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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백성의 특권과 책임
출 19: 1-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또한 무한한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 인간의 삶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 신비스러운 방법인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 특권은 거기에 합당한 독특하고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말도 거칠고 교묘하게 거짓말도 하고, 사람들을 차별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무례하고, 자신을 이익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뇌물을 밝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신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제가 자주 들르는 테니스장에 무례하고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고 침을 함부로 뱉으며 사람들을 무시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대전극동방송국에 녹음을 하러 가다가 그 무례하고 천박한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그 방송사의 이사이기 때문에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무척이나 실망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신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말은 '계약'이라는 말도 되고, '약속'이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집이나 은행대출 등 여러 가지 종류의 계약을 맺기도 하고 약속도 하며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가 비교적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이 '약'(約)이라는 말이 바로 '계약' 또는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리켜 '약속의 책'이라고 하기도 하고, '언약의 책'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근거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이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끈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언약은 신구약성경의 중심되는 주제이며, 우리 믿음의 아주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은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는 언약가운데 하나인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내용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받은 특권이 무엇이며, 동시에 그 특권을 어떻게 유지하고 그 안에 약속된 축복을 누리는지의 방법인 책임문제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언약백성의 특권인 시내산 언약
우리 믿음의 중요한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적 기초가 되는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19:3-24: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석 달이 지난 다음에 시내광야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출19:1). 이 시내산은 언약의 전체적인 구조는 우리 믿음의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잘 이해하는 일은 우리 믿음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풍요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시내산 언약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그 구조는 우리가 우리 사회에서 계약을 맺는 방식과 거의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 역사적 서언(historical prologue, 출 19: 4)
이 역사적 서언은 언약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4에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불과 석달 전에 출애굽할 때 애굽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일부터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사건과 반석을 갈라 물을 내게 하신 초자연적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셨는지를 할 줄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God's promise, 출 19: 5-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출애굽기 19:5-6에 나타나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 약속의 내용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여기에 '내 소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서굴라'(ࠄठࡱ॔, my treasured possession)라는 말인데 아주 의미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어떤 뜻일까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보호해 주고 싶은 존재가 무엇입니까? 고대 근동의 여러 문서를 보면 그것을 '서굴라'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번역할 때 가장 보배롭고 귀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고, NIV성경은 '내 보석같은 존재'(My treasured possession)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용어와 함께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의미는 바로 온 천하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과 만나 그의 뜻을 세상에 알게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어떤 역할(function)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치와 신분에 관계된 표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보석같은 존재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까요? 그것은 이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볼 때 하나님과 관계의 끈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좋을까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자 할 것입니다.
(3) 모세의 중재(negotiation by the mediator, 출 19: 7-8)
언약을 맺는 이 내용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응답을 하나님에게 전하는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였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고,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4) 언약 당사자들의 대면(meeting of the partners, 출 19: 9-25)
그러자 하나님은 언약을 맺자고 하시면서 언약을 맺기 위하여 사흘간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흘간 준비하면서 옷을 빨았고, 성관계도 가지지 않아야 했습니다. 사흘을 기다렸다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의 합당한 태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흘이 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불과 구름과 진동, 소리와 같은 특별한 자연현상을 동반하여 임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 산밑에 서 있었습니다.
(5) 언약 조건 1 : 십계명(출 20: 1-17)
그러자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을 예수님은 두 가지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는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22:37-40). 하나님께서 이 계명은 시내산에서 불과 연기와 구름과 지진으로 임재하여 십계명을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출20:22; 참조 레25:1).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법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백성들과 함께 있어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출20:20). 이 계명은 법적인 용어로 반드시 필연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주어졌다고 하여서 필연법(Apodictic Law)이라고 부릅니다.
(6) 언약 조건 2 : 십계명의 구체적인 적용(출 20:18-23: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난 뒤에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모세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실제 살게될 여러 사회적 상황 가운데 적용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고 할 때 고의성이 없이 사람을 사고로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빠져 함께 나무를 베던 사람이 죽었을 경우라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사회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계명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을 결의법(Casuistic Law)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모를 욕하고 때릴 수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의 재산을 도적질하거나 속여서 빼앗을 수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거짓말로 이웃의 명예를 더럽힐 수가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뇌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7) 언약의 비준(출 24: 4-8)
그리고 우리가 어떤 약속이나 계약서를 쓸 때 서명을 하고, 만약에 약속이나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 처벌규정을 기록하고 서명하듯이 소를 잡아 화목제를 드리고 피를 단과 백성에게 뿌리므로 언약에 조인하였습니다. 백성을 향한 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서에 기록된 내용을 이행하겠다는 서약을 한 후에 뿌려졌습니다. 이 피의 제사에서 피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의미합니다. 피가 뿌려졌다는 것은 그 뿌림을 당한 당사자가 서약에 임할 때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언약서에 약속한 대로 보석같은 존재(ࠄठࡱ॔)와 제사장 나라로 대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겠다는 뜻이고,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는 백성들이 그들의 생명을 내어놓겠다는 뜻입니다.
