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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의 메사추세스 에브뉴에 위치한 주미한국대사관 영사과 석조건물.
김동기 영사가 근무를 할적에 딱 한번 올라가 본적이 있는데 윗층 영사실로 올라가는 가드뤠일은 녹이 쓴지않는 가치가 있는 굵은 브론즈로 되어있다.
쌍닫이 정문밑쪽으로는 갭이 많아 겨울이면 찬 공기가 많이 흐르는데 여권이나 비자를 받으려고 들락거리는 수많은 소시민들이 볼 적에는 에너지낭비로 간주된다.
추고의 어원
내가 한국에 살적에 을지로6가에 위치했던 한남고속버스회사에서 정비사로 근무하고 있을때 유신 대통령이 어디를 행차할 때면 똑같은 두 대의 까만 캐딜랙 리무진에 틴팅(Tinting)을 하여 속이 보이지 않게 가리고 번호판도 숫자 없이 똑같은 무궁화 꽃한송이를 그려 넣어 만들어져 있었다.
길 양쪽에는 총을 든(저격을 우려 실은 빈총이라고 아는 경호원에게 들었음)서울 경찰들이 교통을 차단하고 시민들을 감시하는 동안 차량은 전속력으로 지금은 헐린 을지로 6가의 공설운동장의 축구대회 시구를 위하여 질주하는 것을 2번 본인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은 경선을 그친 민선이라 그런지 보통 크기의 6인승 캐딜락이나 벤츠 1대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는 세월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다.
옛날 중국의 임금들은 큰 바퀴를 달아서 말이나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연(輦)을 이용했고 조선시대에는 관직이 높은 사람이 거동할 때에는 여러 사람이 메고 가는 호화롭게 차린 여(轝)라는 것을 타고 다녔으며 전시효과로 깃발을 든 여러 사람들과 군졸들이 뒤를 따랐단다.
평민들은 이런 것을 살아서는 한번도 타보지 못 하지만 죽어서 묘지에 가는 길에 16명이 메고 뒤에는 기치를 든 사람들이 따르는 호화로운‘상여(喪輿)’ 라는 것을 꼭 한번 타 보게 된다.(같은 여라도 상여에는 아래쪽에 ‘車’자가 없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가난해서 캐딜락 리무진(Limousine)을 한 번도 못타 본 사람일지라도 결혼하는 날과 죽어서 묘지에 가는 길에는 영구차로 꼭 2번은 타 보게 되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 같고 망자의 뒤를 따르는 문상객의 차들이 고급에 몇 대가 되느냐에 따라 그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데 500불을 경찰서에 내면 신호등마다 경찰이 교통을 차단하여주니 난스탑(nonstop)으로 묘지로 갈수 있다.
내가 워싱턴디씨의 한 장의사에서 온 이 케딜렉 스테션 왜곤을 종업원을 시켜서 고쳐본 일이 있는데 관을 실어 나르던 차라고 느껴져서 돈도 좋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옛날에는 평민들은 신격(神格)인 임금님의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 했지만 지금은 국가원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으니 사람은 늦게 태어날수록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격차가 줄어들게 되고 삶의 질이 높아 고생도 덜하게 되나 보다.
할머니들은 밥을 지을 때는 꼭 잡곡을 조금은 섞는데 왜냐하면 수라(임금님이 드시는 밥을 높인 말)는 이밥이니 평민은 같이 먹을 수가 없다고 스스로 차별을 두니 충성심이 내포된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대사를 파견했을 때만 하더라도 미국 대통령에게 절을 할 때에는 옆으로 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대사는 늙고 못생긴 본처 대신 남들에게 돋보이려고 젊고 예쁜 소실(小室)을 데리고 갔었는데 남자의 기운은 돈에서 나오고, 얼굴화장은 예쁜 아내로 대치되던 시절 이었을 것이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미국에 먼저 발을 들여놓은 중국 사람이 통역을 맡았는데 아더[Arther]미국대통령이 넌지시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중국인 통역관은 ‘작은 마누라라...’ 즉 ‘소실(小室)’이 되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작은 방 이 되니 “스몰 룸(small room)”이라고 대답했었다고 나보다 한 살위인 한승수 전 주미 대사가 워싱턴에서 오래전에 근무 할 적에 모임에 오셔서, 들은 적이 있었으며 웃은 적이 있다.
1949년 주미 초대 한국 대사는 영어에 능통한 장면박사 이었는데 세를 낸 차가 시간이 넘으니 돌아가 버려서 비를 흠뻑 맞았다는데 여비를 아껴서 3천불짜리의 새가 로고인 뷰익(Buick)을 샀단다.
뷰익은 GM에 소속이 되는데 1903년 창시자 의 이름 데이빋 뷰익에서 왔으며 한국의 1969년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8기통 센추리세단[의자 가마, Century sedan]을 소유한 것을 정능3동에서 본 적이 있다.
탈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보여 주었지만 추고라는 말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이 글들이 일기책에서 발취 한 것이냐고 물어 왔는데 내가 기억 하고 있는 것들이다.
