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23
10월24일 [연중 제30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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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향지기입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수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2013년 10 월24일, 신부님들의 강론글을 모아 본당의 가까운 지인들과 나눔으로 시작됐던 '복음말씀의 향기'가 오늘로 8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복향의 가족이 되어주시고 나눔에 동참해주신 형졔자매님과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도록 힘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눔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매일 묵상 강론을 올려주시는 20여 분의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제가 아침마다 직접 전하는 분이 500여 명이 넘습니다. 또 이 강론글을 받아 2차, 3차 나눔하시는 분을 통해 국내와 해외의 수천여 교우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말씀의 향기'를 배달하기 위해 신부님들께서 묵상 강론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시간에 맞춰 잠들기 전 1시간, 아침 기상 후 1시간을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강론글을 모으고 편집에 매달립니다. 누군가는 신부님의 강론을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는 줄로 쉽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행간을 조절해야 하고 오탈자도 잡아야 합니다. 받아보는 교우들이 읽기 편하도록 시간과 공을 들여 편집합니다. 제가 언론사에서 글쟁이로 살아온 달란트도 무척 도움이 됩니다.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여 비신자를 성당으로 이끌었다는 자매님, 교정사목에 활용하신다는 수녀님 등 좋은 소식도 빈번히 전해옵니다. 강론글을 모아 전달하는 봉사를 한 지난 8년 동안 개인 카톡을 통해 친해진 형제자매님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 책으로 보면 40여 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다 보니 너무 많다고 투정하는 분도 있고 특정 신부님 강론만 요청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신부님의 강론글로 용기와 위로와 감동과 힘을 얻었듯이 좋아하는 신부님 한 분의 강론만 읽어도 영혼의 양식이 되리라 믿습니다.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류상현 스테파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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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jJ7QIFo7ec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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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제는 모든 고통도 상처도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 제단 앞에 편안히 누워계신 모예수 신부님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다가, 펄펄 날아다니시던 시절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하나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모신부님께서는 스페인 출신의 선교사들이 대체로 그러셨던 것처럼, 그분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확고한 신앙심, 성모님께 대한 지극한 효심, 불타는 복음선포의 열정, 이단을 향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전철역을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모신부님의 예리한 레이더에 한 남자가 포착되었습니다. 계단끝 출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행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었습니다.
평소 틈만 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강조하시던 신부님의 거룩한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습니다. 한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신 신부님은 피캣을 확 뺏들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모신부님께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당하실 때, 입당성가가 울려퍼졌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입당성가가 끝나고 제대 위에 서신 신부님께서 수녀님들 향해 크게 외치셨습니다. “거짓말!” 그러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 입술로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네.’ 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성가 가사를 노래로만 부르지 마시고, 삶과 행동으로 실천하십시오.”
돌아보니 모신부님의 신앙이 참으로 깊었으며, 마치 스페인 검투사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의 깊은 신앙을 내면에만 간직하지 않으셨고, 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물론 때로 너무 지나쳐서 옆에 있던 형제들이 무안해질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그 적극성을 통해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저희 후배들의 신앙에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모신부님은 미사나 강의, 고백성사 등을 통한 복음선포의 기회가 당신께 주어지면 그렇게 행복해 하셨습니다. 말씀 선포를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셨고, 큰 제스처와 흥미로운 말씀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선포를 향한 그분의 발걸음은 언제나 밝고 경쾌했습니다.
첫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외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장 14~15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지상 과제 하나를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복음 28장 19~20절)
다시금 맞이한 전교 주일, 그리스도 신자로서 함께 깊은 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매일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물이요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생명수같은 축복의 말씀을 이웃들, 가장 가까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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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gchR88FOv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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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 전교의 패러다임: 특별하면서도 오를성싶은 나무가 돼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내가 먼저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좋은 것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대부분 더 믿는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제가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렇다면 전교는 이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는 전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요? 믿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주려는 것이 전교는 맞지만 바로 믿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납니다.