(8) 언약의 기쁨을 축하함(출 24: 9-11)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고 난 후에 그것을 기뻐하며 먹고 마시는 기쁨과 감사의 축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내산 언약의 구조를 볼 때 일반적으로 계약을 할 때 계약당사자가 있고, 필요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이행하지 못할 때 처벌규정까지 넣어서 서명한 다음에 악수하고 연회를 베푸는 일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내산 언약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과 자기백성과 언약을 맺음으로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내산 언약의 문맥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약적인 축복을 누리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명을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을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언약서에 약속된 축복을 누리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규범이고 특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내산 언약을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언약백성의 책임
이 시내산 언약의 문맥에서 볼 때 출애굽기 23:1-9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사회적인 상황에 적용해 주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러 면 중에서 실제적인 한 가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출23:1-2, 7).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23:1-2을 보십시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번역에 '허망한 풍설'은 히브리어 성경에 '쉐이마 솨버'(ࠀࢭ ࠒऩ্)라는 말인데 거짓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과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재판정에 설 때 자기의 이기심이나 다수의 편에 서서 부정당한 증거를 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어떤 경우에서든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말은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화평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말은 사람들과 관계를 단절시키고 교회공동체를 무너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말의 힘에 대하여 우리가 수요밤예배 때마다 연구하고 있는 야고보서에서 자세하게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만 야고보는 말의 힘에 대하여 야고보서 3:3-4에 아주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야고보가 여기에 달리는 말을 재어하는 작은 재갈과 큰 배를 제어하는 키라는 그림언어를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어떤 파워를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시내산의 문맥에서 보면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며, 언약서에 담겨진 약속을 누리는 방법이며, 언약백성의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그 중에 우리가 여러 인간관계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말을 사용하는 문제를 적용하였습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거짓말을 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이간시키고 교회공동체의 관계를 허물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인격이나 명예, 때로는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면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말을 통하여 사람들이나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서 가기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악화시키며 교회공동체 전체가 시커멓고 흉악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되면, 사실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그 말이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어 관계를 악화시키고 공동체를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좋지 않은 말은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고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고보는 야고보서 3:8-10에 보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선하고 좋은 말은 사람들을 세우고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말이 가지고 있는 파워입니다. 여러분! 거짓말이나 이웃의 인격이나 명예를 해하기 위한 거짓말이나 여러분의 재산상의 이득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하는 것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언약서에 명시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선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하십시오.
3. 시내산 언약과 우리
오늘 우리는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맺는 끈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기초를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뒤의 역사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언약에 명시된 대로 언약의 말씀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보석같은 존재로 여기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며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약의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무시하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살 때 징계를 받아 고통을 받다가 결국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뒤의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이행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 언약적인 책무를 대신 이행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뿌리시고 우리를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은 단순히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기초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기초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계명을 지키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식이며, 언약서에 약속된 축복을 누리는 방법이며,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내산 언약은 언약백성의 특권과 책임은 맞물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약백성으로서 약속된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가장 귀하고 보석같이 생각하는 존재요, 제사장 나라며 거룩한 백성이 되어 그 언약적인 특권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그 가운데 거짓말을 하지말고 선하고 좋은 말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시내산 언약에 약속하신 언약적인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율법의 축복
출 19: 1-9
많은 소유가 있음에도 불안하고 절망을 느낌은 진정한 가치와 소망의 문제
매일매일 잘 먹고 잘입고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는 살다가 가끔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배부르고 등따뜻하면 행복한 법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첫걸음이요 기초입니다. 그것을 빼고 어떤 형태로든지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십시오. 고깃국에 쌀밥 먹을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더 깊은 의미의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정말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 타고 좋은 데서 산다고 행복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구라파나 미국이나 일본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 나라의 자살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살만한 나라일 수록 자살율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먹을 것이 없거나 환경이 나쁠까요?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부유층이나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 중에 허무주의자가 많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나 행복이 물질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데 있으며 영적인 데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되지만 정신적, 나아가 영적인데서 그 행복이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물론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문제,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충족되었다고 광야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이틀이 아닌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목마를 때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없었을 때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떼가 먹을 것이 되고, 바위에서 샘물이 나고, 원수가 공격했을 때 그 원수를 물리친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버틸수 있었던 더 중요한 버팀목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인데 그 분을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대한 비밀스런, 그러나 기초적인 축복을 주셨지만 진정한 축복으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닌 말씀인 하나님과 동행하는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가장 핵심적인 축복은 율법과 성막입니다.
