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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경항운하(京杭運河)-1
경항운하(京杭運河)는 북경에서 시작해 양주를 거쳐 절강성
항주에 이르는 대운하(大運河)였다. 대운하는 중원을 가르
는 다섯 개의 큰 강을 연결한 대단위 토목공사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장강(長江), 황하(黃河), 전당강(錢塘江), 회수
(淮水), 백하(白河)의 5대 수계를 연결한 대운하는 남북의 문
화와 경제를 교류시켜 중원을 통일한 최대의 공로자였다.
특히 통제거(通濟渠), 영제거(永濟渠) 강남하(江南河), 광동거
(廣東渠), 한거의 5개 대운하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민초들이
노역으로 고생했다. 수양제(隨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많은 폭정을 펼쳤는지는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단 2대 30년 만에 멸망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었다. 그만
큼 대운하는 수많은 민초들의 고혈을 짜내 만들어 완공한 것
이었다. 그러나 대운하가 중원의 남북을 교류시키고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를 주었으니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후대의 사람들이 대운하를 만든 수양제를 폭군으로 기억하면
서도 그 대운하를 사용해 편리를 추구하는 것을 보면 어려운
것이 세상사라는 말이 정확하다 할수 있는 것이다.
자은 선생은 경항운하를 통해 북경에 가는 일정을 잡았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노정은 소주에서 서쪽에 있는 양주에 도
착해 경항운하를 타기로 했다. 자은 선생의 일행은 딸인 황
보영과 조 집사, 그 외 두 명의 시비와 다섯 명의 짐꾼이었지
만 척신명은 자신의 딸인 척금방과 석진을 포함한 호위무사
스무 명을 끌고 갔다. 악삼 일행까지 포함하면 무려 서른 다
섯 명이나 되는 대 인원이었다. 또한 양주에 도착하면 미
리 배를 준비한 운문상단의 식구와 합류하게 되면 그 수가
백 여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악삼은 고개를 흔들고 말
았다. 그들이 아침 일찍 소주에서 떠나 양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다행히 운문상회의 서기가 양주에서 두 번째 정도 큰 객잔의
후원을 통째로 빌려놓았기에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운문상단의 상선에 악삼 일행은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물론 석진은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났다고 술판을
벌려 곤드레만드레 취해 조 집사를 아침부터 힘들게 했다.
그러나 경항운하를 가르는 두 척의 운문상회의 상선은 특별
한 사고 없이 양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악삼 일행이 양
주에서 경항운하를 타면서 포위망을 벗어난지도 모른 채 수
많은 사람들은 소주를 헤매고 있었다.
무석에서 악삼을 찾고 있던 등곡은 소주에서 날아온 급보를
받았다. 악삼이 소주에 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등곡은 바
람처럼 움직였다. 등곡은 악중악이 거처하고 있는 객잔에
부리나케 들이 닥쳤다. 악삼의 소식과 소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항을 알기 위해 등곡은 악중악을 먼저 만나려 했다.
그런데 등곡을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악중악이 아니었다.
"북혈각주님을 뵙습니다."
등곡은 자신이 왔는데도 악중악이 나오지 않고 평범한 40대
중년 무사가 나오자 매우 불쾌했다.
"북풍각주는 어디에 갔는가?"
"북풍각주님은 지금 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등곡의 이마 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내가 왔는데도 손님을 접대하느라 못 나온다. 허허허."
"중요한 손님입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리시면 나오실 겁니
다."
"나보고 기다려라! 언제부터 북혈각이 북풍각의 밑 서열이
됐는가?"
등곡의 싸늘한 말투에는 얼음이 돋친 가시가 가득했다. 또
한 등곡을 수행한 북혈각 소속의 자객들은 자신의 상관이 모
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는 강렬한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곡을 맞이한 40대의 중년 무사의 안색은 아무런 변
화도 없이 담담했다. 이십 여명이 넘는 자객들이 내뿜는
살인적인 살기 앞에서도 그는 담담하기만 했다. 등곡은 너
무나 담담한 중년 무사의 안색이 마음에 걸렸다.
"그대는 누구인가?"
"북풍각의 구직입니다."
"구직!"
등곡은 구직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등곡이 보기에도
구직은 재사(才士)로 느껴졌다.
"이상하군. 어째서 내가 그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을
까?"
"북풍각의 평범한 무사를 북혈각주께서 아신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자네의 말이 옳군."
