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알렉산더'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금삼의 피> 사극을 통해서 드러난 '연산군'의 문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어렵게 만들기로 정평이 난 '올리버 스톤'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역사적 인물인 주인공에 대해서 독자적 평가를 냈다. 알렉산더 왕 사후 40년 뒤의 후계자 입장으로 후반부에 총정리하는 장면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진정으로 말해주고 싶어하는 바일 것이다.
동방을 정복하고 '헬레니즘'문명을 전파한 영웅의 기상을 만든 목적은, 세계를 지배한 서구 문명의 자존심 확인 차원으로 보여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요소를 보여준다. 서구 문명이 스스로 아시아 문명 못지 않게 야만적이었다고 고발하는 차원은 충격적일 것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알렉산더의 어머니 역할은, 사실상 '뭬야~!'류의 텔레비젼 사극에서 야심가진 여인들의 모든 요소를 갖고 있다. 필립왕은 사실상 올림피아가 청부살인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로 인한 '깊은 상처'가 돌아올 줄 모르는 동방 원정을 감행하게 하는 요인으로 설명한다.
전쟁 영화를 여러 차례 만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전쟁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보여주며, 볼 거리는 짧고 강렬하게 승부하는 편이다. 전쟁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 혀를 내두르고, 볼 거리의 짧은 시간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루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미국의 극장 인기 순위 차트도 '6위'라고 개봉관 직원이 그랬으며, 대단히 시시껄렁한 우스개 영화에 순위에 밀려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화에 밀린 6위란 점을 잘 봐야 된다. 해외에서 뜨는 영화 개봉도 되기 전에 악평을 쏟아놓고, 외국 문명에 소통단절을 기도하는 네티즌이 분명히 있는 속에서, 분위기에 취해서 어렵다 해도 '6위'가 될만큼은 쉬운 영화를 지레 질릴 수
있는 점은 없어야 할 것이다.
2.
영화 '알렉산더'는 'Alexander the Great'와 크나큰 거리를 갖는다. 왕이 아니라 친구로 대우해준 이에 대해서 동성애의 감정을 시종일관 가지는 점은, 세계사적 영웅을 비루한 사람들과 연장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 뿐만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현실적 전쟁 속에서 묻어나온 과장을 통한 '신화'라고 단정하는 자세를, 알렉산더와 필립왕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마저도 승리한 인간들에 대한 후대의 숭배욕이 만든 것이라고 극중 인물을 통해서 깎아 내렸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권력의 쟁투속에서 베인 상처로 괴로워 한 인물로 못 그릴 이유가 올리버 스톤 감독에겐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을 다스리는 자에게, 용감한 자에게, 행운이 머문다는 반복 메시지는 패기와 기상을 잊어버린 오늘날 사회를 질타한다. 그러나,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올림피아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입이 닫혀진다. 인간이길 거부해버릴 만큼 작고 왜소해지는 인간을 탈피하는 게, 야심으로 인간이길 거부한 올림피아 처럼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
올리버 스톤 감독은 기록된 역사를 뒤엎고, 7년 원정을 따라간 이들의 알렉산더 독살로 그린다. 영웅의 최후에서 [삼국지]에서 유비에 충성을 바치느라 망한 나라의 광복 운동을 벌였던 인물(갑자기, 인물이 기억 안난다. ^^;;)못지 않게, 생각할 요소를 많이 주는 영웅의 최후이다.
앤소니 홉킨스가 배역한 노년의 후계자는 알렉산더의 꿈은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었는가? 하고 묻는다. 동방을 해방시키고 그 속에 헬레니즘 문명을 도입하는 차원에서, 원정군을 따라간 부대들의 절망과 원한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 영웅의 원대한 꿈에는 정작 충성스럽게 그를 위해서 전투를 해준 사람의 몫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이는 올리버 스톤 감독은 알렉산더를 통해서 '초국'과 '국제'적 움직임으로 장악했던 미국의 꿈은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었던가 하는 묻는 차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렉산더의 업적을 긍정하고 영웅으로 칭송한다. 미국의 세계 지배에 대해서 무용론의 입장(세계지배보다 미국인들을 위한 정치 우선?)이 6이며, 긍정론의 입장이 4로 섞인 영화의 메시지이다.
