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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1장 리좀
리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지질학적, 위상학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세계라는 지도 위에 지층과 영토성, 도주선, 분할선, 분절선, 기계적 배치물, 강렬도와 구성, 선별, 고른판, 기관없는 몸체를
그려놓아야 한다.
새로운 지평 위에 새로운 개념을 배열해 내고, 창조해내면서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형성해 보아야 한다.
먼저 책을 말하자.
갈릴레오처럼 책을 세계에 대응하는 반영물이나, 작은 세계로 바라본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런데 책은 우리가 만들 세계라는 지도 위에서 어떠한 존재였던가?
책은 하나의 다양체다.
책은 지도 위에 그려진 하나의 선분 위에 놓자.
책은 하나의 강렬도와 속도를 가진 배치물이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귀속된 것이 아니며, 책은 유기적인 총체성을 갖는
대상으로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지도 위의 지층의 등고선위에 놓여진 기계적인 배치물일 수도 있다.
세상의 일부인 책의 기관없는 몸체는 고른판 위에 배치되어 연결접속되는 강렬도와 속도를 지니며, 그 과정에 의해 책은
추상기계로 작동할 것이다.
가장 쉬운 책에 대한 설명은 책을 뿌리-책의 유형으로 보는 것이다.
나무는 세계의 이미지이며,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다.
세상에 대한 반영이자 반사물인 책은 유기적 총체로서 존재하며, 변증법적이며, 하나-둘 이런 식으로 가지를 쳐 나간다.
촘스키의 언어나무가 그러하고, 컴퓨터의 연산나무가 그러하다.
그 나무에는 주축뿌리, 변증법적 과정의 환원되는 미끄러지는 중핵이 있으며, 그것은 일대일 대응관계로, 이항논리로
전개된다.
다음으로 어린뿌리체계, 수염뿌리 체계 가 있다.
본뿌리는 퇴화하고 곁뿌리의 다양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알뛰세르의 중층결정, 양가성, 덧코드화로서의 형식들이 드러내는 새로운 다양의 통일성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던한 통일성이자, 순환적 원환적 텍스트의 구조가 보증하는 선형적 통일성이다.
이들의 구조는 생성이 없는 낙태시술자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가지를 절단하여 심어도, 뿌리의 일부를 잘라서 심어도 수평적으로 증식해
나가는 구근과 덩이식물의 삶의 방식, 민중적 삶의 방식인 리좀 이다.
리좀에는 주축뿌리나 덧코드화의 통일성을 그려낼 수 없다.
그것은 일자를 뺀 다자인 n-1로서 존재한다.
리좀은 잡초나 냉이식물들의 집단서식지라는 동질적 부호로 지도에 표현될 수는 없다.
리좀은 지도 아래로 굴을 파고들어간 두더쥐들과 이를 뒤쫓는 고양이, 벌과 꽃,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길 위로 절단된
동물의 이동로, 가상현실에서 우연히 만난 익명의 두 남녀 사이에도 존재한다.
리좀의 제 1의 원리는 연결접속의 원리이며, 제 2의 원리는 다질성의 원리이다.
리좀은 다른 어떤 부분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다.
나무의 유형과 같이 하나의 점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정치, 사회, 정치, 경제 등의 잡다한 영역과 사슬을 형성하며, 그 코드화에 접속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속에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언어를 의미론, 화용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켜 추상기계를 작동시켜 나가야 한다.
끊임없는 연결접속과정에서 언어는 보편성도, 등질적 언어공동체도, 발화자와 청취자의 이상적 관계도 없는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의 경합속에 이루어진 잡다한 언어행위의 연합으로서 존재한다.
언어란 그러므로 탈중심적이고 다질적인 실재다.
리좀의 제 3의 원리는 다양체의 원리이다.
다양체는 하나와 관계하지 않으며, 주/객체가 없으며,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뿐이다.
리좀은 신경섬유다발이나 수많은 꼭두각시줄로 이루어진 망상조직의 다양체다.
리좀은 점이 아니며,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리좀의 다양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려 할 때는 항상 덧코드화로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선으로 구성된 망상 조직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기관이나 체제를 보완하기 위한 텅 빈 차원을 구성한다.
다
인간의 수상돌기나 시냅스는 불확실성에 있는 리좀의 다양체이다.
인간두뇌는 리좀이다.
짧은 기억이 리좀이라면, 긴 기억은 나무다.
즉, 짧은 기억은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나무는 연결의 쌍극자 가운데서 대립절편의 역할을 통해 리좀에 뿌리내리려 한다.
나무체계는 위계제적인 주체화와 의미생성으로 결정될 중앙제어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무구조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공통된 친구를 가정한다.
그 보편적 친구는 기관과 권력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리좀은 중앙제어장치가 없다. 장군 없는 게릴라와 같다.
그것은 독재를 거부한다.
역사적으로 동양의 수로권력은 수로-리좀을 의미하며, 동양의 천의 사상은 민초들의 리좀을 의미한다.
물론 리좀에는 나무의 마디가 있고, 뿌리에는 리좀의 발아도 있다.
우리는 서양의 이원론을 거부하며, 스피노자의 방식인 '일원론=다원론'으로 접근하고 있다.
리좀은 하나나 여럿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하나로 파생된 여럿이나 하나가 더해진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언제나 '그리고'라는 연결접속의 중간만이 있을 뿐이며, 주체도 대상도 없는 고른판 위에
펼쳐진 다양체, 즉 하나를 뺀 다양체(n-1)이다.
리좀은 산의 중턱에 있는 고원이며, 등반의 크라이맥스로 이루어지는 절정이 아니라, 강렬함이 연속되는 곳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 다양체를 고원이라 부를 것이다.
리좀학은 분열분석이자, 지층분석이며, 화용론이자, 미시정치학이다.
천개의 고원으로 향하는 개미떼들과 성배를 찾아 떠난 소년십자군들은 유목론을 역사대신 쓸 수 있으리라.
그것은 정주민들의 연대기적 시간의 배열과는 다른 리좀의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유목민은 국가장치에 대항하여 전쟁기계를 발견했다.
역사는 유목의 과정을 이해한 적이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이 없다.
국가 그것은 책의 모델이자 사유의 모델이었다.
로고스, 철학자-왕, 이데아의 초월성, 개념의 내부성, 개념들의 공화국, 이성의 법정, 사유의 공무원, 입법자이자 주체인
인간, 세계질서의 내부화된 이미지로서 국가, 인간을 뿌리내리겠다는 국가의 오만 방자함.
그러나 여기서 전쟁기계와 바깥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 또한 배치물이다.
책이나 전쟁기계를 기계적 배치물이 되게끔 하는, 리좀의 줄기가 되게끔 만드는 배치물이다.
리좀은 시작하지도 끝나지도 않는다.
언제나 간주곡이고, ~이다를 거부하는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의 과정이다.
자 이제 우리 출발점도, 끝도 없는 유장한 강물 중간에서 그 속도를 느껴보자.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프로이드박사는 신경증과 정신분열을 분석하면서도 다양체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없었고, 하나의 통일체 속에서 판단
하였다.
유아기의 늑대에 대한 공포증에 대한 분석서인 늑대인간은 늑대가 항상 무리들을 이룬다는 동물학적 상식을 간과하면서
외디푸스 공식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오이디푸스 장치내에 있으면 신경증이고, 그것이 파열되면 정신병이라는 손쉬운 공식이 그것이다.
일반인들인 하나의 기의에 사로잡혀 공전하는 기표의 상징계를 가진 신경증자와 어떠한 기의를 중심성도 존재하지 않는
기표로의 다양체를 소유한 정신병자의 대조 속에서 여기서 늑대인간의 분석은 신경증에 집중되어 있지만, 분열분석으로
역전되어져야 한다.
늑대의 다양체 속에서 우리는 기관없는 몸체, 다양체들로 북적거리는 몸체를 발견하게 된다.
사막의 영은 늑대인간의 기관없는 몸체이리라.
무의식에서는 결핍이나 부정적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점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무한한 움직임으로 가득차 있다.
늑대는 강렬함이요 속도요 온도이며 분해될 수 없으나 변하는 거리다.
라깡처럼 구멍, 거세, 결핍, 치환, 대체물으로 다양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과잉의 백치에게 블랙홀이야말로 입자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하리라.
다양체도 두가지 종류가 있다.
거대 다양체는 그램분자적 다양체다.
이는 통합, 총체화, 의식/전의식으로 구성된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미시 다양체는 무의식적, 리비도적, 분자적인 강력한 다양체다.
이 두 가지의 다양체의 구분 속에서 우리는 집단이나 군중과 무리를 구별해 볼 수 있겠다.
집단이나 군중은 양, 가분성/평등함, 중앙집중, 집단전체의 사회성, 일방적 위계, 영토성, 영토화의 조직, 기호방출로 구성
되어 있다.
이러한 집단/군중의 노선은 철학적으로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에 이르는 주류노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무리는 소수자, 흩어짐, 가변거리, 질적변환, 잔류자, 횡단자 불평등, 브라운운동의 다양체, 탈영토화의 선으로 구성
되어 있다.
무리의 노선은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니체-들뢰즈/가따리/네그리의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언제나 주변인
소수자의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분열증은 늘 주변에 있으며, 반면 편집증은 중앙을 형성하고 군중 속에 주체를 호명해 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늘 무리 속에 군중이며, 군중 속에 무리이다. 리좀과 나무는 서로 결합되어서 나타난다.
즉, 우리는 제도 속에서 군중이면서도 동시에 비제도적인 무리이다.
나무는 리좀형태의 선을 갖는 반면, 리좀은 나무형태의 점을 갖는다.
군중과 무리는 상호침투하고 있는 다양체인 것이다.
우리가 다양체/군중기계를 전의식에 귀속시켜 판단하는 것으로는 늘 불충분하다.
언제나 저변에는 늑대무리들의 공포스런 울음소리가 은밀하게 전달되고 있다.
우리가 고려할 점은
1) 사회기계나 조직된 군중이 분자적 무의식을 갖게 되는 방식을,
2) 군중속의 특정한 개인 스스로가 무리의 무의식을 갖게 되는 방식을,
3) 한 개인이나 군중의 무의식 속에서 다른 개인의 무의식과 무리들을 겪게 되는 방식을 고찰하여야 한다.
여기서 무리나 군중에 대당되는 개인들의 언표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언표로 나타나는 것은 늘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물들의 현존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관없는 신체라는 광활한 사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늑대무리들의 탈영토화하려는 도주선을 뒤쫓는 아랍집단들의 오아시스라는 점과 점을 잇는 영토화하려는 길이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다.
군중의 영토성이냐? 무리의 탈영토성이냐?
우리는 사막 위에서 늑대의 무리들과 마주치게된 프로이드라는 장군이 선택한 한 마리의 늑대를 겨냥한 손끝 너머로
수없이 밀려드는 늑대들의 무리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도덕의 지질학 (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 중에는 성층작용(지층화)이 있다.
한 지층이 다른 지층을 떠받치고 있다면 그것을 밑지층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밑지층 위로 기관없는 신체인 고른 판이 있다.
그것을 웃지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밑지층과 웃지층 사이에 기계적 배치물이 있다. 이것을 사이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의 손길은 가재 혹은 이중집게, 이중구속이다.
지층은 적어도 둘로 되어 있으며, 이중적이다.
지층은 두 가지 분절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분절은 불안정한 입자흐름으로부터 준 안정적인 분자단위들과 유사분자단위들을 뽑아내며, 연결-이어짐들이라는 통계학적 질서를 부여한다.
이러한 첫 번째 분절의 작용을 퇴적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분절은 밀집되고 안정된 기능적 구조(형식)을 세우고 그램분자적 합성물들(실체)로 구성된다.
두 번째 분절을 습곡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실체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이다. 형식이 코드화와 탈코드화와 관련된다면, 실체는 영토화와 탈영토화와 관련된다.
첫 번째 분절인 한 유형은 유연하고, 분자화되어 있음에 반해,
두 번째 분절인 다른 유형은 그램분자적이고 조직화되어 경직되어 있다.
중심잡기, 통일화, 총체화, 통합(=적분), 위계세우기, 목적설정과 같은 덧코드화는 두 번째 분절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엘름슬레우의 구분법에 따르면 첫 번째 분절은 내용과 관련되고, 두 번째 분절은 표현과 관련된다.
내용분절과 표현분절의 이중성 속에서 그러한 매개상태, 층위와 평행상태, 교환들이 존재하며, 그것이 지층화를 통과한다.
<엘름슬레우의 구분법>
구 분 | 형식(코드) | 실체(영토) | 재료 |
내용 (contents) (겉지층) | 내용 - 형식 | 내용 - 실체 | 내용 - 질료 |
표현(expression) (곁지층) | 표현 - 형식 | 표현 - 실체 | 표현 - 질료 |
원시수프의 상태속에서 외부의 재료들은 이러한 지층을 거쳐서 경계, 막의 통일성의 내부로 통합된다.
이러한 지층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추상기계를 고른판의 평면태에 반대되는 통합태라고 할 수 있다.
고른판의 평면태는 밑지층으로서의 외부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통합태는 이중적 지층으로 분할된다.
그 중 하나는 외부환경과 내부요소사이를, 실체적 요소들과 그 합성물의 사이를, 합성물과 실체 사이를, 실체화된 여러
실체들 사이를 매개하는 것, 그 매개물과 중첩들, 이 돌출들, 이 층위를 겉지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조성의 통일성 속에서 지층은, 지층의 연속성을 부수고 고리를 잘라 단계화하는 자신의 실체적 겉지층으로 존재
한다.
내부환경과 외부환경의 막으로서 존재하는 겉지층과 달리 그것의 연합적 환경, 합병된 환경으로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연합환경을 곁지층으로 부르도록 하자.
겉지층과 곁지층은 통합태 위의 이중적 지층이다. 겉지층은 내용과 관계된다면, 곁지층은 표현과 관계된다.
형식이 코드와 결부되어 있고 곁지층들 안의 탈코드화와 코드화의 과정과 결부된다면,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인 실체는
영토성과 결부되어 있고, 겉지층 위에서의 탈영토화운동 및 재영토화운동과 결부되어 있다.
코드와 영토성, 탈코드화와 탈영토성은 대응관계가 이나다.
코드가 탈영토성일 수 있고, 재영토화가 탈코드화일 수도 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는 코드변경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코드 변경이 살아남을 것인지를
추상기계는 통합태와 평면태라는 두 가지의 상이한 존재양태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통합태에서 추상기계는 성층작용에 갇혀 있고 또 특정하게 결정된 지층 속에 감싸여 있으면서, 이 지층의 프로그램이나
조성의 통일성을 정의하고 이 지층 위에서 벌어지는 상대적 탈영토화를 조절한다.
반면 평면태는 고른판 위에서 제 힘으로 전개되며, 고른판의 도표를 작성한다.
하나의 동일한 기계가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양쪽 모두를 작동시키며, 절대적 탈영토화의 흐름들을 안내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바는 통합태 속에서 겉지층과 곁지층을 구성하고 분절된 절편으로 나아가는 상대적 탈영토화가 아니라,
고른판 위에서 절편으로 분해될 수 없는 도주선, 절대적 탈영토화인 것이다.
우리는 무기체-유기체-기계라는 구분에서 기계적인 틀을 통하여 거대지층군들을 평가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거대지층군은 무기체적 지층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내용은 분자적인데 반해, 표현은 그램분자적이다.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 사이에 여러 매개가 존재할 수 있으며, 외부적 힘들이나 조직화의 중심이 그램분자적인
형식속에 개입할 수 있다.
그램분자의 표현의 형식은 거푸집유형으로서 외부적 힘들의 최대치를 동원 할 수도, 변조 유형으로서 최소치를 동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자적 내용과 그램분자적 표현이라는 구분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식적 구분이 유기체적 거대지층군 에서는 달라질 수 있다.
유기체 지층에서 표현은 모든 차원을 따라 표현된 분자적 내용에 의존한다.
표현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이 된다.
유기체 지층에서 표현은 선, 면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핵산시퀸스의 선형성과 같은 것이 된다.
유기체의 표현과 내용은 분자적인 것과 그램분자적인 것을 동시에 갖게 된다는 점에서 무기체의 지층과 다르다.
세 번째의 거대 지층군은 내용의 형식이 동종적인 것이 아니라 이종적인 것이 되고 표현이 언어학적인 것이 되는 지층
이다.
기술, 언어, 도구, 상징, 자유로운 손과 유연한 후두, 몸짓과 말이라는 새로운 분배적 특성의 지층을 의미한다.
이 지층에서는 앞발은 탈영토화되어 손이 되고, 입도 탈영토화되어 유연한 후두와 분절을 말하기 시작한다.
음성기호는 시간적 선형성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점에서 유기체지층의 유전코드가 갖고 있는 공간적 선형성과 다르다.
유전코드는 발신자도 수신자도 없고 단지 잉여와 잉여가치만이 있을 뿐인 반면, 언어표현은 시간적 선형성의 순차성과
관련되며, 이것은 언어가 초선형성과 덧코드화를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추상기계는 지층상태인 통합태와 탈지층화된 고른판 위에서 스스로 전개하는 평면태 사이에 있는 매개상태를
의미한다.