학교 다닐 때의 한문시간에 배병창 국어 생님에게서 들은 오언절구(五言絶句)한시 한편을 생각나게 한다.
고사에 의하면 옛날 당나라 때 가도(賈島)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나귀를 타고 장안(長安)으로 과거를 보러가다가 시상이 떠올랐는데
‘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이라고 새는 연못 옆의 나무 위에서 자고 중은 달 아래서 문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두드릴 고(敲)자를 사용해서
‘문을 두드린다.’
도 되고
‘문을 민다’
라고 해도 되니 밀 추(推)자를 사용 하여
‘승추:僧推.’
라 고도 할 수도 있어 곰곰이 생각하며 가다가 시장 한유(韓愈)의 행차에 부딪쳐 말에서 끌어 내리게 되고 끌려가게 됐단다.
연유를 들은 한유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그의 생각에도 두 가지다 맞는 말이니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으며
‘고(敲)가 좋겠군.’
하며 가도와 문학적인친구가 되었단다.
대문을 민다고 하면 무뢰한이 되니 대문을 두드린다는 말이 더 무게 있어 보였을 것이다.
鳥(새 조)가 있고, 推(새 추)가 있는데 새는 뒤로 날거나 뒷 걸음 질을 못하니 앞으로 옮아간다는 뜻으로 추진(推進), 추천(推薦), 추측(推測), 추정(推定), 추산(推算)등의 단어가 나온 건 아닐까하는 나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推敲”를 ‘퇴고’ 또는 ‘추고’ 라고도 읽을 수 있단다.
‘推’를 옥편에 찾아보니 ‘옮을 추’ 라고 되어 있는데 ‘퇴’를 찾아보니 이 글자가 없는데도 어떤 문객은 “퇴고”라는 수필을 발표 했는데 그분들이 ‘퇴고’라 하는 이유는 어디서 온 것일까?
옥편에 보니 추(推)자와 퇴(堆:언덕 퇴)자가 비슷하게 되어있으니 잘못된 글씨를 합법화 하여 부르게 되는 것 같다.
만약 퇴고라고 고집한다면 한다면 퇴보(退步), 퇴위(退位,) 퇴출(退出)등을 볼 때 ‘추고’ 를 ‘퇴고’ 라고 굳이 말 한다면 퇴고(退稿)’라는 느낌까지 생긴다.
글을 쓸 때 필요 한 것은 전체의 검토(추고 또는 퇴고), 부분의 검토, 각 문절의 검토, 용어의 검토, 표기법의 검토, 최종적으로 문장의 검토가 필요하다.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글을 첨삭하거나 고치는 것을 ‘퇴고’또는 ‘추고’ 라 하고 출판사가 미리 고치는 것을 ‘교정(較正)’이라 하고 활판 후 인쇄 직전에 다시 한 번 더 행하는 것을 ‘교정(?釘)’이라하고하는데 ‘문교부 편찬위원회감수[監修]’가있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추고’라는 말은 과제로 남아서 아무도 이 의문점을 규명할 자가 없는데 글을 쓴 후 교정하는 것을‘퇴고’또는 ‘추고(推敲)’라고 지금까지도 일컬어 오고 있고 계속이 되고있다.
한문시험에서 이순신 장군이 탄 배에 내 거는 깃발 '장수 수(帥)'자를 내가 '스승 사(師)'자 와 구별을 못하여 한 문제가 틀린 적이 있었다.
언덕 퇴(堆)자는 흙토(土)변이 되지만 밀 추(推)자의 변에는 '손 수(手)'자(변에 사용을 할 때)의 약자로 '재주 재(才)'자가 오는데 글씨에서는 비슷하다고 해서 무조건 밀어붙일 수 는 없는것이다.
내가 몇 십 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도 학교에서 배운 이 고사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 때문인데 나는 ‘추고’에 더 무게를 두는데 옥편에도 없고 한문으로는 기록 할 수 없는 글자 ‘퇴고’보다 추고가 더 의미 깊게 새겨진다.
'퇴고'가 중국의 고사성어(古事成語)에서 왔다면 응당히 한문으로 표기를 할 수 있어야 원칙이 아닐까?
세상이 오염되어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하물며 ‘추고, 퇴고’문자의 영역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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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여, 길이없는 산으로도 길이없어도 갈수가 있는 장점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케딜렉[엔진사이즈 8.14리터]은
워싱턴 그린벨트에 위치한 케피탈케딜렉에서 김한조씨가 매입하여 무관세로 보냈다고 들었다.
1974년 내가 한남고속버스회사 정비사로서 추풍령상행선 휴게소에 파견생활을 했었는데 이곳에는 화장실이 비치된 대통령전속식당이 있어서 소파는 천을 덮어서 보관,그곳에는 Delmonte pineapple 캔도 있었다.
식사후 서울로 떠날적에는 휴게소장 예비역 이상복 소장에게
"이소장 수고하시오!" 하면서 악수를 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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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는 뒷걸음 못친다는것 처음 알았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