‘최고의 스타들은 왜 키가 작을까요?’ 『언씽킹』이란 책에 나온 소제목입니다. 2008년 미국에서 수입이 가장 많았던 10명의 배우를 봅시다. 1. 해리슨 포드, 2. 애덤 샌들러, 3. 윌 스미스, 4. 에디 머피, 5. 니컬러스 케이지, 6. 톰 행크스, 7. 톰 크루즈, 8. 짐 캐리, 9. 브래드 피트, 10. 조지 클루니
배우로서 ‘주연’이란 말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키가 크고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거론된 주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키가 180cm가 넘는 사람은 니컬러스 케이지뿐입니다. 그런데 니컬러스 케이지가 조각 미남인가요? 조각 미남이라 한다면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조지 클루니는 178cm이고 톰 크루즈는 176cm입니다. 물론 저보다야 다 크지만, 서양인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키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말론 브랜도, 멜 깁슨, 로보트 드니로, 알파치노, 실베스터 스탤론, 숀 팬, 맷 데이먼 등의 평균 키는 175cm입니다.
우리나라의 BTS 평균 키가 177.3cm입니다. 유일하게 RM만 181cm이고 나머지는 평균 175cm인데 모두가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배우들도 보면 키가 크면 소위 얼굴이 좀 만만하고 얼굴이 좀 부담스러우면 키가 만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180cm인 송강호 씨는 키가 크지만, 얼굴은 조각 미남이 아니고 이병헌 씨는 미남이지만 키는 좀 작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어떤 여자에게 매력을 느낄까요? 분명 솔직해서 자신을 다 드러내는데 또 뭔가 신비감을 감춘 여자입니다. 그냥 한 번 만났는데 다 알 것 같은 여자는 매력이 없습니다. 남자도 특별한 것을 꿈꾸고 누군가를 만날 때 특별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신 부담스러우면 안 됩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면이 있으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까지 있다면, 그래서 ‘가능할 거 같은데?’라는 마음을 주는 여자가 가장 매력 있습니다.
종교는 분명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르지 못할 나무만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오르지 못할 나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만 강조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것만 강조한다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불친절한 복음 전파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살기 부담스러운 나라에서 내 아이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특별합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귀화해서 우리나라에 살려면 어떨까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게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기 부담스럽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경쟁을 시키며 한국인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상한 의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열등감이 있으면 자신 안에 있는 하나의 특징만을 강조하며 그것만을 부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매력적으로 되려면 큰 사고 안 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부자가 아니면 무시당하는 문화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가 되면 자녀도 많이 출산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저 어울려 살기만 하면 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그냥 어울려 사는 것을 ‘친교’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럽지 않은 공동체가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부담스러우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할 용기를 얻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이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리만치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아버지!”란 믿음만 강조할 게 아니라 우선은 모든 사람이 어울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어머니, 형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것이 오를성싶은 나무가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서로 친교를 이루며 사랑하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이 당신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가진 것을 나누고 주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로 들어오려 했을까요? 성경에서 초대 교회 선교모델을 한 번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3-47)
일단 성직자들이 ‘놀라운 일과 기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물론 성사 거행보다 더 큰 기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친교’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 친교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사제들의 몫입니다. 그 친교는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랑’이 바탕이 됩니다.