추상기계는 하나의 결정적인 지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모든 지층을 넘어서는 환상을 생산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지층을 재구성한다면 위와 같은 도표가 가능하다.
도구-손/안면-언어라는 이중적인 구성 속에서 인간의 이중적 지층 속에서 작동하는 추상기계는 사이보그적 인간형의
지층적 구성으로 전개될 수 있다.
추상기계 | 내용 | 손 | 도구 | 글 | 문자 | 사회기계 | 겉지층 | 권력구성체 |
표현 | 안면 | 언술 | 말 | 구술/음성 | 기호기계 | 곁지층 | 기호체제 |
여기서 우리는 지표(영토적 기호), 상징(탈영토화된 기호), 도상(재영토화의 기호)를 구분할 수 있다.
기호를 전 지층군으로 확장한다면 기호의 제국주의로 나아갈 것이다.
기호는 세 번째 지층군에 한정되어져야 한다.
기표-기의라는 언어학적 관계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호 속에는 탈기표작용적 기호체제도 있으므로 기표가 기호일 수 없으며, 기호란 권력조직의 배치물의 표현이다.
궁극적으로 기의란 기호를 넘어 확대적용되는 기표의 존재 그 자체이다.
기표란 잉여이며, 잉여를 산출하는 것이다.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내용의 형식은 기의가 아니다.
기표의 애호가들은 말로부터 기표에 예속되는 기의를 추출해내는데, 푸코를 예로 들자면 범죄란 감옥이라는 내용형식을
상호전제하는 표현형식이다.
범죄는 감옥을 기의로 갖는 기표일 수 없다.
하나는 표현이라는 담론다양체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이라는 비담론 다양체이다.
즉, 내용/표현은 기의/기표로 환원될 수 없고 평행한 형식화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정신-물질, 내용-형식, 토대-상부구조라는 스탈린주의로부터 벗어나면서, 동시에 알뛰세르의 최종심급의 경제
결정과 같은 것으로부터도 벗어났다.
지층의 질서에서 덜 조직되거나, 더 조직된 지층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밑지층 노릇을 하는 지층일 경우에도 그러하다.
용어를 정의해 보자.
고른판은 층위의 차이, 크기의 차원, 거리를 모른다.
고른판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차이도 모른다.
고른판은 형식도 실체도 없고, 내용도 표현도 없고, 상대적 탈영토화도 없다.
하지만 지층들의 형식과 실체아래에서 고른판은 추상기계를 통해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구성한다.
강렬함의 연속체, 미립자들 또는 기호-입자들로 조합된 방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집합접속이 고른판의 고유한 세 요소
이며, 추상기계에 의해 작동되고 탈지층화를 구성한다.
추상기계는 때로는 고른판 위에서 펼쳐 지면서 고른판의 연속체들, 방출들, 집합접속들을 구성하고 때로는 하나의 지층
위에 감싸여 있으면서 그 지층의 조성의 통일성과 그 지층의 인력 또는 포착력을 정의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추상기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완전히 다르다, 기계적 배치물은 하나의 지층 위에서 내용과
표현을 상호조율시키고, 내용의 절편과 표현의 절편들이 일대일 관계를 맺게 하며, 지층이 겉지층과 곁지층으로 나누어
지도록 이끌어준다.
모든 점에서 기계적 배치물들은 고른판위에서 펼쳐져 있거나 지층안에 감싸여 있는 추상기계를 작동시킨다.
하나의 지층은 다른 지층의 밑지층 역할을 한다.
지층은 자신의 환원할 수 없는 형식과 연합된 환경에 따라 곁지층으로 나뉘었고, 형식을 부여받은 실체의 층들과 매개
환경들에 따라 겉지층으로 나뉘었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의 내용과 표현을 조절한다는 면에서 사이층이며, 고른판으로 향하는 추상기계를 작동시킨다는
측면에서 웃지층이다.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전제들
1.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한 교사가 문법규칙과 계산규칙을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기호를 부과하고 명령하고 지시한다.
그녀가 작동시키고 있는 의무교육기계는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명령들에 의거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 그러한 명령은 잉여이다.
언어의 기초단위인 언표는 명령어이다. 따라서 정보수집능력인 공통감이 아니라 명령을 수신하고 전송하는 능력을 정의
하여야 한다.
언어는 믿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
그것은 신빙성이나 진실성은 개의치 않고 어떤 규범 무엇을 준수하고 지켜야 하는지 만을 말하고 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할 때, 단어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표지이다.
언어는 삶이 아닌 잉여로서 삶에 명령을 내린다. 삶은 말하지 않는다.
삶은 듣고 기다린다.
언어란 직접 본 무엇이 아니라 말하기와 말하기 사이의 관계로 성립한다.
이런 점에서 이야기는 타인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행위 즉, 간접화법이다.
모든 담론은 간접적이며, 언어에 고유한 전용은 간접화법이라는 전용이다.
언어는 정보로서의 기호의 소통이 아니라 명령어로 기능하는 말의 전달이다.
언어는 지도이지 사본이 아니다.
오스틴의 유명한 논제처럼 말 내부에는 행위가 있다.
언표와 그 행위간의 내재적 관계를 우리는 암묵적 전제 또는 비담론적 전제라고 부를 수 있겠다.
수행적 발화와 발화수반행위는 세가지 중요한 귀결을 가져 왔다.
1) 이제 랑그를 코드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코드란 설명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또 파롤을 정보의 소통으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2) 의미론, 통사론, 나아가 음운론마저도 더 이상 화용론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언어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화용론은 언어의 전 차원에 걸쳐서 존재한다.
3) 랑그-파롤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랑그의 의미와 통사법은 랑그가 전제하고 있는 파롤의 행위와
무관하게 정의될 수 없다.
우리가 수행적 발화(그것을 말함으로써 행하는 것)에서, 발화 수반 행위(말을 함으로써 행하는 것)로 확장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수행적 발화는 행위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지시적 용어들의 속성으로 귀착된다.
언어에 미리 존재하고 있는 주체성과 상호주관성의 구조는 발화행위를 전제하는 게 아니라 설명해 준다.
따라서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것으로 정의되며, 언어학에 고유한 주체화인
상호주관성이 나머지 것들인 "그것"을 말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선험적인 차원에서의 자기-지시현상이 수행적 발화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어떤 언표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행동을 달성하는 데 할애된다는 사실" 즉 사회적 행위가 자기-지시를 설명해 준다.
수행적 발화 그 자체가 발화수반 행위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암묵적인 전제 혹은 비담론적 전제라고 앞에서 말했던 바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발화수반행위이다.
그리고 발화수반행위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 사법적 행위나 그에 준하는 것들이다.
언어는 특정한 순강에 한 랑그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명령어들, 암묵적 전제나 발화행위 같은 명령어들의 집합으로 정의
될 수밖에 없다.
언표와 행위 사이의 내적 관계, 내재적 관계는 있지만 동일성은 없다. 차라리 그 관계는 잉여의 관계이다.
명령어는 그 자체로 행위와 언표의 잉여이다.
언어는 정보전달을 위한 것도, 의사소통을 위한 것도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명령어의 전달이다.
잉여
이 행위를 비물체적 변형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몸체들을 변용시키는 능동작용-수동작용(action)과 몸체들의 비물체적 속성일 뿐이며 언표의 표현된
것인 행위(act)를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비물체적 변형은 순간적인 순수행위의 형태를 띈다. 판사가 선고하는 순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순간적으로 비물체적 변형은 이루어진다.
비물질적 변형은 자신을 표현하는 언표와 자신이 산출한 효과간의 순간성, 직접성, 동시성에 의해 식별된다.
칼을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탄 테러분자들이 "꼼짝마"라고 말할 때, 순싯간에 비행기-몸체는 감옥-몸체로 비물체적인 변형
이 일어난다.
명령의 순간성은 기묘하고 무한히 투사될 수도 있고, 사회의 기원에 놓일 수도 있다.
이 이행은 제자리 뛰기와 같아서 0의 순간에 일어나는 비물체적 변형과도 같다.
역사는 능동작용과 수동작용 속에 삽입되는 비물체적 변형도 보여 주었다.
1923년 11월 20일, 고인플레이션속에 화폐를 무효로 만들었던 그 때가 그 예일 것이다.
배치물들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끊임없는 변형에 내맡겨진다.
우리는 상황을 외부의 상황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맹세한다는 한 마디도 오떤 조건에서 말했는가에 따라 다르다.
몸체들에서 변형이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변형 자체는 비물체적이며 언표행위 내부에 있다.
랑그를 바깥과 관계시키는 표현의 변수들이 존재하지만, 이는 정확히 말하면 언어에 내재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화용론은 외적 상황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화행론은 랑그가 자기 안에 갇히지 않을 충분한 내적 이유가 되는 표현의 변수들 또는 언표행위의 변수들을 도출해 낸다.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
레닌의 소비에트 형성과정에서의 언표행위는 비물체적 변용의 모법적인 예일 수 있다.
그의 「슬로건에 대하여」에서 했던 말은 "모든 개개의 슬로건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 갖는 특수성들의 총체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이다.
다시 말해 한 유형의 언표는 그 언표의 암묵적 전제, 그 언표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들이나 비물체적 변형과 관련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명령어는 명령어가 표현되는 내재적 행위 또는 비물체적 변형으로 나아간다.
그 다음에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 나아간다. 명령어는 이 배치물의 변수에 해당한다.
이 변수들이 특정한 결정 가능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배치물들은 기호체제 또는 기호계적 기계 안에서 결합된다.
명령어는 잉여이며, 간접화법은 말 안에서의 명령어의 현존이다.
언어 전체가 바로 간접화법이다. 집단적 배치물은 소문과도 같아서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못한 목소리들의 집합과도
2.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기계가 있으리라.
몸체적 변양들의 집합과 비물체적인 변형들의 집합은 사회적 장에서 구분된다. 이 집합의 차이 속에서 내용과 표현이라는 형식상의 구분이 존재한다. 내용은 도구-손-사물의 학습이라는 나름의 형식을 갖고 있기에 형식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은 표현에 대립한다. 표현 역시 언어-얼굴이라는 극 또는 기호의 학습이라는 아름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스토아학파는 능동-수동작용과 비물체적 행위를 구분한다. "나는 먹는다"라는 언표는 본성상 아주 다른 비물체적 변형(사건)을 표현한다. 스토아 학파에게 덧붙일 역설은 비물체적 변형, 비물체적 속성은 바로 몸체 자체에 대해, 몸체 자체에 대해서만 말해지는 것이며, 몸체에 귀속된다는 점이다. 비물체적 속성을 표현하면서 동이세 그것을 몸체에 귀속시킬 때 우리는 표상하거나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개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입이 바로 하나의 언어행위이다. 내용을 표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용을 예견하고, 퇴보시키고, 지연시키거나 가속시키고, 분리하거나 결합하고, 또는 다르게 재단하기 위해서 순간적 변형이라는 날실은 늘 연속적 변양이라는 씨실 속으로 끼워 넣어진다. 언표행위라는 배티물은 사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의 상태나 내용의 상태에게 직접 말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표상하고 지시하는 내용의 인과관계란 없으며, 두 성의 독립성은 배분적이며, 따라서 어느 절편이든 끊임없이 다른 쪽 절편과 연계되고 다른 쪽 절편으로 이끄러지나 들어가에 된다. 즉, 내용의 형식들과 표현의 형식들은 자신을 실어나르는 탈영토화 운동과 분리할 수 없다. 이것은 탈영토화에 따라 내용과 표현이 서로 결합되고 연계될 수도 있고, 재영토화됨에 따라 안정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상황이라 변수라고 부르는 것들고 사실은 탈영토화의 정도들 자체다. 한편으로 내용의 변수는 몸체의 혼합체, 몸체의 결집체 안에 있는 비율이다.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변수가 있는 그것은 언표행위 내부에 있는 요소들이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이 서로 소통하며 끼어들고 작용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의 상대적 탈영토화의 양자들의 결합 때문이다.
배치물들의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으로 첫 번째 축인 수평축은 두 개의 절편 즉, 내용의 절편과 표현의 절편을 가지고 있다. 배치물은 능동작용이자 수동작용인 몸체들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이며, 서로 반응하는 몸체의 혼합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배치물은 행위들이자 언표들인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며, 몸체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이다. 수직 방향의 축은 영토화의 측면들,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다. 기계적 측면에서 볼 때 하나의 배치물은 하나의 재화생산에 관
련된다기보다는 한 사회 속에 있는 몸체들의 정밀한 혼합상태에 관련되는 것 같다. 기술도 도구도 <사회-자연>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을 정의하는 공생관계 또는 합체와 분리될 수 없다. 도구는 하나의 사회기계를 전제하며, 사회기계는 자신의 문안에서 도구들을 취사선택한다. 도구와 재화보다 몸체들이라는 기계적 배치물이 우선하듯이 랑그와 단어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 우선한다. 배치물이 기계적 배치물과 집단적 배치물이라는 두 측면으로 분절되는 것은 이 두 측면의 형식을 양화하는 탈영토화 운동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사회적 장은 갈등과 모순이 아니라 그 장을 가로지르는 도주선에 의해 정의된다. 표현의 형식만 있다면 언어체계로는 충분하다는 믿음은 기표작용하는 음운론 구조 또는 심층의 통사론의 구조가 그러하다. 이러한 기획은 랑그라는 추상기계를 세우는 것인데 사실은 그 기계가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며, 선형적인 채로 남아 있다는 것, 매개적 추상 층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데자. 표현의 변수들은 상호작용 중인 매용의 변수와 분리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비언어적 요소들과 관련된 외적 화용론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언어학이 언어학 자체의 요소들과 관계하는 내적 화용론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추상기계는 한 배치물 전체와 관련되며, 이 배치물의 도표로 정의된다. 그것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도표적이고 초선형적이다. 촘스키는 언어적 요소의 선형적인 질서에 기댄다. 그러나 초문장이나 추상적 대상은 초선형성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요소는 선형성이 아니라 리좀모델에 따른다. 추상기계는 배치물의 도표와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순수언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언어는 추상기계에 의존한다 그렇다고 그 역은 아니다.