"등 각주님은 저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보다 북풍각주께서 만
나고 있는 손님을 대비하는 것이 선결이실 겁니다."
"자네에 대해서 신경을 끊으라는 말인가? 아니면 악 사제가
만나고 있는 손님이 그만큼 중대한 인물이라는 이야기인
가?"
"양쪽 다입니다."
"상당히 건방지군."
"그렇게 들리셨다면 저의 실수이오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
다."
구직이 허리를 굽혀 용서를 빌자 등곡은 싸늘하게 웃어 버렸
다. 그런데 북풍각의 한 무사가 능곡에게 달려와 인사를 하
고는 구직의 귀에 속삭였다. 구직은 귀속말을 듣고는 고개
를 끄덕이더니 능곡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엇인가?"
"안에서 들어오셔도 괜찮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제 뒤를 따
르십시오."
"흥... 알았네."
등곡이 구직의 뒤를 따라 걷자 자객들도 그 뒤를 따라 움직
였다. 그런데 구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한 마디 했
다.
"북혈각주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뭐라고!"
"아니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별 짓을 다하는군."
"멈춰라!"
북혈각 소속의 자객들이 일제히 구직에게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가자 등곡은 그들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등곡은 구직
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고는 말했다.
"상당히 방자하구나."
"들어가시면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들어가면 안다... 좋아! 좋아! 그대의 의견에 따르지."
"각주님, 어찌 저런 방자한 자를 나누십니까?"
"그렇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등곡이 구직의 의견대로 행동하려 하자 북혈각 소속의 자객
들과 무사들이 일제히 성토했다.
"어리석은 소리!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등곡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구직에게 시선을 돌렸다.
구직은 등곡의 싸늘한 시선에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입가
에 미소를 지었다.
"가시지요."
"앞장서게."
"알겠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알았네. 그리 하지. 그러나..."
"말씀하십시오."
"안에 들어가서 내가 밖에서 받은 수모가 정당할 정도의 원
인이 없다면 자네는 목숨을 내나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구직은 목숨을 내놓으라는 협박에도 안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등곡은 구직의 변함없이 담담한 표정에서 악중악을 만나러
온 손님이 매우 특별한 인물임을 짐작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저리도 담담한 건가?'
등곡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구직의 뒤를 따라 방안에 들
어갔다. 방안에는 악중악을 제외하고 두 남자와 한 여인이
있었고 그 중에 한 인물은 등곡이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북해방주의 우호법인 경라흉살 강천리였던 것이다.
"아니 강 호법께서 여기에 웬일이십니까?"
"그동안 안녕하셨소, 등 각주."
"저야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뿐 특별하게
잘못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호법께서 어찌 이 소주에
계시는 겁니까? 혹시 사부님께서 소주에 오셨습니까?"
등곡은 북해방주의 호법인 강천리가 악중악과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점이 이상했다. 강천리는 의뭉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등곡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요? 사부님을 호위해야 하는 호법께서 임무를 망
각하시고 별개로 행동하시는 겁니까? 이해가 가지 않습니
다."
"등 각주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아! 그렇군요. 사부님께서 강호법에게 을목도를 가지고 오
란 명을 내리셨지요. 제가 그만 깜박했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소주에 제가 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알만합니다. 갑자기 오행도에 대한 소문이 바람 앞의 불길
처럼 일어나 사방으로 퍼지고 있으니 강 호법께서 오지 않을
수가 없으셨을 겁니다."
등곡은 강천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른 두 사람의 행동을 관
찰하고 있었다. 50대의 염소 수염에 서생원을 닮은 50대의
중늙은이와 30대 초반의 아찔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의 정
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등곡과 강천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악중악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악중
악은 등곡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등 사형."
"악 사제도 그동안 잘 있었는가?"
"네, 등사형도 안색을 보니 많이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하네. 그런데 저 두 분이 누구 신가? 나에게 소개를 해
주지 않겠는가?"
등곡은 두 사람의 정체를 알려 달라고 말하면서 악중악의 표
정의 변화를 살피면서 의중을 살폈다. 악중악은 등곡의 의
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색의 변화가 없었다.
"이분의 모용씨를 쓰시며 함자는 혜입니다."
등곡은 악중악이 남자보다 여자를 먼저 소개시키자 그 지위
의 상하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이름이 들은 등
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30대 미부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았
던 것이다. 등곡은 30대 초반의 화려한 미모를 가진 모용혜
를 탐색하듯 처다 보다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모용혜
의 두 눈은 세상을 모든 것을 빨아드리는 늪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 순간 등곡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채고는 자신
도 모르게 이름을 외치고 말았다.
