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즈에서 오랜기간 동안 아시아 특파원을 해 온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와 셰릴 우던 기자가 쓴 "Thunder From The East : Portrait of a Rising Asia(중국이 미국된다)"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방에 둘이 같이 있을 때 각국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상정한 우스갯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미국인은 상대방을 맞고소하고, 중국인은 장사를 트기 위해 흥정을 벌이고, 일본인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싱가포르인은 학교성적표를 보자고 할 것이며, 대만인은 함께 해외이민 신청을 하고, 인도인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미국 탓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스웨덴인은 섹스에 열중한답니다.
그러면 한국인 두 명은? 아마도 서로 싸우려 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어느 나라사람에 대해서든 선입견을 갖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서방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가 이와 같다면 무심코 지나칠 문제는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공감이 가시는 지요? 우리는 흔히 "한국인은 모래알같이 서로 싸우기만 하고 단결할 줄 모르는 민족이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또한, "일본인은 사쿠라같이 잘 단결하는 민족이다."는 얘기 또한 많이 들어 보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모래알같은 국민성을 버리고, 사쿠라같은 일본의 국민성을 배워야 한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한국인은 모래알"인 것 같습니다. 개인 한 명 한 명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래알 같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틈만 나면 서로 다툽니다. 정치사이트만 하더라도 서프라이즈에다가 남프라이즈에 진보누리에 조은나라닷컴으로 갈기 갈기 찢어져 있고, 찢겨진 조각중 하나인 이곳 서프 안에서도 특정사안에 따라서는 서프앙들의 의견이 갈려 "니가 옳니, 내가 옳니"하며 싸울 때 조차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개인의 자질은 정말 훌륭하나, 서로 싸우느라고 집단으로써는 약한 사람들" 이라는 것이 "한국인은 모래알이다"에 담긴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이겠지요.
2. "사쿠라의 나라" 일본
일본인들은 어릴때 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자신의 개성을 조금 죽여서라도 집단속에 철저히 융화되어야 한다는 "집단의식"의 소산이겠지요.
이런 일본인들의 "집단의식"은 참 별난 데가 있습니다. 70, 80년대 일본인들이 해외여행을 다닐 때, 가이드의 깃발에 따라 수십명이 일렬로 줄지어 다니는 모습이 서구인들의 눈에는 아주 신기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요새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아직도 유치원 얘들처럼 깃발따라 줄지어 다디는지...
저는 이런 일본인들의 국민성이 역사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세기 중반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선 이래 19세기 후반 에도 막부가 무너질 때까지 일본의 역사는 내전이 계속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전시 체제에서는 쇼군(將軍)이나 다이묘(大名)등 지도자의 지휘 아래 일치단결해야만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일치단결만이 살 길이었으니 말이죠.
이것이 일본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집단의식이 강한, 잘 뭉치는 이유일 겁니다. "카미가제(神風)"등 천황에 대한 극단적인 충성도, 자민당이 오랜 기간 일본을 통치하고, 여전히 군국주의자들이 활보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전통이 낳은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을 죽임으로써 집단속에 융화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사쿠라"란 말에 담긴 일본인들의 국민성 이겠지요.
3. 사쿠라의 시대
일본 근대화의 시작은 1854년 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에 굴복하여 가나가와조약 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된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불평등조약의 체결이후 막부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이것이 존왕양이론이 대두되게 한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존왕양이파가 승리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천명함으로써 본격적인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그리고, 1868년 3월
"이번의 왕정복고는 진무천황의 창업시대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일신(一新)하여 일본 고유의 신을 섬기는 일과 정치가 일치하는 이른바 제정일치(際政一致)의 조직으로 돌아간다" 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과거 지방영주인 다이묘(大名)의 지도아래 뭉쳤던 일본인들은 이제 천황을 그들의 영도자로 받아들이고, 천황의 명에 따라 죽고 사는 "사쿠라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죠.
이후 일본인들은 마치 사쿠라처럼 천황의 지도아래 일치단결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기치로 내걸고 근대화, 서구화를 빠르게 이뤄내게 됩니다. 개항이후 40년, 왕정복고 이후 26년이 지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10년이 지난 1904년 "러일전쟁"마저 승리하게 됨으로써,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패망의 잿더미에서 다시금 빠른 속도로 경제를 일으킨 데에도 역시 이 "사쿠라" 정신이 기여한 바는 컸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집단이 되어 위해 일치단결함으로써, 정말 기적처럼 빠른 속도로 경제부흥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다이묘(大名)나 천황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었던 것처럼, 회사를 위해 살고 죽는 "회사인간"이 됨으로써, 세계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죠.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도래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서최고의 경쟁력은 "질 좋은 제품을 가장 싸게 만들 수 있는 능력" 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회사만을 생각하는 "회사인간" 일본인들이 자신도 소중히 생각하고, 하루 8시간만 일하는 서구인들 보다 "더 싸고 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할 것이구요.
그리고 1980년대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세계를 돈으로 다 사버릴 것만 같은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구요. "사쿠라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4. 사쿠라의 시대는 가고...