오늘은 율법의 축복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그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자신의 율법,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아야 할 원칙, 지침서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 먹고 그 말씀과 동행하여 삶으로써 광야같은 세상에서 40년을 아무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쓰라린 고통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것을 맛보고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을 사는 비결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만약 여러분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 속에 있고, 율법과 동행하며 산다면 분명히 이 광야같은 세상은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19장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애굽을 떠나서 삼개월이 되던 때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이 있던 니산월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월이 되었고 고대하던 시내산이 있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가야할 곳은 모래가 있는 광야가 아니었고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 시내산으로 가야만 했을까요? 시내산에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언제든지 시험이 들면 은혜받았던 처음의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장소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회복이 됩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았던 그 자리입니다. 바로와의 열번의 투쟁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물없는 곳에서 쓴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고, 먹을 것이 떨어진 곳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던 사막길을 건너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내렸던 시내산으로 삼개월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드디어 시내산 앞 광야에 온 백성이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당시는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약시대 사람들은 얼마나 축복을 받고 사는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막았던 휘장을 찢어지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을 만나고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벼랑끝에 서서 커튼뒤가 아닌 정면에서 모세가 만난 하나님
이것은 아주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때 그의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절망과 좌절의 끝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벼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벼랑끝에 한번씩은 서보게 됩니다. 그럴때 인간은 정직해 집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소망없이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양떼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습니다. 소망없이 양떼를 몰고 시내산 한 기슭을 걷고 있었을 때 떨기나무를 본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불꽃이었습니다.
불이 타고 있는데 나무는 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입니다. 보통 불은 전부 다 타고 말지만 하나님의 불은 타는데 타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인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모세는 거기 서 있는 불꽃에 빨려 들어갑니다. 불에 가까이 접근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커튼 뒤에서 만났습니다.
40년동안 분명히 하나님은 계시는데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 분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이 수면에 떠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모세의 삶을 인도하고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나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여기서 만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려 하노라
하나님이 자기 꿈을 모세에게 이야기 합니다.
애굽의 간역자들의 손에서 4백년 동안 매일 고통을 겪으며 고생하는 내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그들을 건져 내겠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꿈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아! 나는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를 통해 내가 21세기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 너희 민족의 통일을 이뤄주고 싶고 전세계의 모든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는 일에 너희 교회를 사용하고 싶다좦 좥내가 내 백성을 구원해야 겠다는 하나님의 꿈이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명령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40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광야에 홀로 버려진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능할 때 하나님은 유능해집니다. 여러분이 포기할 때 하나님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모세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할 수 없다, 불가능 하다, 나는 입이 둔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집요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가야 한다.
아마 오늘 이런 명령을 여러분에게도 내리실지 모르겠습니다.
모세는 권력의 화신인 바로와 대면하러 애굽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바로와 싸울 때 모세는 데모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의 힘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영적싸움은 혼자 하는 것입니다.
열번의 무서운 영적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싸움에는 장자가 모두 죽는 끔찍한 일들까지 생깁니다.
그러나 그 싸움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해 앞에 그들이 섰을 때 그들은 절망이라는 이름 앞에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와의 싸움보다 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가 보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원수들이 자기들을 공격하는 핍박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런 광야의 고난을 통과하여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주었던 그 명령을 의지하여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이 명령을 내렸던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 너희가 한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
그 이야기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4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하나님은 애굽에서 행한 모든 일은 너희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번의 싸움과 홍해를 가른 것은 모세가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하용조목사나 장로님들이나 부목사님들이 다 일으켜 세운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헌금과 은사와 노역을 사용하셨을 뿐이지 실제로 행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하게 한 것은 바로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어려운 천신만고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난 것은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안은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날개로 보호해서 여기까지 인도해 낸 것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항상 숨어계시지만은 않고 수면에 부상하듯 나타나셔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해서 독수리 날개로 업듯이 그들을 보호했는가? 그 험한 광야생활과 그 어려운 싸움에서 투쟁하게 하면서까지 여기로 오게 했는가?
그것은 하나의 약속, 축복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5, 6절에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간역자의 손에서 건져내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그 험한 광야를 통과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내 백성을 삼기 위함입니다.
