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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선교장(宣敎莊)-3
본관으로 향한 조 집사의 걸음은 무거웠다. 갑작스럽게 자
신을 동행시킨 자은 선생의 뜻이 무겁게 닥쳐오기 시작했다.
조 집사는 자신이 지닌 무공이 강호에서 어느 정도 수준
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악삼 일행이 선교장에 무단침입
을 했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 집
사가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만이 아니었다. 선교장에
는 자신보다 강한 고수가 있었다. 그는 바로 선교장의 주인
인 자은 선생이었다.
자은 선생은 학식이 높은 유학자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사
실 강호의 10대 고수와 비견해도 별 차이가 없는 무력을 가
지고 있었고 그 사실을 조 집사만큼은 알고 있었다.
위유무기진해(衛儒武技眞解).
유문(儒門)의 절학이 집대성되어 있는 비급으로 세상에는 알
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 뛰어남은 천하의 어떤 무공에도 뒤지
지 않았다. 위유무기진해의 절학은 구대문파에 내려오는 비
전 무공보다 뛰어난 절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직 유학
자들과 유문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위유무기진해를 자은
선생은 완벽하게 익힌 상태였다. 그리고 조 집사 자신도 스
스로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그런데 주
정을 배출해버리는 악삼의 내공을 목격하자 조 집사는 자신
이 너무 과신했음을 절감했다. 악삼은 태연하게 걸어가는
조 집사가 마음 속으로는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했다. 앞서가는 조 집사의 뒤를 따라 가면서 선교장의 건물
배치를 보며 만일에 발생할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해 머리 속
으로 탈주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자에서 담소를
즐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황보영이 갈씨 자매를 중간에
만나게 되었다.
"어디 가십니까? 아가씨."
"아버님을 뵈러 가요. 조 집사는 어디에 가는 거죠?"
"척 대인께서 악 소협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요..."
"아가씨는 두 아가씨와 함께 장주님를 뵈려 하십니까?"
"두 동생을 아버님께 소개시키려고 해요. 그리고 운영 동생이
부탁할 것도 있다고 하니 직접 뵙고 말씀드리러 가는 거지
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 집사."
"말씀하십시오."
"아버님은 아직도 본전에서 척 대인과 같이 계시나요?"
"아닙니다. 두 분께서 바둑을 한 식경쯤에 끝내셨습니다. 장
주님은 본전에 계시지만 척 대인은 악 소협과의 만남 때문에
빈청에 계십니다."
"오호...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악삼은 황보영과 조 집사의 대화중에 나온 한 가지 말이 신
경에 걸렸다. 그것은 갈운영이 선교장의 주인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는 말이었다. 악삼은 갈운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갈 소저."
"네, 말씀하세요."
"방금 전에 보영 아가씨가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가 자은 선생님은 뵙고 부탁을 드린다는 것 말인가요?"
"그렇소."
"보영 언니는 내일 북경으로 출발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
행을 문의하러 가는 것이에요."
"북경!"
"네, 경항운하(京杭運河)를 타고 가니까 우리가 동행해도 무
리가 없지요."
악삼 일행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동행을 요청하러 간다는 이
야기를 들은 조 집사는 깜짝 놀랬다. 겉으로는 무표정한 안
색을 유지해 누구에게도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조 집사의 동요는 상당히 컸다.
'일이 점점 커져 가는군... 아무래도 북경에 가는 길이 쉽지
않겠어...'
조 집사는 자은 선생이 북경에 가는데 수행하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운문상단과 같이
간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알고 나서 불안감이 현실로 엄습했
던 것이다. 석진과 같은 인물과 같이 여행한다는 것이 얼
마나 고역인지 조 집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 측정불
가의 위험을 소지한 악삼 일행까지 동행을 하려고 한다는 사
실이 절로 한탄을 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랜 집사 교육을
통해 마음 속의 이야기를 겉으로 내지 않는 조 집사는 태연
한 얼굴로 황보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악삼과 함께 빈청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조 집사는 빈청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
들어가 탁자에 앉아서 악삼을 기다리고 있는 척 대인에게 인
사를 했다.