그러나, 1990년대 들어 화려하게 만개했던 사쿠라가 밤새 내린 봄비로 순식간에 다 져버리고 앙상한 나무가지만 남듯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쿠라의 시대"도 그런 식으로 가 버렸습니다.
1980년대만 해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사쿠라의 시대가 이렇게 쉽게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들어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일어난 정보혁명 덕분에 과거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절의 가장 주요한 경쟁력 원천이었던 "질 좋은 제품을 싸게 만드는" 일본의 경쟁우위는 급격히 사라지고 맙니다.
"정보혁명"으로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정보의 유통속도 또한 극도로 빨라지게 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에 수십년간 한 분야에 근무함으로써 이뤄냈던 숙련된 노동자들의 그 "숙련"을 컴퓨터가 대체하게 됨으로써, 일본수준의 "질좋은" 제품을 대한민국, 대만, 중국, 태국등지에서 "더 싸게" 만들수있게 되어 버린 것이죠.
또한 "질 좋은 노동력"과 함께 일본이 갖고 있었던 자본력, 기술력의 격차마저도 우리 대한민국등 후발국가들의 지속적인 자본축척과 기술개발로 이미 거의 사라져 버린 상태입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이 다시금 경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이런 "제3의물결"에 잘 적응한 때문입니다. 이제 "마대 인 어메리카"는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1990년대 이후 미국기업들의 제조공장은 "질 좋고 더 싸게" 만들수 있는 중국, 인도 등으로 이미 옮겨진 상태입니다. IBM도 나이키도 더 이상 미국에서 제품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국의 제조공장이 다른 나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쟁력은 오히려 월등히 나아졌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인 생산에는 손을 떼 버리고, 그들이 경쟁력을 가지는 금융, 마케팅, 기획, 연구개발등의 "생각하는" 일에역량을 집중한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경쟁력인 시대에서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경쟁력인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사쿠라의 시대"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것 입니다.
5. 사쿠라는 가라, 이제는 모래알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과거 화려한 성과를 나타냈던 일본인들이 왜 "제3의물결"이라는 "정보혁명"의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일본인들이 "사쿠라" 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그들의 강점이었던 것이 환경의 변화로 치명적인 약점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죠. 사쿠라는 자신을 버려가며 열심히 일 할 수는 있으나, 사쿠라처럼 자신을 버려서는 제대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경쟁력이 된 시대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죠.
"사쿠라라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쿠라가 된다는 것, 곧 "집단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개성을 일정부분 포기하고, 집단에 자신을 맞춰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예를 든 "깃발에 맞춰 줄지어 다니는" 일본 관광객들이 파리에 여행간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일본 단체 여행객들은 에펠탑을 한시간, 개선문에서 한시간, 루브르 박물관을 두시간 관람하고, 쇼핑 두시간 하고 뭐 그런 식이겠죠. 이 단체여행에 포함된 일본인은 자신이 몽마르뜨 언덕에 가고 싶든, 루브르 박물관에서 하루종일 있고 싶든, 관광은 지겹고 하루종일 호텔방에만 있고 싶든 상관없이 깃발에 맞춰 줄지어 다니면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들을 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쿠라"란 이런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파리의 단체여행은 아마도 짧은 시간에 파리를 구경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겁니다. 그러나, 그 "효율"속에서 개인적인 관심이나 개성 따위는 무시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구요. 이렇듯 집단속에 자신을 녹여온 "사쿠라" 일본인들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었고, 자신만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깃발을 따라 줄지어 따라다니는 것처럼 오로지 리더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순종하고 따라가고 열심히 일 하는 것, 그것이 "사쿠라"의 미덕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 할 수는 있었으나, 제대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흔히 일본을 "독창성과 다양성이 부족한 사회"로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한 때 장점이었던 것이 환경이 변함에 따라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쿠라는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가는 데에는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리더가 옳은 목표를 제시하면 그 목표를 가장 빨리 실현할 수는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리더가 제시한 목표가 틀리면 가장 빨리 망할 수도 있는 데다가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쿠라" 입니다.
1980년대 "제3의물결"인 "정보혁명의 시대"가 도래된 이후, 21세기의 초엽인 지금은 "제4의물결"인 "지식혁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지식혁명의 특징은 정보혁명을 통해 더 풍부해진 정보와 기술이 상호 결합, 응용, 변형되면서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보가 더 다양해지고, 빨라진데 이어 스스로 진화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지요.
과거 정보혁명의 도래로 목표의 변화가 더 빨라졌다면, 이제 지식혁명의 도래로 목표자체가 스스로 진화하고 융합하고 변형되는 시기에 접어든 것이지요. 이런 시대에 목표가 주어져야 힘을 낼 수 있는 사쿠라는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쿠라 일본이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이유입니다.