이를 위해 성사가 존재합니다. 성사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게 해줍니다. 이런 친교의 행복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세상에 ‘매력을 발산’합니다. 누구나 친교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해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보고 들어와 ‘신도들의 모임이 커집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선교 방법이었습니다. 현재 성당에서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형제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교적 인원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냉담자를 말할 때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고해성사하고 성체성사 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기적을 통해 ‘친교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사의 목적이 친교입니다. 형제간의 친교를 지향하지 않는 성사는 어쩌면 방향을 잃고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에 기름을 계속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전교하지 않는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듯, 믿는데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형제간의 친교로 참으로 행복하고 그 공동체가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만 목표를 두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열심히는 하는데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특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성사입니다. 성사가 있기에 교회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성사만 강조한다면 교회의 특별함보다는 오르지 못할 나무로 보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과 특별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누가 부담스러운 사람과 사귀고 싶겠습니까? 자신을 성장시켜 줄 특별함은 갖추어야 하지만 성사만 강조하며 부담을 주는, 그냥 특별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960년 펜실베니아 중부에 있는 로제토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 것을 좋아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며 술과 담배를 즐기고 녹초가 되도록 일했으며 비만도 흔한 이 마을에서 거의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수 마을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정착촌이었습니다. 그 마을은 계층이 없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듯하고 친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바로 건강과 장수에도 직결된다는 의미로 ‘로제토 효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냉담자를 정할 때, 성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성당 공동체에서 친교를 나누는 사람에게 신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가야 합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가 없다면 어쩌면 교회도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결국에 사라지는 길로 가는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성체가 아닌 공동체가 선교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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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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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된 복음서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주목할 점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지닌 ‘임마누엘’로 소개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23 참조).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임마누엘’로 불린 예수님께서 복음서의 마지막에 당신을 ‘임마누엘’이라고 밝히십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선교 사명을 깨닫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설명하고 그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이 전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전하고 선포하는 우리 자신이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가 뿌리는 전교의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전교의 시작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일에만,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오늘은 전교를 위하여 삶을 봉헌한 선교사와 그들이 활동하는 교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기도 가운데 함께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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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선포>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성직자들과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면 되지 꼭 모든 신앙인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의 답은 다음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신앙인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고, 동시에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추는 일을 하지 않는 등불은 꺼진 등불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것과 같고, 신앙을 감추는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빛’과 ‘구원의 빛’을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라는 말을,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앙인으로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해야 하는 일입니다. ‘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당한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말씀이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런 권고도 했습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물리치십시오. 알다시피 그것은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주님의 종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가르치며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반대자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시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악마에게 붙잡혀 그의 뜻을 따르던 그들이 정신을 차려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2티모 2,23-26)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논쟁’처럼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봉사활동입니다. (다른 종교의 교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일’입니다. 그런 논쟁은 반감만 일으키고, 역효과만 만들어냅니다.)
4)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걱정하지 않는 모습’ 자체가 믿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말은, 의식주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모든 걱정에 다 적용되는 말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간에 신앙인은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이라는 말은, ‘믿음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보호자와 구원자가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힘든 상황을 만나면 걱정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으니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5) ‘사랑 실천’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이기도 하고, 선교활동의 기본자세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사랑 실천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세워 놓고서 울타리 안에서 신자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실천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 실천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 실천이 없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서로’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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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게 가장 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였고, 박해와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마침내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인 로마에 전해졌고, 콘스틴티노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가 만든 길을 따라서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봉건주의 시대에는 군주가 명령하면 백성들은 모두 따라야 했습니다. 군주가 복음을 믿고 교회를 받아들이면 모든 백성이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마을은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그렇게 복음이 전해졌지만 아시아는 달랐습니다. 아시아의 군주들은 유교의 ‘틀’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통치체제를 통하여 이슬람을 전하였습니다. 아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달라야 했습니다.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슬람과 대화하면서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이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토착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많은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이식하려했을 때는 전쟁과 폭력이 있었습니다. 