"척 대인, 악 소협을 모셔 왔습니다."
"고맙소, 조 집사."
"아닙니다... 악 소협, 이분이 악 소협과 만나고 싶어하신 척
대인이십니다."
조 집사는 악삼에게 척 대인을 소개시켰다. 악삼은 척 대인
에게 포권으로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악삼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운문상회의 척신명이요."
"그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조 집사는 빈청에서 나왔다. 빈청
을 나온 조 집사는 어둠이 깔려가는 동녘과 황혼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서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
나 조 집사는 느긋하게 한숨을 쉬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
치지 않았다. 선교장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자신이 빠져
나간 뒤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조 집사
에게는 아직도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밤을 꼬박 세
워야 일이 겨우 끝날 정도였다.
"북경행에 나를 갑자기 동행시킨 장주님을 원망해야겠군. 후
우~, 가자 할 일은 아직도 태산이다."
조 집사는 남은 일을 생각하자 아찔해지는지 한숨을 쉬며 독
백하고는 산더미처럼 쌓인 일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런
데 이처럼 산더미같이 쌓인 일터로 고군분투하기 위해 가는
조 집사와 달리 악삼과 척신명은 탁자에 놓여진 차를 음미하
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차 맛이 어떠하신가?"
"맛은 모르겠습니다만 다향(茶香)은 정말 훌륭합니다."
"선교장의 차는 매우 훌륭하다네. 물론 선교장이 강남 전체에
서 최대의 차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네. 차가 훌륭한
것은 선교장 사람들의 품성이 녹아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네."
"선교장의 차를 자신의 것처럼 자랑하시는 것을 보니 자은
선생님과 매우 절친한 것 같습니다. 척 대인."
"하하하, 일개 장사치가 천하의 대유(大儒)인 자은 선생님과
어찌 친분을 논할 수가 있는가. 단지 선교장의 차밭을 내가
독점거래를 하다보니 이 정도나마 말할 수가 있게 된 것이
네."
"그렇습니까."
"왜 그러시는가? 내 말에 믿음이 부족한가?"
"아닙니다."
"하하하."
척신명은 통쾌하게 대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했지만 악삼의 표
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갔다. 뜻밖에도 일개 상인이라고
말하는 척신명이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악삼은 척신명이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예측을 하
고 있었다. 정자에서 본 척금방이 지닌 무력만 해도 갈운영
에 필적할 정도였으니 그 부친인 척신명의 무공은 물어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척신명이 지닌 수
준이 문제였다. 악삼이 보아왔던 최고 고수와 비슷한 경지
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고수다. 이런 인물이 상인이라니 어이가 없군.
사부님이나 오 노사와 버금가는 경지에 올라있어. 하긴 이 정
도 고수이니 석진 선배같은 인물이 그 밑에서 일을 하는 것
이겠지.'
악삼의 사부인 묵창 악풍과 벽력수 오기는 태을궁에 있었던
연남삼수와 강동오괴 전체를 통털어 최고의 고수들로 다른
인물들보다 최소한 반 단계 위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한마
디로 악풍과 오기는 강호 전체를 통 털어도 20위권 안에 들
어가는 고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40대 중반의 척신명이
그런 수준에 올라 있으니 놀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
인 것이다. 하지만 악삼이 안색이 시간이 갈수록 굳어지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교장에서 만나는 인
물마다 하나같이 강한 무력을 가진 것도 있지만 그 속내를
밝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을 선교장에 몰아 넣게 만
든 매복자들의 정체와 그들을 움직인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은 척신명이라는 인물과의 조우
(遭遇)였다. 악삼은 척신명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가 없
어 더욱 불안해져 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악 소협."
"척 대인이 강호를 떠돌고 있는 이 애송이를 만나려 한 이유
를 생각했습니다."
"애송이! 악 소협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군."
"정확한 표현입니다."
"어허... 악 소협이 보기에 내가 강호에서 무위를 날리면 어느
정도까지 통하리라 보는가?"
"무슨 말씀인지?"