3.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구조적인 불변항이라는 문제는 언어학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랑그와 파롤은 언어늘력과 언어수행으로 이어진다. 화용론은 상수와 보편자들이 있다고 인정한다. 촘스키의 나무에 싹이 틘다. 그러나 그의 선형적인 질서는 리좀을 싹틔우지 못한다. 추상을 보편자나 상수와 연결시킬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추상기계가 변수나 변주주위에 있다고 추상기계의 독자성을 없앨 이유도 없다. 촘스키는 표준언어인 등질적인 체계와 표준체계의 권리와 규범이 실재의 집합을 재단해 낸다. 라보프는 언어는 변주임을 주장한다. 모든 체계는 변주 중에 있다는 것, 체계는 상수나 등질성이 아니라, 내재적이고 연속적이라는 특성을 갖는 일종의 변화가능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 그리고 체계는 아주 특별한 양태 위에서 조정된다. 변주의 선은 잠재적이다. 즉, 현재적이지는 않으면서도 실재적이다. 언포가 어떠한 도약을 하더라도 변주의 선은 연속적이다. 변주만들기는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체인 매체를 구축한다. 연속적인 변주는 불연속적인 성격과 혼동될 수 없다. 상수를 통해 결정되는 불연속적인 변주도 연속적인 변주인 명령어를 거쳐 뛰어 오르거나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상수 또는 불변항은 중심화되어 있고, 코드화되어 있으며, 선형적이고 나무유형인 체계이다. 상두 또는 불변항은 음악의 온음계와 같다. 그러나 변주의 신시사이저가 '선험적 종합판단'을 대신하고, 나무 대신에 리좀이 되며, 구멍, 침묵, 파열, 단절이 잠재적 우주의 연속체에 복무하게 된다. 변주는 항상 반음계나 신시사이저의 합성음과 같다. 물론 음악은 언어가 아니다. 음의 성분은 언어학에서 말하는 관여적 특질이 아니다. 노래부르기의 목소리는 음표에 한정된 상수기능을 하는 것이다. 목소리는 음악기계로 배치되며 악기와 같이 연주하지만 음악은 목소리의 변주의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의 공통요소 중에서 연속적 변주를 갖게 됨으로 가치를 갖는 것은 은어, 전문어, 직업어, 노래, 상인의 외침과 같은 비밀언어이다. 그것은 반음계의 언어이며, 하위질서 속에서 암호나 숨은 코드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공적 언어의 변주들의 체계를 변주상태로 이끈다. 언어는 내재적인 연속적 변주 중에 있으며, 그것은 공시성도 통시성도 아니며, 언어의 가변적 연속상태로서의 탈공시성, 반음계이다. 우리가 언어적 요소들이 연속적으로 변주되도록 조작할 때(다양한 기계들을 통하여) 언어 속에 내적 화용론을 도입할 때 화용론의 두 측면이 동일한 변주선에서, 동일한 연속체 위에서 결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몸짓과 악기와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취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은 더듬기 쉽다. 하지만 언어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언어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은 모든 언어적 요소들을 변주로 만드는 일이며, 심지어 표현의 변수와 내용의 변수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마저도 변주로 만드는 일이다. 잉여의 새로운 형식은 그리고...그리고...그리고...이다.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되는 것, 위대한 작가들은 랑그의 말더듬이 속에서 다국어를 수행한 사람들이다. 변화의 선 또는 창조의 선은 충만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추상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하나의 랑그는 필연적으로 개척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추상기계는 이 가능성 또는 잠재성을 포괄해야만 한다고 엘름슬레우는 지적했다. 잠재태는 실재와 대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잠재태는 창조적인 것의 실재성이며 변수들의 연속적인 변주화로서, 오직 변수들의 상수적 관계의 현재적 결정에만 대립된다. 기하학적 벡터량인 텐서는 변수로도 상수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매번 상수의 값을 뺌으로써(n-1) 변수의 변주를 보장해 준다. 텐서는 언어학적 범주라기 보다는 화용론의 값이다. 랑그라는 추상기계는 보편적이지 않으며 일반적이도 않다. 그것은 독자적이다. 그것은 현실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잠재적이라는 의미에서 실재적이다. 이러한 추상기계와 언표행위라는 배치물은 서로 상보적이다. 레닌이라는 추상기계와 볼세비키라는 집단적 배치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4.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언어는 다질적인 가변적인 실재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랑그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모델은 랑그를 등질화하고, 중앙집중화하고 표준화하고 다수적이거나 지배적인 권력의 언어가 되게 하는 정치적 모델이다. 두 종류의 언어, 고급어-다수어는 상수의 권력에 의해 정의되며, 저급어-소수어는 변주역량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의 언어가 다수어의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다수어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 언어는 자신을 소수어로 변환시키는 연속적인 변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된다. 상수는 변수에 대힙되지 않는다. 상수는 변수를 연속적인 변주로 다루는 방식과는 또 다르게 다루는 방식이다. 이른 바 강제적 규칙이라는 것이 변수를 상수로 다루는 방식에 해당하는 반면, 임의 선택적 규칙은 변주의 연속체를 구성하는 일에 관련된다. 상수들은 조이고 변주들은 풀어주도록 변수들을 조작함으로써 언어가 말을 더듬도록 하라, 언어전체에 신지어 문어에도 텐서들을 설치하라. 그리고 거기서 외침, 아우성, 음높이, 지속, 음색, 억양, 강렬함을 끌어내라. 표준어를 소수어로 취급하기, 다수어의 소수화되기라는 절제와 변주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다수어롸 소수어를 구분하는 문제가 아니라 되기(=생성)의 문제이다. 방언이라 사투리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소수어들을 그려내
기 위해서 다수어를 정복하기. 소수어를 사용해 다수어를 자아내기. 소수파 작가는 자기 가신의 언어 속에 있는 이방인이다. 다수파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인 도량형 원기, 즉 표현이나 내용의 상수를 내포하고 있다. 이성애자-유럽인-표준어 사용자-도시거주자-성인-남성-백인은 동성애자, 유색인, 농부, 아이, 모기보다 수적으로 적더라도 다수파다. 다수파 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결코 생성이 아니다. 생성에는 오직 소수파 되기만이 있다. 소수의식의 보편적 형상은 만인이 생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창조란 바로 이 생성이다. 우리가 다수파가 됨으로써 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형상은 연속적인 변주인데, 그것은 넘치거나 모자라서 다수적 표준의 문턱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진폭과도 같다. 소수파의 보편적 의식의 형상을 수립하면서 우리는 권력이나 지배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인 생성의 역량에 관계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파 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린다. 다수파 양식은 언어에서 상수를 뽑아내는 방식이라면, 소수파 양식은 언어를 연속적인 변주로 만드는 것이다. 명령어에서 언표행위가 언표 즉 선고에 용접시킨 순수행위이자 순수변형은 죽음에 대한 선고이다. 그러나 명령어는 그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신호 같은 것이다. 죽음은 그 형식을 보든, 실체를 보든 일반적으로 모든 몸체에 귀속되는 비물체적인 변형이다. 명령어의 또 다른 측면 죽음이 아닌 도주를 고려하면 변수들은 새로운 상태 연속적인 변주 상태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명령어를 피할 것인가? 어떻게 명령어가 감싸고 있는 사형선고를 피할 것인가? 어떻게 명령어의 도주역량을 펼쳐 나갈 것인가? 사람들은 명령어에서 명령어를 끌어낸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명령어 아래에는 통과의 성분도 있고, 정지들, 지승들, 조직화된 구성물들의 성분도 있다. 이런 이중적 본성속에서 명령어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만들어라.
5장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몇 가지 기초체제에 대하여
기호체제라 불리는 것은 임의의 표현의 특수한 형식화를 가리킨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은 분리될 수 없으며, 비언어적 배치물과 결부되어 있다. 표현의 형식화가 마치 자율적인 것인 양 행동한다면 예컨대 기표의 자율성이라는 형태에 어떤 특권을 부여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기표작용적 기호계를 기호론이라고 부른다면 기호론은 여러 기호체제 중의 하나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체제는 아니다. 그리고 화용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더욱 그러하다. 기호의 기표작용적 공식은 아주 일반적이다. 한 기호가 다른 기호가 연쇄적으로 관계하며, 기호가 의미하는 실재가 기호와 맺는 관계는 알 수 없으며, 기호와 기호의 형식적 관계만을 즉 그것의 기표작용적 사슬을 규정하는 한에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토적인 지표와 재영토적인 도상과 상재적 탈영토화에 도달한 상징을 기표작용적 체제안에서 바라보게 된다. 기표는 기호와 잉여관계를 맷는 기호이다. 어떤 기호건 다른 기호의 기호가 된다.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그물망과 같다. 사슬을 구성하는 기표는 강력하다. 편집증환자는 탈영토화된 기호의 무력함을 공유하며 탈영토화된 기호는 사방에서 기를 공습한다. 그는 퍼져나가는 그물망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것은 편집증적인 독재체제이다. 기호들의 그물망은 무한한 그물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순환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호들의 순환성보다는 그것의 사슬과 원들의 다양체이다. 호피족은 가정의 문제를 우주의 문제로 도약한다. 이러한 도약은 규제된다. 도약에는 금기가 있다. 이러한 도약과 더불어 기표작용적 체제는 모든 부분으로부터 방출되는 기호들을 원 안에 조직화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것이 해석망상 또는 해석이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기호를 기의에 대응시키려 하고 적합한 기의로 재단하여 한다. 해석은 무한히 진행되며, 기의는 끊임없이 기표를 부여하거나 생산한다. 형식은 기표로부터 오므로 궁극적 기의는 잉여나 초과상태에 있는 기표 자신이다. 이러한 해석의 소통은 의미생성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신분석학은 깨달았다. 라깡의 말처럼 의미생성의 중심은 순수원리이며 순수추상이기 때문에 무이다. 기표의 이런 순수형식적 잉여는 표현의 실체없이는 생각될 수 없으며, 우리는 이 표현의 실체에 얼굴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언어는 항상 얼굴성의 특질들을 동반한다. 얼굴은 잉여들의 집합을 결정화하며, 기표작용적 기호들을 방출하고 수신하고 풀어주며 재포획한다. 얼굴은 그러므로 몸체다. 목소리는 얼굴로부터 나오며 글이란 제국적 관료주의의 타자기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구어로부터 나온다. 얼굴은 기표작용적 체제에 고유한 <도상>이며 체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재영토화이다. 기표는 항상 얼굴화된다. 전제군주에게 모슨 것은 공적이며 공적인 모든 것이 공적인 것은 얼굴 때문이다. 이에 반해 수형자는 제얼굴을 잃어버린 자다. 그들은 동물되기, 분자되기가 될 운명이며 사람들의 그들의 재를 바람에 날릴 것이다. 희생양은 자신의 중심에 기표를 재장전할 줄 모르는 모든 것을 떠맡으며 가장 바깥의 원으로 기표를 가지고 간다. 희생양은 용납할 수 없는 도주선을 만들며 절대적 탈영토화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낸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는 8개의 양상 또는 원리로 정의된다. 1)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한다. 그것도 무한히.(기호를 탈영토화하는 의미생성의 무제한성) 2)기호는 다른 기호에 의해 돌려 보내지며, 끊임없이 회귀한다.(탈영토화된 기호의 순환성). 3)기호는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며 끊임없이 중심에 의존하는 동시에 중심을 바뀌어 놓는다. (기호들의 은유, 기호들의 히스테리). 4)원들의 확장은 기의를 주고는 다시 기표를 주는 해석들에 의해 항상 보증된다.(사제의 해석병) 5)기호들의 무한한 집합은 하나의 주요 기표를 가르키는데 이 기표는 과잉인 동시에 결핍으로 나타난다 (전제군주적 기표, 체계의 탈영토화의 극한) 6) 기표의 형식은 실체를 갖는다. 7)체계의 도주선은 부정적 가치를 부여받으며, 기표작용적 체제의 탈영토화 역량을 넘어선다고 비난받는다(희생양의 원리). 8)그것은 보편적인 기만의 체제이다.
이러한 기호체제의 특징을 짧게 요약하자면, 우선 전-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는데, 그것은 원시적 기호계가 그것이다. 표현의 형식들은 기표에 의한 모든 권력장악을 축출하며 내용 그 자체에 고유한 표현적 형식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예컨대 몸체성의 형식들, 리듬의 형식들, 춤의 형식들, 제식의 형식들은 이질적인 것들 안에서 음성적 형식과 공존한다. 이 기호계는 자신의 절편성과 다성성을 통해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보편화된 추상, 기표의 성립, 언표행위의 형식적, 실체적 균질화, 언표들의 순환성, 언표상관자들, 국가장치, 전제군주의 취임, 사제 계급, 희생양 등을 피하려고 한다. 또 하나의 기호계로는 반-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다. 이 기호계는 절편성이 아니라 산술과 숫자 읽기에 의해 진행한다. 그것은 다수의 움직이는 배분을 표시하며, 스스로 관계들과 함수들을 설정하며, 총합하기보다는 배열하고 수집하기 보다는 분배하며, 단위들의 조합들 통해서보다는 정단, 이전, 이주, 축적에 의해 작동하는 수 기호 이런 종류의 기호는 국가장치에 대항하는 유목민적 전쟁기계의 기호계에 속하는 것 같다. 그것은 증식하는 다수성이다. 그리고 후-기표작용적 체제가 있다. 이것은 의미생성에 대립되는 주체화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정의된다. 전/후/반 기표작용적 요소들은 항상 기표작용적 체제 안에서 작동하고 존재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매우 작은 사건들이 이 기호계에서 저 기호계로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20세기가 시작하면서 정신분석학은 두가지 망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편집망상과 해석망상이다. 이러한 편집-해석망상과 후기표작용적 체제의 의미생성의 주체적 체제를 대립시켜 나갈 수 있겠다. 첫 번째 체제에서 개인은 한 점에서 망사조직의 팽창 속에서 다른 점으로 한 원에서 다른 원으로 건너뛰고 중심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며, 예견하고 회고한다. 두 번째 체제에서 무제약적으로 팽창중인 원들의 동시성 보다는 유한한 과정의 선형적이고 시간적인 이어짐에 의해 규정된다. 이 두가지 망상의 역사는 헤겔이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있다. 정신의학은 광지개념과 관련해서 구성되지 않았으며, 그와 반대되는 두 방향 속에서 광기 개념을 와해시키면서 구성되었다. 이 두 망상 중에서 관념적 망상과 행동적 망상은 계급간의 구별에 조응한다. 편집증은 부르조아인 반면 정념적인 망상증 환자는 주변부 계급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기표작용적이고 편집증적인 전제군주적 기호체제와 주체적이거나 정념적인 후-기표작용적 권위주의적 체제를 구분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원형으로 퍼져나간 그물망으로부터 하나의 기호나 기호다발이 떨어져 나온다. 그 기호는 스스로 작동하며 도주선, 탈영토화된 선이 그어져 있고, 이 선은 탈영토화된 기호들의 지표를 넘어서 있다. 이 성에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여 속죄양을 도주선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유대민족은 이집트의 제국적 그물망을 멋어나 사막으로 향하였다. 선형적인 소송, 호소는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그물망과 대립된다. 가장 탈영토화된 선을, 희생양의 선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하지만 그 선의 기호를 바꾸고 그것을 우리의 주체성의 긍정적 선으로 우리의 <수난>의 선으로 우리의 <소송> 또는 <호소>의 선으로 바꿀 것이다.
얼굴성은 심오한 변화를 겪는다. 신은 자기 얼굴을 돌리는데 아무도 그 얼굴을 보아서는 안된다. 한편 싱에 대한 진정한 공포에 사로잡힌 주체도 자기 얼굴을 돌린다. 이러한 외면속에서 긍정적인 도주선이 그려진다. 예언주의에 대한 심오한 이론가는 바로 스피노자이다. 자신을 외면한 신을 외면한 카인은 죽음 피해주는 기호 즉 카인의 표지에 보호를 받으면서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간다. 카인의 집행유예된 실존은 참된 인간을 보여준다. 선지자와 사제와는 달리 예언자는 배반자이다. 요나의 수난기에서, 요나의 도주선에서도 그것이 보여지며, 그 배반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유대인의 신을 배반하고, 유대인들을 배반하며, 신에게 배반당하고(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된 인간인 유다에게 배반당한다. 예수는 신의 아들임을 요나의 기호로 언급한다. 예언자는 신에게서 영감보다 폭력을 훤씬 더 당하는 것이다. 예언자는 사제가 아니다. 예언자는 말하는 법을 모른다. 신을 예언자의 말을 막는다. 예언자의 망상은 관념이나 상상의 망상이기보다는 생동의 망상이다. 예언자는 신과 정면적이고 권위주의적 관계를 맺는다. 예언자는 현재와 과거의 권력들을 적용하기보다는 미래의 역략을 앞서가서 탐지한다. 우리는 후반부의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오이디푸스의 방황, 자기 자신의 얼굴과 신의 얼굴을 이중으로 외면하는 그의 도주선을 발견하게 된다.
얼굴이 기표의 몸체라면 책은 정념의 몸체가 된다. 편집광은 책이라는 배치물속에서 자신의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정념적 체제 주체화의 체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체화의 점으로부터 유래하는 언표행위의 주체 그리고 첫 번째 주체와 결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언표의 주체가 존재한다. 그 세가지 양상은 1) 제국들과 대립되는 유대인들 그들은 배반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땅을 위애 언표의 주체를 구성하며, 순환적인 팽창 대신에 항상 갱신될 수 있는 계약 또는 선형적 과정을 형성한다. 2)이른바 근대철학 또는 기독교 철학 코기토, 의식, "나는 샌각한"는 자기 자신의 사용을 반성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표상된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서만 그 자신을 파악하는 언표행위의 주체이다. 3) 19세기 정신의학 조증과 구별되는 편집광, 이상적인 망상과 구분되는 주체적인 망상, 마법을 대신하는 "홀림", 편집증과 구분되는 정념적 망상의 느린 방출... 정념적 망상은 진정한 코기토다. 후-기표작용적 체제의 정념적 선은 주체화의 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무엇이든 주체화의 점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두 주체의 구성 또는 두 주체의 이중화이며, 한 주체가 다른 주체로, 즉 언표행위의 주체가 언표 주체로 밀려나는 작용이다. 이러한 이중적 주체의 의미생성과정에서 실체는 주체가 된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행위의 주체로 밀려난다. 언표의 주체가 자기차례가 오면 다른 과정을 위해 언표행위의 주체를 공급하는데도 말이다. 이 밀려남은 정신적 실재가 지배적 실재로 밀려나는 작용이기도 하다. 이제 초월적 권력의 중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계와 뒤섞인 내재적인 권력이 필요하다. 알뛰세르는 사회가 개인을 불러세워 호명하는 것에 대해 주체화라고 부른다. 벤베니스트는 너라는 언표는 나라는 언표안에서 자기자신의 사용을 언표하고 반성하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주체란 언어의 조건도, 언표의 원인도 아니다.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만이 존재한다. 주체화란 여러 배치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내부적 조건이 아니라 표현의 형식화 또는 기호체제이다.
