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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수스, 옛날에는 저쪽 끝은 항구였는데 그동안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육지로...
오늘로써 <터키의 추억> 시리즈를 마감합니다. 터키를 떠나온 지 20년이 되다 보니까 현재의 터키를 쓸 수가 없어 아무래도 한번 터키를 다녀와서 후편을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프랑스의 역사, 문화 기행>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터키보다는 쓸거리가 많아 장기간 연재가 계속되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힘찬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빌며 그동안 뜨거운 열독에 감사를 드립니다.
[ 비정하고 엽기적이었던 오스만의 술탄계승 제도 ]
승승장구하던 오스만제국은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술레이만 시대의 종결과 함께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듭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제국의 영토가 너무 넓어져서 관리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거대 로마제국을 패망으로 몰았던 과잉영토를 다스리는 문제가 오스만에서도 똑 같이 발생한 것입니다.
영토가 넓어지자 술탄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려 하지 않고 궁전에만 처박혀 안주했는데, 이는 술탄의 권위를 손상시켰습니다. 오스만제국 번성기의 그 씩씩하고 웅대했던 기상이 사라지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왕위계승 제도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과 셀주크에서는 큰 아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지 않았습니다. 거친 환경을 살아온 유목민족답게 제일 능력 있는 아들이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문제는 아들 중 누군가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스탄불의 술탄의 톱카프 궁전
이런 잔인한 전통은 술탄을 권력 암투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던 메메드 2세는 이것을 아예 법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어떤 때는 19명의 형제가 한꺼번에 죽기도 했습니다. 본시 권력은 나누지 못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비정하고 야만적이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왕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선택은 딱 하나였습니다. 무조건 술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지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인데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술탄이 되는 길은 자기보다 뛰어난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렘(1)도 개입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술탄이 되지 못하면 죽을 판이니 자기 자식을 낳은 여인들의 개입도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필사적이 되어 갔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형제간 살육전이 전개된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능한 왕자들이 어부지리로 술탄이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문과 교양이 뛰어났던 술레이만 대제도 어쩔 수 없이 세 명의 아들 중 둘을 죽였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아 술탄의 자리에 오른 셀렘 2세는 형편없이 무능력한 술주정뱅이였습니다.
* 하렘
이밖에 이 제도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술탄이 되면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야 했는데, 그 술탄이 자식을 낳기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대가 끊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메드 3세 때부터 취한 방식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는 대신 밀폐된 곳에 가두어두는 것입니다. 혹시 술탄이 죽으면 갇혀 있는 사람들 중에 나이가 많은 이가 새로운 술탄이 되는 것입니다.
현직 술탄이 아들을 낳는 순간 그들의 생도 끝납니다. 술탄의 형제들은 이른바 ‘금빛 감옥’이라 불리는 ‘카페스’에 강금되었는데, 황금 칠을 한 방은 화려하지만 그곳에 사는 형제들에게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감옥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식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낳아 봤자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톱카프 궁전 내부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들 없이 술탄이 죽으면 감옥에 있던 연장자가 새로운 술탄이 되는데 감옥에서 하염없이 있다 보니까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그 또한 애초부터 자식을 가질 생각을 안했으니까 자식도 없었을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39년을 금빛 감옥에 살다가 술탄이 된 이도 있었습니다. 39년을 갇혀 살던 이가 세상물정을 알겠습니까. 노회한 관료들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술탄이 즉위하자마자 한 일은 무조건 자식을 빨리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술탄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렘과 관료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2세를 포함한 몇몇 술탄은 예니체리(2)에 의해 퇴위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 예니 체리
철없는 어린 나이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무라드 4세는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덮어놓고 3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사형에 처해 원성을 사면서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능력이 형편없는 술탄들이 계속 등장했고 또한 구렁이 같은 관료들과 세도가 등등한 귀족 가문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바람에 제국은 늘 소란스러웠습니다. 결국 제국은 서서히 쇠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 겁니다.