"내 비록 상인으로 알려져 있어 누구도 내가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네. 알고 있는 사람이라 봐야 내 딸과 석진,
그리고 자은 선생님 정도이지. 하지만 자네의 눈이라면 내가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네. 어떤가?"
"음... 척금방 아가씨나 척 대인이 높은 무공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저는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지 한 달도 안됩니다. 견문이 그
만큼 짧다는 이야기입니다."
"좋네, 그렇게 나오면 단도직입으로 말하지. 나는 내 무력이
강호에서 30위권 안에는 충분히 들어간다고 생각하네."
악삼은 척신명의 호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척신명의 호언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부족한 감마저 돌 정도였
다. 척신명은 능히 20위권 안에 들어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
었다. 악삼이 자신의 의견에 수긍하자 척신명은 말을 이었
다.
"그런데 내 눈이 자네의 무력이 나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하
고 있네. 그런 자네가 강호의 애송이라면 도대체 고수라고 부
르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
"과찬입니다."
"과찬! 아니지. 절대로 아니네. 자네 나이에 그런 무위를 이룬
사람은 강호 역사를 통 털어 없었네. 물론 쾌도 임백령이 지
상 최강의 쾌도를 자랑하면 강호십대고수의 명예를 얻었지만
그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지. 그런데 자네는 20대 초
반에 이런 무위를 얻었어. 아마 최초로 20대의 나이에 십대고
수가 탄생한다면 그 주인공은 자네라고 확신하네."
"흐음..."
"그런데 자네는 내가 왜 만남을 주선했는지 의아해 할걸세."
"그렇습니다."
"그건 자네의 이름을 어제 들었기 때문이네."
"무슨 말씀입니까?"
"어제 밤에 소주 전체에 있는 모든 정보조직들은 상부에서
온 긴급명령서를 받았네. 그 명령서에는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었지."
"무엇입니까?"
"악삼이라는 청년이 오행도라는 기보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악삼을 발견하는 즉시 추적하라. 이것이네."
"재미있군요. 그런데 그 명령서가 내려진 방파는 어는 곳입니
까?"
"공령문과 개방, 환희궁, 구류방등이네. 하지만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명령서가 위조됐다는 것이지."
"재미있군요..."
"자네는 별로 놀라지 않는군. 자네를 모략한 인물을 짐작하는
가?"
악삼이 별로 놀라하지 않자 척신명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악삼은 척신명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
다. 그러자 척신명은 악삼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가바
기 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우핫하하..."
"무엇이 그리 재미나십니까?"
"아니네..."
"그런데 척 대인은 왜 제게 오행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
십니까?"
"그건 당연하지 않는가. 자네에게 물건이 없는데 무슨 거래를
하겠는가?"
"제게 오행도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나는 20년 동안 오행도를 찾아다니고 있네. 이러면 대답이
되겠는가?"
"오행도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궁금한가?"
"네, 최소한 오행도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저를 쫓아오는 사람
들에게 설명이라도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행도의 비밀만 알아내는데 10년이 걸렸네. 한 마디로
많은 투자를 했지."
"역시 상인이셨군요."
"그러하네. 내 비록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난 강호인은 아
니네. 난 뼈 속까지 상인이지."
악삼은 척신명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모습이 상인 특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15년 동안 산 속에서 무공만
수련했으니 삶의 세세한 풍경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척신명의 미소를 본 악삼은 한 가지를 알아챘다. 척신
명이 원하는 것은 거래였던 것이다. 악삼은 척신명의 눈동
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의 눈동자는 거짓을 알아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라는 것을 악삼은 알고 있었다.
"제가 가진 것은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 빈손으로 무엇을 잡을지는 아무도 모르네."
"제게 무엇을 바랍니까?"
"나는 자네에게 투자하고 싶네."
"오행도의 비밀로 너무 큰 것을 원하시는군요."
"안되겠는가?"
"척 대인이 바라는 것은 제 미래입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과연... 내 생각대로 자네가 대답하는군. 좋네, 그럼 나중에
내 부탁을 한 번만 들어주는 것으로 하는 건 어떤가?"
