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장성 땅에 노화라는 기생이 있었다.
미모에 머리가 명석하고 글공부도 한 아리따운 소녀였지만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어
어느 퇴기(退妓)의 양녀가 되었다가 기생이 되었다.
예전에는 대개 늙은 기생들이 불쌍한 고아를 양녀로 들여 돌보는 체하고
기생을 만들었지만, 사실은 남편도 자식도 없는 자신을 위한 일종의 노후대책이기도 했다.
‘노령산(蘆嶺山)의 꽃’이라는 노화(蘆花)는
가무(歌舞)와 시문(詩文)만이 아니라 만사에 민첩하고 능통하여
기생이 된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아서
일약 명기(名妓)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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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토호(土豪) 한량(閑良)은 물론 수령방백(守令方伯)까지
노화를 탐하여 부(富)를 과시하며 재물을 앞세워 물량공세를 펴는 것이었다.
사내다운 사내는 하나도 없고
하나같이 꽃만 탐하는 탐화봉접(探花蜂蝶)들 이었다.
그 속에서 고뇌하던 노화는 어차피 일부종사(一夫從事)할 수 없는 기생일 바에는
차라리 허랑방탕한 저들의 재물이나 취해서 불쌍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노화의 대담한 행동(行動)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재물만 있으면 누구라도 노화를 취할 수 있었고
재물의 다과(多寡)에 따라 노화의 접대는 그 품격이 달랐다.
그리하여 사내들은 더욱더 많은 재물을 다투어 가져왔고
노화는 이을 모두 거두어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노화의 인기는 날로 높아가고
사내들의 재물은 날로 바닥이 났다.
한량들이야 제 재물을 탕진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마는
수령들은 고을의 국고를 축냈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장성군수가 연거푸 세 명이나 봉고파직(封庫罷職)을 당했다.
그것도 한 계집에 빠져서 국고를 탕진한 죄였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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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수령들이야 합당한 벌을 받았지만, 노화라는 계집을 그냥 두면
장차 장성고을이 망할 판이니, 한양으로 잡아 올려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의 임금 성종(成宗)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행실은 밉지만 처형할 만 죄목이 없지 않은가.
스스로 복죄(伏罪)하지 않으면 벌할 수 없을 터,
살려주게 되면 한양까지 오염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법과 절차를 따라 처형하기보다는 장성에 어사를 보내어
장형(杖刑)으로 다스리다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뜻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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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동안 장성의 국고 탕진 실상을 조사해 온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노계명(盧啓明)이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어명(御命)을 받들고 장성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몇 달 전에 장성에 내려갔다가
노화에게 매혹된 바 있는 이조좌낭(吏曺左郞) 홍만춘(洪萬春)이
비밀히 이 소식을 노화에게 전했다.
노화의 양모는 이제 노화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첬지만 노화는 태연했다.
내가 수청 든 죄, 밖에 더 있느냐면서 침착하게 대비책을 강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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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평민으로 변장한 암행어사 노계명은
내려가면서 충청도 일대의 민정을 살핀 후에 마지막으로 장성에 출두하기 위하여
각양각색으로 변장한 부하들에게
출두일시와 장소(場所)를 알리고 각기 흩어져 출발(出發)하기로 했다.
장성을 가려면 갈재(蘆嶺山脈)를 넘어야 하고
외길 갈재를 걸어서 넘자니 날이 저물었는데 마침 주막이 있어 찾아들었다.
열려 있는 대문을 들어서니 소복(素服) 단장한 여인이
대청에 홀로 앉아 바느질하고 있는데 첫눈에 보아도 매혹적인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려는데 여인은 안으로 들어가고
한 총각이 나와서 주막이기는 하지만 오늘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오늘을 강조하였다.
오늘은 왜 안 되느냐고 캐어물으니
주인 내외가 청상과부 따님만 홀로 두고 초상집엘 갔으니
그러지 않겠느냐고 했다.
산골 주막에 홀로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청상과부?
호방한 풍류남아 노계명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나는 지금 어명(御命)을 받고
불의를 척결하러 가는 몸, 여색(女色)을 탐해서야,
아니 이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내일 일만 추상같이 처리하면 되지.
자기합리화 쪽으로 마음을 정한 노계명은
총각을 달래고 여인(女人)을 설득하여 술자리를 같이하는 데는 성공(成功)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여인(女人)은 처음 보는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였고
노계명은 굳은 맹세를 글로 써 주마라고 하였다.