술탄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승계제도가 오히려 그 권한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제국이 패망에 이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권력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하렘
'하렘(harem)'은 하람의 터키식 발음으로, 정식 명칭은 하렘 이 휴마윤(군주의 하렘)이다. 술탄의 궁전 안에 있는 하렘은 술탄 외에는 남성들의 접근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유럽인들에게 하렘은 그저 "수많은 미녀들과 재녀들이 단 1명의 술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격리된 장소"라는 이미지로 비쳐졌다. 이에 따라 유럽의 남성들은 질투와 선망, 그리고 경멸 등이 가득담긴 시선으로 이를 바라보면서 엄청나게 퇴폐적이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하렘의 모습으로 망상을 해왔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여있었지만 여러 명의 미녀들과 난교를 하는 술탄도 없지는 않았다.하지만, 보통의 경우 술탄은 자기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여럿이라도 한명씩 잠자리를 가졌고 상당수의 오스만 제국 술탄들은 황제의 모후인 발리데 술탄이 골라 준 여인과 잠자리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황제가 여성들이 모인 하렘으로 직접 행차해 여인들을 취하는 형태가 아니라 하렘 여인을 단장시켜 황제의 침실로 올려 보내는 형태였다.
(2) 예니체리
예니체리. 예니는 '새로운(新)', 체리는 '군인(軍)'이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지역 내 기독교 집안의 소년들을 뽑아 술탄의 친위 부대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궁성 학교에서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받았는데, 오스만 제국의 요직은 주로 이들 궁성 학교 출신자들이 차지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권력이 너무 커져 술탄을 내쫓기도 하였고, 부정부패가 심해 오스만 제국의 개혁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오스만 말기에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살아야 하였던 청소년들. 그들은 과연 제국이 부여한 최고의 대우에 기뻐하였을까, 아니면 지저분한 권력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후회하였을까?
* 에페수스, 파묵칼레, 안탈리아 위치
[ 에페수스 ]
에페수스는 성경에 에베소라고 나오는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이 도시에 머물렀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초기 에페수스는 기원전 10세기에 이오니아(1)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에페수스는 로마의 중요한 도시가 되면서 번성기를 맞아 에게해 해안에서 금융, 상업, 무역의 중심지로서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 에페수스 안내도
아름답고 살기 좋은 에페수스는 철학, 문학, 역사 등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예술가와 돈 많은 상인들이 몰려와 한때는 인구 25만 명의 큰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로마의 대장군 안토니우스도 에페수스에 들려 보석과 화장품을 쇼핑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약 20%정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굴될런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 저 멀리 도서관이...
에페수스에는 세 개의 대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이들 대로 양켠에는 크고 작은 공연장, 도서관, 민회, 신전, 유곽, 수세식 공중변소, 창고, 운동장, 체육관, 우물, 목욕탕, 가축 시장, 시장터 등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특히 대리석으로 된 도로에는 마차 다니는 길과 인도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이륜 마차가 잘 굴러가도록 대리석 도로의 양쪽에 긴 홈을 파놓았고, 하수도 시설을 완벽하게 만들어 놓아 치밀한 도시 계획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중 크레테스 거리는 에페수스를 관통하여 남북으로 뻗어있는 가장 큰 도로입니다.
고대 에페수스 사람들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근육질의 전사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어느 동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성채나 요새를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군사훈련에 인력과 자원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아고라(2)에서 토론하고, 신전을 지어 신의 뜻을 살피고, 원형극장에서 시 낭송회와 음악회, 연극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유흥가에서 회포도 풀었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군사력보다 교육과 문화, 여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둔 것입니다.
에페수스 유적의 거리를 걷는 것은 마치 로마시대 세월이 비껴간 어느 모퉁이에 와있는 느낌입니다. 유적의 입구는 남쪽 북쪽 두 군데이나 주로 남쪽 출입구로 들어와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며 둘러보고, 북쪽 출입구로 나갑니다. 피온의 언덕이라 불리는 높이 150m 정도의 암석터에는 비잔틴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의 성벽터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식민지 시대에는 이곳 에페수스 유적지 가까운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과거 항구가 있었던 흔적이 보입니다. 남쪽 입구로 들어서면 바실리카 열주들이 연이어 늘어선 거리 앞으로 소극장터인 오데온이 시선을 잡아끕니다. 극장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장구한 로마시대의 세월을 더듬어 봅니다. 오데온은 지붕이 있던 소극장으로 시낭송이나 음악회가 열렸던 곳이었습니다.
