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정음시조문학상
연적
- 조경선
들어오는 길 있으면
나오는 길 있습니다
작지만 그 안에 큰 뜻을 채워 넣고
내 곁을 지키고 앉아 열리고 닫힙니다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천년을 걸어온 말
물방울로 읽어내도
그 속을 알 수 없어 몇 번을 기울이면서
제 속을 비워냅니다 하루 받쳐 공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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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선시인 약력
◆ 1961년 경기 고양 출생
◆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 천강문학상, 김만중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 시집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 『어때요 이런 고요』
● 수상소감
몸 낮춰 흐르는 연적처럼 -조경선
내 이름을 불러주면 겁부터 나 나무 뒤로 숨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집 가까이에 있는 금광 호수의 물결에 두려움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아직 덜 가신 안개가 얼굴에 닿아 호수 건너편이 희미하게 보여 다행입니다. 혼자서 걷는 길은 발맞춤이 필요 없어 사물과 그 소리와 호흡하면서 바람의 속도를 따라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다짐들은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아 무채색의 시간을 퍼내며 그냥 또 걷습니다. 물과 뭍을 오가며 안개를 마시고 물 위에 발을 담근 버드나무들이 가볍게 몸을 맡기는 것 같아, 그동안 길 위에 뿌리를 내리느라 헤진 내 발도 물결에 맡겨 봅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옮겨와 화선지 한 장 펴놓고 먹을 갑니다. 갈면 갈수록 짙어지는 먹, 한 번 더 연적을 들어 물을 붓고 내 몸을 기울입니다. 손끝에서 숨이 멎으면 좋은 문장은 살아날까, 뾰족한 붓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순간에 실패작으로 끝나버리는 날이 많아 바깥의 세계는 너무 캄캄했습니다. 하얗게 놓인 화선지 앞에 앉아 다시 또 나를 희석해 봅니다.
저 큰 호수도 처음엔 한 방울의 물이었듯이 한번 품은 생각이 내면으로 끝없이 흘러들 때 말없이 그저 담아두고 몸 낮춰 흐르는 연적처럼 하루를 열어놓겠습니다. 꽃들이 춤을 추며 말을 걸어와 눈과 귀에도 꽃이 반사되는 요즘 반가운 소식까지 전해 들었습니다. 한쪽 벽면에 연적의 공손함으로 낮게 걸린 족자의 “舞”가 오늘따라 더 활기찹니다. 그 활기로 계절이 다시 태어나 나무의 뿌리는 하늘 바람 구름 낮과 밤을 곱게 갈아 더 진하게 길을 뻗습니다. 나의 모습 그대로 써 내려가다 보면 걸음의 흘림과 멈춤 사이에 여백이 생겨 흐트러진 마음을 또 가지런히 여미게 됩니다. 아직도 먼 시조에 가 닿기 위해 사유의 잔뿌리를 깊은 곳까지 뻗어보지만 늘 가장자리만 맴돕니다.
쳐다만 봐도 좋은 자리에 붓 한 자루 연적 하나 놓겠습니다. 내 앞에 놓인 흩어진 일상을 가지런히 하고 먹물처럼 번지겠습니다. 시조가 내게 와서 좋은 날, 물음이 많아질수록 마당에는 눈물과 웃음의 춤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오른쪽만 고집할 때 왼쪽이 무너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독자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한 호흡 한 호흡 공들여 붓끝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외딴집 나무에 산까치가 둥지를 짓고 있습니다. 저도 조그마한 집하나 만들겠습니다.
끝으로 정음문학상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같이 공부하는 시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