"부탁이라... 너무 광범위합니다."
"부탁은 자네에게 피해가 없고,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하겠네. 또한 그 부탁이 자네 생각에 잘못된 것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네. 물론 그 순간에 자네와 나의 계약은 종료되는
것이네."
악삼은 척신명이 내건 조건에 어이가 없었다. 한 마디로 지
켜도 그만이고 안 지켜도 할말 없는 기묘한 계약을 가지고
나선 것이었다. 악삼은 의심 섞인 눈빛으로 척신명을 바라
보았다.
"어허! 젊은이가 의심도 많군. 일단 계약한 걸로 알고 말하겠
네. 오행도는 태을도(太乙刀), 경금도(庚金刀), 병화도(丙火刀),
무토도(戊土刀), 계수도(癸水刀)의 다섯 자루의 칼이네. 그 중
에 태을도의 소지자는 연남삼수의 맏형인 벽력수 오기가 가
지고 있네. 그리고 남은 네 자루의 주인은 누구인지 아직 모
르고 있네."
"을목도!"
악삼은 이제 서야 진삼이 죽기 전에 말한 오행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제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척신명이 정말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악삼
은 척신명에 대해 경계심을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척신
명은 악삼의 뇌리에 위험 인물로 분류되었다. 생각을 정리
한 악삼은 오행도에 대한 나머지 정보를 듣기 위해 척신명을
처다 보았다. 그런데 척신명은 남은 정보를 말할 생각이
없는지 악삼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오행도에 대해 남은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지요."
"남은 것은 단 하나이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행도를 만든 인물이네."
"누구입니까?"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부탁을 할 때 알려주겠네."
악삼의 안색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역시 상인이시군요."
"당연하지 않는가. 허허허."
"알겠습니다..."
"아~ 그래도 이 사실을 알기 위해 난 10년이나 투자를 했네.
그러니 약간의 회수를 해야겠네."
"무슨 말씀입니까?"
"간단하네. 나는 내일 자은 선생님과 함께 북경으로 떠나네."
"......"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하네."
"무슨 부탁입니까?"
"북경까지 보표를 부탁하겠네. 물론 보수는 따로 준비하겠
네."
척신명의 갑작스런 제안은 악삼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악삼은 척신명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
떤 꿍꿍이가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척신명은 악삼이
가진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악삼
이 척신명에 대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척신명은 물귀신이다."
한 마디로 벼락을 맞아도 절대로 혼자 안 맞고 옆에 있는 사
람까지 덩달아 맞게 만드는 인물로 악삼은 평가했다. 악삼
의 지론인 위험은 피해야 한다라는 것에 비추어 보면 나올
말은 단 하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악 소협. 그럼 내일 아침 얼굴을 보세."
그러나 악삼은 위험이 있다고 감지한 길로 가겠다고 대답했
다. 척신명이 나는 장사꾼이오라는 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일 보자고 말하자 악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삼은 빈
청에서 나오자 자신을 선교장으로 유인한 매복자의 배후와
척신명이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척신명과 대화를 나누면서 얻은 오행도의 정보에서
한가지 사실을 찾아냈다. 그것은 자신과 갈씨 자매가 소
주 시내를 활보하며 도주할 때 추적용 매를 잡아 추적을 끊
게 만들고 매복자를 이용해 선교장으로 자신을 유인한 인물
은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오행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해방이나 악중악을 의심했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 더 있었다. 바로 척신명...'
척신명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악삼은 알고 싶었다. 척신명이
언젠가는 큰 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악삼의 뇌리
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악삼은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
았다. 북경에 가는 동안에 천천히 분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악삼은 젊었고 남아도는 것은 시간이었다.
황보영은 갈씨 자매와 함께 부친을 만나 동행을 허락을 받기
위해 본관에 들어갔다. 자은 선생은 황보영이 들어 온 것도
모르는 채 바둑판에 바둑알을 깔았다가 다시 담는 일을 반복
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아버지, 보영이에요."
"응... 어서 오너라."
