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고요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침착한 두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게 하고 육신이야말로 얼마나 가엾은 것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내 안에 오래 녹지 않은 얼음덩이와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내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오래된 상자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 감추어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수천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 읽을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허약하며 자주 바닥이 드러나는 사람인지 고요는 이미 다 안다 내 안에는 타오르는 불길과 오래 흘러온 강물이 있다 고요는 그 불꽃을 따스하게 바꾸고 수많은 것을 만지고 온 두 손을 씻어준다 촛불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 아직도 내 안에 퇴색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과 푸른 이파리처럼 출렁이는 것이 있다고도 일러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물 한 잔을 건넨다 다시 아침 해가 뜨고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생은 계속된다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다시 별빛을 바라보고 자신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들은 신께 판단을 넘기고 고요의 끝에 왜 두 손을 모으게 되는지 물어보게 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