늘과 땅의 질서를 세우십니다(창세 2,1). 이어서 거룩한 시간을 세우시며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십니다(창세 2,2-4ㄱ). 이렇듯, 아무 죄 없이, 은총 속에 태어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뱀이라는 유혹자의 손에 이끌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창세 3장).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대적할 존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왜 인간은 은총을 누리면서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까? 어찌하여 지고선(至高善)이신 분께서 악의 실존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느님과 세상-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써 명약관화하게 해결되는 의문입니까? 아니면 설마 몇몇 무신론자들의 푸념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상대로 무력하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이 모순점들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이라 하겠습니다.
허나 굳이 그 열매를 따 먹지 않은 이에게도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모순점들을 전하는 성경의 설화적 현실이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신다고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적대시되는 일들(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윤리-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기는커녕 부모 자식 간에 반목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남의 소유를 도둑질하며,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을 상대로 창세기의 아담-하와이면서 동시에 뱀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네 현실에 대한 상징이 되어줍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 뜻에 따라 잘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낙관주의에서 비롯된 하느님 사랑의 일원론(一元論)을 비루하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말씀 그 자체이신 분께서 이루시는 강생의 신비에 따라 성경은 그분께서 실제 살로 취하신 인간의 얼굴과 그 가운데 천막을 세우신 세상(요한 1,14)에 대한 대조 그림을 내놓음으로써 자기 본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 대조 그림과 우리 현실 사이의 ‘연속성 가운데 비연속성’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앞으로 1년간, 1달에 한 번 쓰일 이 칼럼은 하느님 말씀으로서 성경이 조명하는 인간 군상의 민낯과 그 민낯을 마주 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할 것입니다. 그로써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늘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immanent), 우리와 다르신(transcendent) 하느님을 지향하기를 요청받는 존재로 조명될 것입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예수님의 세례, 우리의 세례(마르 1,9-11)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한 남자가 길을 떠납니다. 오랫동안 광야에 머물며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주님을 맞이하고자 준비하던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남자는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설교를 듣게 된 사람들은 그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 외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유다와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길을 떠난 그 남자는 어느덧 요르단 강에 도착했습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뒤엉킨 사람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는 조용히 사람들 틈에 끼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후, 차례가 되어 그 남자도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강물에 온몸을 담갔습니다. 그런데 다시 물 위로 올라온 그 순간,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이 사람들 앞에 펼쳐집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그 사람 위에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놀라운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 소리는 도대체 뭐지? 지금 물 위로 올라온 이 사람에게 내린 저 성령과 하늘의 음성은 무슨 뜻일까?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사람들은 이 남자가 자신들과는 다르게 하느님과 유일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면서, 바로 나자렛 출신의 이 남자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예고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당신의 피로 인류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세례의 참된 주인이십니다.
마르코에게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어야 했을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면 굳이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분명 마르코는 이런 질문에 침묵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자신은 단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이고, 자신은 단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 모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했던 언급이 눈에 띕니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이 사건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하느님의 계시이며, 동시에 교회가 베푸는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에게도 성령이 함께하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는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명, 곧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하시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56) 바룩서
진정한 참회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오라
바룩서는 구약 성경 제1경전인 히브리어 「타낙 성경」에 수록돼 있지 않은 제2경전에 속한 예언서입니다. 따라서 바룩서는 헬라어 「칠십인역」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작품입니다. 「칠십인역」은 바룩서를 ‘Βαρουχ’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Baruch’으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바룩서’로 음역해 표기하고 있습니다. 바룩은 우리말로 ‘축복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인들이 바룩서를 읽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바룩서를 라틴말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가타」에 수록된 바룩서는 예로니모 성인이 옮긴 것이 아니라 고대 라틴어 역본입니다.
「칠십인역」은 예레미야서-바룩서-애가-예레미야의 편지-에제키엘 순으로 배열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불가타」 바룩서는 ‘바룩서 본문’(1-5장)과 ‘예레미야의 편지’(6장)을 합쳐놓았습니다. 그리고 「불가타」는 예레미야서-애가-바룩서-에제키엘서로 배치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의 전통을 따라 바룩서를 애가와 에제키엘서 사이에 놓고,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인 6장으로 싣고 있습니다.
바룩서는 현재 헬라어 사본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바룩서의 1장 1절에서 3장 8절까지는 본래 히브리어로 저술됐고, 나중에 헬라어로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편지도 바빌로니아 유배 지역에서 본토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경계하기 위해 본래 히브리어로 작성됐으나 후대 헬레니즘 셀레오코스 왕조 시대에 헬라어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룩은 힐키야의 현손이며 하사디아의 증손이고, 마흐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입니다.(바룩 1,1)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비서이고 친구이며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지시로 하느님의 신탁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백성에게 읽어 주었습니다.(예레 36,1-8) 유다 왕국 여호야킴 임금이 이를 칼로 조각내 불태워 버리자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을 더 적어 넣어”(예레 36,32) 두루마리를 새로 엮어낸 자입니다. 아울러 그는 친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이집트로 끌려간 후 행적이 묘연해진 인물입니다.(예레 43,1-7)
바룩은 이 책을 갈데아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해 불태운 지 5년째 되던 해인 기원전 582년 다섯째 달 7일에 바빌론에서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바룩 1,1-2 참조)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2세기 후반 사이에 바룩의 이름을 빌린 익명의 저자가 이 책을 저술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다인 유배에 관한 당시 문헌의 정보와 바룩서에 실려있는 내용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룩서는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남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동족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고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 쓰인 작품입니다. 바룩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생긴 단절을 공인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둘 사이의 화해로 끝납니다.
바룩서는 ‘역사적 서문’(1,1-14), ‘참회 기도’(1,15-3,8), ‘지혜에 관한 명상’(3,9-4,4),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4,5-5,9), ‘예레미야의 편지’(6장)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바룩서의 역사 배경을 전하는 ‘첫째 부분’에는 저술 시기와 낭독, 예배, 예루살렘을 위한 모금, 성전 기물 반환 등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를 나열한 후 고백하고 하느님께로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참회 기도를 전합니다. ‘셋째 부분’은 이스라엘에 지혜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넷째 부분’은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는 권고와 위로 말씀을 시로 전해줍니다. ‘다섯째 부분’은 예레미야의 편지로 우상 숭배에 대한 철저한 배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방 우상들은 신이 아니며 무용하고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며 유다인들의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신이시다고 선포합니다.
바룩서는 이스라엘의 주님만이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며(바룩 3,36)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로서 온 세상에 대한 절대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바룩서는 유다인들의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그분을 거역하고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며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에 일어난 징벌이라고 규정합니다.(바룩 1-2장) 이러한 징벌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묻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참회를 통해 하느님께로 되돌아와야 하며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바룩 4-5장) 아울러 바룩서는 ‘지혜’를 생명의 근원(바룩 3,12)이라고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율법과 동일시합니다.(바룩 4,1-4)
가톨릭교회 전례에도 바룩서 내용이 봉독 됩니다. 특히 3장 9-15절, 3장 32-4장 4절은 파스카 성야 미사 제6 독서로 봉독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