"무얼 하세요?"
"복기를 하고 있단다."
"척 대인에게 또 지셨군요."
"허험!"
"호호호."
황보영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평상시 근
엄한 유학자의 모습을 잃지 않는 아버지가 바둑에서 지면 심
술난 아이처럼 꽁해져서 진 이유를 찾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검미봉안(劍眉鳳顔)의 외모
와 한 자에 달하하는 미려한 턱수염으로 특출한 외모를 자랑
하는 자은 선생이 바둑알을 쥐었다 놓았다하며 끙끙거리는
모습은 남들이 보아도 재미있을 정도였다. 자은 선생이 척
대인과 교우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둑이었다.
물론 척신명의 운문상회가 선교장의 차밭을 전매하고 있으
니 만남이 없지는 않지만 대유학자인 자은 선생은 상인을 상
대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왔었다. 척신명이 고고한 대유인
자은 선생과 깊은 교우를 나누게 된 것은 뛰어난 바둑 실력
덕분이었다. 사실 자은 선생은 국수(國手)라 불릴 만큼 뛰
어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어 별 상대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선교장을 찾아온 척신명과 자리를 함께 있
게 되자 불편함을 이기지 못한 자은 선생이 바둑을 권해 일
대 격전이 벌어졌었다. 그 날 자은 선생은 바둑을 둔지
10년 만에 패배를 당했다. 그것도 반집패를 당해 버린 것이
다. 사람은 상대한 인물이 너무나 격차가 크면 오히려 흥
미를 잃어버리는 법이고 비슷한 상대에게 아쉽게 진다면 끝
없는 승부욕에 불타는 법이었다. 그 후부터 척신명과 자은
선생은 아슬아슬한 승리와 패배를 서로 맛보면서 깊은 교우
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자은 선생은 척신명과의 한
판 승부에서 한집차로 패배해 패인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왔느냐?"
"아버지께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서 왔어요."
황보영의 말이 끝나자 갈운영과 갈운지는 자은 선생에게 허
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자은 선생님께 인사 올립니다. 소녀는 갈운영이라고 부릅니
다."
"자은 선생님께 인사드립니다. 소녀의 이름은 갈운지입니다.
"반갑소. 자 이리와 앉으시오."
갈씨 자매가 자리에 앉자 자은 선생은 황보영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황보영은 아버지의 시선을 받고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갈씨 자매와 악삼을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자
은 선생은 황보영이 하는 이야기를 묵묵부답으로 듣기만 했
다. 황보영이 말을 끝내자 아무런 변화가 없던 자은 선생의
안색이 침울해졌다.
"흐음... 여린 처자들이 강호의 흉적들에게 쫓기다니 세상이
도탄에 빠졌구나... 그런데 보영아, 네가 갈씨 자매와 같이 나
에게 온 이유는 무엇이냐?"
"내일 북경으로 가는 길에 두 자매를 동승을 허락 받으러 왔
습니다."
"곤궁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
常情)이니라. 그런데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닌데 무슨 허락이
필요하겠느냐. 두 처자가 편안하게 여행하도록 네가 신경을
쓰거라."
"고맙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자은 선생님."