정신분석적 코기토는 정신분석자가 다른 곳에서 말하거나 행하는 모든 것 속에서 그는 언표의 주체이며, 영원히 정신분석되고, 선형적 과정들을 옮겨 다닐 것이며, 정신분석가를 바꾸더라도 지배적 실재의 정상화 작용에 더욱더 굴복하게 될 것이다. 편집증적 체제에는 두 축이 있다. 한편으로 기호는 다른 기호를 지시하며, 다른 한편으로 기표는 기의를 지시한다. 첫 번째 죽은 의식이다. 이러한 이중적 주체화 속에서 두 번째 형식은 정념-사랑, 다른 유형의 분신, 이중화, 밀려가기이다. 코기코가 자아만을 위한 정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정념적인 사랑은 둘인 코기토이다. 정념-사랑에 잠재적인 유일한 주체의 이중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코기토에는 잠재적인 커플이 있다. 두 종류의 분신은 의식적 형상인 <자아>=<자아>와 함께 정념적 분신은 <남자>=<여자>로 존재한다. 부부싸움은 항상 둘인 코기토이며 전쟁하는 코기토이다. 주체-입법자 커플에서는 한 분신은 언표행위의 주체역할을 점령하는 반면 다른 분신은 단지 언표의 주체에 그치고 만다. 후-기표작용적 체제안에 있는 의식-사유와 열정-사랑이라는 두 형상이 있다. 혼합된 정락 또는 조합 속에 관료주의적 의식성과 혼인관계라는 두 계기가 존재한다. 다른 체제의 기표작용적 잉여화는 다른 잉여가 의식과 사랑의 잉여가 존재한다. 기표작용적 체제에서 잉여는 기호들 또는 기호의 요소(음소, 문자, 랑그에서 문자들)들을 변용시키는 객관적 빈도라는 현상이다. 후-기표작용적 체제에서 잉여는 주체적 공명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연동소 즉 인칭대명사와 고유명사를 변용시킨다. 기표작용적 체제와 구제적 체제, 그리고 그 각각의 잉여를 구분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그것들이 수행하는 탈영토화운동이다. 여기에는 빈도로 표현되는 상대적 탈영도화가 있으며, rlghsms 의식과 정념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절재적 탈영토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코기토의 절대적 탈영토화, 주체적 잉여는 기표작용적 잉여 위에 접목되어 거기서 이차적인 잉여로서 파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주체화는 도주선에 긍정적 기호를 강요하며, 탈영토화를 절대에까지 가져가며, 잉여를 제귀적 형식으로까지 가져간다. 공명의 잉여안에서 의식의 절대는 무력함의 절대이며 정념의 강렬함은 공의 열기이다. 이는 주체화가 본질적으로 유한한 선형적 과정을 구성하며, 그래서 다음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한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코기토는 끝을 추구하며, 이를 통해 주체화는 도주성에 끊임없이 그 선을 부인하는 절편성을 강요하며, 절대적 탈영토화에 끊임없이 그것을 가로막고 우회시키는 소멸의 점을 강요한다. 그 이유는 표현의 형식들 또는 기호 체제들은 여전히 지층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속하는 지층들은 유기체, 의미생성과 헤석, 주체화와 예속이다. 우리는 이 지층으로부터 고른판과 추상기계를 분리시킨다. 잉여속에는 주체적인 잉여가 아닌 도표적인 잉여 나무형태의 노드가 아닌 리좀식의 잉여는 없는가?
전-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는 언어의 특권를 나타내는 덧코드화가 널리 시행된다. 기표작용적 기호계는 덧코드화는 기표와 기표를 방출하는 국가 장치에 의해 완벽하게 수행된다. 반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표현의 형식 또는 언표행위의 형식으로서 <수>에 의해 확보되고 또 그것이 의존하는 <전쟁기계>에 의해 확보된다. 후기표작용적 기호계 여기서 덧코드화는 의식의 잉여에 의해 확보된다. 그런데 보완적이면서도 상이한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추상적이거나 순수한 어떤 기호계를 다른 기호계로 변형시킬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 변형은 상징적 변형, 의식적 변형, 모방적 변형, 도표적 변형이 가능한데 변형은 순수 기호계의 언표와 혼동되지 않는다. 또한 변형은 자신이 어떤 기호계에 속하는지 알기 위해 화용론적 분석을 해야만 하는 애매한 언표와도 혼동되지 않는다. 변형된 언표는 하나의 기호계가 다른 데서 온 언표들을 자기 자신을 위해 번역
하는 방식으로 표시해 준다. 번역은 창조적인 작업이다. 새로운 순수 기호 체제들은 변형과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다. 흑인 랩이 아프리카와 백인 음악을 변형하고 번역해 낸 것처럼 말이다. 화용론은 두 개의 성분을 제시한다. 첫 번째 것을 발생적 성분이라고 부른다면 두 번째를 변형적 성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성분이 가장 심오하며, 첫 번째 성분의 요소들을 측정하느 유일한 수단이다. 화용론은 변형에 내맡겨지지 않을 수 있는 불변항, 지배적인 문법성이라는 불변항이라는 관념도 거부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언어학적 사인이기 이전에 정치적 사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문법성의 등급에 대한 평가마저도 정치적인 문제이다. 기호체제란 언어의 존재함수일 뿐이다. 그래서 기호체제들은 언표행위 자체 안에 있는 변수들, 그러나 랑그의 상수들 외부에 있으며 언어학적 범주들로 환원될 수 없는 변수들에 의해 정의된다. 배치물의 단지 한 측면만이 언표행위와 관련되고 표현을 형식화한다. 내용들은 이런 저런 식으로 기표에 의존하는 기의들이 아니며, 인과관계들을 맺고 있는 대상들도 아니다. 추상기계는 배치물의 모든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구성하고 결합한다. 추상기계는 표현의 판과 내용의 판이 구별되지 않는다. 진정한 추상기계는 동일한 고른판을 그리며, 그 고른판이 지층들이나 재영토화들을 따라 내용들과 표현들을 형식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추상기계는 그 자체로 탈지층화되어 있고 탈영토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안에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자기 안에서 내용과 표현을 구별하지 않는다. 추상기계 자체는 물리학적이거나 물체적이지도 않도 기호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도표적이다. 추상기계는 순수한 <질료>,<기능> 즉 도표이며, 이 도표가 분배할 형식들과 실체들, 표현들과 내용들과 독립해 있다. 즉, 그것은 텐서들만을 나타내는 기능-표현이다. 탈영토화의 최대치는 때로는 내용의 특질로부터 오고 때로는 표현의 특질로부터 온다. 이 특질들은 서로 상대방과 관련해서 탈영토화한다라고 얘기된다. 한 쪽의 특질이 다른 쪽의 특질을 데리고 가서 자기 자신의 역량으로 고양시키면서 도표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추상기계의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표는 영토적 기호인 지표와 재영토화에 속하는 도상과 상대적 부정적 탈영토화에 속하는 상징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독자적인 추상기계가 질료안에서 직접적으로 기능할 때면 언제나 도표가 존재한다. 도표의 층위나 고른판 위에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기호체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도표는 특질점, 첨점만을 알 뿐이다. 이중분절 표현과 내용의 뒤섞임은 각각 자신의 측면에서 보면 실체화되어 있고, 형식화되어 있다. 그것들은 이중분절의 집게들 속에 있어 자신들의 독립성 또는 실재적 구분을 보장받는다. 지층들은 도주선의 접합접속들을 방해하며 탈영토화의 첨점을 으스러뜨린다. 공리화, 기호화, 물리화는 도표가 아니라 오히려 도표의 반대이다. 고른판의 도표에 맞선 지층의 프로그램, 그러나 이것은 도표 자신의 도주로를 다시 걷고 독자적이고 새로운 추상적인 기계들을 확산시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추상기계들은 도표들을 전개하는 고른판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기계는 지층들속에 끼워 넣어져 있으며, 표현의 형식과 내용의 형식을 동시에 조직하는 개별지층에도 그려져 있다. 이중의 운동, 추상기계들이 지층에 작용해서 끊임없이 거기에서 무언가를 달아나게 하려는 운동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기계들이 실제로 지층화되고 지층들에 포획되는 운동이 있다. 지층들의 안정성과 평온은 보장되지 않는다. 안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도약하는 고른판을 되찾기 위해 지층들에 작용하는 도주선을 연장하고 점선들을 증대시키고 탈영토화의 과정을 경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추상기계의 모든 양태는 기계적 배치물과 공존하고 있다.
기호체제에는 네 가지 성분이 있다. 발생적 성분은 기호체제가 어떻게 혼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에 변형적 성분은 추상적인 체제가 어떻게 다른 체제로 번역되고 변형될 수 있는지를 보려준다. 세 번째는 도표적 성분이다. 기호체제와 표현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이것은 실재와 추상기계를 통과한다. 도표성분은 변형의 성분보다 더 심층에 있다. 마지막으로 기계적 성분이 있다. 이것은 추상기계가 어떻게 구체적인 배치물에서 실행되는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화용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다. 1)발생적 성분안에서 혼합된 기호계의 사본만들기 2)체제가 번역되고 창조될 가능성 및 사본들 위로 발아할 가능성과 더불어 체제의 변형적 지도 만들기 3) 각 경우에 잠재성 또는 결과적 돌출로서 작동하고 있는 추상기계의 도표만들기 4)집합을 나누고 운동을 순환시키는 배치물들의 프로그램만들기
하나의 언표는 1)전기표작용적 2)반기표작용적 3)의미생성 4)열정적 또는 후 기표작용적 속에서 존재한다. 언어에 보편자를 부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은 이미 너무 추상적인 동시에 아직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은 층위를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최악의 추상으로 떨어진다. 기호체제들이 언어를 참조하는 것이 아니며, 언어가 그 자체로 추상기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가 진실이다. 기호체제를 참조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며, 모든 기호론, 모든 언어학, 모든 논리학을 붕괴시키는 것은 추상기계들, 도표적인 기능들, 기계적인 배치물들을 갖고 있는 기호체제들이다.
1947년 11월 28일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관없는 몸체는 <사회체>이자 정치이자 실험이다. 몸체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몸체의 여러 가지 기관들은 접혀지고 꿰매어지고 접합되고 고문당함으로서 유기체로 변신한다. 그것은 사도-메조히즘적인 작업이다. 기관없는 신체를 CsO라고 말하자. CsO는 국가기관이라는 기관이 없는 사회체로서 그 자체로 내포적 공간 안에 강렬함들을 배분한다. 그것은 강렬하고 아직 형식을 부여받지 않고,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강렬한 모체, 강렬함=0인 것이다. 부정적인 강렬함 따위란 없다. 이 물질은 에너지와 같아서 실재를 생산해 낸다. 모든 CsO의 집합이 존재하는가? CsO들의 집합은 모든 하나와 여럿의 대립을 넘어서는 융합 상태의 다양체가 문제인 것이다.
Cso들 즉, 특정한 속성 아래에 있는 모든 종류의 강렬함의 연속체들은 욕망의 내재적 장이며, 욕망에 고유한 고른판이다. 여기서 욕망이란 긍정으로서의 욕망이지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아니다. 마치 자기자신에 의해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만 충족되는 것처럼 보이는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이 존재한다. 그 기쁨은 어떠한 결핍도 어떠한 불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쾌락으로 측정할 수도 없다. 강렬함을 넘어서 자아도 타자도 없는 기관없는 몸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욕망이 쾌락을 규범으로 삼지 않는 까닭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 때문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욕망의 긍정성, 다시 말해서 욕망이 자신의 진행과정에서 그리는 고른판 때문이다.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은 고원지대이며 그것은 Cso 즉, 기관없는 몸체의 영토이다. CsO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라, 유기체이다. CsO는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과 그와 같은 조직화에 대립한다. 몸체는 몸체이다. 또한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몸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는 몸체의 적이다. 유기체는 결코 몸체도 CsO도 아니다. 오히려 유기체는 하나의 지층, 축적, 응고, 침전이다. 지층은 사슬이며 집게이다. 유기체를 헤체한다는 것은 결코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전체적인 배치물을 상정하는 연결접속들, 회로들, 접합접속들, 구배들과 문턱들, 강렬함의 이행과 배분, 영토들과 측량사의 기술로 계측된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 유기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몸체들은 자신의 기관들을 비워버린다.
지층으로서의 유기체를 보자.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의 조직화와 대립되는 CsO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지층 자체에 속하는 유기체의 CsO도 존재한다. 암조직이 바로 그것이다. CsO는 알이다. 그러나 이 알은 퇴행적인 알이 아니다. 오히려 알은 철저하게 동시간적이며,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알을 자신의 실험의 환경으로서, 연합된 환경으로서 안고 있다. 알은 순수한 강렬함의 환경이며, 내포적 공간으로서, 외연적인 연장이 아니라 생산의 원리로서의 강도 0이다. CsO는 어른, 아이, 어머니의 엄밀한 동시간성이며, 이것들의 비교적인 밀도와 강도의 지도이며, 또한 이 지도상의 온갖 변이들이다. CsO는 욕망이다.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 바로 CsO이며,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욕망한다. CsO가 고른판 또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어서 만은 아니다. 설령 CsO가 조잡한 탈지층화의 공허함에 빠지거나 암적인 지층의 증식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욕망이다. 고른판은 단순히 모든 CsO들을 통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고른판이 거절하는 CsO도 있으며 이 판은 그것을 그리는 추상기계와 함께 선택한다. CsO의 마약 파시스트적 사용이나 자
살적 사용도 존재한다. CsO의 집합이 가능한가? 선택된 모든 충만한 CsO들의 집합을 만드는 자가 바로 고른판이다. 이점을 분명히 해두자 효과들의 동일성, 종류들의 연속성, 모든 CsO들의 집합은 오직 고른판을 뒤덮고 심지어 그려낼 수 있는 추상적인 기계를 통해서만, 욕망과 합체되어 실제로 욕망을 싣고 이러한 욕망들의 연속적인 연결접속들과 횡단적인 연계들을 분명하게 해 줄수 있는 다양한 배치물들을 통해서만 비로서 이 판 위에서 획득 될 수 있는 것이다.
0년 얼굴성
우리는 두 개의 축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축을 만났다. 이성은 두 개의 기호계이자 두 개의 지층이자. 의미생성은 기호들과 잉여들을 기입할 흰 벽이 없으면 안된다. 주체화는 의식, 정념, 잉여들을 숙박시킬 검은 구멍이 없으면 안된다. 얼굴, 즉 흰벽-검은 구멍이라는 체계는 매우 흥미롭다. 얼굴은 그 자체로 잉여이다. 얼굴은 공명이나 주체성의 잉여들은 물론이고 의미생성이다 빈도의 잉여를 갖고 자신을 잉여로 만든다. 얼굴은 기표가 부딪혀 튀어나와야 하는 벽을 구성하며, 기표의 벽, 프레임, 스크린을 구성한다. 얼굴은 주체화가 꿰뚫고나가야 하는 구멍을 파며, 의식니아 열정으로서의 주체성의 검은 구멍, 카메라 제 3의 눈을 구성한다. 얼굴은 괴담이다. 기표 혼자서 자신에게 필요한 벽을 구성할 수 없듯이, 주체화 혼자서는 자신의 구멍을 팔 수는 없을 것이다.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로부터 태어난다. 이 기계는 기표들에게 흰벽을 주고 주체화에 검은 구멍을 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들을 생산한다. 얼굴은 구멍-표현들, 구멍 뚫린 표면이라는 체계의 일부분이다. 머리가 더 이상 몸체의 일부분이 아니게 되었을 때, 머리가 더 이상 몸체에 의해 코드화되지 않을 때, 머리가 더 이상 다차원적이고 다성적인 몸체적 코드를 지니지 않을 때, 요컨대 머리를 포함하여 몸체가 탈코드화되고 얼굴이라 불리는 어떤 것에 의해 덧코드화되어야만 할 때 얼굴이 생산된다. 얼굴화는 닮음이 아니라 근거들의 질서에 의해 작동한다. 얼굴은 추상기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머리를 뒤덥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기계가 어떤 상황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얼굴은 앞발의 손으로의 탈영토화보다 훨씬 강렬한 탈영토화를 표상한다. 그것을 절대적 탈영토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은 아주 중요한 상관물인 풍경도 갖는다. 풍경은 환경일 뿐만 아니라, 탈영토화된 세계이다. 얼굴과 풍경의 상보성 안에서 하나를 다른 것으로 구성하라.