* 오데온
오데온 앞으로는 거대한 아고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2세기에 지어진 바리우스의 욕장터가 3개의 아치와 함께 아직 발굴중인 채로 남아있습니다. 오데온 소극장 정상에 올라 앉아 2,000년 전 비잔틴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의 흔적을 느껴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묵묵하게 흘러가는 세월, 역사는 오늘도 어제에 이어 유유히 흘러가고 또 흘러 갈 것입니다.
* 아고라
완만한 경사지로 이어지는 길은 하도 관광객들이 다니는 바람에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수 천년 전의 대리석이 닳고 닳아 반질반질한 정도가 유리알과 같습니다. 이어지는 거리 양쪽으로는 신전들과 목욕탕과 공중 화장실 등이 펼쳐지면서 당시의 주민들의 삶의 흔적들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바리우스 목욕탕
* 압권, 셀수스 도서관
드디어 장대한 에페수스 유적의 하이라이트인 셀수스 도서관에 당도합니다. 도서관 입구 계단에는 여행자들이 휴식을 취하며 에페소스 유적의 신비에 휩싸인 듯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교육과 문화를 사랑하던 에페수스의 진가가 바로 이 셀수스 도서관에 압축되어 이습니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셀수스 도서관은 보는 것만으로 경이롭습니다. 16개의 거대한 코린토스식 대리석 기둥이 2층으로 받친 이 건물은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시 이 도서관의 규모와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비친 도서관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일찍 들어와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건물을 동쪽으로 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에 햋빛이 잘 글어오는 창가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책속에 몰두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 도서관은 로마제국의 아시아지역 총독이었던 셀수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유산으로 서기 125년에 지은 것입니다.
* 유곽
재미있는 것은 도서관 바로 앞에 대형 유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작은 돌과 흙벽돌로 만들어진 벽 일부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2층으로 지어진 럭셔리한 건물이었습니다.
입구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안쪽에는 분수와 수도시설이 완비된 고급 유곽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학자들이 제일 큰 고객이었는지, 아니면 토론에 지친 시민들이 좀 더 편하게 회포를 풀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인지 몰라도 유곽은 도서관 바로 앞에 떡 허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최대 고객은 여행자들이었을 겁니다. 로마시대 때 에게해를 항해하던 사람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에페수스에 정박하고 몸을 풀었습니다. 에페수스로 들어오는 항구로에는 유곽을 찾는 사람들의 위한 광고 석판이 있습니다. 인도의 대리석 위에 머리를 단장한 여자의 얼굴, 하트 모양, 조그만 동그라미와 발모양 등을 음각한 광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 주변의 모습은 똑 같습니다.
* 웅대한 야외극장
셀수스 도서관을 지나면 아고라가 펼쳐집니다. 돌길이 아닌 흙 길을 밟으며 지나간 고대 문명을 추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야외극장을 오릅니다. 문명의 쇠락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2세기 피온의 언덕에 올라섭니다. 파나 유르산 언덕에 지어진 야외극장은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그 웅장함에 압도당합니다.
객석 아래는 청동관과 토관을 묻어 공명장치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2천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작은 소리가 뒤쪽 끝에서도 들릴 정도로 공명이 생생해서 유며 성악가들이 서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객석에 앉아 묻혀버린 고대 세계의 항만을 바라봅니다. 2,000년 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영화를 회상하며 인간과 문명, 역사와 인류가 피고 지던 그 도도한 흐름을 영사기의 흑백 필름처럼 마음속으로 흘려보냅니다. 형제의 땅, 아시아와 유럽의 가교 터키의 변방에서 장대한 문명의 흔적, 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유적지 에페수스의 신비를 더듬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깊은 역사의 지혜를 생각해 봅니다.
* 이오니아해와 에개해, 이오니아해는 아래 왼편 아드리아해 밑에 있습니다. 이 지역에 살던 그리스인들이 도리아인들에 쫓겨 오른쪽 에개해 연안으로 옮겨살게 되면서 이 지역을 이오니아지역 이곳에 사는 사람을 이오니아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에개지역, 에개인이라고 불렀겠지요.
(1) 이오니아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게 해에 면하는 지역을 말한다. 도리스 족의 그리스 침입으로 이오니아해에 면한 지역에서 살다가 이 지방으로 피신 온 그리스인들 때문에 이 지역을 이오니아 지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사는 그리스인들은 이오니아인이라고 칭했다. 이오니아해는 그리스 본토 서쪽에 있다. 이들은 밀레토스, 에페수스, 페르가몬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또 사모스, 키오스의 두 섬에 정주하였다.