"요마(妖魔) 모용혜!"
"등 사형!"
등곡이 너무나 놀라 모용혜에게 큰 실례를 저지르자 악중악
이 중간에 나섰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용서
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악중악이 중간에 자기 이름을 부르는 덕분에 정신을 차린 등
곡은 재빨리 용서를 구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모용혜
는 등곡이 포권을 하며 용서를 구하자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이 받아들이고는 착석을 권했다.
"용서해주신 것으로 믿고 자리에 앉겠습니다."
"그러세요. 등 각주."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 신지..."
"아... 이 사람의 이름은 연적심입니다. 현 구류방주이지요."
"구류방주!"
염소 수염에 서생원의 외모를 가진 중늙은이의 정체가 밝혀
지자 등곡은 참으로 놀라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요마는 팔마당의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구류방과 팔마당이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
가?'
등곡이 놀라며 고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강호에선 알려
져 있지 않지만 강남 흑도의 지배자인 팔마당은 사해방의 네
세력 중에 하나인 남해방의 외부 세력이었다. 즉 팔마당의
움직임이 남해방의 뜻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팔마당과
구류방이 심상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등곡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모용혜는 등
곡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구류방주와 내가 같이 있어 놀라는군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놀라운 일이지요."
"호호호, 남들이 하찮은 하오문으로 보는 구류방과 내가 같
이 있어 놀라는 건가요?"
"무슨 말씀입니까? 구류방을 강호에선 하오문이라 부르며
멸시하지만 그 정보력을 생각한다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방파 중에 하나입니다. 무력을 가진 문파와 정보력을 가진 방
회가 결합하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는 제가 잘 알
고 있습니다."
"저희 구류방을 그리 높게 봐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등 각
주님."
구류방주 연적심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곡에게 감사의 인사
를 올렸다. 등곡은 연적심의 인사를 받으면서 이들이 모인
뜻을 알아내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
다. 그는 사제인 악중악도 믿을 수가 없었고 사부의 호법
인 강천리도 신용하지 않고 있었다. 등곡이 믿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런 등곡을 바라보는 악중악이나 모용혜,
강천리의 눈빛은 깊었다. 그들은 의중을 숨기면서 서로를
탐색하는데 골몰해 좌 중은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을 깬 것은 구류방주인 연적심이었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악삼이라는 자
때문이지요."
"으음..."
"악... 삼..."
악삼의 이름이 연적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서로를 탐색
하며 눈치를 보던 등곡과 악중악, 강천리의 표정이 단숨에 변
하더니 다들 침울한 음성을 내뱉었다. 모용혜는 그들의 표
정이 순식간에 변하자 마음 속으로 악삼에 대해 강렬한 호기
심이 생겼다.
"도대체 악삼이 어떤 인물이기에 그런 표정을 짓는 거죠?"
모용혜의 질문에 다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안색이 찌푸려졌
다. 다들 악삼을 쫓고 있지만 악삼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
하게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들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졌고 모용혜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갔다.
"악 각주님."
"네, 말씀하시지요."
"악 각주님은 악삼에 대해 우리들 중에 가장 많이 알고 있
다고 들었어요."
"같은 가문의 출신이고 10년 동안 태을궁에서 수련을 같이
했습니다."
"그럼 자세히 알고 있겠군요. 나에게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악삼이란 인물을..."
모용혜의 두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일렁거렸고 악중악
은 그 시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늪처럼 끈적거리는 모용혜
의 눈빛은 사내들을 잡아 버리는 거미줄이었다.
"악삼은... 악삼은..."
"말해보세요."
"모르겠습니다... 악삼이 어떤 인물이라고 명확히 정의를 내
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악삼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 해보니 전혀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군요..."
모용혜는 악삼에 대해 호기심이 늘어났다. 그녀의 눈에 비
친 악중악은 나이에 비해 놀랄만한 무위와 뛰어난 기상을 가
지고 있었다. 또한 제법 술수를 부리고 적당히 잔인하면서
도 날카로운 감각을 소유했고 크나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한마디로 매력이 있는 남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악중악에게
곤혹스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악삼이란 인물이 너무나 궁금
해진 것이다.
"정말 보고 싶군요."
"저도 만나고 싶습니다. 모용 선배님."