정보혁명을 넘어 지식혁명의 시대, PC를 넘어 인터넷의 시대인 지금 이 시점은 협동보다는 창의가, 집단보다는 개인이, 통일됨보다는 다양함이 더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때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사쿠라의 시대는 가고, 모래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우리 대한민국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6. 모래알을 다시 생각함
서두에서 모래알이란 "개인의 자질은 정말 훌륭하나, 서로 싸우고 잘 뭉치지 못해 집단으로써는 약한 사람들"이라는 한국인에 대해 형성된 일종의 고정관념임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럼 왜 한국인은 잘 뭉치지 못할까요? 저는 그것이 개인적 자질이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알 한알 빛나는 모래알처럼 뛰어난 자질을 가진한국인들은 쉽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거죠. 한송이로는 볼품없는 사쿠라가 모여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과는 반대로 말이지요.
과거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는,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해 내는 것이 경쟁력의 주요 원천이었던 시절에는 이런 하나 하나 아름다운 모래알의 "개성(個性)"이 다소간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국민총화"를 모토로 이런 모래알들을 사쿠라로 만들려고 하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끝끝내 사쿠라가 되지 않으려던 모래알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붙잡혀 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분들은, 자신을 사쿠라로 만들려고 한 사실조차 몰랐던 모래알들은 "입 닥치고 일하지 않는" 그 모난 모래알들이 아마 원망스럽고 미웠을 겁니다. 아마도 묵묵히 일했던 그 때의 모래알들은 그 모난 모래알들 때문에 목표에 더 빨리 도달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때의 일을 다시금 되돌아 보면, 사쿠라가 되지 않으려 했던 그 때의 모래알 때문에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에 도달한 것이 비록 늦었을수도 있으나, 그들 덕분에 지도자가 제시한 잘못된 목표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소 늦게 도달했을 수는 있으나, 잘못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게 된 것은 오로지 그 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래알은 뭉치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나름대로 좀 안다는 외국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기자처럼 한국인들은 서로 싸우기를 좋아하고 잘 단결하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외국인은 히딩크는 최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선수들은 인정이 많고 단합이 잘 되며, 한편으로 비슷한 것 같지만 각자 개성이 강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히딩크가 감독 초기에 실시한 한국 대표팀에 대한 평가에서도 정신력의 두 항목중 "팀에 대한 헌신"에는 높은 점수를 준 바 있습니다.
뉴옥타임즈 크로스토프 기자와 월드컵 4강을 이끈 히딩크 감독, 두 명의 외국인 중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입니까?
곰곰히 옛날 일을 되돌아 보면, 싸우기만 좋아하고 단합하지 못한다는 한국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너무나 어긋나는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2004년 탄핵 때 광화문 거리를 가득매운 십수만개의 질서정연한 촛불들...
2002년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온통 붉게 물들여 버린 붉은 악마들...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전국에서 모인 금 붙이들...
6월 항쟁, 4.19의거, 3.1운동때의 불의에 맞선 수 많은 사람들...
구한말, 임진왜란, 몽고의 침입때 전국 방방곳곳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들...
싸우기만 좋아하고 단결하지 못한다던 우리 한국인과 한민족이 보여준 이런 거대한 하나됨의 힘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말로 우리는 잘 뭉치지 못하는 "모래알" 입니까?
모래알은 뭉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래알에 시멘트를 부으면 거대한 마천루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잘 뭉쳐지는 진흙으로는 큰 건물을 만들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우리의 역사속에 살아있는 이 거대한 하나됨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평소에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다가도 정말 하나됨이 필요할 때에는 하나로 크게 뭉쳐저서 거대한 마천루가 되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자랑스런우리의 역사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7. 이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상으로
금년 초 이해찬 총리가 "군자 화이부동(君子 化而不同), 소인 동이불화(小人 同而不和)"라는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군자는 화합하나 자신과 같게 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자신과 같아지게 하려 함으로써 화합하지 못한다는 이 말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화두였다고 생각됩니다.
화(和)는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신이 약한 타인을 흡수해서 동화(同化)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 평화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화이부동"의 세계이며, 이는 서로 떨어진 개체로써 존재하나, 크게 뭉쳐 거대한 마천루를 만드는 "모래알"이 추구하는 세상일 것입니다.
동(同)은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한 자신이 약한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해서, 자신과 같게끔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육강식, 지배와 정복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동이불화"의 세계입니다. 이는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었던 "사쿠라"가 추구하는 세상일 것입니다.
19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수 많은 민족,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한 때 식민지였던 많은 나라들이 하나 둘씩 독립을 되찼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국주의는 전세계 인류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이불화(同而不和)"를 꿈꾸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중동의 이슬람인에게 "기독교식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자들,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기꺼이 아메리카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 다른 민족의 역사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자들, 그런 자들이 여전히 큰 힘을 갖고 있기에 이 세상은 여전히 불안하고 시끄러운 것이겠지요.
김구 선생님께서는 "나의 소원"에서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화이부동"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상, 각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하고 공존하는 세상, 이것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래알"들이 인류를 위해 크게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김구 선생님께서 삼팔선을 베고 죽으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첫댓글 마지막 화이부동 이란말 가슴에 팍 꼿히내염.
맞는 말인데..넘 길어서 눈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