너는 내백성이다. 너는 내 것 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를 구속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양자로 삼기 위하여, 내 자식을 삼기위하여, 내 상속자를 만들기 위하여, 내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버려진 사람이었고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마귀자식으로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져내기 위하여, 내가 너를 축복하고 내가 너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너를 건졌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그 댓가를 치루면서도 우리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여러분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댓가를 치루어도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너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내 소유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는 내꺼야라고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싫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좋지 않겠지만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꺼야! 너는 내 소유물이야! 내 백성이야
이렇게 소유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순종하고 내말을 지키면 이런 축복을 주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이 언약의 내용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조금 더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내산의 계약이 신약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를 애굽땅에서 내가 불러 내었고 광야의 그 험한 골짜기를 건너서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왕같은 제사장입니까? 택하신 족속입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백성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이것이 설교의 모범입니다. 설교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선포하면 백성들이 아멘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당신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이 축복들이 다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선포했더니 백성들이 일제히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말로 응답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멘입니다. 설교들을 때 아멘으로 받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는 어떻게 이 약속이 우리에게 올 것인가?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한 것은 너를 낮추시고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여러분을 낮추시고 시험하여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순종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순종과 헌신이 중요합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과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여러분이 능력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모세가 다시 한번 시내산에 올라가는데 굉장히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입니다. 불꽃나무 가까이 모세가 다가왔을 때 모세야! 모세야! 가까이 하지 말라 너 있는 곳은 성결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라고 막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축복의 산으로 올라가는 비결의 첫째는 순종이요. 그러나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순결과 거룩, 즉 성결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에게 요구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순결입니다.
순종과 성결앞에 하나님은 기가 막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8절을 보십시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절에서는 나팔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20절에 이르러 연기가 자욱한 시내산 꼭대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시고, 그 곳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름 속에서 천둥과 번개 속에서, 나팔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한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가득 찼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서 이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감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있는 사람이 들어오자 마자 꼬꾸라지고 귀신이 떠나가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내산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꽉 찼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소리지르고 싸우고 방자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 곳을 어찌 성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은 시장바닥입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장식하여도 그 속에서 서로 싸우고 소리지르고 세상의 방법이 모두 묻어난다면 이곳은 시장바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있는 곳입니다.
그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첫째는 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다, 너는 제사장이고 내가 너를 축복해 주겠다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 다음 그 연기와 나팔 소리와 번개와 천둥과 불속에서 모세를 부릅니다. 왜 부르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20장 1,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지침서들이 선포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말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받는 것만큼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의롭습니다. 율법은 축복입니다.
시편 19편 7절에서부터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광야같은 캄캄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춥고 배고픈 이런 기막힌 광야라는 악조건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40년동안 승리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율법이었습니다.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승리하며 사는 비결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세상에 제일 웃기는 사람들은 주일 한번 예배드리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저께 먹은 밥이 내일 배고픈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음식은 오늘 먹어야 합니다. 오늘 잘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부름이 내일까지 가지 않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은 내일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배불리 먹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올 것을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새벽기도회에 1천여명이 찼으면 좋겠습니다. 새벽기도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집에서 큐티를 하십시오. 말씀으로 매일 30분 이상은 묵상하여야 합니다.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이 내 속에 내주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살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외롭고 고독하고 속상하고 상처받는 모든 이유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배고프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무리 때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건들면 아픈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건강하면 파도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쳐도 요동치 않습니다. 세상에 불경기가 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붙잡고 광야생활 40년을 버텼던 것처럼 말씀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움으로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온누리교회가 창립 13주년을 맞으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갖게 됩니다. 자동차운전의 예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3단으로 달리다가 4단으로 달리기 위해 기어를 바꿀 때입니다. 새롭게 변할 것입니다. 지나온 것들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온누리의 비전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대일을 잘해 왔습니다. 우리 교회 상표가 두개인데 일대일과 큐티입니다. 큐티 하지 않는 사람은 온누리교회 교인인지 아닌지 의심해도 괜찮습니다. 일대일 하지 않는 사람은 온누리교회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부목사님들에게 나부터 일대일제자양육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이 누구에게는 기회를 주고 누구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 왜 편애하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저부터 일대일제자양육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니. 부목사님들도 다 일대일제자양육을 하라고 했습니다. 일대일제자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칠 수 있는 일대일지도자 과정을 마친 수료자 50%가 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모두 다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축복인 것을 깨닫고 도전 받으십시오. 배울 때보다 가르칠 때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배울 때는 졸지만 가르칠 때는 눈 똑바로 뜨게 됩니다. 배울 때는 결석해도 되지만 가르칠 때는 절대로 결석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지려면 가르치는 자리로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한 영혼을 안고,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에서 받는 축복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번 연단한 금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말씀을 연구하십시오. 최소한 하루에 30분이상 말씀과 동행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광야에 사는 여러분에게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광야에 사는 우리들은
외롭고 허전하고 고통스럽고
병들고 시련이 많습니다.
주님,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율법인 말씀으로
다 소성케 하여 주옵시고
영적으로 부강하게하여 주셔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