탈영토화의 정리들 혹은 기계적 명제들을 서술해 보자. 1) 혼자서는 탈영토화될 수 없다. 손-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2)탈영토화의 두 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탈영토화의 강렬함은 운동이나 전개 속도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3) 가장 탈영토화되지 않은 것은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 재영토화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서 아래에서 위로 수직적인 재영토화, 가슴, 손, 온몸, 도구 자체도 얼굴화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것은 성의 상품화나 방송에서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렇듯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고,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그렇지 않다.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는 선별적인 작용을 한다. 인종주의자들은 동일화되지 않는 것이
소멸될 때까지 동일자의 파동을 퍼뜨린다. 모든 종류의 나무성과 이분법을 그리는 것은 얼굴성이라는 추상기계가 생산하는 얼굴들이다. 나무성과 이분법이 없으면 기표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은 언어 안에서 그것들에게로 회귀하는 것들을 기능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얼굴성의 기계는 기표와 주체의 부속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기표와 주체의 연결장치이며, 기표와 주체를 조건짓는다. 얼굴의 잉여들은 기표작용적이고 주체적인 잉여들과 더불어 잉여를 만든다. 얼굴은 추상기계에 의존하기 때뭉에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주체나 기표를 가정하지 않는다. 의미생선과 주체화를 강요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권력배치물이다. 독재적 배치물없는 의미생성은 없고, 권위적 배치물 없는 주체화도 없으며, 권력 배티물들이 없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혼합도 없다. 권력자들은 검은 구멍-흰 벽 체계를 건설할 것이다. 주체의 자율성처럼 기표의 전능을 정당하게 허용하고 보장해주는 이 추상적인 기계에 시동을 걸 것이다. 이 기계는 얼굴성기계라고 불린다.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며,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킬 것이다. 몸체의 탈영토화는 얼굴위에서 재영토화를 내포한다. 몸체의 탈코드화는 얼굴에 의한 덧코드화를 내포한다. 기표작용적인 것과 주체적인 것의 기호계는 결코 몸체를 통과하지 않는다. 기표는 적어도 완전히 얼굴화된 몸체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다. 얼굴의 비인간성, 얼굴은 결코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구체적 배치물 → 얼굴성, 즉 검은 구멍-흰 벽의 추상기계의 시동 → 이 구멍 꿇린 표면 위에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새로운 기호계의 설치 이 때문에 우리는 두가지 문제, 즉, 얼굴과 그것을 생산하는 추상기계의 관계, 그리고 얼굴과 이 사회적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 배치물들의 관계를 배타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지상의 기표작용적인 독재적 얼굴과 바다의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권위적 얼굴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검은 구멍과 얼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추상기계는 진정한 탈얼굴화의 수행자로서 자신의 행로에서 지층들을 해체하고, 의미생성의 벽들을 관통하고, 주체화의 구멍들에서 분출하고, 진정한 리좀들을 위해 나무들을 쓰러뜨리고, 긍정적인 탈영토화의 선들과 창조적인 도주선들 위로 흐름들을 인도하는 일종의 자동유도장치들을 해방시킨다. 얼굴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얼굴을 비인간화하기 위하여 그것을 클로즈업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커다란 판이며, 자연스럽게 비인간적이며 괴물적인 복면이다. 얼굴을 기계에 의해서 생산되며, 그 기계를 동작시키고, 탈영토화를 부정적인 것 안에 두면서도 절대에까지 밀어붙이는 특수한 권력장치의 요구들을 위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8.1874년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문학작품에서 단편소설의 존질을 결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뭔가가 일어났다는 말이나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각각 아주 직접적인 과거와 아주 근접한 미래를 가리킬 수 있다. 현재는 다시당김과 미리당김과 하나일 따름이다. 그 운동들 중에서 한 운동은 현재와 함께 움직이지만, 다른 운동은 그것이 현존하자마자 이미 현재를 과거로 던지며, 또 다른 운동은 동시에 현재를 미래로 끌고 간다. 단편소설은 근본적으로 비밀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콩트는 발견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단편소설은 주름들이나 감쌈들로 존재하는 몸과 정신의 자세들을 등장시키는 반면, 콩트는 가장 뜻밖의 펼침과 전개들인 태도들, 입장들을 작동시킨다. 단편소설은 다음과 같은 연쇄를 갖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양상 또는 표현),<비밀>(형식), <몸의 자세>(내용).
단편소설은 선들 사이에 있다. 글자의 선들은 삶의 선들, 행운과 불운의 선들, 글자의 선이 변주된 선들, 씌어진 선들 사이에 있는 선들 따위의 다른 선들과 결합되어 있다. 단편소설은 쥐앙스에 까지 으르는 순수한 선들일 따름이며, 또한 말의 순수하고 의식적인 힘일 따름이다.
첫 번재 단편소설 헨리 제임스의 「철장 안에서」 1898
두쌍의 남녀가 만난다. 그들은 계급적 위치가 틀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는 거시-정치이고 또 하나는 미시정치인데 이것들은 계급, 성, 인물들, 느낌들을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원소들을 작동시키는 커플들의 내부의 관계와 다른 분신관계가 있다. 이것은 유연한 분할선 또는 분자적 분할선인데 여기에서 절편들은 탈영토화의 양자들이다. 바로 이 선위에서 현재가 정의된다. 제임스의 여주인공은 견고한 절편성과 같은 흐름의 선을 뚫는 세 번째의 선 도주선과 같은 것에 도달한다. 그녀는 두 절편의 계열을 뚫어 절대적 탈영토화에 도달한다. 그것은 과거속에 있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세 번깨 선이 섬광을 발하면 도주선이 달리는 기차와 같다면 그것은 우리가 선형적으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재 단편소설 피츠제럴드의 「파열」1936
피츠제럴드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도래, 파국, 피로속에서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타격들, 그리고 의미심장한 절단들에 의해 진행되는 갑작스런 커다란 타격들이 있다. 우리는 부자-가난뱅이 이항적 절편을 넘어서게 된다. 이경우에는 나무의 초월성에 의해 규정된 거대한 운동들과 거대한 절단들 대신에 리좀의 내재성 안에 있는 격동들과 파열들이 있다. 균열은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에 일어나며 분자의 선은 개인의 선이 아니다. 나무의 방식이 아니라 리좀의 방식으로 분할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미시정치를 말이다. 천재는 모든 사람들을 생성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피츠제럴드는 우리에게 우리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절단선, 파열선, 단절선을 말이다.
세 번째 단편소설 피에르트 플뢰티오 「심연과 망원경 이야기」 1976
재단하는 망원경은 모든 것을 덧코드화한다. 길게 보기, 길게 보는 자의 상황은 모호하지만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의 수는 극히 작으며 그 수는 절편마다 하나이다. 그들은 미세하고 복잡한 망원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우두머리는 아니다. 길게 보는 자는 미래를 점칠 수 있지만 점치는 방식은 항상 분자적 질료, 발견할 수 없는 입자들 속에서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의 생성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망원경은 덧코드화의 방식이며 미시정치의 생성을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선들을 글의 선들을 그린다. 삶은 그 선들 위를 지나간다. 유연한 절편성의 선은 해방되어 길게 보는 자의 미시정치에 의해 떨리는 방식으로 그려진 아주 상이한 또 다른 선들과 뒤엉킨다. 그것은 정치의 문제이다. 다른 정치 못지 않는 정치의 문제다. 어느 날 길게 보는 어떤 자가 자기 절편을 버리고 검은 심연 뒤에 걸린 좁은 가교로 올라가서 자신의 망원경을 부순 후 도주선 위에서 다른 쪽에서 다가오는 눈먼 분신을 만나러 떠날 것이다.
우리는 도주선을 발명해야 한다. 여기 나름의 독자성을 갖고 있고 이미 복합적인 도주선이 있다. 한편 나름의 절편들을 가진 그램분자적인 습관적인 선도 있다. 이 두 선 사이에 분자적인 선이 있으며, 이 선을 한 쪽으로 기울면서 나름의 양자를 갖는다. 이 선은 지도제작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 선들은 지도를 구성하듯 우리를 구성한다. 그 선은 리좀의 선이다. 이 선들은 구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조를 점유하는 것은 점들, 우치들, 나무 형태들이며, 구조는 항상 체계를 닫아버려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분열분석은 단지 선의 배치만을 다루는데 선의 배치는 개인들 뿐만 아니라 집단들을 가로지른다.
○ 우선 그램분자적 분할 선, 유연하고 분자적인 분할선, 도주선 등 각 선의 특수성이 문제가 된다. 유연한 절편적인 것은 상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미시정치는 그 외연과 현실성에서 다른 정치 못지 않다. 요컨대 집합들이 크면 클수록 그것들이 작동시키는 심급들은 더욱 더 분자화된다. 집단이나 개인은 도주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창조하며 무기를 탈취하기 보다는 그 자신이 오히려 살아있는 무기다. 도주선은 현실이다.
○ 두 번째 문제는 선들 각각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견고한 절편성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건 좀더 쉽다. 그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주선 즉 절대적 탈영토화는 뒤에 따라오지 않는다. 도주선은 자기 때를 기다리고 다른 두선의 폭발을 기다려도 거기에 바로 있다. 절편성은 타협이며 상대적 탈영토화는 도주선을 타협시키고 봉쇄한다. 구개의 도주선이 양립가능하고 공존가능한지는 확실치 않다. 기관없는 몸체들이 용이하게 합성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랑이 견딜지 정치가 견딜지 확실치 않다.
○ 세 번째 문제는 선들의 상호내재성이 있다. 각각의 선들은 다른 선들 안에서 작동한다. 미시 외디푸스, 미시권력구성체들, 미시파시즘이라는 유연한 절편성도 재구성된다.
○ 끝으로, 가장 불안한 마지막 문제는 각 선들에 고유한 위험들에 관한 문제이다. 첫 번째 선의 경직성과 두 번째 선의 애매성도 말할 것이 없다. 도주선에 대한 절망이 그런 것이리라.
커플, 분신, 잠행자, 혼합물이란 무엇인가? 각 선들 사이에서 <그리고>라는 연결접속에서 한 선과 다른 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것은 새롭게 그려지는 도주선이다. 포기와 단념에 반대되는 새로운 행복이 아닌가?
9.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되어 있다. 이항적으로 절편화되어 있다. 원형적으로도, 선형적으로 절편화되어 있다. 이항적 절편, 원형적 절편, 선형적 절편 등 절편성의 모습들은 항상 함께 취해지며, 심지어는 서로 옮겨가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부족의 이원적 조직화가 원형적 형태와 결부되며 선형적 형태로 이행함을 보여준다. 이질적 사회적 절편들 사이에는 커다란 소통 가능성이 있어서, 한 절편과 다른 절편의 이어짐이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사회적 절편들은 연속적으로 활동하므로 절편성은 돌출, 격리, 재결합에 의해 작동하는 진행 중인 절편화작용과는 구분되지 않는다. 절편적인 것과 중앙집중적인 것과의 고전적 대립은 전혀 적합한 것 같지는 않다. 국가는 졀편 속에서 작동할 분만 아니라 나름의 절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강요한다. 절편성과 중앙집중을 대립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편성의 두 유형을 구분해야 한다. 하나은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이다. 이 구분에서 살펴볼 것은
1) 이항대립(남자-여자, 하층민-상층민)은 원시사회에서 매우 강력하다. 그러나 이항대립은 그 자체로는 이항적이지 기계들과 배치물의 결과인 것 같다. 계급이나 성은 둘 씩 나아가며, 삼분 현상은 둘의 운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우리는 얼굴기계에서 그 점을 분명히 했는데 얼굴기계는 원시적인 머리기계와 구별된다. 현대사회는 이원적 절편성을 충분히 조직화한 사회이다.
2) 원형적 절편성은 원들이 중앙집중적이라거나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유연한 중심들은 이미 노드들, 눈들, 또는 검은 구멍들처럼 작용한다. 애니미즘적 눈들의 다양체는 각각의 동물정신에 의해 변용된다. 분명 중앙집중은 절편화와 대립되지 않으며, 원들은 구분된 채로 있다. 하지만 원들은 중앙집중적이 되며, 결국 나무 구조를 갖게 된다. 중앙국가는 원형적인 절편성을 제거함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원들을 중앙집중화하거나 중심들을 공명하게 함으로써 구성된다. 원시사회에도 이미 권력의 중심들이 있다. 국가 안의 사회에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 있다.
3) 선형적 절편성의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절편은 그 자체로는 물론이고 다른 절편들과 관련해서도 강조되고 교정되고 등질화된다고 얘기할 수 있다. 기하학적이고 선형적인 국가이성은 영토의 정비, 공간 잘소와 영토성으로 대체하기. 세계를 도시로 변형하기 등 점점 견고해지는 절편성을 포함하고 있다. 형상들은 형상들에 가해지는 변용과 분리될 수 없고, 선들은 선들의 생성과 분리될 수 없고 설편들은 절편화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 기하학과 산술은 해부용 메스처럼 사유재산과 토지대장을 영토화한다. 한 선의 절편들은 다른 선의 절편들에 대응한다. 임금제도는 화폐, 생산, 소비재의 절편에 대응한다.
경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은 1) 견고한 양태아래에서 이항적 절편성은 그 자체로 유효하며 직접적 이항화의 거대기계들에 의존하는 반면, 유연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성들은 n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의 결과로부터 생긴다. 2)원형적 절편성은 단일한 중심 안에서 공명기계를 참조하면서 모든 초점을 일치시킨다. 3) 선형적 절편성은 기하학적 방식으로 등질적 공간을 구성하는 덧코드화
기계를 통과하며, 절편들의 실체와 형식과 관계 안에서 결정된 절편들을 끄집어낸다. 현대사회 또는 국가 사회는 일의적 덧코드화를 통해 쇠약한 코드를 대체하였으며, 특수한 재영토화를 통해 잃어버린 영토성들을 대체했다. 절편성은 언제나 추상기계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두 가지 절편성, 즉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하고 현대적인 절편성을 대립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뒤얽혀 있다. 유연한 절편성은 견고한 절편성과 분리될 수 없는 현대적인 하나의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회와 개인은 두 절편성 즉 그램분자적 절편성과 분자적인 절편성에 의해 가로질러진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며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인 것이다. 사회계급들 자체도 동일한 운동과 동일한 분배, 동일한 목적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투쟁을 전개하지 않는 군중과 관련되어 있다. 군중이라는 개념은 분자적 개념이다. 군중은 계급이라는 그램분자적 절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편화 작용의 유형을 통해 나아간다. 견고한 절편들의 분리 및 총체화와 공존하는 또 하나의 체제는 바로 분자적 체계이다. 국가사회주의도 중앙권력 탈취만이 아니라 미시적인 점을 통한 분자적인 초점의 공명을 목적으로 하였다. 미시적인 검은 구멍에 전쟁기계를 장착하면 파시즘이 된다. 파시즘이 위험한 것은 분자적이거나 미시정치적인 역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주으이 운동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암적인 몸체인 것이다.
분자적 절편성과 관련한 네가지 오류가 있다. 1) 가치론적으로 더 좋아지기 위해서 약간의 유연성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파시즘 중 위험한 건 미시파시즘이며, 섬세한 절편화는 견고한 절편화만큼이나 위험하다. 2) 심리학적인 것으로 분자적인 것은 상상의 영역이며 개인이나 개인 상호간의 사항에만 관련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3)두가지 형태는 단순한 규모로 판단되지 않는다. 분자적인 영역도 사회에 걸쳐 존재한다. 4)이 두선의 질적인 차이가 양자의 상호 자극이나 교차를 저해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러한 결과로서 이 양자간에는 정비례건 반비례건 하나의 비례관계가 존재한다.
그램분자가 강력해 질수록 분자화는 촉진된다. 우주시대에 초소형디지털의 등장이 그것이다. 기계가 지구적 우주적인 것이 될수록 배치물은 점점 더 소형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분자적 운동들이 세계 규모리 대조직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반대하고 그것에 구멍을 뚫을수록 미시정치가 중요해 진다. 동서진영의 균형은 남북의 불안정화는 초래했다. 동서의 양 진영에 있는 대규모의 그램분자적 집합은 지그재그의 균열과 함께, 자기 자신의 절편들조차 보유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분자적 절편화 작용에 의해 부단히 변형된다. 맑시즘은 그램분자적인 절편간의 모순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지만, 미시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는 그 사회의 도주선들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 도주선들은 분자적인 것이다. 바로 1968년의 6월이 그러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배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좌파는 조건의 미성숙을 애기했지만 드골과 같은 우파는 사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분자적 흐름이 분출해서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그 후에는 규정할 수 없는 상태로 커져 간다. 하지만 그 역도 사실이다. 분자적 도주와 분자적 운동도 그램분자적 조직으로 되돌아와 이러한 조직의 절편들과 성, 계급, 당파의 이항적인 분배에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이라는 개념은 그램분자적이다. 오히려 향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이 분자적인 개념일 것이다. 화폐의 선도 절편이 아니라 화폐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선형화와 절편화를 통해 흐름을 고갈시키지만 상대적인 권력의 문제로 전화된
다. 분자적인 것 미시정치는 그 요소들의 작음이 아니라 그것의 군중에 의해 정의된다.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은 그램분자적인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과는 다른 것이다. 교회권력이 속죄의 절편성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범죄성향이라는 분자적 흐름도 존재한다. 군사적 권력고 정치목적과 대응하는 전쟁유형이 있는 가 하면 클라우제비츠의 직관으로는 전쟁기계는 이와는 전혀다르다 전쟁기계란 공격의 극에서 방어의 극으로 흘러가며 단지 양자에 의해서만 표시되는 절대적인 전쟁의 흐름이다. 절편들을 가진 선의 지표들을 가로질러서만 흐름과 흐름의 양자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 선과 저 절편들은 이것들을 침범하는 흐름을 가로질러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절편들을 가진 선은 양자들을 가진 흐름 속으로 잠겨들거나 연장되며 양자들을 가진 흐름은 끊임없이 절편들을 개정하고 휘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르켐은 통상 이항적이고 공명하고 덧코드화된 거대한 집단적 표상들 속에서 특권화된 대상을 찾았기 때문에 가브리엘 타르드를 짓밟았다. 타르드는 집단의 표상이란 n만의 인간들의 유사성에 전제하고 있으며 오히려 세부적인 세계, 무한소의 세계 즉 표상 아래 단계의 질료를 이루는 작은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에 관심을 가졌다. 미시 모방은 개인이 아니라 흐름이나 파동에 관련된다.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구조화이다. 발병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 타르드의 흐름은 믿음이나 욕망이다. 믿음과 욕망은 흐름이며 그래서 양화가능하며 사회적인 양인데 감각은 질적인 것이고 표상은 단순한 결과물이다. 집단표상이건 개인표상이건 그램분자적 영역이 아닌 믿음이나 욕망이라는 분자적 영역이 존재한다.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과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이 구별되고 나서 돌연변이 흐름이 있다. 그것은 코드를 피하고 코드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갖는다. 양자란 탈코드화되 탈코드화된 흐름위에 있는 탈영토화의 기호들 내지는 정도들이다. 견고한 선은 쇠퇴하고 있는 코드들을 대신하는 덧코드화를 내포하며 절편들은 덧코드화하거나 덧코드화된 선위에서의 재영토화와 비슷하다.