창과 칼, 총과 대포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사람들의 몸은 복종시킬 수 있을지라도 마음을 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려는 지식인들이 교리와 전례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호기심이 있었고, 양민과 천민은 교회에서 높고 낮음이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가 와서 사목할 때까지, 한국의 교회는 소위 ‘가성직제도’를 만들어서 스스로 주교, 사제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법과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고 사제가 오면서 교회의 제도와 법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뿌리를 내리던 한국교회는 몇 가지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박해는 근 100년간 이어졌고, 만여 명이 넘게 순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교회는 박해를 견뎌내고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100만 명이었던 한국교회는 매 10년 마다 100만 명씩 증가하여 2020년 현재 교적상 5,923,300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본당은 1,767개가 있으며 공소는 704개가 있습니다. 사제는 5,538명, 수도자는 11,788명, 주교는 40명이 있습니다. 박해를 견뎌내고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를 알릴 수 있는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참가했습니다. 8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여의도 광장을 가득 매웠습니다. 교회도 놀랐고, 한국사회도 놀랐습니다. 이후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여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주관하였습니다. 1989년에도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있었고, 교황님의 방한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입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를 위한 활동이 있었고, 자유를 열망하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희망의 빛이었고, 마지막으로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꽃동네를 비롯해서 교회는 약하고, 외롭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회를 선택하겠습니다.’ 자발적으로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비자 교리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인터넷이 있고, 각종 소통 수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맛집은 멀리 있어도, 작은 곳이어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맛집의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사람도 적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며 향기를 전해주는 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의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 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위로와 용기의 희망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둔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삶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교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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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나의 복음화가 민족들의 복음화이다>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의 복음화가 이루어집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를 깨달어갈 때, 나의 삶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세상에 전해진다는 것을 기억하며 내 삶은 지금 얼마나 복음의 정신에 따라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한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우울과 좌절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어느 신혼 부부의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변비가 심했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남편과 TV를 보던 중 방귀를 끼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현상은 서로 이해하기로 약속했으면서도 철없는 어린 남편은 참을 수 없는 심한 냄새에 아내와 작은 말다툼을 하다가 그만 화가나 장모님께 이런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장모님, 은주의 방귀 냄새를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자 조금 후 장모님의 답장이 왔습니다.
“조서방, 자네가 사랑으로 흡수하게나.”ㅋㅋㅋ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단점과 잘못,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흡수하여 하나가 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결혼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느님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 여정이라고 하듯이, 그렇게 긴 세월 함께 하며 깎이고 부서지고 깨지면서 둥글둥글 해져 서로 함께 함이 아픔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어 가는 노년의 부부들을 보면 사랑의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 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이런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민족들의 복음화의 과정이 마치 부부의 사랑이 영글어 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남자와 여자로서 다르고, 살아온 환경과 교육도 다르고, 생각이나 가치관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갑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면서 더 큰 사랑을 배워갑니다.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참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으며, 찌지고 볶고 싸우다가도 화해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복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 부부를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각자가 사랑으로 성숙해지지 않으면 늘 부부 간의 갈등은 끊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민족들의 복음화의 핵심이 있습니다. 너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나를 먼저 바꾸는 것입니다. 과거 선교 방법처럼 그렇게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전교인 시대는 지났습니다. 내가 먼저 복음화 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복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 민족도, 우리 문화도 복음화 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며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에 실천하고 표현할 때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들이 복음화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화라는 말이 무엇일까요? 우선 복음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냥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소식을 듣고 기쁩니까?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때 매일매일이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매 순간이 하느님 나라의 사랑으로 충만한 때인 것입니다. 오늘 우스개 소리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으로 흡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깊이 들어가 예수님의 마음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 다른 종교, 다른 민족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에 이제는 그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그들을 흡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람으로 만들거나, 나와 같은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흡수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어떤 관계일까요?
이것을 전문 용어로 Unity-in-diversity, 즉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서로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믿음과 신뢰의 관계, 사랑의 관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면 상대를 구속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도 서로 일치를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연대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의 복음화입니다.
자식들에게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그들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전하지 않으면 잔소리에 불과해지는 것처럼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고 방식, 혹은 다른 민족의 문화와 가치관 속에 복음의 정신을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듯이 복음에 녹아 있는 사랑과 용서, 자비와 기쁨의 삶, 고통을 건너가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에 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사랑과 믿음과 용서와 희망의 복음을 살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홀로 복음 선포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듯이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고 계십니다. 지금 내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 뵈옵고 오늘도 자신과 이웃과 주님을 사랑하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빕니다.
나의 복음화가 바로 민족들의 복음화입니다.