한참을 망설인 여인은
나는 글을 모르니 팔뚝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했다.
글을 모른다는 말에 내심 미소를 지은 노계명은
여인 팔뚝에 먹물로 설부녀(雪膚女 :흰 눈 같은 피부의 여인)라고 쓰고는
어서 마르기 전에 바늘을 찔러 글자를 새기라 했고
여인은 설부녀라는 이름도 세상(世上)에 있느냐고 화(禍)를 버럭 내면서 일어서려 했다.
당황한 노계명이 어르고 달래서 노계명 석 자를 다시 써 주고서야 목적을 이루었다.
그토록 애를 태우던 노화의 태도가 요염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미가 재혼을 권하면서 마련해 준 것이라면서 십장생(十長生) 병풍(屛風)을 가져다 둘러치고
그 안에 원앙금침(鴛鴦衾枕)을 펼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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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재 주막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호강을 누린 노 어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장성(長城) 관아(官衙)에 나타나
어사(御使) 출두(出頭)를 했다.
불문곡직하고
장성의 요화(妖花)라는 기생 노화부터 잡아들여 형틀에 묵었다.
제 죄는 제가 알 것이고
백번 죽어 마땅하니 단번에 물고를 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집장사령(執杖使令)이 곤장을 높이 들어
막 내리치려는데 노화가 큰소리로 야무지게 외친다.
‘소첩은 기생으로서 수청 든 죄 밖에 없사옵니다.
설사 그것이 중죄라 한들 문초도 없이 백성을 죽이는 법이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어느 조목에 있사옵니까?
※ 경제육전(經濟六典) : 오늘의 경제와는 뜻이 다른 경세제민(經世濟民)
어사께서는 마땅히
치죄(治罪)의 절차를 밟으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경제육전을 들어대면서
허(虛)를 찌르는 기생의 항변에 노어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쩔 수 없이 지필묵(紙筆墨)을 내리면서 자백서(自伏書)를 쓰라 했더니
노화는 능숙한 필치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거침없이 적어 올린다.
蘆兒臂上刻誰名 墨入雪膚字字明
노아비상각수명 묵입설부자자명
노화의 팔에 뉘 이름 새겼는가?
고운 살에 먹이 배여 글자도 선명하다.
寧使川原江水盡 此心終不負初盟
령사천원강수진 차심종부부초맹
차라리 천원강이 말라버릴지 언정
굳게 맺은 그 맹세 변할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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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어사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갈재주막 과부가 노화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모두가 노화의 치밀한 계략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지만
언제나 당당했던 호걸 남아 노계명도 이번 만은 어찌할 바를
모르도록 당황했다.
죽이자니 대장부의 위신이 말이 아니고
살리자니 어명(御命)을 어긴 죄(罪)를 어찌한단 말인가.
망설이던 어사(御使)가 드디어 영을 내렸다.
‘저 여인을 즉시 방면(放免)하라.
사유는 오늘로 상경하여 대왕 전하께 직접 품고(稟告)하겠노라.’
천하의 쾌남아 노계명 다운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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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상경한 노어사는
‘신 노계명 어사(御命)을 어긴 죄로 석고대죄하옵니다.’ 하고
궐하에 부복했고,
‘충직한 노지평이 내 명을 어겼으면
필시 사유가 있을 것이니 자세히 아뢰라.’라는 어명(御命)이 내렸다.
자초지종을 솔직히 아뢰자
호탕한 임금 성종(成宗)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무릎을 친다.
‘과연 노지평이로다. 어명을 어긴 죄 벌을 주어 마땅하나
불미한 일을 숨김없이 아뢰었고 장부의 결단이 명쾌했으니
내 어찌 이를 벌하겠는가.
논인어주색지외(論人於酒色之外 : 사람을 논할 제 주색은 따지지 않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한 실수(失手)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것,
내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사후처리를 잘하도록 하리라.’
그 신하에 그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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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에 노지평을 다시 부른 성종은
‘어사의 이름을 팔에 새긴 기생을 어찌 장성에 그대로 두겠소.
기적(妓籍)에서 빼라 했으니
이제부터는 경이 알아서 하오.’ 했다.
성은(聖恩)에 감복한 노계명이
노화를 한양으로 불러 부실을 삼고 평생을 함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