사회적 장은 탈코드화운동과 칼영토화운동에서 생기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연결접속과 결합이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도입했다.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흐름이 양자들이 더하거나 자극하는 방식을 연결접속이라고 한다면 흐름들의 결합은 차라리 흐름들의 상대적인 정지를 가리키며 축적으로부터 도주선을 봉쇄하고 재영토화를 수행한다.
한편에슨 군중들,흐름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들, 절편들이 있다. 거기에 이항적인 조직과 공명, 접합접속이나 집적, 어느 한쪽에 유리한 덧코드화 선이 동반된다. 군중, 계급은 동일집단을 변용시키더라도 동역학을 따르지 않는다. 군중으로서의 부르주아지,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엄밀하게 보면 동일한 싸움이 전혀 상이한 두 개의 양상 하에 전개되며 거기서 일어나는 승리, 패배는 동일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지도를 더 잘 그릴 수 있다. 우리에게 세가지 선이 있다. 1) 코드와 영토성이 서로 뒤얽힌 비교적 유연한 선 : 원시적 절편성에서 시작됨 2) 절편들의 이원적인 조직화, 공병하는 원환들의 동심성, 그리고 일반화된 덧코드화가 실행되는 견고한 선 : 국가장치 3) 양자에 의해 표시되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 또는 여러개의 도주선
원시사회의 영토성과 코드성에 따라 덧코드화와 재영토화가 사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뒤얽혀 있다. 로마제국의 견고한 절편성과 훈족이라는 유목민의 국가없는 전쟁기계 그리고 게르만의 탈영토화와 훈족의 재영토화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편으로는 덧코드화라는 추상기계가 있다. 이 기계는 절편들을 두 개씩 대립시키고, 절편들의 모든 중심들을 공명시키고, 등질적이고 분할 가능하며 홈이 페인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연장시키면서 절편들을 생산 재생산한다. 이런 종류의 기계는 국가장치이다. 하나의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자신의 한계의 자족적 한계속에서 닫힌 꽃병 상태를 통해 재영토화를 수행하면서 덧코드화의 세계적 기계와 동일화될 때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탈코드화와 칼영토화에 의해 작동하는 변이의 추상기계가 있다. 이 기계는 도주선을 드린다.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들을 인도하고 흐름들의 연결접속-창조를 확보하고 새로운 양자들을 방출한다. 이 추상기계는 도주상태이며 전쟁기계를 작동한다.
권력의 중심 또는 초점은 무엇인가? 절편적인 부분들과 중앙집중화된 장치간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한편으로 가장 견고한 절편성 조차도 중앙집중화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상자이다. 공명기능은 애적인 효력을 증가시키거나 강제적 운동의 공명을 배가시키는 닫힌 꽃병 상태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진다. 덧코드화되는 선이 절편에 그어지면 한 절편은 다른 절편보다 우위에 서게 되며 코드의 선이 통과하는 지배절편이 강조된다. 이런 점에서 중앙집중화는 늘 위계제적이다.
권력의 각 중심은 또한 분자적이며 미시논리적인 조직에 행사된다. 여기에서 권력의 각 중심은 확산되고 분산되고 확대되며 모형화되고 끊임없이 대체되고 유한한 절편화에 의해 작용하고 세부 및 세부적인 것들의 세부에서 작동함으로서 존재한다. 규율들 미시권력들은 분자적 측면의 통제를 가능케 한다. 학교의 유지는 교장의 권력이 아니라 전체학생들의 미시권력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시적 짜임을 갖고 있지 않은 권력의 중심은 없다. 억압당하는 자가 능동적인 이유는 마조히즘이 아니라 이 미시적 짜임 때문이다. 미시적 짜임은 견고한 절편들로 이루어진 덧코드화의 선과 양자들로 이루어진 궁극적인 선들 사이에 있다. 권력의 중심은 도주선과 덧코드화의 선과 만나는 점이다. 그래서 권력의 중심은 자신의 역량의 원칙과 자신의 무력함의 토대를 동시에 만난다. 역량과 무력함은 대립하기는커녕 서로 보충하고 보강해 준다. 위대한 정치인들이란 도주선을 예감하고 도주선을 뒤쫓는다. 권력의 중심들은 흐름들이 절편들로 변환되는 점들에 행사된다. 이 점들이 교환기, 변환기, 진동자이다. 절편들 자체는 이 추상기계에 의존한다. 은행권력은 창조된 신용화폐를 적합한 절편적 지불화폐로 변환하는 작업을 한다. 권력의 중심의 세가지 양상은 세가지 지대로 나뉜다. 1)견고한 선의 절편들과 관련된 역량의 지대 2) 미시 물리학적인 조직으로의 확산과 관련된 식별불가능성의 지대 3) 통제하지도 규정하지도 못하고 단지 변환할 수밖에 없는 흐름들 및 양자들과 관련된 무력함의 지대. 화폐를 예로 들자면 첫 번째 지대는 공적인 중앙은행으로 대표되며, 두 번째 지대는 은행들과 차용자들 간의 사적인 관계들의 무한계열에 의해 그리고 세 번째 지대는 경제 거래의 총액에 의해 규정되는 양자들의 화폐를 욕망하는 흐름들에 의해 대표된다. 권력중심의 첫 번째 지대는 그램분자적인 덧코드화의 추상기계를 실행시키는 배치물로서 국가 기구속에서 규정된다. 두 번째 지대가 이러한 배치물이 잠겨버리는 분자적 조직 속에서 규정된다. 그리고 세 번깨 지대는 변이, 흐름들, 그리고 양자들의 추상기계 속에서 규정된다.
세 선 중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화용론과 분열분석의 대상이다. 여기서 위험성은 네가지가 있다.
1) 우선 공포 무언가를 잃어 버릴 것이라는 공포는 도주 앞에서의 도수를 만들고 오히려 절편들을 공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느 절편 위에서건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2) 명확함이다. 그것은 분자적인 것에 관련된다. 이주민의 미시 물리학은 거시기하학을 대체한다. 유연한 절편성은 견고한 절편성의 변용들과 직무들을 축소된 모형으로 재생산할 위험을 갖는다. 이것은 군중이 되고 탈영토화되지만 다른 재영토화보다 훨씬 더 나쁜 여분의 재영토화를 발명해 낼 뿐이다. 미시파시즘은 작은 세포 하나하나에 젖어드는 바이러스처럼 천개의 구멍을 형성할 것이다.
3)권력이다. 이는 두 선 위에 동시에 걸쳐 있다. 견고한 절편의 덧코드화와 공명으로부터 미세한 절편까지 혹은 역으로 권력은 진핸된지만 권력이 무력한 진자 원인은 권력의 무력함이다. 권력자는 끊임없이 도주선을 정지시키려 하고 덧코드화의 기계속에 변이의 기계를 붙잡아 고정시킨다.
4)도주선 자체다. 도주선 자체가 파괴와 순수하고 단순한 소멸, 소멸의 열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욕망이란 배치되어 있으며 욕망이란 배치물이 결정한다. 도주선을 그리는 배치물은 전쟁기계유형을 한다. 정쟁기계란 전쟁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영토화의 양자들을 방출하고 변이하는 흐름들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기계는 유목민적 기원을 가지며 국가장치에 맞선다.
우리는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차이를 재발견하게 된다.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국지화된 배치물인 국가와 이 배치물이 실행하는 덧코드화의 추상기계와 관련된다. 그러나 파시즘은 전쟁기계와 관련되어 있다. 전쟁기계가 국가를 탈취한다는 것 파시즘의 국가는 전체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자살적이다. 모든 가능한 도주선들을 봉쇄하여 하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파시즘은 강렬한 도주선 위에서 구성되며, 이러한 도주성들을 순수한 파괴와 소멸의 선으로 변형시킨다. 파시즘의 전쟁기계는 평화로 되돌아올 수 없다. 파시즘의 전쟁기계란 전쟁이외의 다른 목적이란 갖고 있지 않은 전쟁기계를 의미한다.
1227년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
공리 1 - 전쟁기계는 국가장치 외부에 존재한다.
명제 1 - 이러한 외부성은 먼저 신화, 서사시, 연극 그리고 각종 놀이에 의해 확인된다.
<명제에 대한 증명>
국가는 국왕과 사제, 전제군주와 입법자, 묶는 자와 조직자의 두 극이라는 이항적 구분을 전재로 하는데 전쟁기계는 국가의 두 분절 사이에 위치하며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려면 전쟁기계를 통해야만 한다. 여성되기, 동물되기 등의 변용태는 전쟁무기이며, 이러한 외부성의 요소는 새로운 리듬, 긴장, 섬광, 가속의 시간의 계기가 된다.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포섭할수록 사유기계, 사랑기계, 죽음기계 등이 국가에 도전하는 활력으로 등장한다.
<요약발췌>
국왕과 사제, 전제군주와 입법자, 묶는 자와 조직하는 자의 두 극은 대립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이며,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필요로 한다. 이 두 극은 국가장치의 주요요소로서 <하나><둘>에 의해 작용하여 이항적 구분을 분배하고 내부성의 환경을 형성한다. 이러한 이중분절은 국가장치를 하나의 지층으로 만든다. 전쟁기계 자체는 국가장치로 환원불가능하며 국가의 주권 외부에 존재하고 국법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기계와 국가장치를 비교하기 위해 놀이이론의 입장에서 장기와 바둑의 사례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바둑알은 주체화되어 있지 않은 기계적 배치물의 요소들로서 일대일 대응관계를 가지며 투입 또는 배치의 기능을 갖는다. 극단적인 경우 전투마저 없는 전쟁, 바로 그것이 바둑의 본질이다. 바둑알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출발점과 도착점도 없는 끝없는 되기(=생성)이다. 장기가 공간을 코드화하고 탈코드화하는데 반해 바둑은 공간을 영토화하고 탈영토화한다.
전쟁기계는 전제적 마법적 국가와 군사제도를 가진 법적 국가 사이에서 번개처럼 외부로부터 출현한다. 전사란 언제라도 군사적 기능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배반할 수 있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전쟁기계는 국가의 마법적 폭력과 국가의 군사제도와 혼합된다. 속도와 비밀을 발명한 건 전쟁기계이지만 국가에도 고유한 속도와 비밀이 존재한다. 전쟁기계는 국가의 두 개의 머리 사이에 또는 국가의 두 분절 사이에 위치하며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려면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국가 자체는 전쟁기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클라이스트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전쟁기계를 예찬하였으며 전쟁기계를 국가장치에 대립시켰다. 국가의 승리 앞에 자살기계가 되어 스스로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려 고독하게 죽은 두 남녀는 전쟁기계의 패배를 말한다. 클라이스트의 비밀은 내부성의 형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밀과 속도, 변용태가 그의 작품성의 요소이다.
감정은 내부성에서 벗어
문제 1 - 국가장치(또는 하나의 집단에서의 이것의 등가물들)의 형성을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는가?
명제 2 - 전쟁기계의 외부성은 민속학에 의해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를 기리며)
<명제에 대한 증명>
절편적 원시가회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정의되어 왔으며, 원시사회의 전쟁은 국가형성을 저지하는 메카니즘이었다. 무리나 패거리는 리좀으로 권력기관 주위의 나무형 집단과 대립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패거리에서 왕국으로 진화했다는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는 원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천재의 일필후지처럼 등장하였다. 외부성과 내부성, 끊임업싱 변신을 거듭하는 저너쟁기계와 자기동일적인 국가장치, 패거리와 왕국, 거대기계와 제국들은 상호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장에 공존하고 경합하는 것이다.
<요약발췌>
절편적 원시사회는 흔히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즉 분명한 권력 기관들이 출현하지 않은 사회로 정의되어왔다. 클라이스트 학설은 국가라는 괴물을 저지 예방하는 것이 실제로는 원시 사회의 잠재적인 관심사는 아니었을까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원시사회에도 물론 수장들이 존재했다. 국가는 수장의 존재가 아니라 권력기관의 영속이나 보존에 의해 규정된다. 수장은 권력자라기보다는 집단의 리더나 스타에 가까운 존재로서 항상 인민들에게 부인당하고 버림받을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 있다. 클라이스트는 한발 더 나가 원시사회의 전쟁을 국가형성을 저지할 수 있는 확시리한 메커니즘으로 규정하고 있다. 클라이스트는 이렇게 홉스의 견해를 바꾼다. 홉스가 간파한 "국가는 전쟁에 반대한다"를 "전쟁은 국가에 반대한다. 그리고 국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로 말이다. 전쟁은 교환을 한계짓고 결연의 테두리 내에서 유지하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교환이 국가의 요인이 되어 집단들을 융합시키는 것을 막아준다. 국가형성을 억제하는 여러 집단적 메커니즘에서 갱집단의 리더제도를 들 수 있다. 또 사교집단은 패거리나 무리와 비슷한 것으로 사회 집단처럼 권력의 중심과의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위신을 전파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다. 무리나 패거리는 리좀 유형의 집단으로 권력 기관의 주위에 집중되는 나무형 집단과 대립된다. 군대를 전유하였을 때 국가가 규율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규율은 전쟁기계의 속성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는 일거에 제국 형태로 출현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요인들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천재의 일필휘지처럼 등장한다. 전쟁기계는 원시사회의 야생적 배치물이 아니라 전사적인 유목민의 야만적 배치물에서 훨씬 더 완벽하게 실현되어 있다. 국가를 경제력이나 정치력의 진보에 의해 설명할 수 없듯이 전쟁의 결과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원시사회의 자연상태는 순수개념이 아니라 완전한 사회적 현실이었으며, 이 진화는 발전이라기 보다는 돌연변이였다. 우리는 '패거리에서 왕국으로'라는 낡은 진화론적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차라리 국가는 항상 존재해 왔다는 원국가론이 더 사실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시공동체냐 국가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자체는 항상 바깥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빼놓고는 국가를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가의 외부란 통합태라는 전세계의 영역와 패거리, 주변부집단, 소수자 집단이 가진 국지적 매커니즘과 같이 국가권력기관에 맞서 절편적 사회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집단의 영역으로 사고할 수 있겠다. 패거리는 세계적인 조직과 마찬가지로 국가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외부성의 형식은 필연적으로 다형적이고 분산적인 전쟁기계 형태로 출현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전쟁기계의 외부성의 형식은 오직 스스로 변신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외부성과 내부성,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전쟁기계와 자기동일적인 국가장치, 패거리와 왕국, 거대기계와 제국들은 상호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장 속에서 공존하고 경합하고 있는 것이다.
명제 3 - 전쟁기계의 외부성은 또한 소수자 과학 또는 유목과학의 존재와 영속성을 암시해 주는 인식론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명제에 대한 증명>
유목과학은 왕립과학과 제국과학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국가는 수력을 수로나 도관, 제방등에 종속시켜 공간에 홈을 파고 계량하며, 액체를 고체화시켜 흐름이 평행한 층류를 이루러 흐를 수 있게 한다. 반면 유목과학과 전쟁기계의 수력학 모델의 물은 소용돌 리가 되어 매끈한 공간을 가로질러 퍼져 나가면서 공간을 채우며 모든 지점에 작용하는 운동을 창출한다. 유목과학은 전과학적 부과학적 단계라 할지라도 동업조합원이 땅위에 그린 도면과 건축가의 종이에 그려진 계량적 도면은 대립한다. 공분은 왕립과학이 채택하는 모델이라면 법칙의 추구는 변수들간의 상수를 끌어내는 질료-형상의 도식과 관련있다 .유목과학의 요소인 이분은 질료-형상 도식이 아닌 재료-힘의 도식과 관련있다. 이것은 로고스와 노모스간의 대립이다. 과학은 재생산 절차의 한축과 따라가지 절차라는 한 축이 있다. 유목과학은 문제제기적 방식으로 존재하며, 유목과학의 매끈한 공간 벡터 장, 비계량적 다양체는 항상 공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탈영토화가 왕립과학의 재영토화를 수반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요약 발췌>
삐딱한 과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유체를 특수한 경우로 간주하는 고체이론이 아니라 수력학을 모델로 사용한다.