나의 나누는 사랑,
나의 내어 주는 사랑,
나의 용서와 자비가 바로 민족들의 복음화에 기초가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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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연정 티모테오 신부님]
<우리로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해 전교 주일 담화에서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의 목적대로 활동하다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다른 수많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라고 역설하십니다. 참으로 교회는 선교성(宣敎性)을 잃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만민에게」, 즉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시(摘示)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이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야곱 집안, 곧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빛 속에 들어오도록 초대합니다. 주님의 빛은 구원을 상징하며, 이는 주님의 교회를 통하여 선포되고 실현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더불어 선포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몇 년 전에 우연히 손가락 끝 마디가 잘려나간 수녀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멕시코에 선교사로 파견된 분이신데, 어느 날 미국으로 떠나는 트럭에 올라탄 멕시코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서둘러 건네주시다가 발생한 사고 때문에 손가락 끝 부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본래보다 어쩔 수 없이 짧아진 수녀님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분이 정말로 아름다운 삶을 사신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강조하면서,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찬양하시면서 그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어라(마태 28,19 참조)
2015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미국을 사목 방문하셨을 때에 언급하신 일화입니다. 언젠가 카타리나 드렉셀(Katharine Drexel)이라는 미국 여성이 레오 13세 교황님을 알현한 자리에서, 자기네 가문에서 세운 학교에 선교 사제들을 파견해 주실 것을 청원 드렸답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그런데, 자매님은요?”라고 반문(反問)을 하면서, 카타리나 드렉셀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길 권하셨답니다. 카타리나 드렉셀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2000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카타리나 드렉셀을 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고 하면서, 당신의 복음을 만민에게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소명을 똑같이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여야 합니다.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복음의 기쁨」 20항) 2005년부터 우리나라 가르멜 수녀님들이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해 수도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수녀님들이 열대지방에서 몸으로 겪는 수고가 적지는 않지만, 사실 더 큰 어려움은 그리스도교의 불모지에서 봉쇄와 정주(定住) 생활의 뿌리를 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나가서 선교하는 교회”(「복음의 기쁨」 17항 참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복음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교회의 선교 사명」 7항)을 살게 됐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서 증인이 되라고 격려하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말할 수밖에 없는”(사도 4,20 참조) 아름다운 삶으로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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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유튜브 : https://youtu.be/OL6y2Mhtkb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완전하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 이런 호칭들은 하느님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완성된 하느님이시기에 모자람도 부족함도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여러 면에서 전혀 완성과는 거리가 먼 분처럼 느껴지십니다. 당신이 사신 평생인 30여년 조차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데, 당신이 이루신 일이라고 해도 목수로 시작한 인생이 전부였고 우리가 아는 조금이라도 성공한 사람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누군가의 위험한 발언처럼 ‘주님의 인생은 어쩌면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교회의 고백에는 의심이 없지만 그러기에 주님이 세상에서 이루신 일들은 어느 하나 ‘마침표’나 ‘닫힌 괄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는 자리는 주님이 결정하신 우리와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적어도 사람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장면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탐탁하지 않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부활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모두 옳았다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세상에 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 그분의 제자들조차도 아직 의심 속에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깨닫지를 못했고,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시는 순간에도 틈만나면 자신들 중 누가 높은가를 두고 다투거나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했던 제자들입니다.
칭찬보단 꾸지람에 가까운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한 녀석은 스승을 팔았고, 한 녀석은 알몸으로 도망쳤으며, 스승을 지키고자 다짐했던 큰 제자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합니다. 엉망진창이고 아무리 급했던 사건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모두 사라진 상황에 주님은 그야말로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 재판과 죽음에 이르는 순식간의 사건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예언과 함께 시작된 공생활이었지만 하느님의 삶은 바람 앞에 순식간에 꺼져버린 촛불과 같았고 아예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그분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제자들이 아닌 여인들이었고, 부활의 첫 목격자 역시 이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은 제자들이 아니라 고작 전해주는 소식에 긴가민가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이 전해져도 계속 믿지 않았던 이들은 결국 주님을 만나고서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스승의 예언조차 믿을 수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 주님이시니 그분의 공생활과 구원사건을 어찌 성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후 40일을 보내시고 제자들을 준비시켰음에도 제자들은 이 모양이었습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이미지가 무너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위험한 도전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정말 모든 것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들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믿고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되리라 알고 계신 듯 사명을 주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분을 닮아 완전해야 하는데, 완전하신 하느님이 부족한 이들에게 완전한 가르침을 맡기셨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신이 살아계실 때에야 당신이 가서 완성하셨다 치지만 이제 이 사람들이 스스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주님은 주저 하지 않으시고 하늘로 오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복음의 사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고 잘 준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생길 때마다 우리의 반성과 고민은 깊어지고 대책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 하나는 이 시작의 모습이 놀랍게도 이런 엉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고민을 하는 우리가 그들에게 이 귀한 신앙을 이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혀 모자람 없이 말입니다.