"연 방주."
"네 말씀하십시오. 팔 당주님."
구류방주는 모용혜가 자신을 부르자 공손히 대답했다.
"악삼을 찾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하세요."
"알겠습니다. 팔 당주님."
"비영(秘影)!"
모용혜는 구류방주의 대답을 듣고는 거실의 천장을 향해 말
했다. 그러자 천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흘러나오더니 모용혜
앞에 무릎을 끓고 엎드렸다. 검은 그림자는 온통 검은 색
복장에 검은 신을 신고 있었으며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남녀노소의 구별이 가지 않았다. 모용혜는 아루런 말없이
자기 앞에 부복한 검은 복면인을 향해 아찔한 미소를 지었다.
"비영, 본 당에 연락해 악삼을 추적하라 일러라. 그리고 잔
마(殘魔) 삼 형(三兄)에게 잔영대(殘影隊)를 움직여 악삼을 추
적을 부탁한다고 말씀 올리거라."
비영은 모용혜의 명령이 내려지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일언의 말도 없이 환상처럼 사라
지는 비영의 움직임은 거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하
기 힘든 괴리감과 이질성을 느끼게 했다. 특히 자객이 본업
인 북혈각의 각주인 등곡은 비영의 움직임에서 동업자의 냄
새를 강하게 느꼈다. 또한 비영이 북혈각의 어떤 일류 자객
들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자객임을 직감했다. 모용혜는 비
영이 보여준 잠입술과 경공에 다른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있
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등 각주님, 비영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는군요."
"아... 네, 놀라서 그렇습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
채지 못했습니다."
"호호호, 비영은 내가 이 거실에 있을 때부터 계속 있었어
요."
"설마..."
모용혜의 말은 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들은 비영이 은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
고 단지 모용혜의 부름을 받고 잠입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비영이 자신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잠입했다는 것
도 놀라운데 자신들 머리 위에서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어이
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닌 무위를 믿고 있었는데 일개
자객이 바로 머리 위에서 은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기 목숨이 한순간에 왔다갔다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위에 회의가 들었는지 안색이 벌
레를 씹는 표정이었다. 모용혜는 그들이 시시각각으로 변
하는 표정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소주의 밤거리를 지배하는 귀웅회의 후원 별관에도 여러 사
람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있었다. 회의의 주재자는 사해방
의 총사인 장소군이었다.
"악삼의 흔적은 찾았나요?"
"죄송합니다. 총사."
"흠... 소양객잔에서 악삼을 발견하고는 단 반나절만에 그 흔
적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무려 3일이나 지났어요. 그런데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어떤 단서도 없는 것인가
요."
"그렇습니다..."
"이상하군요."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목 호법님, 악삼의 종적이 사라진지 3일이에요. 무려 3일
동안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주에 흔적도 없이 숨을 수가 있
을까요?"
"힘든 일입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두 여자를 동행한 상
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방법을 바꾸어야겠어요. 즉시 함부에 있는 감시조를 철수시
켜요."
"네! 총사 무슨 말씀입니까? 함부는 소주에 있는 악가의 유
일한 거점입니다."
"알아요. 우리는 악가의 비밀거점인 함부를 겨우 찾아내고는
악삼을 잡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악
삼이 함부로 가지는 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쓸데없는
병력운용은 할 필요가 없어요. 즉시 감시조를 철수시키세
요."
"알겠습니다. 그럼 감시조를 어디로 돌리면 되겠습니까?"
"소주 시내를 돌게 하세요. 현재 소주는 오행도의 소문을 듣
고 수많은 강호인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분명 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악삼을 찾을 수가 있을지 몰라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악삼과 오행도의 소문을 퍼트렸을
까요?"
"악중악이에요."
"네! 그럴리가요?"
장소군의 확신은 목도렴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행도의 비밀은 본 방에서도 극비입니다. 그런데 그런 극
비를 사사로이 퍼트릴수가 있다는 겁니까?"
"악중악은 본 방 사람이 아니에요. 야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
물이지요. 야망을 위해 잠시 북해방이라는 배를 탄 자에 불과
해요."
"그럼 이 사실을 잘 활용해야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지금은 때가 아니지요. 나중에 분명히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에요. 잘하면 북해방주에게 치명적인 요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에요."
"그럼요. 분명히 북해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구멍이 될 것입
니다... 크크크."