2) 이것은 안정된 것, 영원한 것, 자기 동일적인 것, 항상적인 것과 대
립하는 생성과 다질성을 모델로 한다. 클리나멘 즉 최소각은 오직 곡선과 직선, 곡선과 접선 사이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원자운동의 최초의 곡률을 구성한다. 3)박편 또는 얇은 조각 모양의 흐름 속에 있는 직선으로부터 이 직선의 평행선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곡선의 편이로부터 경사면 위에서의 나선과 소용돌이의 구성으로 나간다. 이것이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의 차이로서, 전자의 경우 공간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점유되는 데 반해 후자에서는 공간이 점유되기 위해서 헤아려진다. 4) 이 모델은 정리적이라기보다는 문제설정적이다. 정리가 이성의 질서를 따르는 데 반해 문제는 변용태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과학 자체의 다양한 변신이나 발생, 창조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전쟁기계이다.
유목과학은 삐딱한 방식으로 전개되며, 따라서 왕립과학이나 제국과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 유목과학은 로마 국가에 제압되어버린 아르키메데스처럼 국가과학의 요구와 조건에 봉쇄된다. 국가수학자들은 되기, 다질성, 무한소, 극한으로의 이행, 연속적 변주 등 역동적이고 유목적인 개념들을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시민적이고 정적이며 서수적인 규칙을 강요하려고 하였다. 국가는 유목과학에서와는 전혀 다른 수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수력을 수로나 도관, 제방 등에 종속시켜 소용돌이의 발생을 막고 물의 움직임을 어느 한 점에서 다른 한 점으로 유도해 공간 자체에 홈을 파고, 계량하며 또한 액체가 고체에 종속되고 흐름이 평행한 층류를 이루며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유목 과학과 전쟁 기계의 수력학 모델에서 물은 소용돌이가 되어 매끈한 공간을 가로질러 퍼져 나가면서 공간을 채우며 모든 지점에 동시에 작용하는 운동을 창출한다. 매끈한 공간인 바다는 전쟁기계에게 고유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소용돌이 운동을 하면서 열린 공간을 차지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곳은 바로 바다이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의 리듬은 유동이라는 조건에서 그러하며 원자가 만들어내는 형태들은 무엇보다 대기, 바다 그리고 심지어는 대지처럼 비계량적인 거대(거대한 것들), 즉 매끈한 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늘높이 찌르는 듯한 고딕양식과 둥근 천정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유목과학과 왕립과학 사이의 긴장관계를 다양하게 드러내 준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부분적으로 여전히 홈이 페인 공간 속에 머물러 있는 반면 고딕양식은 마치 매끈한 공간을 정복한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러한 건축을 계획할 때는 유클리드의 정리적 과학이 도입되었다. 수와 방정식은 표면과 입체를
조직화하기 위한 지성적인 형식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러한 입체를 너무 힘들다고 이유로 베르나르두스는 소수자의 과학인 수의 논리보다는 수의 도형인 조작적 기하학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과학은 방정식의 부재라기보다는 방정식의 다른 역할 볼 수 있다. 방정식은 질료를 조작하는 절대적으로 올바른 형식이 아니라 최적치를 구하는 질적인 계산을 통해 발생되고 재료들에 의해 창출된다. 왕립과학은 정적인 원근법밖에 인정하지 않고 원근법의 중심에 위치하는 검은 구멍에 종속시켰다. 제국의 교회는 조작적 유목과학을 금지하였으며 소수자의 기하학을 금지하였다.
우리는 집단적 몸체란 무언가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국가에 속하는 대규모 집단들은 분화되고 위계적인 질서를 가진 유기적 조직으로서 특정권력과 기능을 독점함과 동시에 국가 여기저기에 대표자들을 배치한다. 여기서도 전쟁기계, 즉 국가의 몸체와 다른 역동적이고 유목적인 몸체를 구성할 소질이 중요하다. 몸의 정신이 유기체의 영혼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몸체는 유기체로 환원되지 않는다. 군대의 단결심과 같이 몸체가 군대에 유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 기원인 전쟁기계가 중요하다. 장교들이 군대에서 유기적인 몸체를 요구하며 관철하고자 할때 조차도 집단적 몸체는 항상 주변부나 소수자를 갖고 있으며 이들은 교량건설, 성당건축, 재판이나 음악, 과학이나 기술의 설립 등의 특정한 배치물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전쟁기계의 등가물을 재구성하고 있다. 집단적 몸체의 갈등은 스스로의 범위를 일탈할 가능성, 즉 혁명적 짧은 순간을 보여준다.
후설이 말하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원과학도 유랑적이고 유목적인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한 본질은 사물에서 사물성 이상의 규정, 마치 물체 정신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듯한 물체성이라는 규정을 추출해낸다. 왜 후설이 순수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원-기하학으로 간주했을까? 후설은 유목과학이 왕립과학과 환원될 수 없음을 아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지만 왕립과학의 입헌적 우월성을 유지하려 한다. 유목과학은 전 과학적 또는 의사과학적 부과학적 단계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과학과 기술, 과학과 실천간의 관계 역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유목과학은 왕립과학과 다른 분업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강제인력동원이나 부역, 구빈원 등은 패거리들의 유랑성과 몸체의 유목을 동시에 타파하기를 염원하는 국가의 주요사업 중의 하나였다. 국가입장에서 유동성이라는 능동적 역량과 파업이라는 수동적 역량을 보유한 채 얼마나 광범위하게 돌아다녔는지 알기 위해 고딕양식으로 돌아가 본다면, 국가는 공사현장에서 지배자-피지배자의 차이를 모델로 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이론노동과 실천노동의 구별을 뭉뚱그려낸다. 하지만 동업조합원이 땅위에 그린 고딕건축의 도면과 건축가의 종이 위에 그려진 계량적 도면은 대립한다. 왕립과학은 숙련노동이 필요 없으며 숙련노동의 비숙련화가 필요할 뿐이다. 이 도식은 기술이나 생활에서 파생되기보다는 지배자-피지배자, 더 나아가서는 지적 노동자-육체노동자로 분열된 사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분열은 질료가 내용에 할당되며 형식은 전부 표현 속으로 이동된다. 유목과학은 반면에 내용과 표현이 각각 형식과 질료를 소유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내용과 표현의 연결에 대해 훨씬 더 민감한 것이다. 질료는 등질화된 질료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독자성을 담고 있다. 그리고 표현 또한 형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인 동시에 기술인 이 유목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분업은 완전한 의미로 존재하고 있으나 이것은 질료-형식의 이원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유목과학의 분업은 질료의 독자성과 표현의 특질들 간의 연결접속들을 따르고 있으며 자연적인 것이건 아니면 강제적인 것이건 이러한 연결접속들에 의존해 있다.
플라톤식으로 두 과학 모델을 대립시키자면 공분과 이분의 모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분은 왕립과학이 채택하는 법적 내지는 합법적 모델이다. 법칙의 추구는 변수들간의 관계에서 상수를 끌어내고 질료-형상 도식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유목과학의 요소인 이분은 질료-형상 도식이 아니라 재료-힘의 도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로고스의 노모스간의 대립이다. 공분모델의 등질적인 공간은 매끈한 공간이 아니라 홈이 패인 공간의 형식 그 자체이다. 노모스 또는 이분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은 항상 보충적인 사건 또는 가변적인 변용태를 나타낸다. 유클리드적인 홈이 페인 공간은 시각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즉 손에 의한 접촉 공간, 미세한 접촉 행위의 공간인데 반해, 매끈한 공간은 수로도 운하도 없는 비 등질적이면서 특수한 유형의 다양체, 비계량적이며 중심이 없는 리좀적 다양체, 즉 공간을 헤아리지 않고 차지하는 다양체, 탐색하려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다양체와 결합된다. 느리거나 빠른 것은 운동의 양적인 정도가 아니라 운동의 두 가지 유형이다. 중력에 이끌리는 물체는 속도의 감소에 의한 느림이며 공간에 홈을 파고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박편 모양의 운동이 중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속
과학의 두 가지 유형은 한쪽을 재생산하기 절차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은 따라가기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따라가는 것은 결코 재생산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따라갈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재생산이라는 왕립과학적 유형은 변수를 끊임없이 상수로 도출해내려 한다. 재생산하는 것은 반드시 재생산되는 것의 외부에 위치하는 고정된 관점의 항상성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마치 물가에서 물의 흐름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형식이 아니라 질료 즉 재료의 독자성을 탐구하려 할 때, 중력을 피해 신속함의 장으로 들어가려 할 때, 상수들이 아니라 변수들의 연속적 변주를 발견하려 할 때, 박편운동이 아니라 소용돌이 운동으로 휩쓸려 가려 할 때 직접 따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 백터 장, 비계량적 다양체는 항상 공분으로 번역 가능하며, 또 반드시 번역되어야 한다. 유목과학은 성격상 자율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없을뿐더러 자율적으로 발전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조작을 직관과 구축을 위한 감각적 조건, 즉 물질의 흐름을 따라가고 매끈한 공간을 그리고 부합한다는 조건에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근접인식은 문제제기적 방식으로밖에 인식을 드러낼 수 없다. 이러한 탈영토화가 왕립과학의 재영토화를 수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순회과학이 현장에서 즉홍적인 대처를 한다할지라도 개념장치 또는 과학의 자율성을 위한 계량적 수단을 갖고 있는 것은 왕립과학 뿐이다. 순회과학은 문제를 발명한다고 한다면 과학적 해결은 왕립과학으로 편입해 들어간다.
문제 2 - 사유를 국가모델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는가?
명제 4 - 결국 전쟁기계의 외부성은 사유학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명제에 따른 증명>
사유의 이미지인 주권의 두 극은 포획, 장악 내지 속박의 측면(뮈토스)과 맹약 내지는 계약에 의한 입법조직과 법률조직(로고스)로 구성된다. 국가형식은 사유 속에서 전개되는데 사유만이 국가만이 보편적이라는 허구를, 국가를 합법적인 보편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허구를 고안해 낼 수 있는데 이로부터 보편형식의 정당성을 인가 받는다. 공통감 즉, 코기토를 중심으로 한 모든 능력의 통일은 절대화된 국가의 합의인 것이다. 사유학은 반사유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앞으로 도래할 민중과 연관된 고독, 절대적으로 민중적인 고독과 함께 존재한다. 이것은 내부의 형식 속에서 수집되는 대신 외부의 다양한 힘들과 싸우고, 이미지를 형성하는 대신 중계에 의해 작용하는 사유, 주체-사유가 아니라 사건-사유 즉 이것임, 본질 또는 정리-사유가 아니라 문제-사유 관청으로 자임하는 사유가 아니라 민중에게 호소하는 사유인 것이다.
<요약 발췌>
사유의 이미지는 주권의 두 극에 상응하는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다. 참된 사유의 제국, 이것은 마법적 포획, 장악 내지 속박에 의해 작동하며 정초를 내놓는다.(뮈토스)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들의 공화국은 맹약 내지는 계약에 의해 진행되며 입법조직과 법률조직을 만들어내며 근거를 정당화해준다.(로고스) 양극은 중간단계가 있어 서로 이행하면서 대립하면서도 보완한다.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행하려면 양자 사이에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 사건이 이러한 사유의 이미지 외부에 숨어 있다가 외부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국가-형식은 이러한 사유 속에서 전개되는데 사유만이 국가만이 당연히 보편적이라는 허구를, 국가를 합법적인 보편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허구를 고안해 낼 수 있다. 사유로서는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유리하듯이 국가 입장에서도 사유 속에서 전개되어 이로부터 유일한 보편형식의 정당성을 인가 받는 것이 유리하다. 근대 국가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공동체 조직으로 정의되면서 정신적 개별성(민족성)을 가질뿐더러 공동체 조직을 통한 보편적 조화(절대정신)에 공헌한다. 소위 근대 철학과 근대국가 또는 이성적 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입법자와 주체(=신민)를 중심으로 운용된다. 따라서 국가가 입법자와 주체(=신민)을 구별할 때는 사유가 이 양자의 동일성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형식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공통감 즉 코기토를 중심으로 한 모든 능력들의 통일은 절대화된 국가의 합의인 것이다. 사유학은 다양한 반(反)-사유에 봉착한다. 그것은 공적인 교수에 맞선 사적 사유자들의 격렬한 사유행위로서 역사적으로는 단속적으로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역사를 관통해서 동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적 사유자라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그것은 반사유이며 앞으로 도래할 민중과 연관된 고독, 절대적으로 민중적인 고독과 함께 존재한다. 사유의 외부성의 형식, 즉 항상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힘 또는 마지막 힘, n번째 역량은 전혀 국가 장치의 영감을 받은 이미지와 대립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다. 사유, 진리, 법의 모델은 보편적 사유라는 홈페인 공간으로서 한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할 때 따라가야 하는 경로를 묘사한다. 외부성의 형식은 사유를 매끈한 공간에 위치지으며 사유는 헤아리지 않고 이 공간을 점거해야 한다. 이러한 사유는 흡혈귀와 비슷하다. 이미지도 모델도 복사도 없다. 전쟁기계의 문제는 어떻게 중계하는가 하는 문제이지 모델이나 기념물을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중계자인 순회적인 민중의 문제이지 모델도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를 관리하지 않고, 모국어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 말 자체를 자신에게 꽤어 맞추고는 떼어내 뭔가 전혀 불가해한 것을 만들 필요성, 바로 이것이 외부성의 형식, 오누이 관계, 사유자의 여성되기, 여성의 사유되기이다. 통제되기를 거부하는 바로 이러한 감정이 전쟁기계를 형성한다. 이것은 내부의 형식 속에서 수집되는 대신 외부의 다양한 힘들과 싸우고, 이미지를 형성하는 대신 중계에 의해 작용하는 사유, 주체-사유가 아니라 사건-사유 즉 이것임, 본질 또는 정리-사유가 아니라 문제-사유, 관청으로 자임하는 사유가 아니라 민중에게 호소하는 사유인 것이다. 유목적 사유는 스텝, 사막, 바다 같은 매끈한 공간, 지평선 없는 환경 속에서 전개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의 지평 안에 있는 보편적 주체가 아니라 사막에 있는 하나의 부족인 것이다.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또는 더 단순하게는 귀족주의나 당파주의, 복고주의와 같은 미시파시즘으로 전화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인종은 열등인종, 소수인종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잡종과 혼열이야말로 인종의 진정한 이름이다.
공리 2 -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 (국가장치의 외부에 존재하며, 군사제도와 구별되는 한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유목적인 전쟁기계는 공간-지리적 측면, 산술적 또는 대수적 측면, 변용태적 측면의 세 가지를 가진다.
명제 5 - 유목민의 실존은 필연적으로 전쟁기계의 조건들을 공간 속에서 실현시킨다.
<명제에 따른 증명>
유목민이 머무는 지점은 괘적에 종속외어 있는 중계점으로 존재한다. 유목민의 생활은 일종의 간주곡이다. 유목민이 탈영토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재영토화가 이주민의 경우처럼 탈영토화 이후에 이루어지거나 정주민처럼 다른 어떤 것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탈영토화 자체에 의해 재영토화된다. 유목민이 국가의 폐지라는 꿈을 꾸게 할 수 있고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유목민들의 전쟁기계이다.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또는 혁명이라는 반국가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는 부활하고 새로운 유목민적인 잠재세력이 출현하는 매끈한 공간이 재구성된다.
<요약 발췌>
유목민의 머물 수 있는 지점은 원래의 괘적에 엄격하게 종속되어 있으며, 그 지점은 중계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경로는 항상 두 지점 사이에 존재하지만 유목민에게는 이 둘-사이가 고름을 취해 자율성과 고유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유목민의 생활은 일종의 간주곡인 것이다. 그리고 유목민의 괘적이 발자취나 관습적인 길을 따르더라도 정주민의 도로와 같이 인간들에게 닫힌 공간을 배분하는 규제적인 기능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주민은 거주지가 황폐해지거나 볼모지가 되면 환경을 버리고 떠나는 데 반해 유목민들은 떠나지 않으며 떠나기를 원하는 자들로서 숲이 점점 줄어들고 스텝이나 사막이 증가하면 나타나는 매끈한 공간 속에 있으면서 이러한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유목을 발명해낸다. 유목민의 속도와 운동을 구별하자면 운동은 외연적이며, 속도는 내포적인 것이다. 속도는 어느 물체의 환원 불가능한 부분들이 돌연 어떠한 지점에서 출현할 가능성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매끈한 공간을 차지하거나 채우는 경우 물체가 갖게 되는 절대적인 성격을 가리킨다. 유목민만의 절대적인 운동, 즉 속도를 갖고 있으며 소용돌이 운동 내지 회전 운동은 본질적으로 전쟁기계에 속하는 것이다. 유목민이 탈영토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에게서 재영토화가 이주민의 경우처럼 탈영토화 이후에 이루어지거나 정주민처럼 다른 어떤 것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탈영토화 그 자체에 의해 재영토화된다. 즉 대지 그 자체가 탈영토화된 결과 유목민은 거기서 영토를 발견하는 것이다. 유목민은 탈영토화의 벡터이다. 유목민을 끊임없는 행로나 방향을 바꾸는 일련의 국지적인 조작을 통해 사막에 사막을, 스텝에 스텝을 첨가시켜 나간다. 유목민과 유목공간은 국지화되지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정되거나 한정되는 것은 상대적인 포괄성으로서의 홈이 페인 공간이다. 유목민은 오히려 국지적 절대성, 즉 국지적으로 표현되고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국지적 조작 체계를 통해 생산되는 절대성, 예를 들어 사막, 스텝, 빙원, 바다 같은 국지적 절대성 속에 존재한다. 매끈한 공간 또는 유목 공간은 홈페인 공간 사이에 있으며 홈페인 공간에 반격을 가한다. 유목민이 국가의 폐지라는 꿈을 꾸게 할 수 있게 하고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유목민들의 전쟁기계이다. 서양의 국가는 홈에 페인 요새와 같은 공간에서 전쟁기계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았기 때문에 국가의 성분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유목민을 아주 간접적으로만, 유목민으로 발생한 이주민 또는 이주민화된 유목민을 매개하고 아주 간접적으로만 마주쳐 왔다.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또는 혁명이라는 반국가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는 부활하고 새로운 유목민적인 잠재세력이 출현하는 매끈한 공간이 재구성된다. 요새는 유목민을 겨냥한 걸림돌로서 소용돌이 모양의 절재운동이 다가와서 부딪치는 암초이자 방벽이다. 자동변화기이자 포획장치로서 국가는 운동을 상대화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운동을 재부여한다.