주님의 확신은 우리의 어떤 것보다 강하십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 세상이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주님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어리석지만 하느님은 분명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이 바탕이 아니라 그냥 있는 모습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의 세상도 첫 제자들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 분 하느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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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기쁜 소식 온 세상에 전하자>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시온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될 것인데, 그때 모든 민족이 그리로 밀려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와 주님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모든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불의와 전쟁, 죄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의 빛에 따라 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2,1-5)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모든 민족은 온 산들 위에 굳게 서 있는 새 도성 예루살렘이자 성전이신 예수님께로 모여올 것입니다.
그분께 주님의 길을 배워 주님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기쁜 소식, 그분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신 모든 것, 곧 아버지의 뜻인 주님의 길을 가르치고 모두가 그 길을 걷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마태 28,18-19)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며 모두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이어받아 이사야가 예언한 그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임무에 따라 복음을 충실히 전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마태 5,13-16) 왜냐하면 전교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선포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도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이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길로 따라나선 이들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전해 들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하던 신앙, 곧 예수가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또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믿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입으로 고백한다고 표현을 하다 보니 당신을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마태 8,21)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교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입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말고 세상 곳곳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말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로마 10,15-16)
오늘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전교 주일입니다. 이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겠다고 다짐합시다.
물론 전교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 곳곳에서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 주님이심을 고백합시다.
그렇게 우리들이 믿는 바를 선포할 때 세상 모든 이들은 예수님께로 모여들어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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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경욱 사도요한 신부님]
<내 안에 먼저 복음의 빛을 밝히자>
피정의 집을 운영하다 보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피정을 준비하고 초대하였으나 유료 피정에는 사람이 없고 무료 피정에만 사람들이 몰려올 때입니다.
자기 영성 생활의 성장을 위해서 이토록 투자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슬퍼집니다. 물론 강사가 유명하지 않아서라고 자책도 하지만 세속화의 흐름을 더 강하게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 주일을 지내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온 세상에 전파하리 복음 말씀을...”이 성가를 부를 땐 저도 좀 뻔뻔하고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복음을 잘 전하지 못하는 점을 일깨우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한 구원의 소식,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가 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날입니다.
복음 전파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말이지요. 백성으로서, 자녀로서, 제자로서 누리는 권리 말입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라는‘님의 침묵’의 시 구절처럼 음악이 끝나도 흥을 멈출 수 없는 사랑의 마음같이, 전교는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이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사명인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큰 상을 아들이 받았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면 형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말하지 말라하면 벌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들에게 불을 붙이고자 하는 그 불은 이미 네 안에 불타고 있어야 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이 내 안에서 내 삶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내 모습을 내 이웃이 보게 되는 것,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음을 알리는 것이 복음 전파의 시작일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내 이웃이 알아차리는 그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이 고통받으시는 것처럼 고통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내 안에 불붙은 복음도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노력함으로써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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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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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소서!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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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선교는 복음화!>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이 모습들이 바로 '선교인 복음화의 아주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내가 기쁘지 않고,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감사하지 않는데...
내가 부활하지 않는데...
어떻게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기쁨과 감사와 부활의 원천'은 내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끊임없는 영적 행위인 '기도와 미사와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습니다.
'기도와 미사와 말씀'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영원한 부활이요 완전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내가 먼저 굳게 믿고,
내가 먼저 기뻐하고,
내가 먼저 감사하고,
내가 먼저 부활합시다!
내가 먼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 안에 머뭅시다!
