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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오늘 복음을 보면 두 여인 간의 만남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의 만남이지요. 태어날 아기들의 운명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인들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런데도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처럼 주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나옵니다. 지금은 나의 처지가 비천하지만, 언젠가 귀한 존재가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비록 내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으로 넘치리라는 희망이지요.
마리아는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비천한 사람은 낮은 신분, 또는 매우 겸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없기에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재산이나 명예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주님 앞에서 자신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비천한 자신을 택하신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께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넘치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나의 생활을 늘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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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믿음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5월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많은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올해는 성모님께 우리 가정을 봉헌하면서 묵주기도를 더 열심히 바쳐야지,
그리고 어머니처럼 더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어머니의 사랑을 나도...
열심히 살아간 5월 그 마지막 날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축일을 기념합니다.
환희의 신비 제 2단,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예수님의 잉태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을 오늘 전례는 기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한 사람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냥 소문 퍼뜨리고 수군거리기에 딱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 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걱정하고 불안해하기 보다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하려 한 것입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마리아는 달려가서 엘리사벳과 함께 임마누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이 우리가 즐겨 기도하는 성모송과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동정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고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엘리사벳은 지나치게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어버린 남편 즈카르야와 달리 불안과 걱정을
믿음으로 극복한 마리아를 칭송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은근히 자기 자신을 자랑할 만도 할 것인데
마리아는 이 인사말을 참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구원의 역사에 협력할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면서 저는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일에 대한 걱정만 하는 제 자신을
반성해 보았습니다.
걱정보다는 그 일 역시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고,
하느님의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순명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기 보다는 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잘못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역시 성모님은 우리 믿음의 모범이심을 느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모범이심을 오늘 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큰 모범이시기에 정녕 복되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함께 나누고 엘리사벳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성모님 같은 방문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듦을 함께 나누면서, 함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이 우리들의 이웃방문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입당송에서 선포되는
“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다 와서 들어라. 주님께서 내게 하신 큰일들을 들려주리라.”
는 시편 65장의 말씀이 신자들끼리의 가정방문을 통해 믿음으로 선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제대로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불안과 걱정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생각만 하면 기뻐서 마음이 설레 여야 됩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생활성가 중에 ‘기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 부족한 입술로 구세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묵상되는 가사입니다.
우리 안에서도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 그리고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순명을 합니다.
주 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하느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 하시니 형제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네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 분 기뻐 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
우릴 통해 하실 일 기대해
부산교구 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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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두 여인의 노래에 담겨진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가장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 벳 방문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이 축일은 주님을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 중에 있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신
루카복음의 보도(1,39-56)에 근거한다.
엘리사 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그들의 태중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상봉(相逢)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의 문안으로 세례자 요한이 엄마의 뱃속에서 성화(聖化)된다.
이 상봉 을 보도하는 성서의 이야기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고
이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려 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5 세기경 비잔틴 동방교회가
"성모님의 거룩한 옷" (블라쉐르느)을 안치 한 것을 기념하는 미사에서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복음을 봉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동방교회는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의 팔일축제 다음 날인 7월 2일을
축일로 지냈다.
서방교회에서는 1263년 보나벤투라(1221-1274) 성인이 성모님의 중재로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 를 가지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이 축일을 도입하면서 파급되었다.
100년 후 우르바노 6세(1378-1389) 와 보니파시오 9세(1389-1404) 교황에 의해
축일이 공인되었고, 바젤 공의회(1431-1447)는 축일 고유미사 기도문을 제정하여
더욱 장려하였고, 비오 5세(1566-1572) 교황을 통하여
가톨릭교회의 공식 전례축 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7세기에 와서는 이 축일이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이라는 정식 명칭 을 얻게 된다.
1969년 개정된 로마 전례력은 이 축일을 시기적으로 합당한 "주님 탄생예고 대축일"(3월25 일)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즉 성모성월의 마지막 날인 5월 31일로 옮겨 놓았 다.
두 여인의 만남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두 곡(曲)의 아름다운 노래 를 담고 있다.
하나는 마리아의 문안을 기뻐한 엘리사벳이 성령을 가득히 받고 마리아를 칭송하는 노래와
이에 응답하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Magnificat) 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2-45절)
이 노래는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던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1,28)과 함께
후에 가톨릭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성모송"의 첫 부분으로 자 리를 잡게 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 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구약성서에도 같은 유형으로 발견된다.
(신명 28,4; 판관 5,24; 유딧 13,18 참조)
"마리아의 노래" (막니피캇, Magnificat)에 대한 학설은 분분하다.
신약성서 학계의 통설은 "마리아의 노래"가 실제로 마리아의 노래라기보다는
루카복음이 집필되던 시기 에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이며,
내용상 많은 구절이 구약성서를 본 딴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의 전체적인 구조는 한나가 사무엘을 야훼께 바친 후 불렀던
감사찬양 노래와 흡사하다.
그때에 한나가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하느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당신밖에는 없으십니다.
우리 하느님 같은 바위는 없으십니다.
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아라.
야훼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힘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 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 시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 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하느님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당신 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 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하느님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지존하신 이께서 하늘에서 천둥소 리로 우렁차게 호령하신다.
하느님은 땅 끝까지 심판하신 분, 당신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의 이름을 떨치게 하신다."(1사무 2,1-10)
이와 같이 "마리아의 노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한나의 노래"를 그 기 본구조로 하고 있다.
나아가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이 처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함과 그분의 종말론적 통치에 의한 도덕적(51절), 사회적(52절),
경제적(53절) 혁명을 신앙하고, 이스라엘의 남은 "가난한 이들"(아나윔)의 구원을
희망하 는 노래라고 볼 수 있겠다.
"마리아의 노래"는 내용상 전편(46-50절)과 후편(51-55절)으로 구분되 는데,
전편은 개인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며, 후편은 집단 차원에서의 감사찬양이다.
루카복음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신앙과 희망을
"엘리사벳 -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마리아-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내다보며
마리아의 입에 담아 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마리아는 석 달 가량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면서(56절) 이미 만삭이 된 엘리사벳에게
봉사하였을 것이다.
만삭이 된 여인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그것도 한 번의 출산 경험이 없는 엘리사벳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정녀인 마리아가 무슨 경험 이 많아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상봉은 인류의 역사 안에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마리아의 엘리사벳에 대한 봉사는 그녀의 뱃속에 있는 요한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를 잉태하심으로써 하 느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인간이 되실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얼마 있지 않아 요한은 하느님이신 예수께 빚진 은혜를 되 갚을 것이다.
결국 찬미 의 노래로 엮어진 두 여인의 만남은 세상과 하느님의 만남,
죽음과 생명의 만남, 파멸과 구원의 만남, 절망과 희망의 만남을 의미하며,
이 만남은 세상의 구원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