자은 선생이 동행을 허락하자 황보영과 갈운영은 감사의 인
사를 드렸다. 황보영과 갈씨 자매는 자은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고 본관에서 나와 척금방이 기다리고 있는 정자로 향했
다. 부친의 허락을 받은 황보영은 마음이 가벼워 졌는지 걸
음걸이가 매우 경쾌했다. 그런데 수다를 떨면서 걸어가던
황보영과 갈씨 자매는 척신명과 만남을 끝내고 정자로 향하
던 악삼을 만나게 되었다. 밝은 안색의 세 여인과 달리 악
삼의 안색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기에 세 여인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악삼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을 했
는지 자세한 설명을 피해버렸다. 악삼이 질문을 회피하자
갈운영은 자은 선생에게 북경행을 동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악삼은 씁쓸한 표정으로 갈운영
의 이야기를 듣고는 척신명과 북경까지 같이 간다는 약속을
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갈운영은 자은 선생 일행과 동행이 되어 소주를 빠져나간 뒤
에 장강을 타고 운남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갑자기 악
삼이 북경까지 가게 됐다고 말하자 당황했다. 그러나 옆에
황보영이 있어서 아무런 말없이 악삼의 말에 수긍하는 척 했
다. 갈운영은 나중에 악삼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마음
먹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자 황보영은 악삼에게 거처
를 안내했다. 악삼이 아무런 말없이 자신에게 배정된 방
에 들어가자 황보영은 갈씨 자매와 함께 자신의 거처로 발걸
음을 옮겼다. 그녀는 척금방과 갈씨 자매와 함께 재미난 추
억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골몰해 갈운영과 악삼의 표정이
편안치 못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해가 떠오르자 조 집사는 충혈한 눈을 비비며 바삐 움직
였다. 밤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업무가 정리되어 조 집
사의 마음은 편안해 졌다. 조 집사는 자은 선생의 북경행
때문에 무려 3일간 잠을 자지 못했다. 3일 동안 불철주야로
일한 덕에 모든 일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북경행 전야에는 편
안한 수면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자신
도 북경행에 동행하라는 자은 선생의 명령덕분에 조 집사는
4일 째 잠을 못자고 일을 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일 동안 잠을 안자고 일한 덕에 업무가 정리가 되었다는 사
실이었다. 그러나 조 집사에게는 새로운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은 선생을 수행해 떠나는 북경행은 그렇게 만만
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 집사는 쏟아져 내리는
잠을 초인적인 직업정신으로 이겨내고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떤 덕분에 모든 준비를 끝낼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
제가 발생해 조 집사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그것은 북
경행을 떠나는 인원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바로 석진이었다.
조 집사는 석진이 있던 별관으로 내달렸다. 그 푸짐한 몸집
이 비호처럼 움직인 것을 보면 세상에는 제법 불가사의한 일
이 많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별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조 집사의 눈에 보인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술병들과 그
사이에 기묘한 형태로 누워있는 석진의 모습이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어떻게 술병사이에 몸을 구부려 잠을
잘 수가 있는가. 거기에 술병들은 단 한 개도 넘어지거나 깨
진 것이 없다니..."
팔 다리, 허리가 술병사이로 기묘하게 꺽어 누워 있는 석진을
깨우기 위해 조 집사는 다가갔다.
"흑~, 지독한 술 냄새야!"
조 집사는 석진을 흔들어 됐다. 그러나 석진은 깨어날 생각
은 한 푼도 없는지 코를 골며 더욱 잠에 빠져 들어갔다. 조
집사는 고개를 흔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
온 조 집사의 손에는 거대한 바가지에 물이 가득 차서 찰랑
거렸다. 조 집사는 석진의 얼굴에서 바가지를 뒤집어 버렸
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어푸푸! 이게 뭐야?"
석진은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 집사를 발견하자 너털웃음을
지어냈다.
"어허허, 돈형 아닌가?"
"석진 무사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 그럼 내가 어찌 내 밥벌이를 잊어먹겠는가?"
"그런데 이게 뭡니까?"
"핫하하, 눈감아 주게나. 어차피 오늘 떠나면 자네도 내 얼굴
을 보려면 한참이나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이번에 한번
만..."
"후우~"
조 집사가 한숨을 쉬자 석진은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그
리고 암담한 표정으로 변해가는 조 집사의 안색을 바라보며
석진은 말을 이었다.
"아니, 돈형 왜 그러는가?"
"석진 무사님과 오늘만 만나고 한 동안 안 뵙는다면 용서하
지요."
"그건 무슨 소리인가?"
"저도 북경행에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에엥!"
놀란 석진의 눈은 토끼 눈처럼 왕방울만 해졌다. 그리고 잠
시 후 석진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조 집사의 안색은 정반대로 굳어져 갔다.
두 사람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비례로 전혀 다른 표정
이 되어갔다. 석진이 희희낙락할수록 조 집사의 안색은 납
이라도 마신 것처럼 굳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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