'선교인 복음화'는 이것이 '너에게로 흘러 넘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선교인 복음화의 구체적인 모습'인 '코이노니아(koinonia 친교)'입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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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게 하소서>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랑하게 하소서>
다만
사랑하게 하소서
누구든
사랑하게 하소서
떳떳하게
사랑하게 하소서
지치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절망하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물러서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한결같이
사랑하게 하소서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세상
끝 날까지
사랑이
나와 함께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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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삼자로서는 너무 고되고 힘든 시간처럼 보이는 데도 기쁨을 가지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저보다 더 힘드신 분도 많은데, 저만 힘들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어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언젠가 읽은 책을 통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물리학자 스테판 클라인에 따르면 힘든 시간을 받아들이면 그 기억은 더는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면 전뇌의 영역이 편도체를 통제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이 있어야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집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모욕과 치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주님도 이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의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담겨 있는 복음을 접합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십니까? 그보다 사회의 법칙을 따라야 더 현명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회의 법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때 주님께 대한 의심도 생기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까요? 문제의 크기를 계속해서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법칙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는 말씀으로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긍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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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
어느 한 부족의 추장이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부족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 세 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져온 사람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 사람은 곧바로 산에 오릅니다. 시간이 흘러 한 명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산봉우리 꼭대기에서 뜯은 푸른 이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빈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부족의 미래를 보고 가슴에 담아왔습니다. 이는 바로 언덕 너머의 옥토입니다. 제가 추장이 된다면 그 넓은 옥토를 바탕으로 부족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추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미래에 대해 희망을 꿈꾸는 자가 바로 추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희망과 미래는 중요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떤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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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어느 모임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합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깥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 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비대면 시대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하게 되는데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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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
-꿈, 고백, 실천-
오늘 10월24일은 제95차 전교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교 주일 담화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
올해 전교 주일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보고 들어 마음에 지닌 것을 우리가 저마다 책임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하는 요청입니다. 전교 사명은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니,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교 소명은 과거의 일이거나 이전 시대의 낭만적인 흔적이 아닙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코로나 19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우리 삶의 반경을 넓히고, 우리의 관심권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주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우리 모두 참된 선교 제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전교주일, 우리의 신원이 새롭게 확인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전교 제자들이 될 수 있겠는지요. 거창하지 않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전교 제자들 답게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어제 수도형제와 언뜻 주고 받은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루가 참 빨리 갑니다.”
“하루만인가요, 하루도, 일주일도 한달도 일년도 금방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도 금방입니다.”
평범한 대화지만 깊어가는 기도의 계절 가을과 함께 시리도록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더불어 시편 90장 10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새삼 짧은 인생,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깨어 잘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갖게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복음 선포의 선교적 삶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삶은 역동적이 되고 생동감이 넘치며 방향감 역시 뚜렷해질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아갈 때 비로소 인생 무지와 허무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의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꿈입니다.
머리의 꿈입니다. 우선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비전이, 희망이 생생해야 합니다. 사람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이들이 사라지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가 보장되도 타락하게 되고 나태해집니다.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집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내면은 날로 황폐화 됩니다. 정말 지옥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사라진 곳입니다.
우리의 꿈은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 되는 꿈이요 비전이요 희망인 하느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가 받은 환시를 통해 우리의 꿈을 환히 보여 줍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 보다 높이 솟으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얼마나 멋진 꿈이며 비전입니까! 언젠가의 꿈이, 비전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에서부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앞당겨 실현되는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입니다. 이어지는 영원한 평화의 비전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그분께서 민족들의 재판관이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으리라.”
언젠가 그날의 꿈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우리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평화의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입니다. 참으로 꿈이 없다, 비전이 없다, 희망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몸소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영적 야곱 집안의 공동체가 되어 그렇게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둘째, 고백입니다.
가슴의 고백입니다. 성서의 언어는 대부분 고백 언어입니다. 오늘날의 비극이자 불행은 고백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꿈을, 비전을, 희망을, 사랑을, 믿음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는 것이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마음을 담아 주님께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들입니다.