목도렴의 얼굴에 흉측스런 웃음이 나타났다. 그리고 장소
군은 목도렴의 웃음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짓다가 조용히 앉
아 있는 혁무강에게 시선을 돌렸다.
"혁 대장."
"네. 총사."
"몸은 괜찮은가요?"
"이상 없습니다."
"그래요. 무려 3일 동안 술독에 빠져 있다가 나왔는데 별 이
상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군요."
"제 건강을 생각해 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혁무강은 장소군의 걱정이 어린 듯한 어조를 비야냥 섞인 어
투로 대답했다. 그러나 장소군의 안색에는 노여움의 기색
은 고사하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목도렴과 장소
군의 유모는 혁무강의 비야냥 섞인 말투에 분노가 끓어올랐
다. 그런데 그들이 발작하기 전에 장소군이 수신호를 보내
그들을 진정시켰다. 목도렴과 유모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
서 혁무강에게 분노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혁
무강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데 별관 문이
열고 들어온 동이각주의 등장이 격전을 불발로 만들었다.
"동이각의 선우 전이 총사께 인사 올립니다."
"오세 오세요. 선우 각주."
"그래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호오~, 무엇이지요."
"첫째는 악중악이 오행도에 대한 기밀을 풀었다는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래요. 북풍각의 구직이 분명히 일을 벌였을 텐데 증거가
남았단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각 방파의 회선에 비문을 넘기면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흠... 그럼 구직이 아직 악중악을 완전히 신용한 것은 아니
라는 이야기이군요. 그럼 그쪽은 위험한 동거를 시작했다고
보면 되겠군요. 선우 각주."
"네, 말씀하십시오."
"북풍각의 간자의 활동을 한동안 중지시켜요. 구직이 본격적
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정체를 들킨 위험이 높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소식은 무엇이지요?"
"악삼과 같이 다니는 여인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악삼의 이름이 나오자 신경전을 벌이고 있던 혁무강과 목도
렴이 일제히 시선을 동이각주에게 돌렸다.
"누구죠?"
"운남 오독문의 사갈미인 갈운영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선우 각주."
"태을궁에 있었던 오독문의 갈운영은 갈운지였습니다."
"갈운지?"
"네, 갈운영과 쌍둥이 동생인 갈운지가 태을궁에 있었던 것
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내가 아는 갈운영의 행동과 전혀 다른 움직
임을 보인 거야. 그래서 함부에도 가지 않았고 오독문의 비밀
거점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어."
장소군은 탁자를 내리치며 탄식했다. 사실 그녀는 악삼과
갈운영이 같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에 그들이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악삼과 갈운영이 전혀 다른 움직
임을 보여 장소군을 혼란에 빠트렸던 것이다.
"세 번째 소식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무엇이죠?"
"악중악의 거처에 등곡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 자리에 경라흉살 강천리와 구류방주, 요마 모용
혜가 모여 있었습니다."
좌 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해버렸다. 장
소군은 너무나 놀라 동이각주를 멍하니 처다 만 보았다.
그런데 혁무강이 갑자기 일어나 동이각주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우 각주님, 북해방주는 어디에 계십니까?"
"소주에는 안 계시네. 혁 대장."
"그럴 리가... 경라흉살 강천리는 북해방주님의 우호법이오.
그런데 어떻게 호법이 홀로 돌아다닐 수가 있습니까?"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강 호법이 북해방주와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라네."
장소군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다가 동이각주에게 질문을
했다.
"구류방주 연적심이 모용혜와 같이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구류방과 팔마당 사이에 연계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그럼 본 방의 최대 적은 북해방이 아니고 남
해방이란 말인가?"
"서해방도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총사."
"하아~, 그렇겠지요. 무려 백년동안 세상에 나타내지 않고
30년마다 벌어지는 사해대전에만 총력을 기울었으니 그 잠재
된 힘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이겠지요. 다른 소식이 남았
나요. 선우 각주."
"네, 소명왕부의 유영군주가 실종됐습니다."
"뭐라고요!"
"지금 소주 시내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이런..."
"소명왕부의 위사들뿐 아니라 강소성에 있는 모든 관부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소주는 난리도 아니겠군."
"난리도 난리지만 더 이상 악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괜한 움직임을 보여 관에서 저희들을 추적해 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장소군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동이각주의 마지막 말을 듣
고는 탄식하고 말았다. 그들에겐 더 이상 악삼을 추적할 방
법이 없었고 그나마 있던 길마저 막혀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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