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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하나님의 방법으로/대상 13:1-14
출 처| 노경모목사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아나존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헤리슨 포드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가 아닙니까? 너무나 재미있고 스릴이 있는 영화이지요. 이 영화는 법궤를 찾는 과정을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스릴있게 만든 영화입니다.
법궤 속에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들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 돌판이겠지요.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입니다.
이 법궤가 엘리 제사장의 말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긴 이후에 기럇여아림이라는 곳에 70년 이상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블레셋을 완전히 쫓아내고 정지적으로 군사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인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얼마나 다윗과 백성들이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법궤를 옮겨오는 것은 만장일치로 찬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의 사무엘하 6장을 보면, 이 벱궤를 옯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에서 뽑고 뽑은 3만명의 백성이 동원되었습니다. 주악이 울립니다. 즉 고적대가 퍼레이드를 벌입니다. 삼하 6:5에는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모든 백성들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볼까요.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이렇게 좋고 감격스러운 날, 수레를 몰던 '웃사'라는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웃사를 죽이셨습니다. 경사스러운 날, 그것도 70년 이상 방치되었던 그 법궤를 이제 잘 모시기 위해서 다윗 성으로 가져오는 이 선하고 의미가 있는 이 날에 왜 웃사가 죽어야 했을까요?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면 법궤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웃사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잡은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요? 우리가 이러한 부분에 궁금증을 갖고 오늘의 말씀을 살펴봄으로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행여나 법궤를 갖고 나가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지 않을까 하여 임시 방편으로 법궤를 가져갔다가 빼앗깁니다. 그 법궤로 인해 블레셋에 재앙이 임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 변방에 갖다 놓습니다. 그래서 그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죽고, 사무엘 선지자의 시대가 되었고, 사울 왕의 시대가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 법궤를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올 생각을 못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다윗이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드디어 다윗의 때가 되어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오는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다윗이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 일을 말입니다. 다윗과 백성들만 기뻐한 것이 아니겠지요, 하나님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다윗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수레를 준비합니다. 좋은 재료로 잘 만든 최고의 수레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최고급, 최첨단 기능을 갖춘 벤즈와 캐딜락 리무진과 같은 차이겠지요. 이러한 다윗의 정성은 높이 평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고 선한 동기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내 방법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라고 합니다.
특히 법궤는 반드시 레위 족속인 고핫 자손이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법궤를 구별된 자가 메고 가야 함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수아 6: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역대상 15: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법궤를 구별된 자, 즉 레위 사람들이나 제사장들이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해 드려야 하지요. 그런데 왜 다윗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도저히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던 다윗이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윗의 실수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 때 그는 블레셋에서 거주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율법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의 풍습과 규례에 젖어 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상을 옮길때 수레를 사용해서 옮겼던 것입니다. 블레렛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로 인해서 그들의 우상을 모신 다곤 신당의 신상들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재앙이 임하자 그들은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때 수레에 실어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6:8을 봅시다.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다윗은 법궤를 옮기는 일 때문에 흥분이 되어있었지 하나님의 법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 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검토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잘못된 열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주님도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2-30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또한 '웃사'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물(聖物)을 만지는 자는 죽을까 하노라'는 민수기 4:15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법궤를 손으로 만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겁이 나서 법궤를 다윗 성으로 더 이상 가져 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석 달 동안 두었습니다. 이 법궤로 인하여 오벧오돔의 집은 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옯겨 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옯겨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하 6:12-15을 봅시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법궤를 가져 올 때, 다시 기쁨이 회복됩니다. 백성들이 기뻐합니다. 다윗도 기뻐합니다. 얼마나 기뻐하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 만 기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얼마나 기뻐하시는 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요, 내가 행하는 일의 목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물론 성도들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의 깊이 있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 목적을 위한다는 명분아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목적이 좋은 것은 정말 좋습니다. 의도가 좋아야 하는 것도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과정도 좋아야 합니다.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방법이 하나님이 방법이어야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2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애정과 묵상과 연구와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게을리 했다가는 다윗처럼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파인애플 스토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령 뉴 기니아에서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를 담았습니다.
오지에서 식구들과 함께 원주민을 선교하는 한 선교사는 이 마을에 파인애플을 들여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깊은 정글 속에서는 싱싱한 과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한 원주민에게 품삯을 주고 파인애플 묘목을 심게 했습니다. 그후 3년이 지나고 마침내 파인애플 열매는 맛있게 익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선교사 식구는 파인애플 밭으로 향했지만, 파인애플 밭에는 파인애플이 없었습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파인애플을 전부 따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화가 난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전부 따갔다는 생각에 자신이 무료로 운영했던 병원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병을 치료할 수 없어 선교사에게 병원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했고, 더 이상 두고볼 수만 없었던 선교사는 병원문을 열었습니다. 후에 선교사는 결국 파인애플을 도둑질한 원주민이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바로 자신의 파인애플을 심었던 원주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파인애플을 심었으므로, 그 파인애플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 마을의 원칙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원주민에게 파앤애플을 심어주는 대신 품삯을 주었으므로 그 밭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설명했지만, 원주민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어 선교사는 그 밭을 전부 그 원주민에게 주고, 새로운 밭에 파인애플을 심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선교사는 다시 원주민들을 찾아가 원하는 것은 모두 줄테니 자신의 파인애플 묘목을 밭에 심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파인애플을 심는다면 그 파인애플은 자신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선교사는 자신이 갖고 있던 멋진 칼을 줄테니 파인애플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원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에 응했고, 다시 3년이 지나 파인애플 열매는 맛있게 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인애플은 여전히 없어졌습니다. 원주민들이 모두 따간 것입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선교사는 자신이 그 마을에서 운영했던 상점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선교사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해서 그들이 원래 살았던 깊은 정글로 모두 들어가 버렸습니다.
원주민들이 모두 떠난 텅빈 마을에 홀로 남게된 선교사는 어쩔 수 없어 다시 상점의 문을 열테니 마을로 돌아와 달라고 원주민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원주민들은 여전히 파인애플을 가져갔습니다. 선교사는 여러 방법으로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렀고, 마침내 선교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의 방법과 생각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손해볼 것은 없어. 아무래도 나는 먹지 못할 파인애플이니 하나님께 그 파인애플 밭을 드리자”
하나님께 파인애플 밭을 드리고 결심한 선교사는 원주민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가도 더이상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젠 자신의 파인애플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인애플이기 때문이었습다.
그후 원주민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로부터 그 밭이 하나님의 것임을 들은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파인애풀을 훔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이상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을 훔치지 않았고, 맛있게 익은 파인애플을 수확한 선교사는 파인애플을 원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할 때 그는 파인애플을 먹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께 헌신하는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은 사업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밥으로 하면 손해나고 일이 잘 안될 것 같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의 길입니다. 자녀를 키우고 공부시킬 때에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할 때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