고백의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사랑이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고백기도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시간입니다. 참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공동전례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로마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바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아름답고 고무적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고백하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고백하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는’을 ‘고백하는’ 말마디로 바꾸니 더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믿음을, 사랑을, 희망을, 찬미를,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행복을 고백할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런 고백기도를 바칠 공동전례기도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평생 살아도 주님을 몰라, 주님을 잊어 이런 고백기도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허망하겠는지요!
이런 고백기도보다 영적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내적 위로와 치유를 주는 수행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의 고백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우리를 신망애信望愛의 사람,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니, 이런 우리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참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셋째, 실천입니다.
발의 실천입니다. 꿈과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실천의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관상의 친교는 활동의 선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꿈의 사람만이, 고백의 사람만이 비로서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가 되어 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열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 하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통해 늘 현재화되어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과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례를 강요할 것도 없습니다. 각자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삶의 모범을 보여 이를 보고 배우고 깨닫고 감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웃이 주님을 만날 때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을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칭합니다. 이는 특히 우리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에게 어울리는 선교입니다.
바로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함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그러니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이 큰 울림을 줍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 복음을 선포하라 파견된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신망애의, 진선미의 삶자체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우리 믿는 모두에게 주어진 복된 사명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꿈의 사람, 고백의 사람, 실천의 사람으로, 참 아름답고 행복한 주님의 참된 선교 제자로 살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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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알려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들 중 더러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열외로 내치지 않으시고 함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미 주님께 믿음을 굳힌 이들과 달리 그들은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서 믿음 또한 키워나가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수 차례의 수난 예고와 실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스승을 따르는 길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을 터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로마 지배층과 유다인들이 새로운 길에 적대적이니 '세상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큰 부담일 수 있지요. 자기들에게 여전히 신앙과 지혜가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동행 약속이 얼마나 든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은 당신 현존의 기간을 세상 끝 날까지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 곁으로 돌아오신 이 순간부터 앞으로 계속, 이 세상이 끝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어느 한 시기를 살다 떠난 어느 위인 정도가 아니시지요. 그리스도교는 박제화된 과거를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존하시는 주님을 전하며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지붕 아래로 모여 들 평화의 날을 노래합니다. 그때에는 서로 대립할 일도 싸울 일도 없을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이사 2,3)으로 모든 이가 깨우치고 위안을 받으며, 살상 무기들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변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닫힌 마음들을 열고 무기들을 녹이며 어둠을 밝힙니다. 제자들을 통해, 제자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 모든 이들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모성을 흔들어 깨워서, 사랑과 자비를 되살려내고 충만하게 키워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난 이들의 마음에 그분을 닮고 그분과 하나 되려는 열망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빛 속을 걷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한 존재 안에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간결히 전합니다. 먼저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포된 말씀께서 듣는 이의 마음 안에 믿음을 형성하십니다. 말씀께서 그이 안에 거처하기 시작하신 겁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정해진 날수가 계속되는 날까지 지속될 약속이지요.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겁니다.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 위안이고 용기이며 힘이 되어 주십니다. 설령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듯해도 우리는 이성과 감각을 뛰어넘어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언어와 문화, 인종과 종교, 민족과 신분을 넘어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과 기도로 사심 없이 전하는 사랑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평화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실 겁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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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v0th9fUx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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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20)
모든
민족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진리가 복음이다.
복음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봉사가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모습이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향한 참된
봉사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복음은
봉사와
공동선의
추구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교는
신앙인들의
본래적
소명이다.
소명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집과
교만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나누는 것이다.
건강한 삶의
나눔이
진정한
전교이다.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이다.
전교는
일방적이지
되어서는
아니된다.
참된 전교는
배려와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쌍방적인
사람의 소통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우리의
복음화이다.
복음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서로간의
위로와
정화이다.
전교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생활 속의
참된 실천이다.
올바른
생활의
실천이 바로
전교이다.
우리의 전교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묻게된다.
복음화의 미래는
복음화에 있다.
복음화는
올바른 삶의
나눔이다.
나눔의
한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나눔은 전교의
시작이며
힘찬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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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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