동방제국과의 접촉으로 일찍부터 경제적, 정신적으로 흥륭(興隆)하여 자연철학과 역사학, 지리학에 있어 그리스 본토보다 뛰어났고 예술상으로는 섬세, 우미한 이오니아 양식을 발달시켰다. B.C. 546년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으나 B.C. 500년 이오니아 인들이 봉기하여 페르시아 전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2) 아고라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에 형성된 광장으로, 그리스인들은 이 곳에서 민회와 재판, 상업, 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아고라(Agora)’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장’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아고라가 시장의 기능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민들의 일상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 목화성, 파묵칼레 ]
석회층으로 이뤄진 터키 남서부의 이 온천지대는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과 어우러집니다. ‘목화의 성’. 파묵(목화), 칼레(성)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얀 온천지대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풍경입니다. 생긴 모습은 흡사 계단식 다랭이 논을 닮았습니다.
금가루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 하얀 석회층이 절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빙산이나 설산 같습니다. 석회를 머금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그 성분들이 층을 이루고 층마다 푸른 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맑은 날이면 석회층은 물과 함께 청아하게 빛납니다.
* 파묵칼레의 로마 유적(히에라폴리스)
이 석회층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색이 변합니다. 푸르던 물은 희게 변색되며 해 질 녘에 띠는 색깔은 붉은빛입니다. 그렇기에 두세 시간 석회층과 인근 유적만 둘러보고 훌쩍 떠나는 것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중 온천에서 발을 담그며 현지인들과 미소도 나눠 보고. 겉은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터키빵 에크멕도 인근 시장 골목에서 제대로 맛봐야 합니다. 그렇게 노닥노닥 보낸 뒤 파묵칼레가 시간에 따라 빚어내는 색의 마술을 감상하면 좋습니다.
예전에는 석회층에서 직접 몸을 담그며 목욕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뒤에는 목욕은 금지됐고 입구에서도 신발을 벗어야 일부 구간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원천수의 온도는 대략 섭씨 35도. 생긴 것은 빙산처럼 보여도 발끝에 젖어드는 감촉은 따사롭기가 그지없습니다. 온천 분위기 내려고 수영복 차림으로 오가는 청춘들도 있고 석회층에 걸터앉아 멍하니 사색에 잠기는 여행자들도 있습니다.
[ 터키 남부의 최고 휴양지, 안탈리아 ]
안탈리아는 터키의 남부 지중해 연안 중심도시로 상주 인구가 10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이 지역 인구는 관광객으로 급증합니다. 연중 300일 이상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부드러운 백사장과 돌출된 암반지대, 따뜻한 해안과 높이 솟은 토로스 산맥 등 극명히 대조되는 경치와 많은 유적 관광지들은 외국인뿐 아니라 터키인들도 자주 찾게 되는 휴양지입니다.
이 도시는 기원전 159년 페르가몬의 아타로스 2세에 의해 건설됐으며, 옛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앗탈레이야’였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133년 로마인의 손에 넘어간 것을 시작, 7세기에는 아랍인의 침략을 받았고, 1206년 셀주크인이 오기 전까진 비잔틴이 지배했으며, 성지로 향하는 십자군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1390년에는 오스만의 지배, 1919년에는 이탈리아가 점령했다가 3년 후 돌려주는 등 역사의 굴곡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 웅장한 토러스 산맥을 배경으로...
꾸불꾸불한 해안선을 따라 길게 둘러싸고 있는 고대 성곽에서 안탈리아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림 같은 옛 시가지 칼레이치(성 안)를 돌아보는 데는 약 1시간 가량 걸립니다. 야자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만드는 넓은 도로와 오밀조밀한 목조 가옥과 골목길 등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가 많습니다.
* 안탈리아 뒷골목의 터키 노인네들
칼레이치 선착장에 들어서면 다양한 카페와 레스토랑, 관광 상품점 등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을 피해, 아침에는 항구에서 수상스키, 래프팅 등 해양 스포츠를 즐긴 뒤 선착장에서 밝은 햇살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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