4.
영웅이라고 세워놓고 한편으로는 '오야붕'만들고, 한편에서는 '팽'시키는 준비를 하여서, 들러매는 차원의 한국우파정치에서 '영웅'의 의미를 진정하게 묻고 싶다. 지하철에 매점에 전시된 어느 신문에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에 대해서, '여의도연구소'가 팽을 준비하는 연구를 했다는 게 실려 있다.(한나라당 여의도 연구소가 해명을 하던지, '박사모'가 여의도연구소에 캐묻던지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영웅의 이미지가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다. 박대통령이 일본 역사학에 자유롭지 못하던 한국사학계 때문에, 조선조를 비난했었지 실제적인 현상은 이렇게 영웅 만들고 들러메치고 하는 일본식 요술이 문제였을 것으로 본다.
최근 10여년 간에 우파 정치를 되새겨 보자. 우파 정치를 궁지에 몰고 간 많은 수의 충실한 우파 어피니언 리더의 전향을 생각해보자. (특히, 이 컴퓨터에서 갑작스레 솟아오르는 중앙일보 신문 기사 포함) 우파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바뀔 동안 바뀌지 않은 사람들에 대우를 해줄까 생각해보면, 하는 거 보면 좌파사랑에 전향좌파 사랑 뿐이다. 그리고, 좌파들에 솔깃하는 게 고학력 고학위 때문임이 명백한데도, 보다 더 덜배우고 더 무식하고 더 말잘듣는 사람만을 찾는 분위기이다. 우파 정치를 따라가보면 결국은 따라가는 이들만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게 아닌가? 미국도 사실상 포기한 초국적 버전의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검증받지 않은 일부만의 이상에 대해서, 알렉산더 대왕에 항의하는 숫자만큼도 되지 않는 수의 항의에도 혼란스러운 게 현실이다. 나는 기본 방향의 거시적 측면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알렉산더에 많은 불평세력들이 결국 알렉산더에 따라가는 차원만큼은 공통의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알렉산더가 동방정책으로서 행했던 명분이 살아있던 시절과, 명분이 멈춰 버린 '객기'로 돌변한 시점의 차이는 분명하다. 한나라당은 밀리듯이 국가보안법을 봉합할 듯한 테세이다. 여기에서 믿을 사람들이 떨어질까봐 여전히 괜찮은 듯 하는 자세는 너무 속이 보인다. 그보다도 더 속보이는 일은 대한민국의 친북좌파 지식의 네트워크에 합세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배려를 할 생각 자체를 포기한 우파들이다. 대한민국정신의 부활보다는 권력욕에 사로 잡힌 이들이 좌파 신문에 얼쩡거리며, 진보적 요소가 자기에게도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일이, 최근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문화면의 친북좌파 지식인 집중사랑 10여년 만에, 유일역사가 좌파의 역사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서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네트워크 확장보다는 권력의 재확인만이 중요한듯 여겨진다.
꿈이 영웅을 만든다. 그러나, 꿈이 특정인사만의 객기로 돌변할만큼 고립될 때, 그 꿈은 영웅의 요소를 사그러뜨린다. 그리고, 보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미친 인간'빼고는 역사에 남을 영웅적인 꿈을 꾸지 않는다. 한국의 우파 세력은 영웅으로 치켜세우다가 마음에 안들면 들러메칠 것이면서(그렇게 팽 시킨 인사 목록에 박대표도 든다는 설이 나오는 형편이니), 늘 영웅을 과장한다. 나는 애초부터 '소시민적 자유'차원으로서 보장이 될까 하는 차원의 의견피력만 해오고 있다. 친북좌파로 장악된 대학가에서 친북좌파들의 아버지들만 자랑스럽게 씌어진 것이 하도 한맺혀서, 아버지 세대의 평범한 일상을 연구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게 밀려서 한스러운 입장이다. 이러한 일상성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할 의사도 없으면서 꾸는 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한 꿈인가?
'알렉산더'의 홈페이지 주소는 이러하다. 그런데, 예상외로 빈약하다. 전쟁영화로 수준있게 그린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웅론에 대해서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영화를 일단 봐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