1227년 유목론과 전쟁기계2
명제 6 - 유목생활은 필연적으로 전쟁기계의 수적 요소들을 함축한다.
<명제에 대한 증명>
인간조직화는 혈통적, 영토적 수적 조직화로 이루어지는데 유목민의 조직은 철저히 산술적이며 방향적이다. 수적 조직의 특수성은 유목민적 실존양식과 전쟁기계의 기능에서 유래한다. 헤아리는 수는 혈통적 코드와 국가적 덧코드화 모두에 대립되낟. 유목민의 패배는 철저하고 역사는 국가 승리의 역사가 되었지만 유목전사들은 토지분배와 세제와 관련해서는 혁신자들이다. 그들이 동산적 영토성과 주적 원리의 자율성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요약발췌>
인간조직화는 혈통적, 영토적, 수적 조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씨족적 혈통관계에 따라 절편성을 강화할 수도 있고, 토지소유라는 인간-대지의 탈영토적 관계에 의해 조직될 수도 있다. 혈통, 대지, 수의 모든 절편들은 이들을 덧코드화하는 천문학적 공간 또는 기하학적 연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영토적 조직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혈통과 주를 계량적 역량에 종속시키고 있는 제국적 내포적 공간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 수는 항상 원료를 지배하고, 이 원료들의 다양한 변화와 운동을 관리하는데, 즉 이러한 변화와 운동을 국가의 시공간적 틀 - 제국적 내포적 공간이나 근대적 연장 -에 복속시키는데 봉사해왔다. 수는 공간을 배분하거나 공간 자체를 분배하는 대신 무엇인가를 공간에 분배하면 즉각 출현한다. 수는 이미 계산이나 계량의 수단이 아니라 자리바꿈의 수단이다. 수는 매끈한 공간을 점거할 때마다 원리로서 작용하며, 홈이 페인 공간을 계량하는 대신 매끈한 공간의 주체로서 전개된다. 유목민의 조직은 철저히 산술적이며, 방향적이다. 사방에 눈에 띄는 10,000이라는 양 그리고 좌우라는 방향만이 있을 뿐이다. 전쟁기계와 더불어 그리고 유목적 실존에서 수는 더 이상 헤아려진 수이기를 그치고 암호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암호로서의 수는 단결심을 구성하고, 비밀과 비밀의 수반물들을 발명해 낸다. 수적 조직의 특수성은 유목민적 실존양식과 전쟁기계-기능에서 유래한다. 헤아리는 수는 혈통적 코드와 국가적 덧코드화 모두에 대립된다. 유목민 또는 전쟁에 속하는 헤아리는 수의 첫 번째 특징은 항상 복합적이라는 것, 즉 분절화되어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항상 복소수이다. 헤아리는 수가 국가의 수 또는 헤아려진 수처럼 대규모의 등질화된 양을 압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의 세세한 분절에 의해, 즉 자유로운 공간에 다질성을 분배함으로써 커다란 효과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몸체의 수는 수의 몸체를 상관물로 가져야만 하고 수는 상보적인 두 가지 조작에 따라 이중화되어야 한다. 즉 집단의 전사의 수와 우두머리의 수적 배치와 더불어 역동적인 형성체인 소수 친위대를 선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 탈영토화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계열이 없었다면 전쟁기계는 가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적 편성이 혈통적 조직을 대신하는 동시에 국가의 영토적 조직화를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배열에 따라 전쟁기계에서의 권력이 정의되는 것이다. 수적 편성, 즉 헤아리는 수의 문제는 전쟁기계가 국가에 의
해 전유될 때 심지어 오늘날의 국가의 군대에서도 이와 똑같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몸체가 편성되는 방법은 1)특권적 혈통이나 씨족으로 편성되는 방법 2)모든 혈통들로부터 대표자를 선발해 편성하는 방법 3)본래의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요소들로 즉 노예, 외국인 또는 이교도로 편성하는 방법이 있다. 유목민들에게 역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지리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유목민의 패배는 너무나 철저했으므로 역사는 국가의 승리의 역사가 되었다. 유목전사들은 역사가들이 뭐라고 하건 토지분배나 세제와 관련해서는 위대한 혁신자들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들이 발명한 동산적 영토성과 세제가 수적 원리의 자율성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명제 7 유목적 삶은 전쟁기계의 무기를 변용태로 갖고 있다.
<명제에 따른 증명>
무기는 투사와 관련을 맺는다면 도구는 내향적이고 내부선의 형식에 부합하도록 가공된다. 수렵에서 사냥꾼들은 도상을 통해 야수의 운동을 정지시키지만 목축민들은 야수들의 운동을 보존시킨다. 도구의 상대적인 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선적 이동으로 구성되는 반면 무기의 절대적인 운동은 소용돌이 운동을 통한 공간을 차지한다. 도구는 노동을 전제한다. 자유로운 행동에는 전쟁기계라는 배치물이 존재하며, 노동모델에는 노동기계라는 배치가 존재한다. 무기의 특수성은 단지 힘이 자체로 파악되어 수와 운동, 시간과 공간하고만 관계를 맺거나 속도가 이들에 첨가될 때만 드러날 수 있다. 전쟁기계는 변용태의 체제로서 무기는 변용태이며, 변용태는 무기이다. 무술은 변용태의 통로인 길이며 스스로 탈각하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전쟁기계의 고유한 속성이다. 무기 - 도구를 구별하는 다섯 가지 관점은 방향(투사-내향), 벡터(속도-중력), 모델(자유로운 행동-노동), 표현(보석류-기호), 정념이나 욕망의 음조(변용태-감정)이다.
<요약발췌>
괘 오랫동안 농업 용구와 전쟁 무기는 같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기는 투사와 특히 특권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던지거나 던져지는 모든 것은 무기이며, 추진기야말로 무기의 본질적 계기이다. 그리고 무기는 탄도와 관련되어 있다. 이와 달리 도구는 오히려 내향적이고 내사적이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을 균등한 상태로 이끌거나 또는 내부성의 형식에 부합하도록 가공한다. 무기의 경우에는 원심적인 반면 도구의 경우에는 구심적이다. 두 번째는 무기와 도구가 운동이나 속도와 맺는 관계는 경향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전쟁기계는 속도의 고유한 벡터를 출현시키는데, 이것이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명칭을 부여해야만 할 것같다. 단순히 파괴력이 라니라 행위주의라는 명칭말이다. 수렵은 무기와 도구가 미분화되고 상호 전환가능한 차원에서 행해지거나 이미 도구와 구별되어 무기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사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전쟁은 인간에 대해 수렵자와 동물의 관계를 적용했을 때가 아니라 전쟁관계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출현한다. 폭력의 경제는 목축민 중의 사냥꾼의 경제가 아니라 수렵당한 동물의 경제이다. 수렵에서 사냥꾼들은 체계적인 도살을 통해 야수들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반해 목축민들은 야수들의 운동을 보존시킨다. 문제는 전쟁기계가 자유로운 또는 독
문제 3 - 유목민들은 어떻게 그들의 무기를 발명 또는 발견했는가?
명제 8 - 야금술은 필연적으로 유목과 합류하는 하나의 흐름을 구성한다.
<문제에 따른 증명>
대장장이는 국가장치에 의해 통제된다고 가정되고 있었지만 기술적 자율성과 사회적 은밀성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유목민도 국가장치에도 속하지 않았다. 기술적 계통은 운동-물질의 흐름과 특이성과 표현의 특질을 짊어지고 연속적으로 변주되는 물질의 흐름을 다룬다. 기계적 문은 모든 배치들을 관류해 한 배치물을 떠나 다른 배치물로 이동하거나 모든 배치물을 공존시키거나 한다. 변화하는 기계적인 문은 다양한 배치물들을 발명하는 한편 이들 배치물들은 가변적인 문들을 발명한다. 재료채집가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화는 장인을 불구로 만들어 노동자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직공은 기계적 문에 순종하도록 정해진 자로 규정될 수 있다. 기계적 문, 물질의 흐름에는 어떤 연관이 이동생활과 야금술간에는 특별한 기본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야금술은 물질 흐름의 의식 또는 사유이며 금속은 이 의식의 상관물이다. 기계적 문은 야금술과 관련되며, 금속이란 기관없는 신체이다. 대장장이는 최초의 장인이었다. 그들은 지하에서 매끈한 지평을 홈페인 공간의 대지와 결합시키고 있었다. 대장장이란 유목민에게 경멸당하고 정주민에게 존경받았다. 대장장이는 유목민도 정주민도 아니고 이종하는 자이다. 이들은 잡종이며 합금이며 쌍생아적인 형성체이다. 야금술은 유목적 배치에서 리좀이 되어 탈주로를 만들 수도 노동모델에 종속되어 수목적 구조에서 도주선을 틀어막을 수도 있다.
<내용요약>
힉소스인들의 청동도끼나 힛타이트인들의 철검은 소형 핵폭탄의 발명에 필적할 만큼 혁신적인 것이었다. 대포가 유목민의 한계를 보여주는 바는 대포가 단지 국가장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투자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군대와 유목민의 전쟁기계 사이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 또는 중간적인 형태나 양자의 조합이 수없이 존재하는데, 종종 이런 것 중 많은 것이 제국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대장장이들이 항상 국가장치에 의해 통제된다고 가정되고 있지만 이들 또한 일정한 기술적 자율성과 사회적 은밀성을 누리고 있으며 , 따라서 통제되더라도 이들 자신이 유목민이 아니듯 국가장치에 속하지도 않은 것이다. 야금술은 다양한 특질을 가진 시공간적인 특이성이나 이것임 그리고 이것들과 결합하는 변형이나 변용 과정으로서의 조작, 두 번째로는 이러한 특이성과 조작에 대응하는 다양한 층위의 변용태적 질이나 표현의 특질을 의미이다. 철검은 주조나 주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조되는 것이며, 공냉이 아니라 수냉이며, 대량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제조된다. 특이성의 집합, 즉 몇몇 조작을 통해 연장 가능해지며, 또 이와 함께 하나 또는 몇 개의 지정 가능한 표현의 특질들로 수렴되거나 수렴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특이성들의 집합을 확인할 수 있다면 하나의 기계적 문 또는 하나의 기술적 계통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에서 다른 문으로 연장 가능한 특이성의 차원들을 설치해 이 두문을 통일시키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운동-물질의 흐름, 특이성과 표현의 특질을 짊어지고 연속적으로 변주되는 물질의 흐름을 말이다. 지층화된 특이성과 표현의 특질의 집합을 배치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러한 의미에서 배치물이야 말로 진정한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치물이 문을 상이하게 분화된 선들로 분할하는 동시에 기계적 문은 이 모든 배치들을 관류해 한 배치물을 떠나 다른 배치물로 이동하거나 모든 배치물을 공존시키거나 한다. 문에 대한 배치물의 선별적 작용과 함께 하나의 배치물에서 다른 배치물로 이동하거나 또는 배치에서 벗어나 이를 유도해 외부로 열어주는 지하선으로서의 문의 진화적인 반작용을 고려해야만 한다. 변화하는 기계적인 문은 다양한 배치물들을 발명하는 한편 이들 배치물들은 가변적인 문들을 발명한다. 후설은 지성적인 형식적 본질, 형식화되고 지각된 감각적 사물성과도 구별되는 물체성을 끄집어낸다. 이 물체성은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변용태-사건이라는 순회하는 짝짓기가 그것이다. 시몽동이 제시한 구분은 후설의 구분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식화되거나 형식화될 수 있는 질료에 독자성이나 이것임들을 갖고 있는 운동 중에 있는 에너지적 질료성을 첨가시켜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형상적 본질에서 질료로 흘러가는 본질적 특성들에 강렬한 가변적 변용태를 첨가해야 한다. 법칙에 종속된 질료보다는 노모스를 가진 질료성에, 질료에 특성을 강요하는 형상보다는 다양한 변용태를 구성하는 표현의 물질적 특질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시몽동이 질료 형상 모델을 비판하는 이유는 이것이 형상과 질료를 각각 개별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두항목으로 어떻게 결합될지 모르는 두 개도 나뉜 체계의 반쪽 사슬의 끝과 같은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적인 변조과정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단순한 주조관계와 간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계적 문이란 인공적이거나 아니면 자연적인 물질성이다.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조작은 한 장소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가령 대패질하는 장인은 위치를 바꾸는 일이 없이 나무에 나무의 결에 따른다. 재료 채집가와 상인과 장인을 분리시키는 조직화는 장인을 불구로 만들어 노동자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직공은 물질의 흐름, 즉 기계적 문에 순종하도록 정해진 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직공이란 편력자, 방랑자인 것이다. 이동목축민은 토지의 순환에 순종하더라도 그들이 흐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회로를 그리고 있는 것이며, 회로로 들어오는 흐름의 일부만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주민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유목민은 불가피하게 그런 경우가 있을지라도 순회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이동목축민도 또 이주민도 아니다. 유목민이 이동목축민이나 이동민일 수 있는 것은 매끈한 공간의 요청에 따를 뿐이다. 기계적 문, 물질의 흐름에는 어떤 연관이 즉 이동생활과 야금술간에는 특별한 기본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조작의 종료를 나타내는 구체화된 형상은 다시 새로운 조작을 위한 질료로 가능하는데, 여기서는 연속적인 문턱을 나타내는 고정된 순서에 따라 그렇게 한다.
금
명제 9 - 전쟁은 반드시 전투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전쟁기계는 무조건 전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전투와 전쟁이 어쩔 수 없이 전쟁기계로부터 유래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 내 용 | 표 현 |
실 체 | 구멍뚫린 공간 (기계적 문 또는 물질-흐름) | 매끈한 공간 |
형 식 | 이동적 야금술 | 유목적 전쟁기계 |
<명제에 대한 증명>
전쟁기계가 전투를 추구하는 경우와 전투를 본질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전쟁이 적대세력의 섬멸이나 항복을 지향하는 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기계는 전쟁이 되어 국가의 힘들을 섬멸시키고 국가형식을 파괴하려고 한다. 전쟁이 유목적 전쟁기계의 보충적이고 종합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에게는 전쟁기계를 다시 유목민에게 되돌리는 것이 국가를 향해 전쟁기계를 돌려세우는 유목민들이 무릅쓰는 위험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문제는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느냐가 아니라 국가장치가 어떻게 전쟁기계를 전유하는가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공식은 역전된다. 현실운동이 끝날 때 전쟁기계를 전유하고 국가는 스스로를 목적으로 설정하고 더 많은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전쟁기계를 풀어놓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전쟁기계가 공상과학소설처럼 강력하게 구성되어 파시즘적인 죽음보다 무시무시한 평화를 목적으로 삼고 극히 처참한 국지전을 자신의 일부로 유지하며 임의의 적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창조하는 도주선이냐 파괴선으로 전화된 도주선이냐가 문제이다. 전쟁기계는 이 기계를 전유함으로써 전쟁을 주요사업과 목표로 만드는 국가장치에 대항해 구성되어 가며, 포획장치와 지배장치들의 대규모 결합접속에 맞서 다양한 연결접속들을 만들어낸다.
<내용요약>
전투는 전쟁의 목적인가? 전쟁은 전쟁기계의 목표인가? 전쟁기계는 어느 정도까지 국가장치의 목표가 되는가? 전투문제는 두가지 경우를 구별해야 한다. 전쟁기계가 전투를 추구하는 경우와 전투를 본질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경우를 말이다. 두 경우가 공격과 방어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게릴라전은 비전투를 지향하는 반면 본래의 전쟁은 전투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게릴라전의 발전은 내외의 거점과 접속하면서 실제로 전투를 추구해야만 하는 계기와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라전과 본래적인 전쟁은 끊임없이 상대방의 방법을 빌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